[연극평론] ‘마음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성찰 –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 / 김향

‘마음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성찰 –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

 

                                                               김 향 (연극평론가)

 

 

극이 시작되기 전 관객은 무대 위에서 나무로 지어진 집 한 채와 그 벽에 투사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소와 새 그리고 강아지를 보게 된다. 디지털 이미지여서인지 이 동물들에게서는 친근감보다는 어색함과 낯섦이 경험되었다. 섬세하지 않은 나무 구조물과 이미지적으로 처리된 동물들의 모습은 어색하고 차갑고 건조했다.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었음을 알린 것은 코모토 슌스케(이윤재 분)의 나레이션이었다. 무대 위에 코모토 슌스케의 사진과 이름이 보이는 블로그 영상이 투사되는 가운데 관객들은 2011년 봄 일본의 후쿠시마를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가 그 지역의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제1원전을 파괴시키면서 일본 전역이 방사능으로 오염될 것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접하게 된다. 긴박한 음향은 한층 더 관객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며 공연 전 보고 있었던 나무로 지은 집은 그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급구조된 응급가설집이며 디지털이미지의 동물들은 그 와중에 생명을 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유령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2014.6.10.~7.5.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는 일본 작가 나카츠루 아키히토(中津留章仁)가 쓰고 한국 연출가 김재엽이 연출한, ‘일본의 재난’을 다룬 연극이었다. 그리고 3시간에 걸친 1,2부 공연을 다 보고 나왔을 때 이 작품은 현재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치·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한국 역시 겪고 있는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역시 겪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두산인문극장 2014: 불신시대’ 공연작 중 세 번째 작품이었고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기획된 것이었는데, 관객으로서의 나는 문득 인류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실제 재난을 토대로 하지만 시각적으로 끔찍한 광경을 경험하게 한다기보다는 인물 간의 갈등을 통해 ‘마음의 무너짐, 죽음에 가까운 황폐함’을 형상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질곡이 미래의 시·공간을 블랙코미디 같은 현실로 만들어갈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절망과 분노의 형상화

 

<배수의 고도>는 ‘프롤로그: 여파 – 전편: 파리 – 최종편: 배수의 고도’ 세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편’은 2011년 재난 후 복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최종편’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뒤 원자력 대체 에너지원 문제가 심각해진 미래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 장들은 ‘코모토의 코멘터리’라는 블로그 영상과 함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기에, 마치 이 연극은 그의 블로그 기록을 극화한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프롤로그’와 ‘전편’의 사건 형상화는 재난과 복구의 현장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사건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종편’에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사건이 벌어질 때에, 이 작품은 실제 후쿠시마 재난을 토대로 했지만 허구적인 인물들을 기획하여 궁극적으로는 원자력발전소의 문제점을 이슈화하기 위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재난에 대한 다채로운 생각을 유발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매우 뚜렷한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수의 고도>에서 그려지는 일본의 재난과 후유증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은 ‘그럴 법한’ 형상화임에도 전세계 다른 국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환유적 표현’으로 인식된다.

언론인이었다가 경호회사 간부가 된 코모토, 카메라맨이다가 원폭피해자들을 위해 일하게 된 저널리스트 카이하라 시게토(선명균 분), T자동차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야기현 지방의회 의원이 된 모리무라 미츠루(김승언 분), 야당의원이다가 재무성 장관이 된 오다기리 아라타(오대석 분) 그리고 외신 기자였다가 후에 일본 경호회사에서 일하게 되는 미국인 알렉스(이정수 분)는 <배수의 고도>에서 원자력으로 인한 문제점과 이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설정된 각계각층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일본 원자력 역시 미국과 유럽에 의존한 것이어서 원자력 파괴 후 일본 정부가 복구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일본 정권이 당리당략을 위해 피해 보도를 축소하거나 때론 위험 상황을 알리려 하지 않는 속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부의 당리당략으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은 더욱 큰 피해 상황에 놓이게 되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향한 노력 역시 권력 앞에서 묵살 당하고 만다. 한편 모리무라 미츠루의 경우는 일본 경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일본 경제가 대외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일본 경제 쇠망의 원인임을 암시하고 또 도쿄 중심의 일본 경제에 비해 지방 경제의 열악함을 토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인물들이 거대한 일본의 정치·경제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면, 일본의 평범한 국민들로 재난의 피해자가 된 인물들은 잔혹하게 변해 버린 일상을 보여준다. 카타오카 유우(김소진 분)는 전도유망한 의과대생이었으나 생사를 넘나드는 재난 속에서 우발적으로 노자키 사이조(하성광 분)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임신한 상황이 되었다. 그녀의 남동생 카타오카 타이요(김시유 분)는 도쿄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재이지만 누나가 남몰래 임신중절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녀를 돕기 위해 통조림을 훔쳐 팔며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지내고 있다. 재난으로 곧 죽을 위협 속에서 유우와 관계를 맺은 노자키 사이조는 유우의 임신중절을 위해 돈을 벌다가 원폭피해자가 되었으며 자식의 죽음과 아내의 정신분열 상태 그리고 자신의 행위로 벌어진 일들 때문에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재난이 일어난 뒤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안도 쇼코는 인근 노인들을 돕던 중 피폭자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전염병자 취급을 받는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고통스런 사연은 느린 템포로 차근차근 폭로되며 타이요의 절도 행위가 밝혀지고 연달아 유우의 남자친구인 이시즈카 히토시(이종무 분)가 유우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갈등 상황이 절정에 다다른다. 재난으로 인해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이들에게는 윤리, 도덕, 양심, 사랑 등의 단어가 통용되기보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본능적인 몸의 욕망만이 꿈틀대었으며 이러한 동물적인 행동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 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억울함과 피해의식 그리고 절망감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이 작품에서는 ‘파리’가 꼬이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일상’과 ‘배수의 고도’라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싸움을 벌이는 섬’으로 형상화된다.

