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 우수진

역동하는 오브제, 육체의 시학

– 셰익스피어 작, 펠릭스 알렉사 연출의 <리처드 2세>-

우수진 (연극평론가)

작: 셰익스피어
번역: 강태경
윤색: 한현주
연출: 펠릭스 알렉사Felix Alexa
단체: 국립극단
공연일시:  2014. 12. 18-28.
공연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극일시:  2014. 12. 20. 토 3시공연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었던 2014년을 <맥베스>(이병훈 연출)와 <노래하는 샤일록>(정의신 연출), <템페스트>(김동현 연출)로 풍성하게 열었던 국립극단은 이제 <리차드 2세>로 이제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봄 시즌의 셰익스피어와 달리 <리차드 2세>는 루마니아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를 특별히 초청하여 국내 초연으로 제작되었다.

연극은 무명옷의 소년이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시작된다. 아직 어두운 무대 안쪽에는 배우들이 검은 조각상의 타블로를 이루며 서있다. 소년은 말없이 앞무대 중앙의 바닥에 앉아 종이배를 접기 시작한다. 소년은 완성된 종이배를 장난스레 머리 위에 얹어본다. 하지만 종이배는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소년이 일어나면 비로소 무대 뒤편에 조명이 들어오고, 소년과 배우들의 타블로 사이에 놓여 있던 샤막이 서서히 걷힌다. 무대로 걸어들어가는 소년의 손길이 무심히 어느 배우에 가닿는 순간, 죽은 조각상들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 “덕망 높은 랭카스터 공작이시자 연로하신 내 숙부님 곤트의 존 경, …” 그는 바로 연극의 주인공인 리차드 2세이다.

소년의 종이배 왕관, 종이배 왕관의 덧없이 미끄러짐. 소년의 프롤로그는 연출의 의도를 처음부터 명확히 보여준다. 장난감 종이배와 같은 왕관, 그것이 상징하는 권력은 결코 절대적이지도 견고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장난스럽고도 허무하게 몰락한다. 그리고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는 소년의 극중극이라는 연출적 장치를 통해 <리차드 2세>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재현하기보다, 리차드 2세라는 한 인간의 꿈이나 회상, 또는 그의 연극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권력, 그 임의와 폭력  
“이런 것이 왕의 힘이구나”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무대앞 양쪽에는 존 숙부의 아들 헨리 볼링브루크와, 그의 고발을 당한 노포크의 공작 토마스 모브레이가 대치하고 있다. 그리고 명예가 걸려 있는 일촉즉발의 결투를 앞둔 이들의 위험한 칼끝 사이에서, 리처드왕이 칼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지긋이 누르며 초연히 서있다.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는 결투의 의지를 강력히 밝히지만 리차드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단칼에 중재한다. “그만! 짐은 명령할 뿐 부탁하지 않는다.” 그리고 볼링브루크에게는 십년간의 추방을, 그리고 모브레이에게는 평생의 추방을 명령한다. 숙부의 눈물을 보고 4년의 추방을 감해준다는 리처드왕의 말에 볼링브루크는 실감한다. “네 번의 지루한 겨울과 네 번의 변덕스런 봄이 말 한마디에 스러지는구나. 이런 것이 왕의 힘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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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힘’은 둘 중 하나의 목숨을 구했다는 점에서 선한 듯하지만, 실상은 어디까지나 임의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속성은 무대 한복판을 차지하고 서있는 거대한 볼링핀과 볼링공을 통해 극명하게 가시화된다. 리처드왕은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 사이의 언쟁을 들으며, 중간중간 볼링공을 굴린다. 무심하게 장난처럼 굴러다니는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들은 속절없이 쓰러지며, 주위의 대신들은 왕이 쓰러뜨린 볼링핀들을 세우기에 바쁘다. 단 하나의 볼링공 ―즉 리처드왕― 을 제외한 볼링핀들은, 실상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대신들과 같은 신세일 뿐이다. ‘볼링’핀 신세가 된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라는 은유에는 연출의 재치가 엿보인다.

권력의 본질은 지극히 임의적이고 폭력적인 데 있지만, 권력은 바로 그것에 의해 몰락한다. 리처드왕은 충분한 국고의 준비 없이 아일랜드와의 전쟁을 감행하고, 전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죽은 존 숙부의 재산을 몰수하여 볼링브루크의 상속권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평민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세금과 벌금을 부과한다. 그리고 이같이 연이은 왕의 실정(失政)은 왕권의 몰락을 재촉하여, 귀족들은 상속권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볼링브루크와 지체없이 합세한다.

