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입 ‘수시전형’ 체험기
우 상전(연극배우)
올 가을에 처음으로 대입 수시전형의 실기평가를 경험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5일 동안 700여명에 이르는 수험생의 ‘입시연기’를 직접 면전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요사이 수능시험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도 그럴 게 젊은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험에, 그것도 매년 계속해 정답에 오류가 발생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연극대학이 실시하는 ‘실기전형’도 연극계에서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배우로서의 첫 시작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매년 반복됩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생들의 평가기준들이 가르치는 사설기관(학원이나 개인지도)의 교육과 어느 정도 매치가 되면 좋겠습니다.” 입시생을 가르치는 한 연극인이 ‘작은 바람’이라며 연극대학을 향해 던진 하소연이다.
현재 입시는 ‘복불복 게임’
현재의 실기전형이 사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복불복게임’으로 비쳐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왜? 예측이 불가능해서 합격여부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도대체 3분 동안에 무엇을, 어떤 평가가 가능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럴 것이다. 명색이 대입시인데 어떻게 이런 식의 전형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럼 교수들은 매년 이런 식의 평가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거의 무감각의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이래서 연극대학의 실기교육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입시전형인 게 사실이다.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합격을 할 수 있을지, 또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지, 가르치는 교사도, 수험생을 평가하는 교수들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말이 많고 결국에는 ‘복불복게임’이 되고 있는 것일 거다.
‘입시레슨’마저도 불가능한 연극계
내가 국립극장에 머물 때, 한국의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이, (그것도 젊은 예술가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입원을 ‘입시레슨’을 통해서 얻고 있는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립단원이 되면 수강료가 3,4배로 뛰기도 한다면서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연극은 어떤가?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왜? 실기평가가 ‘복불복게임’이 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한마디로 입시가 ‘입시교육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기와 무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하니 그럴 것이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학원 등에서 입시연기를 지도하는 교사들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원 과정에 있는 젊은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자기의 경험과 해당교수들의 연기취향(?)을 잘 파악해 입시정보에 밝을 뿐만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 학원 등을 유지하기 편해 젊은 교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대학입시가 대학교수들의 제자들에 의한 사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여러 가지 불만이 해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왜 ‘선행교육’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럼 도대체 연극대학은 왜 고교 정규과정에도 없는 연기를 수험생들에게 ‘선행학습’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대학이 연기의 재능여부를 알고자 하는 – 수험생의 잠재력을 알고자 하는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대학에서 제대로 된 연기교육을 받으려면 반드시 ‘선행학습’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3분 테스트’로 그들의 잠재력을 알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또 이런 수준의 ‘선행학습’으로 수험생이 장래에 받을 대학교육을 위해 보탬이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는 먼저 사교육의 전반적인 교육현실이 너무나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대학이 자신들의 교육을 위해서 ‘선행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또 이게 자기 제자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또 그들에 의한 제대로 된 ‘선행학습’이 되게 하려면, 이에 필요한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약간의 고민과 배려만 있어도 이런 난맥상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디 이 뿐인가? 이렇게 시작부터가 부실하다 보니, 한국의 모든 공연예술 장르가 입학 후에도 지속적으로 ‘레슨’을 받아 정진을 하는데 반하여, 연기는 입시가 끝나면 학생들 모두가 더 이상의 개인적 노력도 동시에 포기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평생 연극관련 서적 한권 읽지 않아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교육시스템이 바로 우리 연극대학의 위대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재학생들이 연예계 진출을 꿈꾸며 각종 오디션에 얼굴을 내밀고 기웃거리고 다니는 현실은 ‘대학교육’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정말 한국의 연기교육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 게 해주고 있는 풍경들일 것이다.
‘사전선행학습’이 왜 중요한가?
