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조선인 고등 관료의 후예/ 오민아

만주국 조선인 고등 관료의 후예 

 

오민아

 

 

작/연출: 박근형

드라마터그: 김윤정

단체: 극단 골목길

공연일시: 2014/08/08-08/31

공연장소: 소극장 시월 (구. 배우세상)

관극일시:2014/08/25 8pm.

 

 

‘만주전선’은 만주 신천지를 배경으로 1943년, 소하 18년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만주라는 공간은 꽤나 복잡한 위치에 놓여있다. 식민지 조선 하에 국토와 자유를 잃은 조선인들은 본국의 핍박과 차별을 뒤로 하고 희망의 땅,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는 1920년대부터 의열단을 중심으로 치열한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했다. 이 또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모여든 희망의 땅이었다. 핍박받는 조선인의 희망의 땅이었던 만주는 박근형의 ‘만주전선’에서 또 다른 희망의 땅으로 그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희망의 땅은 진정한 일본인으로 거듭날 수 있길 바라는 조선인들(민족반역자들)의 공간이다. 일본의 사회적 시스템과 사상에 동화된 이들은 조선인을 ‘짐승’으로 폄하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만주국에서 조선인 고등 관료들은 그들만의 연결을 통해 그들만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만주전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만주국 조선인 고등 관료들과 같이 기록에서 등한시되어왔던 조선역사의 일부를 재현한다. 바로 이 지점이 ‘만주전선’의 백미이다.

박근형은 일본인으로부터 핍박받는 조선인이 아닌, 조선인을 핍박하는 조선인 사이의 강한 유대감을 그려냄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분노를 이끌어낸다. 여섯 명의 등장인물들은 일본이라는 이름 아래 뜨거운 유대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아리에 담긴 된장, 고추장 냄새를 맡으면 어쩔 수 없이 아련한 감정을 품게 되는 조선인이다.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전혀 일치되지 않는 이들의 정체성은 모순 덩어리 만주국과 닮아있다. 바로 이러한 모순이 관객의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지점이다.

만주국의 고등 관료인 시청 정규 공무원이 된 요시에는 그녀의 일본인 상사와 사랑에 빠진다. 요시에의 희망은 자신의 아들이 ‘누구의 손가락도 받지 않는 진짜 일본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은 일본인 상사로 인해 좌절되지만, 그녀의 희망은 집념에 가까운 경지로 변모한다. 어쩌면 요시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아버지인 일본인 상사가 요시에를 ‘정옥순’이라는 조선이름으로 불렀을 때, 아들이 일본인일 수는 있어도 그녀는 절대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요시에의 믿음처럼 그녀의 아들이 일본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해방이후 요시에의 아들은 해방공간을 거쳐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된다. 누구보다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만주국 고등 관료의 후예는 당당히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대한민국의 모순의 역사는 계속되어 관동군 아스카가 광복 이후 6•25참전과 공산주의자들을 소탕을 통해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스카와 같은 권력의 중심들이 대한민국 정부 탄생 이래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겉모습을 바꿔 사회에 안착해 왔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내레이터는 “할아버지의 피는 아버지를 통해 나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요시에와 아스카의 피는 아직도 대한민국에 흐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작품을 보는 내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의 희망은 무엇이며 그 희망이 구현될 땅은 어디인가?’라는 씁쓸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내레이션의 활용이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신의 세 할머니를 소개하는 내레이션 형식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세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아주신 할머니, 키워주신 할머니, 종종 만나는 할머니인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적절히 기능한다. 관객이 극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 세 할머니와 주인공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 대한 퍼즐을 맞춰야만 하는 놀이에 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 놀이가 ‘즐거운 놀이인가?’라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극의 전개 과정에서 할머니의 존재를 주인공스스로가 고백하면서 관객에 손에 들린 퍼즐이 결국 작가에 의해 맞춰지기 때문이다.

내레이션이 전략적 효과를 얻고 있지는 않는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이들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다. 관객에게 형식적 재미를 위한 퍼즐을 쥐어주기 보다는 인물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퍼즐을 쥐어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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