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김봉길

어긋난 시간들 달래기

– 현대무용극 <게르니카>  

 

김봉길(시인)

안무: 안병순

연출: 오세곤

단체명: 떼아트르 현대무용단

공연일시: 2014/10/11

공연장소: 노을소극장

 

우리네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흐른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누구는 빠르게 흐르고, 또 느리게 또는 맑게 아니 더럽게 흐르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시간으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우리네 생각이요 행동이리라. 그런 시간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서로 다른 것을 끌어안으려는 의지가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잠깐, 서로 다른 시간이 모인 대학로 한 소극장에 갔었다. 서로 다른 시간을 잠시 맞추었다는 행복감으로 친구와 함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어긋난 시간들의 파편엔 언제나 전쟁이 있음을 다시 확인하려 했었다. 전쟁으로 시간이 정지되거나, 상처를 입어 절룩거리는 시간도 된다. 그 시간의 후유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시가 되기도, 소설이나 희곡이 되기도, 그림 또는 음악도 된다. 참, 우습다. 이것을 또 확인하려 하다니!

 

1936년, 스페인은 정권에 눈먼 사람들과, 이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앞선 사람들과 내전이 있었다. 이 전쟁을 빌미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신무기를 시험하려던 독일 나치군. 스페인 작은 마을 게르니카 주민이 무차별 폭격의 희생양이 된다. 내전이나 전쟁은 어느 나라든 인본주의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언제나 묵묵히 하리라. 3.1, 6.25, 4.3, 5.18 등의 숫자처럼, 아물지 않는 아픔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숙연함은 어느 나라에게든 있으니까.

 

2014년 가을 입구에서 마주한 날의 현대무용극 <게르니카>는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주민의 무고한 살상에 분노를 느낀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의 70여년 전 ‘그림’과, 3살 때 스페인 내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오늘도 절대상황 경계를 산책하는 페르난도 아라발의 50여년 전 ‘희곡’과, 항상 새로운 현대극을 30년째 시도하는 오세곤의 ‘연극’, 그리고 이들 그림․희곡․연극의 공통분모를 ‘무용극’이라는 장르로 하나가 되고 싶은 안병순의 도전적 예술혼으로 이어진 결과물이었다.

 

 

줄거리 이해 

 

폭격과 총소리. 내전과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 폭격으로 무너지는 집안.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공화국 장교. 그리고 전쟁의 파편을 상업적 가치로 만들려는 기자와 작가.

 

이미 부서지진 화장실에서 갇힌 리라. 고통 속의 아내 리라를 구하려 하지만, 어쩌지 못해 마음만 무너지고 있는 남편 황슈.

 

사랑해서 만났고, 어제보다 지금 서로 더 사랑하고 싶지만, 그 사랑의 끝을 확인하지 못하는 황슈와 리라.

 

전쟁이란 절대성에 의해 결국 집 전체가 무너지고, 둘은 필연인지 우연진지도 모르고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두 개 파란 풍선이 되어 하늘도 날아간다.

 

전쟁. 그 극명한 절대상황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네 삶이란 그 자체가 이미 절대상황이니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있으니까.

 

 

<게르니카> 주제 맛보기

 

장미 맛. 화장실이 점점 무너질 때마다 가중되는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리라. 그러나 그 고통만큼이나 남편 황슈가 다른 여자가 있으리라는 심적 고통도 심하다. 남편에게 지난 토요일 동네 빵집 여자와 함께 있었느냐는 확인을 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 한다. 남편이 더 이상 그녀와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과 그 사과를 받으려 하는 리라. 남편이 달아나면 슬며시 다가서는 리라, 다가서면 짐짓 반걸음 물러서는 리라. 여자는 언제라도 장미만큼 다양한 색깔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가?

 

바위 맛. 화장실에 갇힌 아내 리라를 구출하고 싶지만, 그래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려 한다. 그러나, 한편 지난 토요일 빵집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남편 황슈. 아내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을 회피한다. 이런 종류의 거짓이란 큰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남자만의 전유물인가? ‘눈 가리고 야옹’이란 말로 묵인되는가? 그러기엔 남자와 인간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이도 문제인 듯.