통조림을 훔쳐 팔던 타이요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상황에서 울부짖는 대사, “쯔나미 때문에 사람 마음이 썩어버렸어요…… 한 번 보세요, 산 사람의 썩어문드러진 마음에 파리가 꼬이고 있어요…….”는 관객들의 폐부를 깊이 찌른다. 재난은 물리적인 몸의 고통만을 안긴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깊게 병들게 해 이제는 인재(人災)의 수준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인재는 인간의 추한 욕망이 일으킨 것으로 자연의 재난보다 더한 ‘썩은 내’를 풍기고 있으며 재난의 폐해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쯔나미를 아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우리들 사이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알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압도적이고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잔혹할 정도로 우릴 무력하게 만든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그 질문 앞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마치 말을 모르는 시인처럼, 그냥 오로지 삶을 갈망한다. 그렇게 삶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괴로워하며 주워 모은 영혼의 파편은, 다음 파도에 휩쓸려 아주 쉽게 사라진다. 희망 따위 없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그리고 나는 이 배수의 고도에 홀로 서 있다.

 

기자에서 다큐영상부로 이전해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던 코모토는 기자 때보다 더 큰 절망감을 안고 방송국을 떠나게 되며 그는 이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인용문에서와 같이 토로한다. 자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모리무라 토오루(김승언 분)의 시체를 보면서 또 암으로 죽은 자신들의 아버지 카타오카 다이고(선종남 분)의 시체를 보면서 “깨끗하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그들이 경험한 재난이 죽음을 넘어선 재앙이며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추측할 수 없는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인간애를 지닌 이들은 모두 ‘배수의 고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모토를 연기하는 이윤재는 특유의 지적인 이미지에 피해자들의 내면에 다가가려는 노력과 안타까움을 담은 연기로 인간미를 자아냈다. 그리고 타이요를 맡은,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구분할 수 없는 외모를 지닌 김시유는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신선한 면모가 ‘전편: 파리’의 입시생 역할에서는 요긴한 듯했으나 ‘최종편: 배수의 고도’의 서른 살 역할 연기에는 장애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역할에 비해 너무도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전편’에서는 절도범으로, ‘최종편’에서는 테러범으로 돌변하는 모범생이자 인텔리이지만 과격한 휴머니스트 타이요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인물이기에 배우 김시유가 연기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격앙되고 분노한 상황에서 거칠어지고 갈라지는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배우가 배역의 정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유우를 맡은 김소진은 ‘전편’에서는 절제된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토로하여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이러한 연기 패턴이 ‘최종편’에서도 반복되면서 다소 지루하게 여겨졌다. 자신을 임신 시킨 노자키가 돈을 마련하려다 원폭피해자가 되었고, 그런 그에게 깊은 연민을 표하며 원폭피해자들을 살리기 위한 연구를 하게 된 유우가 여전히 똑같이 차분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12년 전의 차분함과 차별되는, 원폭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러한 열망이 반정부적인 인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다소 복잡한 차분함’이 구현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무능하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고자 이기적이고 야비한 행동을 하는 정치인 오다기리 아라타를 연기한 오대석은 ‘최종편’이 블랙코미디처럼 여겨지는 데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연기는 결코 코믹하지 않았지만 국민의 안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일삼던 그가 타이요의 거짓 연기에 속아 넘어가 총리에게 전화를 걸고 그러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다시 전화를 거는 등의 연기는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뾰족한 얼굴의 오대석의 연기는 전형적으로 냉혹한 악인의 모습이었다기보다는 ‘내면이 없는, 마음이 없는, 텅 빈’ 악인의 연기였다고 여겨진다.

‘전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시·공간에서의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 행위를 하든 ‘그럴 법하게’ 여겨지고 있었다면 ‘최종편’에서의 배우들의 연기는 12년이라는 시간차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큰 과제가 되었던 듯하다. 타이요가 ‘입체형 태양광발전소’를 주장하며 2층으로 올라서 가짜 폭탄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 그 위협에 등장인물 모두가 넘어가는 설정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우둔함을 꼬집는 블랙코미디 같았고 아예 배우들이 좀 더 이완된 연기를 펼쳤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을 잃은 자들의 세계 또는 현재 우리의 세계

 

이 작품은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파괴의 후유증 즉, 그로인한 방사능 오염 문제는 몇 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부각될 것이며 이러한 재난은 일본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원전보유국 나라 어디에서건 발생할 수 있고 따라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요구된다는 작가와 연출가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제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영상 자막에서 보인, ‘한국이 원전밀집도 면에서 전세계 1위’라는 정보는 너무도 뼈아픈 현실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한국의 원전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의 사후 처리의 무능력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테러를 감행하기보다 촛불을 들고 평화행진을 하고 있다. “우리를 살려 주세요.”

<배수의 고도>는 그 어떤 결여된 면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본, 권력을 향한 이기적인 욕망으로 ‘생명의 고귀함을 잃은, 마음을 잃어가는 자들’이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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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   연극평론가. 연세대 강사. 계간 『공연과 이론』의 부주간을 맡고 있으며 연극과 인접 예술 간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창극 연구를 하고 있으며 ‘극’이 지닌 인문학적 면모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한다.

 

(『연극평론』 2014 가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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