이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앞서 ‘한국연극’의 풍경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래 연기란 (시대의 요구에 따른) ‘스타일’이 있게 마련인데, 이게 한국에서는 대학마다 다르고, 극단마다 다르며, (무대배우와 영상배우라는) 출신이 달라도 다른, 한마디로 각양각색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연기에 통일성을 찾기가 힘들다. 우선 배우마다 발성이 제각각이고, 화술도 각인각색이다. 소위 미국드라마라는 ‘미드’를 안방에서 시청해 보면 목소리의 통일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미국에서는 대학의 ‘연기교육’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비통일상’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입시의 ‘선행학습’에서부터 출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따라서 출발의 중요성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이토록 시작이 중요한 것일까?
인간이 하는 연기가 바로 인간의 ‘절차기억’에 의해서 기억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서술기억’, ‘절차기억’, ‘정서기억’ 세 가지 기억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배우들이 연기를 터득하는데 이바지 하는 기억은 바로 학습을 위해 필요한 ‘서술기억’이 아니라 ‘절차기억’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있다.
의식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기억 – 주소나 전화번호, 대사 외우기 등의 ‘서술기억’이 아닌, 의식적으로 기술할 수 없는, 그러니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또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기억해 낼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절차기억’에 의해 인간의 연기가 습득된다는데 있다.
그래서 한번 배우면 잊지 않고 계속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과 같은 ‘절차기억’에 의해 연기가 숙달되어서, 한번 익히면 무의식상태에서도 저절로 연기가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초보시절에 익힌 연기가 한 배우의 연기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사교육이라 할지라도 ‘선행학습’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 학원 등에서 최소한 수개월씩 연기를 익히면, 당연히 ‘절차기억’이 작동해 이게 습관으로 고정돼, 평생 배우의 연기력으로 입력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때 불행히 잘못된 기억이 입력하게 되면 배우는 이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교육에 의해서 행해지는 초보자의 교육과 훈련을 단지 입시를 위한 ‘선행학습’ 정도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한 연기자의 인생을 위해서도 실기전형이 초보자들에게 ‘복불복’으로 작용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그 책임이 전적으로 대학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다.
물론 이건 배우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린 연주자, 운동선수 등도 다 마찬가지다. 초보시절에 잘못된 습관을 익히게 되면, 그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평생 고생을 면치 못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래서 초보자를 위한 교육과 훈련이 중견배우들의 훈련보다 더 중요하고, 필히 좋은 교육을 시킬 자질과 경험이 풍부한 교사로부터 초보시절부터 제대로 된 연기술을 익히도록 권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한번 잘못 입력된’ 절차기억이 순순히 자기의 기억을 포기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보시절에 처음으로 익힌 호흡, 발성, 제스처, 걸음걸이, 화술 등이 너무나 중요하며, 이게 나중에까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절차기억’으로 남아, 평생 배우의 일생을 좌우하는 연기력으로 굳어지게 되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대사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서술기억’이 필요하지만 – 그래서 대사는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히지만 – 호흡과 발성, 액션 화술의 버릇 등, 신체를 원용해서 익힌 연기술은 ‘절차기억’에 의해 전혀 힘들이지(?) 않고 기억되어, 결국 이게 배우의 일생을 결정짓게 되는 연기력이 된다는 것을 필히 명심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교육’이 초보자들을 위한 교육으로서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배우는 수시로 자기의 잘못된 ‘절차기억’에 의한 입력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운동선수들을 보면 명확해진다.
그들은 경기시즌이 끝난 훈련기간에는 그동안 경기 중 잘못 입력된 ‘절차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각 분야의 코치들과 함께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이 배우들을 위한 ‘연기코치’를 두고 있는 게 현실이며, 이걸 모르는 곳은 한국연극계 뿐이라는 사실을 모든 배우는 ‘서술기억’을 통해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야구의 경우를 보면 분야별로 전부 코치가 존재한다. 타격코치는 물론이고 주루코치, 수비코치 등 10여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대학교수들이 연기경험이 일천해 ‘절차기억’의 중요성을 모르니 연기지망생을 -한국연극의 미래의 인재들을 위험천만한 사교육에 내 팽개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대학입시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당연히 대학의 연기교육이 바뀔 것이고 나아가 한국연극에 새로운 변화가 유도돼 ‘연극생태계’에 일대 변화가 야기될 것이다. 당장 연예인을 꿈꾸는 교수들의 많은 제자들이 가장 혜택을 보는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자 생각이다.