 

구름 맛. 인간으로서 남자와 여자 사이엔 언제나 벽이 있는 듯하다. 가끔 낮아지기도, 한 쪽이 열리기도, 투명해져 잘 보이기도, 또 어떤 땐 두껍고 높아 다른 세계가 되기도 하는 벽. 아픈 와중에도 여자로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리라와, 그것을 알고도 어떤 순간이나마 남성의 본능을 합리화시키려는 황슈. 이들 사이엔 서로 하나 되기 힘든 모양새가 영원히 존재하는 듯. 그 남녀 존재 자체가 구름인 양 근거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조리 근원인 듯. 현대극의 주제인 부조리인 듯.

 

나무 맛. 고통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집밖 나무는 잘 있느냐고 리라는 계속 확인한다. 건성으로 확인하고 잘 있다고 확인해 주는 황슈. 어쩌면 그들은 전쟁으로 인한 집의 파괴와 육체적 고통 및 애정갈등 등등과는 상관없는 집밖의 나무에 또 다른 피난처를 만든다. 이 세상은 내 의사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엉뚱한 상징성에 자신의 의미를 이입시켜 놓고 싶은 것이 인간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건들지 않는 나무, 누가 건드려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은 건 그들이나 나나 같지 않겠는가? 이 또한 현대극의 또 한 주제인 듯.

 

바람 맛. 전쟁은 파멸을 이끄는 악의 상징이다. 이를 모두 알면서 싸움은 영원히 되풀이 된다. 어쩌면, 그 싸움은 누구의 책임도 아닐 거다. 이는 우리 인간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또한 사랑은 생산의 근원으로 선의 상징이라고 한다. 서로 가까이 있어도 서로 마음이 편한 인류애. 그 많은 역사의 유산은 전쟁과 사랑이 만들었다. 어느 쪽으로든 바람처럼 오며가며 살고 있는 현실 자체가 또한 현대인의 영원한 변명거리인 듯하다.

 

시간 맛. 폭격이 심해지면서 자신들이 분명 죽을 것임을 알고도, 리라와 황슈는 현재를 탈출하려는 일과 자신들만의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이들 주인공이나, 이미 결론이 이미 나있는 상태의 작품임을 알면서도 그 과정을 확인하려는 독자나 관객, 또 이를 쓴 작가나 공연에 참여한 제작자 등등, 이들 모두는 현대인으로서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함을 매번 자각하고 싶어 한다. 또한 저마다 스스로 만든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가슴 앞에 내밀어 놓고 지켜보려 하는 현대인. 어쩌면 한 상황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순간이나마 그것을 뛰어넘는 맛을 보려는 현대인. 이러한 현대인의 이름 자체가 부조리 대명사인 듯도 하다.

 

 

누구나 절대상황은 있다 

 

누구나 절대상황은 있다. 그것이 죽음인가? 그 전에도 많다. 공부하고, 돈 벌고, 사랑하고, 다투고, 누군가 아프고, 집에 가야하는, 그랬다, 어떤 경우든 절대상황이다. 그것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 그러니, 내 상황이 곧 절대적인 것이란 묵계가 세상을 존재하게 한다. 말이야 쉽겠지만, 내 상황을 항상 즉시하고, 아니 나부터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다른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 했다. 노는 대상, 싸울 대상이며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다. 말할 대상이거나 밥 먹을 대상이며, 게임할 대상이 있어야 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상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세상 모두인 듯하다. 뭐, 이 지구는 영원해야 하니까. 아니 인류는 영원해야 하니까. 아니, 본능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니까. 아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해야 하니까. 그래서 살아있어야 하니까.

 

