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을 이겨라/ 최하은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

: 도그마로서의 배우론을 이겨라

 

최하은

구성/연출: 윤서비
공동창작: 최영열, 이종민, 홍승비, 염문경, 유재미, 윤서비
단체: 열혈예술청년단
공연일시: 2014년 11월 6일 ~ 11월 16일
공연장소: 대학로 스타시티 예술공간 SM
관극일시: 2014년 11월 10일

 

“선배들을 쉽게 존경하지 마라. 술자리에서 오가는 한물 간 경구들에 감동받지 마라. 혹여 당신이 장독 뚜껑을 덮고 오매불망 숙성되기만을 기다리는 된장 덩어리 같은 배우라면, 미련 없이 이 책을 덮고 향수병 걸린 선배들 수발을 들며 술 상대나 하라.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들의 무용담에 손뼉 치며 30년쯤 세월을 보내다 보면 혹시라도 좋은 배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당신을 존경할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연기는 성스럽지도 않고 다른 일에 비해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신발장에 모셔두지 말고 현관에 꺼내놓고 슬리퍼처럼 쉽게 또 자주 끌고 다녀라. 화장지처럼 필요하면 뽑아 쓰고 다 쓰고는 단호하게 구겨버려라. 적당히 익혀 재빨리 써먹으면 그뿐이다. 시간을 축내지 마라. 돌아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

– 이상은 열혈예술청년단의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의 한 대목이다. 선배들을 존경하지 말란다. 연기를 쉽고 가볍게 써먹으란다. ‘관객모독’ 아닌 ‘배우모독’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불온한 도발은 보는 이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트랜스휴머니즘’을 표방한 본 작품은 당당하게도 공연을 위해 제작된 로봇들을 배우들과 동등한 수준의 출연진(혼동을 막기 위해 인간 출연진과 비인간 출연진으로 나누어 알리기는 했다)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그리 멀지도 않은 미래, 고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로봇이 완전히 무대 위의 배우를 대체하여 ‘포스트 액터’로 관객들을 만날 가능성을 때로는 재기발랄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진심을 담은 농담처럼 타진한다.

작품은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배우로서의 경험과 고뇌를 들려주는 장면들과 로봇을 전면에 등장시킨 장면들, 독백과 군무, 로봇과 개와 인간의 협연 등 30여개의 분절적인 조각들을 얼기설기, 다소 어지럽게 엮은 모양새다. 전통적인 드라마의 작법을 해체한 것 자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조차 식상해진 요즈음에 대단히 신기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관객의 배우들에 대한 감정적 몰입을 미연에 차단한 것은 연극인이 연극인으로서 살아가는 고충을 토로하는 작품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자기위안의 함정에서 작품을 건져내기 위한 성공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또 무대에 등장한 로봇들은 그냥 겉껍데기만 씌운 무대장치가 아니라 한독미디어대학원대학교(KGIT)와의 협업으로 제작된, 실제로 유효하게 가동하는 진짜 로봇들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 배우들의 신체표현 역시 전문 무용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준급으로 느껴졌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꽤나 위험한 다리를 건넌다. 국내 유수의 연극제에서 받은 트로피를 들고 나와 실존하는 거장 연출가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조하기도 하고, 자신의 진정성을 한 번 맛봐 달라며 불판 위에 드러누워 양념을 발라 가며 육수를 짜내기도 한다. 매니큐어를 바르고 화장을 하면서 여자로서, 혹은 여배우로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드리겠다며 신체 부위를 모형으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져보게 한다.
이 시도들은 모두 그 계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배우로서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흔히 연극의 3요소는 무대, 배우, 관객이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배우는 무대와 관객이 없으면 연극의 한 요소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번의 작은 무대를 얻기 위하여, 한 사람의 관객의 눈을 붙들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실존하기 위하여 배우들은 저마다의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전략들은 기존 대부분의 연극들에서는 무대 뒤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다. 흔한 비유이지만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물 밑에서는 끊임없이 발장구를 치고 있듯, 배우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발장구를 관객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꽁꽁 감추고, 완벽한 가면을 쓴 모습만을 선보여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는 고통스럽고 성스러운 일이었으며,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들기 위해 소위 진정성이라는 것을 무한히 짜내기를 요구했으며, 오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숙성되어야만 했으며, 그러한 인고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 배우는 응당 존경과 숭배를 받아 마땅했다. 배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직업인 것처럼, 더 나아가서 흡사 인간성의 증명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연기론을 근본부터 뒤흔든다. 무대에는 개가 등장하고, 배우들은 개처럼 기어 다니며 서로 싸운다. 개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 틈으로 진짜 개가 등장하는 것은 무대 위에서 ‘완벽한 가면’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개로 완벽히 분한 배우와 진짜 개 중 무엇이 개일 것인가, 누구의 눈에도 일목요연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배우의 무대 위에 어디 배우가 아닌 조연출이 올라오냐며 성을 내는 배우의 한편으로, 길 가던 아줌마를 그냥 불러다 쪽대본을 쥐어준 것 같은 아줌마가 마치 배우인 양 더듬더듬 주어진 대본을 읽는다. 티어스틱을 직접 들고 나와 눈 밑에 바르고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대 안팎을 채운 로봇들이 시종 이를 지켜본다. 지켜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로봇들은 배우들의 연기력과 진정성을 측정하기도 하고, 하나의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서기도 한다. 극에 따르면 언젠가는 이러한 로봇들이 인간이라는 제약 많은 몸을 가진 존재들을 대체하여 진정한 배우로 거듭날 것이다. 그들은 포스트 액터로 불릴 것이며, 그때 인간 배우들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마치 자연사에서 보다 강한 새로운 종의 출현에 따라 기존의 종들이 먹이사슬의 아래로 밀려나거나 심지어 멸종한 것처럼.

이 극은 배우들의 숨겨져야 할 개인적인 과거사와 치부를 드러내고, 배우가 아닐 뿐 아니라 종종 인간도 아닌 존재들(동물과 로봇)을 무대에 등장시킴으로써 배우와 비(非)배우, 나아가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묻는다. 그를 통해 배우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을 함께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배우들도, 보는 이들도 견딜 수 없이 ‘불안하’다.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정의되는가? 어찌 보면 모욕적이고 무례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실존은 이러한 모욕과 무례의 도전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그 도전이 주는 ‘불안’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가능해진다. 정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모든 ‘진실’은 열린 토론의 대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살아있는 진실이 아닌 죽은 교의(도그마, dogma)가 되고 만다(it will be held as a dead dogma, not a living truth)”고 했다. 이 극은 신성성 속에 ‘죽은 교의’로서 고착되어 왔던 배우론과 연기론, 연극론을 과격한 위협, 즉 ‘열린 토론’에 노출시킴으로써 그것을 ‘살아있는 진실’로 재탄생시키고자 기도한다.
곧 올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대에 배우들은 부단히 로봇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로봇을, 비배우이자 비인간인 그들의 도전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불안하다. 로봇을 이겨라.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 실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때려눕힌 후에 그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저 한 대의 로봇이 아니라 거대한 도그마로서의 배우론이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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