아마 많은 교수들이 3분으로 제한받고 있는 현실의 ‘입시제도’를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연기는 ‘개성’이 중요해 평가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얼버무릴지 모르지만, 이는 (단언컨대) 우리의 연기교육이 고작 비전문가에 의한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라 것은 분명하다.
‘홍익미술대’의 입시
홍익미술대학이 대입에서 ‘실기전형’을 전면 폐지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왜 그들은 기존의 평가방식을 전면적으로 개혁한 것일까? 이는 입시에서의 실기전형이 장래 미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술로 진입하는 초보 예술가에게 입시에서의 실기전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존의 실기전형을 폐지한 주된 이유는, 단적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조(경향)에서 기존의 입시를 위한 실기전형이 무용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경향으로 현대미술이 변화해 가는데 따른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홍대가 실기전형을 포기하고, 당연히 자기 대학의 취향에 맞는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예비 수험생들이)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시행해오던 기존의 미술교육을 받지 않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저런 준비를 해서’ 자기 대학의 입시전형에 임하도록 각 고교를 찾아다니며 입시요강을 설명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입학한 후에는 선발된 학생을 대상으로 대학이 직접 현대미술에 적합한 실기교육을 초보단계에서부터 실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다.
홍대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현재 중, 고교과정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중, 고교교육이 스스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홍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을 선발할 수 없을 것이니, 홍대가 이런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홍대는 교사와 고교생들을 설득해, 학생들이 기존의 데상과 같은 실기를 익히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 즉 기존방식의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도 입학이 가능함을 알린 것이다.
이게 외려 요즘의 현대미술경향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게 세계적 추세임을 함께 설명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 비하면 연극(연기)은 고교과정에서 아예 가르치지 않아서, 대학이 입시전형에 대한 ‘발상의 전환’만 하면, 즉 교수들이 인식을 바꾸기만 하면 금방 입시전형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게 사실이다. 즉 좋은 입시전형을 실천하기가 너무나 용이하게 되어 있는 게 연극대학들일 것이다.
그런데도 ‘3분 테스트’ 등의 불합리를 깨닫지 못해 입시를 파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며, 개인과 연극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을 여태껏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입시전형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연극계 후배가 자기 아이를 한번 가르쳐보라는 부탁을 해서 이른바 ‘입시연기’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비밀유지를 위해서 세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해할 수준으로만 설명하겠다.)
자기 아이가 고3인데, 입시를 앞두고 갑자기 진로를 바꿔 ‘연극과’를 가겠다고 나서서 나에게 입시연기를 부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입시 한 3개월 전이었다. (그때는 수시전형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 전에 학원이나 개인에게 연기교습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고 물었다. 그랬더니 “가르쳐보면 알거야. 처음이라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던 차 드디어 입시가 목전에 다가 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다. 그래 만나보니, 얘가 꼭 가고 싶은 대학이 첫 시험인데, 느닷없이(?) 그 대학에서 시험 볼 문제(지정 대사)를 예비소집에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보기에도 난이도가 너무 높아 걱정이 된다며 나에게 출제된 대사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그래 읽어보았더니 꽤 길고, 초보자에게는 절대로 만만치 않은 번역문장의 대사였다. (세세한 것은 생략하겠다.)