그 많은 대상 중에 나 자신을 대상으로 극명하게 동그라미든 수평선이든, 그래서 어떤 그림을 그려 놓아야 했다. 그 그림을 손끝에 걸쳐놓고 봐야 한다. 그렇게, 언제든 어떻게 보든, 같은 모습으로 있고 싶어 하면서, 그 다음, 조금 뭔가 달라질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욕심이다. 뭐 하나 분명한 것이 다음 것을 만드는 일임을 알면서, 애써 다음과 그 다음의 것을 엿본다. 분명 자신을 바보스럽게 하는 일임을 알면서, 스스로 새롭길 바라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대상으로 새롭다며 이기려 할 때, 사람들은 자연 속을 산책한다. 들, 산, 강, 바다로 간다. 하늘을 보며 구름의 무한대 변화에 마음을 새롭게 다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다른 대상과 씨름하는 것이다. 내 생명이 아직 있으니까. 굳이 이 사이에 있는 괴리를 부조리라고 하기엔 아직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규명할 수 없기에 눈앞에 던져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밥을 또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꼬인 상태에서 지속되곤 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또 나를 대상으로 산책하는 일이 막연해지고, 그래서 싫증나게 되고, 지쳐 쓰러지게 될 지경이면, 어떤 것이든 스스로 포기하는 순간, 그 어떤 대상은 없어진다고 한다. 다 없어지고 나면, 절대성만 남는다고 한다. 이 절대성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누구는 한 순간, 그 절대성을 뛰어 넘는다고도 한다. 그 다음 영원한 추락과 그리고 또 다른 순간 절대성을 그 위에서 다시 뛰어 넘는다고 한다. 마음만이라도 앞서는 일이라니 참 건방진 생각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또 어떤 경우, 절대성에 안기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편안해진 자연과 나 자신을 만진다고 한다. 그 절대성에 안기는 일 또한 평생 기대고 안기고 해야 문득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한다. 뛰어넘을 것이냐 안길 것이냐 하는 그 방법과 펼쳐진 시간들이 너무 많기에, 선택하는 일 자체 또한 고민이요 평생 간다 하겠다. 물론 이도 쓸데없는 걱정이니, 어떤 것이든 부조리란 말을 빠트릴 수 없다.

 

 

전쟁과 부조리를 위한 변명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끔 다른 의미를 비슷하게 느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의미를 또 다르게 바라보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한다. 나만은 다르다고, 저들과 다를수록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을 느낀다고 본능처럼 우겨보는 것이었다. 이율배반적인 행위란 내 마음과 몸이 함께 하지 못하는 소이가 아닐까. 함께 하기 위해, 한 순간이나마 하나가 되고 싶은 현실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심심하면 안 된다.

 

사람은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는가 보다. 그 결과, 지구를 거쳐지나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논하지 않더라도, 또한 전쟁의 자취에 얽힌 인물 명암을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매순간 나오는 뉴스는 그때마다 과거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그 수많은 사람 모두,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그래서 며칠 몇 달 그냥 있으면, 대체적으로 특별한 그들만의 길을 각각 만들게 된다.

 

한 쪽은 이럴 수 있다. 마음과 몸이 하얀 백지처럼 깔끔해지면, 그 백지에 일시적인 충동의 꿈틀거림으로 새로운 길과 그 길 위를 달리는 그 무엇이 만들어지는 것. 그것은 꿈이었다가 희망이 되고, 그 희망과 그 위의 새 생명이란 집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새로운 삶의 충동이 되기도 한다. 참 생각만 해도 지금을 즐겁게 한다. 이들은 전쟁을 최후 수단으로 여긴다.

 

또 한 쪽은 저럴 수 있다. 자칫, 마음과 몸이 검은 어둠의 길을 걷기도 한다. 내 안의 힘듦과 상처가 환한 웃음보다 어두운 파편들이란 괴로움의 길을 만들고 있는 것. 그것이 절망이 되고, 그 절망과 그 아래 되풀이 되는 주검이란 집까지 부수고 또 스스로 부서지기도 한다. 당연히, 모든 것을 잊고 싶을 것이란 말에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이들의 전쟁은 최우선 수단이다.

 

그러면,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쪽도 아닌 듯. 지난 시간을 혹시 가슴에 있는지 만지다 보니, 위의 이런저런 것들이 섞인 채 소근거린다. 어쩌다 마음과 몸이 서로 묶여 현실에 매달린 채 끌려다니고 있다고. 문득 뒤돌아 볼 적, 그렇게 어느 한 쪽 길에 서서 다른 쪽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에 대해 뭐라고 답에 답을 할 것인가. 그랬다. 답이 늦어질수록, 그 뉘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궁에 더 빠져드는 법. 그래도 여전이 그 답을 찾지 못하는 있으니 어찌 할 것인가? 당연, 비겁이란 말은 부조리와 동급이다.

 

항상 지금의 문제는, 자의든 타의든, 일단 들어선 길에 대한 정의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남은 시간이나마 진정 나의 길이라고 말이다. 서로 다른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오가며, 그래도 희망을 향한 몸짓으로 자신만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고 떠들어대야 한다. 자신을 위한 즐거움과 이를 위해 생길 수밖에 없는 슬픔, 또 그 되풀이 되는 과정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며 길을 가야 한다. 부조리란 이 길들이 서로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더욱 시끄런 소리를 낸다.

