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재, 양립의 가능성
–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
정명문(연극평론가)
원작 : 주요섭
작/작창/예술감독 : 이자람
연출/드라마터그 : 박지혜
단체 : 판소리만들기 자
출연 : 이승희, 김소진
연주 : 김홍식, 이향하, 신승태
공연일시 : 2014.11.20~2014.11.23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극일시 : 2014.11.22 pm 6:00
‘전통의 현대화’는 연극계의 오랜 숙제였다. 전통양식에 대한 시각도 다양한 실험과 논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를 반영하는 작업을 바라보는 전문가와 관객의 반응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통극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관객들이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래는 이질적인 양식의 결합을 ‘퓨전’이라 일컬으면서, 현대극에 전통적 감각을 가미하는 형태도 발견된다. 창작자와 관객이 ‘전통’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에 따라 소통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의 공연방식은 판소리와 연극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품의 외형은 소리꾼이 아니리와 창으로 이야기를 풀고, 고수가 박자와 추임새를 하는 판소리이다. 하지만 소리꾼은 화자와 등장인물을 확실히 구분하여 연기하기에 1인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청아한 소리로 한을 풀어내는 방식 외에 시대를 반영한 연극적 기법들은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이는 기존 작품이 아닌, 단편소설을 판소리 표현방법들로 풀어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주요섭의 단편소설 두 편은 근대의 하층 여성을 다룬다. <추물>의 언년이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비난을 받지만,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노력한다.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된 그녀는 아이가 아름답게 태어나 세상에 복수하길 꿈꾼다. 하지만 아기는 본인과 꼭 닮아있다. 언년은 절망감에 아이를 질식시키다가, 자라면 외모가 나아지지 않을까란 희망으로 아기를 보듬는다. <살인>의 우뽀는 가난 때문에 보리 서 말에 팔린다. 그녀는 몇 번의 팔림 끝에 중국 상해의 창녀촌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우뽀는 우연히 보게 된 K씨를 사모하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위해 악독한 포주 할매를 죽이게 된다. 언년이와 우뽀의 삶은 외모지상주의, 강간, 가난, 매춘, 살인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90여년이 지났는데도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환경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꾼의 호흡에 따라 전달되면, 관객들을 웃고, 한숨 쉬고, 눈물짓는다. ‘어단성장’(語短聲長; 노래할 때 낱말은 빨리 붙이고 소리는 길게 냄, 판소리 용어)에 유념한 발음, 의성어와 의태를 활용한 재담과 같은 판소리의 미덕도 찾아진다. 혹은 예전 판소리는 이런 방식으로 놀았을 것이란 상상도 가능케 한다. 이렇게 ‘판소리’가 우리 시대와 가까운 서사와 공연 방식을 흡수하면서 관객들이 어렵지 않게 즐기게 한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재미있는 것은 <추물>과 <살인>을 표현하는 기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추물>은 소리꾼이 해설과 등장인물을 역동적으로 넘나들며 풍자와 해학을 느끼게 하고, <살인>은 소리꾼이 우뽀의 감정을 통해 비장미를 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휴식시간을 사이에 두고, 소리꾼과 무대를 다르게 하여 호흡과 분위기를 전환한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끼게 하는 연극적 연출인 셈이다. <추물>의 원작은 가벼운 문체와 대화를 통해 생동감을 드러내었다면, 판소리<추물>은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소리꾼의 명랑한 연기가 덧붙여져서 한스러울 수 있는 언년이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한 것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뽀의 고단함이 강조되었고, 소리꾼 역시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극단의 ‘한’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판소리 <살인>은 우뽀의 의식은 명확히 드러나지만, 1차적인 감정토로에 치우치는 한계가 노출되었다. 세심한 감성 표현으로 인해 무대화할 상상력이 부족해진 것이다.
<판소리 단편선 : 추물/살인>은 ‘판소리의 현재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였다. 이를 통해 양식의 미덕과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함이 드러났다. 소리꾼의 소리가 보이기 위해서 판을 다양한 소리로 채우고, 기본적인 분위기를 잡아준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3명의 고수를 두어 북, 장구, 꽹과리 외에 아코디언, 템버린, 타악기로 밴드의 일면을 가져온다거나, 소리꾼이 모던가요를 맛깔나게 불러 설레임과 흥청거림을 표현하였다. 또한 간단하지만 상징적인 무대와 조명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확실히 드러내었다. <추물>은 하얀 병풍과 노랑 저고리, 밝은 조명으로 <살인>은 빨간 병풍과 청록색 치마 자락과 검붉은 조명으로 각각의 감각을 적절히 표상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무대방식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해주면서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힘 있는 서사의 발견도 중요하다. 다양한 매체로 전환되는 현 시대에 관객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노력들이 뒷받침되어 하는 것이다.
주요섭은 ‘사회에 억압된 여성의 우울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변화와 자각을 꾀했다. <판소리 단편선 : 추물/살인>은 판소리의 양식과 현대적 무대화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전통의 현재화, 서사의 깊이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 작품은 분명 성과를 보였다.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현재화된 판소리가 앞으로도 많이 개발되었으면 한다. 판소리 만들기 자의 행보가 기대된다.
(사진 출처: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