우선 아이의 엄마를 안심시켰다. “이게 이 얘한테는 되레 행운입니다. 이렇게 대학이 문제를 미리 제시해 주면, 그것도 40시간이라는 비교적 넉넉한(?) 시간을 주고 문제를 미리 제시해 주는 것은 이 아이에게 더없는 행운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초보자인 수험생의 경우, 미리 대사를 제시하면 이는 전적으로 교사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게 입시연기다. 이른바 대학입시에서 말하는 ‘자유연기’라는 것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결국 수험생의 자질을 평가하는 게 아닌 사교육의 ‘교사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간여유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아이에게 “지금부터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아예 외워버려!” 그리고 나를 따라 외우게 해서 입시에 임하게 했다. 혹 긴장해서 망치지는 않았을까 하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그 아이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발표가 났는데, 우리 아이가 수석을 했어요!” 현장에서 내가 주문한 대로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그 후에 그 애 아빠가 레슨비를 내밀기에 “어떻게 연극동료한테 돈을 받을 수 있냐?”면서 거절을 했더니 “상당히 많은 장학금을 받았거든”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였다.
그럼, 이런 결과와 행운은 어떻게 해서 얻게 된 것일까?
1. 먼저 현재의 ‘3분 테스트’의 맹점이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입시전형에서 ‘자유연기’란 이름으로 치러지는 수험생의 연기는 바로 사교육의 교사의 능력을 가늠하는 평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형을 실시할 바에는, 차라리 입시교사가 추천의 글에서 “이 학생은 내가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타고난 재능이 우수한 학생임을 보증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의 명예를 걸고 거짓말을 한 죄로 형사처분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이런 추천서를 받느니 만도 못한 게 사실이다.
2. 그가 수석을 한 것은 바로 ‘지정대사’를 통해서 변별력에 수월성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각자 자기들이 준비한 ‘자유연기’로 실기전형을 치르게 되면 당연히 변별력을 상실해 당연히 ‘복불복게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교육부가 실시하는 수능고사가 수험생 각자에게 각기 다른 평가문제를 제시하고 이를 평가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실시하는 ‘자유연기’는 절대로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사의 난이도까지도 따지는 아주 세밀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연극대학의 실기평가는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인 평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연기’란 애초부터 진정한 ‘변별력’을 가질 수 없는 ‘복불복게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3. 모든 심사에서는, 심사자의 감각이나 취향이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예술계에서 각종 시상식이 끝나면 항상 ‘뒷말’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심사자의 감각과 교사인 나의 감각이 상호 일치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를 거쳐서, ‘학위논문’으로 시간강사를 거친 다음에, 전임교수가 되는 이런 과정에서는 솔직히 교수들의 감각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 현장에서 작업을 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사교육의 교사들이 대학교수들의 연기취향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현장인들에 의한 ‘레슨’도 불가능하고, 현장인들이 어떻게 가르쳐야 합격할지를 몰라, 입시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업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난맥상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
여기서 우리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현재의 입시전형이 이처럼 ‘복불복게임’이 되고 있으니) 사교육도 수험생들도 ‘선행학습’을 대충 해도 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컨대 “내가 아는 우리 선배는 학원에 3개월도 다니지 않았는데 합격했어!” 또는 “자기 혼자 준비했는데 수도권 대학에 붙었다니까!” 하는 이야기를 많은 수험생들이 스스럼없이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이런 ‘복불복게임’에서는 비록 몇 년씩 죽도록(?) 준비를 해도 해당 대학의 교수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도리아미타불’이 될 뿐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3분 테스트’로 진행되는 현행 입시제도는 연기지망생들에게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현재의 실기평가는 입시전형이라기 보다는 편법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편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서 개선이 시급한 상태인 게 사실이다.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연기교육’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우리의 연기교육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배우가 하는 거 보면 알 수 있잖아!”식의 단지 ‘해보인’ 연기를 수정하거나 평가하는 게 고작인 실정이다.