 

 

부조리는 처음부터 있었다

 

칸트는 부조리의 논리를 정반합으로 치장했지만, 굳이 그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부조리란 이름의 숫자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보다 많다. 전쟁이란 이 수만큼의 경우가 뒤섞이며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 혼돈의 언저리에서 결국 전쟁은 내가 먼저 살기 위해 생길 수밖에 없는 단어였음을 어찌 부정하랴. 나를 자랑하고 싶고, 우리를 더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바, 이를 어떻든 이기고 봐야 하고, 그러고 나서 베풀고 즐기는 것을! 참 묘하게 행복이란 단어로 치장되는 것을!

 

전쟁이란 밥 먹거나 숨 쉬는 것과 같은 것이면 어떨까. 세상사는 일 자체가 전쟁이라면, 또 부조리라면, 종종 이랬으면 했었다. 그 부조리란, 전쟁이란, 애당초, 원래 있었던 것이라고 정의해 두는 것 말이다. 그 오랜 세월의 끝에 매달린 채, 누구도 내 것이라고 잡지 못해 손끝으로 건드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조리란, 처음부터 초록이나 분홍처럼 부조리란 색이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 나만 가지고 있는 걸까? 원래 있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랬다, 그때마다 갈등에 시달린 가슴을 조금이나마 편히 만질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전쟁은 어디에나 있다. 게임, 스포츠, 영업, 선거, 시험, 주식, 토론 등등. 이 세상 어느 단어든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전쟁의 끝자리에 매달리거나 그 가운데로 퐁당 빠지게 된다. 그 시간의 결과, 이기고 지는, 먹고 먹히는 것에 관해, 그 누구도 바보처럼 억울해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사라지면 된다. 사라지지 못하면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몸을 시간에 얹혀 놓아야 한다. 그것이 패자의 떳떳함이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결국은 모두 같아지는 것이 세상 모습이다. 그 수많은 이긴 사람과 더 많이 진 사람들 모두 사라졌으니까.

 

 

부조리는 욕심을 없앨수록 줄어든다 

 

공연을 보며 머리며 가슴을 계속 누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 감상문을 마무리 하면서 줄어들지 않는 것, 그것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불투명함이었다. 뭐 다름 아닌, 나 자신 조절능력 부족함이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욕심이 뭐 그리 많은 것일까? 앞과 뒤가 뒤틀리는 것이 세상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억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도 건방지다고 하면, 할 말 또한 없지만.

 

<게르니카>의 리라도 남편 황슈에 대한 소유욕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면, 황슈도 리라를 위한 사랑 의지가 더 강했다면, 당연히 둘은 사랑타령보다 위험을 탈출하는데 서로 힘을 모았을 것이다. 폭격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서로를 탓하며, 자신의 욕구에 더 집착하는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 자체가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은 참 억울하다. 작품 속 주인공들이나 나나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 시간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죽는다. 그와 동시에 그가 가지고 매달렸던 불협화음의 잔해들도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 어디 그것을 허용하는가 말이다. 살아생전 명쾌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이 또한 나의 욕심인데, 어찌할 것인가? 계속 행복하고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이 세상 최선의 행복감은 누군가에게 도움 주는 일에서 시작하고 또 끝난다고 한다. 그 일이 아무리 작더라도 누군가에게 내 것을 내어주는 것만큼 더 큰 행복감은 없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행복감이 부조리한 상황을 투명하고 잘 정리해 줄 수 있을까? 절대상황이니 부조리니 전쟁이니 하는 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분명 그렇다.

 

말로만 쉽게 해왔지만, 언제나 다짐하고 있는 말, ‘부조리는 욕심을 없앨수록 줄어든다.’는 말을 다시 해야 하는 지금 기분이란,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나은 듯하다. 이제 이 말도, 고의든 아니든, 다시 잊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알면서, 조금이나마 지금 기분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을 용서해 본다. 나는 언제라도 ‘욕심 줄이기’라는 말을 스칠 적, 고개 숙여 땅을 오래 보거나, 아니면 고개를 들어 잠깐이나마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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