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 이주영

집에 대한 고민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

이주영(연극평론가)

 

작: 윤미현
연출: 김승철
드라마터그: 배선애
단체: 창작공동체 아르케
공연일시: 2014년 11월 21일~30일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2014년 11월 25일 8시
결국, 집은 그 형체를 잃었다.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이하 <빨간 여자>)는 윤미현 작가의 신작으로, 그간 작가는 집을 소재로 두 편의 작품을 내놓았으며 <빨간 여자>는 집 연작 중 세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작가의 <평상>과 <젊은 후시딘>에서의 집은 남루하고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을망정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의 집은 전작처럼 집 안 상황은 쓰레기장에 다름 아니지만 낮은 담벼락만 있는, 집이라 하기에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다. <젊은 후시딘>의 극 후반부, 그 처리 방법에 있어서는 환상과도 같았지만 집에서 쫓겨난 세입자들이 공원을 집으로 세팅하여 집의 내부와 외부를 흔들어 놓았다. 이 경계의 흐릿함은 <빨간 여자>에서 구체화된다. 이 작품에서 모든 극적 상황이 진행되는 공간인 집은 등장인물들이 집이라 말하기/우기기에 집이 된다. 집의 최소한의 의미인 신체 보호라는 기능마저 이 작품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단, 내부와 외부가 모호하긴 하나 폴리스라인이 집 둘레를 감싸고 있기에 외부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된다. 법의 영역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이들이 폴리스라인 테이프로 법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에게 법은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그렇기에 이들은 법의 테두리에서 완벽히 밀려난 존재들이다. 집의 경계만큼 이들에게 법은 흐릿하게 작동된다.

외부에 대한 통제는 내부자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비만인 중학생 딸은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집 안에서만 살아간다. 아버지 또한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밖을 나가지 않는다. 이 단절은 이들의 지저분한 외형뿐 아니라 말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작가의 기왕의 작품에서는 일상화된 분노를 상징하듯 등장한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지르는 발성을 사용했다. 분노도 외부와의 접속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외부와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지양하기에 분노를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들은 분노의 내지름 대신 문어체의 말투를 사용한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아버지, 군대에서 갓 제대한 아들, 비만인 중학생 딸, 치매에 걸린 집주인 할머니 등 총 네 명인데, 사회와의 접속 빈도수에 따라 문어체적인 말투의 양상이 각기 다르다. 돈을 내지 못해 일찍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한 딸이 가장 두드러지게 문어적 말투를 사용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까지 사회와 접속한 아들이 문어적 말투가 아닌 일상의 어투로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아버지가 있다. 대화방식에 있어 문어적 어투의 설정과 함께 그 양상에 있어 인물마다 미묘한 차이를 둔 점은 흥미로운 선택이었다.

집의 형체만 사라진 게 아니다. 악랄한 집주인도 사라졌으며, 철거의 위협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집주인과 동거를 한다. 집주인은 치매에 걸렸기에 돈으로 이들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세입자들은 쫓겨날 걱정 없이 이 집에서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이들에겐 어떤 미래도 없다. 법에서 유리된,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상 이들에게 나은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현 상황에서 더 악화만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단,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서 연민은 느낄 수 없었다. 이는 아들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말하기에는 군대를 갓 제대한 아들의 조건과 그 역할에 있어서 설득력을 잃었다. 세습된 가난이지만 아들은 이 세습을, 이 남루함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노력은 부재한 채 그릇된 사회 구조만 체화한 인물이 아들이다. 무능력한 인물이지만 작품 내에서 일말의 사회와의 부딪힘을 보였다면 인물과 작품을 대하는 연민과 공감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설득과 공감은 증발된 채 지금/여기의 집에 대한 문제의식만이 1시간 40분 동안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이 반복의 지루함을 털기 위해 극적 공간을 무대 뒤편으로 잠시 확장한다. 새로운 시각과 국면이 제시되기를 기대했으나, 극적 공간만 새로워졌을 뿐 무대 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반복된다. 그리고 더더욱 아쉬운 점은 작품이 제출한 문제의식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집에 대한 불안, 가족의 해체, 탈출구 없는 미래 등 익숙히 봐왔던 주제들이다. 물론 문제의식이 새로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전달 방법과 형식만큼은 반복이 아닌 새로워야 하지 않을까. 이는 전작과의 비교에서도, 본 작품의 진행 방식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특별히 진전되는 상황 없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봐야 했을 때의 피로는 생각보다 컸다. 이 피로가 누적될 즈음, 가족은 자신들을 피곤하게 했던 치매에 걸린 집주인 할머니를 집에 묻는다. 이 충격적 상황이, 사고를 흔들기에 충분한 이 극적 상황이 앞서의 누적된 관극의 피로로 인해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빨간 여자>에 대한 모 웹진의 별점이 흥미롭다. 전문가의 평점은 높으나 일반관객의 평점은 별로 좋지 않다. 이 간극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접 체현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그래서일까. 이 반복된 이야기를 새롭게 구현하려는 무대와 이를 잘 전달하려는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작가의 전작과 비교했을 때, 이번 작품에서 빤한 은유가 사라진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진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집에 대한 얘기는 이제 충분히 한 것이 아닐까. 만약 집에 대해 다시 말하고 싶다면 좀 더 새로운 시각과 구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이쯤에서 무대에 다른 소재와 주제를 제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직 이야기가 궁금한 작가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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