나 역시, 오지혜의 ‘여자의 아침’을 연출해서 그가 최고의 연기력을 발휘한다는 명성을 얻게 한 경험도 있고, 고인이 된 배우 서희승이 국립극단의 ‘무주별곡’을 통해서 ‘이해랑 연극상’을 받을 때, 같이 출연한 내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나름 ‘연기코치’로서는 누구 못지않게 일가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이 정도로는 진정한 연기교육자가 될 수 없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런 재능이란 고작 기성배우들을 위한 조그마한 ‘기능’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서 그렇다. 이게 진정한 초보자를 위한 연기교육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초보자를 위한 교육의 기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초보자인 학생들이 보여주는 연기를 ‘수정’해 주거나 조언을 해주는 ‘코치로서의 기능’은 연기의 진정한 초보교육이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혼동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저 앉아서 입학한 학생들이 사교육에서 익힌 연기를 보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런 연기를 어디서 배웠니?”하는 게 대학의 연기교육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세계의 모든 교육기관이 채택하고 있는 기초교육으로서의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왜 그 많은 시스템을 위한 자료를 남기고 있으며, 그는 왜 그토록 많은 실험과 시도의 경험을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처럼 교사가 학생들 앞에 나서서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외치면 될 일인데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보자를 향한 기초교육의 어려움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배우의 표현도구인 인체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완성된 표현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배우의 인체를 완성된 표현체로 만들기 위한 기초교육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둘째는 배우가 ‘생각하는 기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배우가 자기의 두뇌나 감성을 통해서 스스로 연기의 ‘자발성’을 키우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연기는 인간의 신체와 두뇌가 결합해 이루어내는 복잡한 조합에 의해서 표현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술이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연기는 배우의 자발성에 의해 도출된 연기가 진정한 연기여서 그렇다. 연기는 배우가 자발성에 의한 표현을 하지 않으면, 또는 하지 못하면 ‘코치’의 기능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연기자가 자발성을 발휘하지 않는 한 교사의 연기에 대한 판단이나 수정도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연기교사들이 ‘보면 안 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기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이 분출하는 예술의 세계다. 따라서 ‘보면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무진장한 공간을 가진 세계다. 흔히 교수들이 하는 말 “그가 그렇게 스타가 될지 몰랐어!” 이것도 한 단면일 수 있다.
정말 진정한 교육은 인간이 가진 무진장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이 간직한 두뇌의 상상력과 심리와 감성의 디테일과 미묘함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자가 자기의 모든 것을 동원한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진정한 연기의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연기자가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으면 교사는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는 게 연기교육의 특성이다. 아마 우리 대학이 이게 두려워서 – 입학 후에 학생이 가만히 서있을까 봐 – 엉터리라도 ‘선행교육’을 요구하는 이유이며, 내심일 것이다.
왜? 현재 우리의 교육이 배우가 무언가를 표출하지 못하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행교육을 요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일반교육처럼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교육과 차별화되는 지점인 게 사실이다.
또 이거야말로 56년의 전통을 가진 연극대학의 연기교육이 지금껏 보여 온 ‘한심한’ 결과라는 것도 부정하면 안 될 것이다.
다른 장르, 즉 무용(발레)이나 음악(오페라), 뮤지컬 등이 정해진 곡(曲)과 몸짓으로 (상당부분 규격화가 이루어진 장르) 입시의 실기전형이 이루어지는 것과 차별화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예컨대 무대공연에서, 다른 공연예술 장르가 더블이나 트리플로 배역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연극에서는 이게 크게 불편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배우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실상은 더불 캐스팅인 것을 안다면 연기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건 살아있는 생명체인 배우가 자기 내부의 내면과 사고(두뇌를 움직여) 인간의 살아가는 일상을 표현하는 것이어서 ‘규격화를 도모하기’ 힘든 유연성이 개입하기 때문이어서 그렇다.
일단 인간 개개인을 위해 끝없이 치료법을 개발해 내야 하는 인체를 다루는 ‘의료기술’을 연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앉아서 “한번 해봐, 나는 보면 안다.” 이런 넋 빠진 소리를 하는 연기교사가 있다면, 일단 자기의 지능(?)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체를 표현체로 다루며, 그것도 개인의 두뇌와 감성,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일상을 모델로 하는 연기야말로, 음악이나 무용처럼 표현의 룰이 나름 규칙적이거나 일정한 규범이 있는 장르와는 분명히 차별화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교육은 연기가 ‘의학’처럼 끊임없는 탐구가 요구될 수밖에 없는 예술임을 아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입시전형을 개선할 수 있을까?