 

권력과 죽음, 그 무상과 자기반성
“…그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여느 비극이나 역사극이 통상 주인공의 몰락/죽음과 함께 끝난다면, <리처드 2세>에서 리처드왕은 비교적 이른 시점에서 몰락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리처드왕의 몰락 자체보다, 몰락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처드왕이 몰락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 마침내 삶/권력의 무상과 자기반성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선다.

리처드왕이 절대 왕권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저 험하고 거친 바다의 물을 다 쏟아 부어도 신이 내린 왕의 이마에 새겨진 성유를 지우지 못하고, 속세의 인간 어느 누구도 지상을 다스리는 신의 대리인을 보좌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한다”고 자신하던 리처드왕은, 사태를 파악한 후 폐위당한 왕들을 노래하며 “…이 텅빈 왕관 속에는 죽음의 신이 다스리는 궁정이 있지. 거기 광대 하나가 죽음의 보좌에 앉아 막간극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나라를 주무르고 온갖 영화를 누리지.”하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한다.

인식과 실감의 간극은 그러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플린트 성 앞에서 마침내 왕위를 볼링브루크에게 양도해주기까지 리처드왕은 다양한 국면을 거친다. 처음에는 아직 몸에 익은 사자왕의 당당한 위엄을 보여주지만, 곧 폐위의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한편, 그로 인한 굴욕과 슬픔 역시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걸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대의 것은 그대 것이오. 나도 그대 것이고 모두가 그대 것이지. 그대가 원하는 것을 내가 주겠소, 기꺼이. 힘으로 밀어붙이는데 내가 어찌할 수 있겠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왕은 마치 장난감을 양보하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볼링브루크에게 넘긴 왕관을 꼭 부여잡고 차마 놓지 못한다. 신성화된 왕권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은 실상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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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왕이 볼링브루크에게 건넨 얼음 속에 놓인 왕관은 권력에 대한 연출의 비전을 잘 보여준다. 차갑고 단단한 얼음 속에 확고하게 들어있는 왕관/권력을, 볼링브루크는 받자마자 땅바닥에 내리쳐 얼음을 깨뜨리고 왕관을 취한다. 얼음 왕관은 얼음이 깨어져야만 왕관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양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얼음이란 결국 깨지고 녹아버린다는 점에서 볼링브루크가 받은 왕관/권력 또한 위태롭고 불안정한 것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얼음은 이제 리처드왕의 눈물이 되어 무대 위에 넘친다. 모든 것을 넘겨준 왕이 런던으로 향하는 길에 왕비를 만나는 장면은 아마도 이 연극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될 것이다. 흐르는 물 위에 리처드왕과 왕비가 말없이 그러나 격렬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끌어안고 키스하고 넘어지는 장면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지난날과 앞날에 대한 회한과 비통을 온몸으로, 그 어떤 대사 이상으로, 애절하게 표현해주었다.

폼프렛성에 갇힌 리처드왕의 장면에서 왕의 긴 독백은 무대 위를 가득 메운 하얀 종이배들과 무대 밖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어우러진다. 리처드왕은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갇힌 이 감옥을 세상이라 생각해볼까?” 리처드왕의 곁에는 이제 소년이 함께 한다. 그리고 삶의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 점점 깊어갈수록, 암살자인 엑스턴과 함께 죽음 역시 서서이 깊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칼에 찔리는 순간 쓰러지는 리차드왕은 소년의 품에 안긴다. 죽어서 저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했던 리처드왕의 영혼은 이제 소년 ―아마도 어린 리차드― 의 품으로 귀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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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번역, 그 불가능의 꿈

번역극에서 언제나 가장 아쉬운 것은 언어, 특히 시적인 대사 언어이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번역극에서 셰익스피어의 대사 언어가 지니는 무운시의 아름다운 형식미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무대 언어를 통해 대사 언어의, 때로는 그 이상의 시성(詩性)을 구현해낼 수도 있다. 이번 <리처드 2세> 공연에서도 종이배와 얼음, 물, 거울, 볼링핀과 볼링공, 자갈, 바위 등등의 오브제들은 그 자체가 풍부한 시적 은유와 상징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 대사 자체의 풍부한 비유와 상징들이 배우들의 빠른 대사로 인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무운시로 된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무대 위에서 실제 일상어보다 몇배 이상 빠른 속도로 말해지며, 그럴 때 무운시 자체의 음악성도 살아난다고 한다. 그러나 내재율이 발달한 우리말의 비유와 상징은 빠르게 쏟아지는 대사 속에서 관객들에게 충분히 만끽되기 어렵다. 벤야민의 통찰과 같이 이는 결국 번역의 ‘모이라(moira)’인 것이지만, 그것의 극복과 초월에 대한 꿈꾸기 역시 모든 연극인과 관객들의 정당한 ‘모이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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