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의 책무 / 오세곤

(제47호 편집인의 글)

평론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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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국립극단 예술감독 선임 과정에서 평론가가 현장 예술인이냐 아니냐 하는 우스꽝스러운 논란이 있었다. 연극계 이의 제기의 참뜻이 왜곡된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었다. 그때 성토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문화부의 일방적 인사 관행이었다. 연극계와 소통하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이 여러 차례 연극 관련 기관의 인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계속하여 연출가가 맡아왔던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제대로 된 의견 수렴조차 없이 갑자기 평론가에게 맡기겠다니 우려 내지 반발이 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에 있어 단언컨대 평론가도 분명한 현장 예술인이다. 다만 제작에 직접 참여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좁은 의미의 제작 현장에 있지는 않지만 연극 현장에는 있는,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하는 예술인이다. 참고로 예술인복지법과 관련하여 현재 준비 중인 세부지침에서는 연극 관련 대표적인 직종을 “연기, 연출, 극작, 비평, 기술지원, 기획 등”으로 명시하고 있다. 사실 “비평”은 모든 예술 장르에서 인정하는 예술 직종이며, 따라서 평론가는 어느 장르에서나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평론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연극 작품은 공연으로써 완성된다. 그 공연과 공연 사이에 평론이 존재한다. 즉 평론은 작품이 계속 진화하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다. 관객의 반응까지 포함하여 공연 결과를 냉정하게 기록하고 나아가 전문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이 평론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있으면 당연히 평론이 따라야 한다. 때로 그것은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갈릴 수도 있다. 보는 시각이 다르면 당연히 여러 판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현장작업자들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따위의 걱정은 필요 없다. 각자 충실한 논리로 펼치는 주장이라면 어떤 경우건 활용할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이 연극 현장과 맞물려 있는 실체라면 근본적으로 그것은 연극 제작과 동일한 정도의 에너지와 열정을 필요로 한다. 사실 연극을 보고 전문적인 고민을 통해 판단하고 그 결과를 글로 발표하기까지는 상당한 공력이 든다.

그런데 우리 평론의 실상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국공립 공연장이나 대형 기획사들이 선택한 작품만을 따라다닌다. 영세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작은 공연들에는 거의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큰 공연은 이미 크기 때문에 평론의 존재를 별로 아쉬워하지 않고, 작은 공연은 어차피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평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국 평론은 어디서나 있으나마나 상관없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각종 심사를 보면 평론가는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들어가고 만다. 그것도 거의 고정된 몇 명이 오랜 세월 독차지하고 있다. “평가를 주된 임무를 하는 게 평론”이란 말은 이제 완전히 틀린 말이 되었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가 없는 연극의 미래는 결코 낙관할 수 없다. 평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극을 위해 평론이 살아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과 의무감에 충만한 평론가가 필요하다. 공연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다니고, 공연을 보았으면 철저히 평가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고, 그런 뒤에는 자신이 발표한 내용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평론가가 많아야 한다.

이제 연극평론가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책무를 깨닫고 그 실천을 위해 나서야 한다. 더욱 치열한 평론의 장을 펼쳐 거의 죽어버린 평론을 되살리고 그로써 우리 연극의 진정한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 연극이 잘못되면 곧바로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아파하는 진정한 연극평론가들의 출현과 활약을 기대한다.

2014년 9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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