1. 우리 현실에서 ‘3분 테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면.
2. 그 많은 수험생을 효과적으로 측정할 특별한 방법이 없다면
3. ‘자유연기’로 학원교사 등의 능력을 측정할 바에는
4. 미술대처럼 실기전형을 폐지할 수 없다면
5.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는 교수들이 있을지 모른다. ‘3분 테스트’로 충분히 수험생의 ‘끼’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끼’는 교육의 영역이 아니다.
왜? 연기력의 차원이 높아질수록 ‘끼’는 보잘 것이 없는 게 될 뿐이어서 그렇다. ‘홍매’에서 보인 신구선생의 연기를 ‘끼’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끼’는 우리처럼 체계적 교육이 부실한 곳에서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3분 테스트’에 의해 행해지는 ‘자유연기’나 ‘종합연기’로는 제대로 된 평가가 불가능하다. 또 입학 후의 대학교육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대입이 실기전형을 포기하는 게 가장 합리적 방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이를 보완해야 할 것인가가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느낀 소감은) 수시에서 하루에 겨우 2명 뽑는 게 전부인 현실에서, 하루 응시자는 무려 100여명이 넘는다. 거기다 응시자의 3분의 2가 사교육의 부실을 드러낼 뿐이며, 용모나 태도에서도 배우가 될 자질에 의문이 가는 것도 부정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이라면, (나의 주장은) 최선의 방책은 ‘실기전형’에서도 수능 – ‘수학능력시험’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끼리’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각 대학이 개별로 입시를 강행할 게 아니라, 일단 전반적인 수학능력을 점검하는 ‘실기고사’를 교수협의회 등의 주관으로 먼저 실시하자는 것이다.
각 대학이 연합해서 통일된 연기력의 판단기준을 마련해 ‘수능시험’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를 교육부가 반대하면 연극대학의 특성을 주지시켜 이를 관철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즉석에서 ‘지정연기’로 테스트를 실시한다.
2. ‘10분’안에 테스트가 가능하도록 준비한다.
3. 교수들이 모여 심사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여러 군데서 동시에 실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더욱더 효과적인 기준마련을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오자마자 지나치게 일정한 태도로 연기를 시작한다든가. 끊임없이 신체를 움직이며 대사를 하는 모습으로 등으로 ‘동일학원’ 수강생임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을 지속하는 것은 대학의 직무유기이며, 책임회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대학들이 입시의 3분 테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면 ‘한국’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개척해야 하는 게 옳은 태도일 것이다.
예컨대, 연극학회, 연기학회, 연극교육학회, 교수협의회가 주관처가 되어서 모든 연극관련 대학에 지망을 원하는 수험생에게 일 년에 한번, (일반 수능시험이 끝나기 전) 날을 잡아 ‘실기수능고사’를 실시해 점수를 얻고, 이를 토대로 수험생이 지원 대학에 가서 면접이나 논술, 간단한 특기전형을 거쳐 – 그러니까 ‘본고사’에 해당할 것이다 – 입학하게 하면 어떨까?
이것도 불편하다고 여기는 대학은 지원서를 서류로 심사해 합격여부를 통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럴 경우에 우선 ‘선행교육’의 병폐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 일단 입시전형이 지금처럼 아리송한 ‘복불복게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대학의 서열화에 따른 입학을 걱정하는 교수들이 있겠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거야말로 지금도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렇다. 그보다는 외려 현재의 불확실성에 의한 선발이 더 위험할 것이다.
(내 판단으로) 거의 반수 이상에 가까운 수험생이 ‘복불복’을 노리고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건 학원에서 수강한 기간이 겨우 3개월 정도인 학생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최소한 입시 제도를 바꾸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복불복’의 심정으로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면서 대입시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려 드는 수험생의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배우로 성공하기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보다도 백배가 어려운 게 현실이고, 서울법대를 다니다가도 “너 연예인이 될 끼가 있어” 하는 칭찬을 들으면 다짜고짜 이 판으로 뛰쳐나오는 게 현실이다.
어느 누가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20대에 수백억을 버는 재산가가 될 수 있겠는가? 연예인과 ‘프로운동선수’가 고작일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내 주변사람들로부터 “대학갈 실력이 안 되면 일단 응시해보는 게 연극대학 아니야?”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를 대학이 입시제도의 개선으로 불식시켜야 할 것이다.
하여튼 현행 전형제도로 (글쎄?) 대학이 얼마나 막대한 ‘응시료’ 수익을 얻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태도로는 학생과 학부모, 특히 연극계부터의 ‘무용론’이나 불신을 불식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5일 동안 700여명의 입시생의 연기를 평가하기 위해 그들의 연기를 감상(?)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침 9시부터 실시하여 한 시간 가량의 점심식사시간을 제하고 저녁 7시까지 치러지는 하루 10시간의 대장정은 (거기다 평가를 위해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정말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매일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의 이코노믹 좌석에서 꼼짝없이 매일 편도비행을 하는 격‘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언제까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며, 연극대학의 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제도를 고수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시전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
그럼 현재 사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선행학습’이 입시전형의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거의 100%의 수험생이 ‘지정연기’를 시키면 대본을 들고 그냥 ‘읽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긴장으로 짧은 시간에 암기가 불가능하다 해도, 최소한 ‘말을 하려는’ – 연기를 하려는 노력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훈련이나 교육이 사교육에서 전무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2. 인물을 필히 설정해야 하는 ‘자유연기’를 피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때 수험생들이 인물설정에 따른 – 정형화된 인물성격의 부여로 인한 ‘꾸미는 연기’ ‘정형화된 목소리 연기’로 연기를 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3. ‘모노로그’(독백)와 ‘다이얼로그’(대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대화는 상대와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따라서 혼자서 대사를 한다 해도 상대를 의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왜? 이게 습관화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4. 가장 중요한 것은 발성이다. 감정과잉에 빠져 ‘소리를 지르는’ 연기를 대다수의 수험생들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연기를 위한 발성. 동시에 심사자에게 소리가 들리게 하는 발성을 적절히 조절하여 안정된 목소리를 내는 능력이 전혀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아마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합격을 위해서는 심사자들에게 뭔가를 보여야 하다는 ‘압박감’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아니면 자신이 감정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너무 긴장해서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5. 가장 걱정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른바 ‘종합연기’다. 많은 수험생이 먼저 몸짓부터 시작한다. ‘인도의 전통춤’을 연상시키는 몸짓을 하면서 대사를 치는 것이다. 문제는 목소리를 내는 화술과 상호 충돌하여 헐떡거리면서 대사를 쳐, 잘 들리지 않거나 이로 인해 패턴화된 연기(목소리)가 되는데 있다.
사실 제일 어려운 게 말을 하면서 움직이는 연기일 것이다. 즉 액션을 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걸으면서 대사치기, 화투치면서 (또는 싸우면서) 대사하기 등이 만만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몸의 유연성(?)을 보겠다고 초보자에게 이를 강요하는 것은 난센스다.
간단히 설명하면, 움직임도 호흡과 박자가 맞아야 원활하게 움직여지고, (수영이나 달리기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도 호흡을 조절해 발성이 된다. 따라서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할 경우, (이게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당연히 연기에서 호흡의 난조가 발생해 연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에서는 움직이고 나서 말을 하든가. 말을 하고나서 움직이는 게 보통이다. 또 이 둘을 결합하게 될 때는 길게 말하기 힘들어 ‘짧게’ 말을 하는 게 통상적이다. 그런데 이런 걸 연기초보자에게 강요하니 제대로 연기가 될 턱이 없다.
따라서 ‘종합연기’로 학생의 재능을 평가하려고 하면, 첫째 날은 몸의 표현력과 유연성, 둘째 날은 화술,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해서 입시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 기상천외한 연기를 강요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6. 왜 대사를 자기 말처럼 하기 어려울까?
첫째로 이를 방해하는 것은 ‘등장인물의 이미지’가 연기자에게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소위 복식호흡에 의한 발성을 하지 못해서다. 일상어와 달리 문어체인 화술에서 ‘화술을 위한 발성’을 하지 못하면, 화술에서 자기가 하는 말처럼 목소리를 조절하기 힘들어지고, 자기의 사고나 감정을 개입시킬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실 대사는 등장인물의 말이다. 하지만 초보연기자가 명심할 것은 비록 등장인물의 말을 할지라도 목소리는 연기자의 몸을 빌어서 나오는 것이며, 이때 연기자의 사고와 감정이 동시에 목소리에 개입해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7. 발음(딕션)이 부정확해질까?
하나, 발성을 위한 신체나 발음기관의 결함 때문에
둘, 무슨 말인지 모르고 습관적(암기된 상태)에서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화술로 치면 말의 내용에 따른 – 의미전달에 따른 ‘강조’나 ‘끊어 말하기’ 등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호흡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말의 리듬에서 특정 단어나 어구가 죽어버리거나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다.
셋, 지나친 긴장
8. 노래를 부를 때처럼 화술에서도 ‘리듬감’이 있어야 한다. 왜? 작가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리듬을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사교육에서는 교사의 절대적인 능력이 되기도 한다.
9. ‘척하는 연기’가 왜 대종을 이룰까? 한마디로 대다수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분석이 미약한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연기자가 흔히 빠지는 오류이기도 하다.
10. 그 외에도 긴장해소를 못해 목소리와 신체의 경직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감정과잉표출에 의한 ‘소리 지르기’, 목소리로 꾸미려 들어 더욱 경직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입시에 임하는 초보자들이 공통적으로 표출하는 문제점들이기도 하다.
가령 임금 앞에서 말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자기 가슴을 치는 경망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기도 하며, 부모님에게 말을 할 때도 일상에서 할 수 없는 거친 행동을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 상대에게 말을 하는데, 전혀 거리조절을 못하고 (상대의 위치를 모르고) 목소리를 내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정연기’에서 비록 암기가 불충분해도 애드리브를 동원해서라도 ‘나는 무슨 내용의 말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이는 게 외려 심사자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너무나 임의적으로 내용과 거리가 먼 볼썽사나운 ’자기창작‘을 해서야 안 되지만 말이다.
연기 지망생이 알아둘 일
1. 연기도 시대의 트렌드가 있게 마련이다. 요새는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을 명심하라! 따라서 이완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며, 목소리의 적당한 템포유지, 목소리의 크기와 톤의 부드러움이 가장 중요하다.
2. 몰입이 중요하다. 집중해서 연기를 하는 것을 초보시절부터 습관화 하여야 한다. 특히 눈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긴장으로부터 해방도 가능하다.
3. 자신이 마른 신체를 가지고 있을 경우, (목이 가늘고 가슴발달이 미약한 경우) 대개 천성적으로 발성에 약한 약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발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술을 구사하는데 나쁜 습관에 빠질 위험이 크다.
4. 긴장한 탓이겠지만 대사를 칠 때 적당히 ‘스피드’를 유지하라. 그래야 암기한 대사를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뛰어난 연기자는 템포와 포즈를 적절히 섞어 연기를 하지만, 초보자가 너무나 뜸을 들이면 템포만 처질뿐이다.
5) 왜 여자 수험생들이 ‘어린애 목소리’를 낼까? 이게 나에게 궁금증을 일으킨 사항이기도 했다. 성인인 수험생이 대사를 치면서 어린애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 자신을 귀엽게 봐달라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경우에 심사자는 수험생이 장래 성인연기를 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 즉 성숙미가 없는 연기를 할 우려가 있다고 여겨 배우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