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자전거/ 백승무

* 본고는 <<공연과 이론>>(2014년 겨울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김현탁의 <자전거>: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극작: 오태석
연출: 김현탁
극단: 성북동비둘기
상연일시: 2014.10.01~10.12
상연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소극장
관극일시: 2014.10.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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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탄생

지난 11월 23일 <K팝스타4> 1라운드에서 이진아 양의 노래가 끝나자 세 명의 심사위원은 기겁을 했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그루브, 만화영화 성우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앳된 보컬, 귀에 익숙하지 않은 톡톡 튀는 건반진행! 셋이 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 안 어울리는 조합이 모여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게 나오네요!
– 황홀경에 빠진 거 같아.
– 이거 뭐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야.
– 실제로 우리보다 잘하잖아.
– 훨씬 잘하지!
– 우리보다 잘하는 사람을 어떻게 심사해.
– 아, 대박이다. 4년 통틀어 실력은 최고야.
– 음악성으로 따지자면 그래. 그동안 우리가 모르는 음악을 한 사람이 있었냐고?

심사 후 인터뷰는 더 가관이다. 박진영의 말이다. “저랑 희열이랑 음악인생에 회의를 느꼈어요. 희열이도 대기실 오자마자 우리가 음악을 해야 하나, 이런 말 할 정도로.” 유희열도 못지않다. “대한민국에서 들을 음악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하잖아요. 들을 음악이 없다가 아니라, 들을 음악을 우리가 찾지 않았던 겁니다. 어딘가에 있어요. 바로 이진아 양이 그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호들갑은 마치 거대한 보석 원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유난스러웠다. 그리고 이진아의 음원은 삽시간에 포털 사이트를 ‘점령’했다. 칙칙한 지하공연장에서 인디활동을 하던 무명 가수가 한순간에 대중스타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다. 하룻밤 사이에 스타로 등극하는 이런 성공신화가 희한한 게 아니다. 신데렐라를 급조해내는 상업방송의 영악한 속셈이 마뜩찮은 것도 아니다. 필자가 주의 깊게 보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의미가 되는’ 이 독특한 가치화의 구조이다. 유명 음반기획자 세 사람의 짧은 멘트 하나로 대한민국의 음악적 취향과 기준이 바뀐 것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대중음악이 아무리 소비주기와 흥행기한이 짧아지고, 떴다 지는 별들이 발에 치일 정도라지만, 그래도 하루아침에 스타가 ‘제작’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진아는 땅속에 묻혀있던 원석이 아니라, 2013년에 음반까지 발매한 ‘낡은’ 신성이다.

우격다짐으로 스타탄생의 신화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면, 수긍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재즈, 소울, 펑크가 어우러진 독특한 리듬? 장르혼합이 새삼 새로울 것 있는가. 그리고 초짜의 어설픈 ‘뒤섞기’는 얼치기 소리 듣기 딱 좋다. 여태 들어보지 못한 희귀한 음색? 10년 전에도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진아의 코맹맹이 소리는 소아편향발성(childish like speech)에 가까운 질환성 음성이다. 예전 같으면 마이크 잡기도 전에 불합격 감이다. 그런데도 심사위원들은 “전 세계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던 음악이라 헤어날 수가 없어.”라고 아우성이다. 이토록 획기적이고 기상천외한 음악인데, 왜 여태 우리는 모르고 있었을까?

이진아의 등극은 발견이 아니라, 발명에 가깝다. 대중에게 없던 감성이 새로이 주입된다는 의미에서 이진아는 잘 만들어진 발명품이다. 또한 권위에 의해 공인되었을 때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극장의 우상’(전문가의 의견에 편승한 오도된 판단)이다. 역설적으로 예술에 있어서 ‘극장의 우상’과 발명은 그 자체로 미덕이 된다. ‘극장의 우상’을 무기로 해서 대중음악은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과시했고, ‘발명’의 전법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간하는 창업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우연의 절묘한 작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진아가 발명품으로 ‘선택’되는 과정은 철저히 우연성이 지배한다. 어쩌면 누군가를 띄우자는 모종의 사전합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진아의 음악이 끌리는 날씨거나 그런 기분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은 이렇게 늘 우연적인 끌림이나 말도 안 되는 오류, 혹은 광기어린 일탈에서 시작했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비밀이 있다.

 

홀림, 예술의 마력

저속한 예능프로의 노골적인 상업화 전략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라고 지청구를 던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시와 도외시의 대상이 순식간에 대중의 존경과 추앙의 대상으로 변신하는 이 경이로운 둔갑술은 눈여겨볼 만하다. 대중문화든 고급예술이든 대중의 감성과 선호도에 기반을 두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술에서 의미가 새로이 만들어지는 방식, 취향과 기호가 탄생하는 과정, 미답의 지대가 옥토로 개간되는 매커니즘이다. 물론 미적 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신봉하는 실재주의자라면 이런 주장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술의 가치는 수장고에 모셔진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환경에 따라 학습되고 길들여지는 구성물이다. ‘아름다움’은 미적 대상의 고유한 자질이 아니라, 수용주체의 주관적 체험에 의해 형성된 기호품인 것이다. 인간 일반이 갖는 공통감(Gemeinsinn)을 통해 미적 판단이 보편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칸트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편성이 시대의 감각구조(레이먼드 윌리엄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사회와 문화의 변동에 따라 수시로 몸을 바꾸는 유동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무미건조하고 유치하며 ‘엽기적인’ 하나의 취향이 시대적 주류감성을 대표하는 유희열과 박진영의 음악세계를 능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류음악은 주변부의 독특한 취향을 자양분으로 해서 자신의 몸을 키운다. 유희열과 박진영이 이진아가 자신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극찬하는 것, 즉 주류음악이 자신의 살점을 잘라내, 여리고 무른 애송이를 포육하는 것은 중심부의 자신감과 자기애의 발로이다. 중심부의 결함과 결핍을 인정하고 차집합과 여집합을 합집합으로 포용하는 이 개방성과 유연성을 배워야 한다.

예술은 학문과 달라서 지식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으며, 스포츠와 달라서 강한 힘이나 정교한 기술로 재단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술에는 심판도 없고 한판승부도 없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추앙과 열광의 형식이다. 예술은 주체(예술가)의 자기현시보다는 객체(음미자)의 평가(판단력)에 의해 추인된다. 이것은 예술의 숙명이다. 이진아 신화는 대중적 판단력의 가공할 힘과 그 판단력에 미치는 전문가의 역량이라는 취향생산 매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대중의 열광이 없을 때, 전문가의 조력이 없을 때, 예술은 시시한 유흥에 불과하다. 대중은 동기부여가 되면 열광의 제스처를 취한다. 새로운 취향에 의미부여가 되면 대중은 예술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된다. 대중은 새로운 미적 가치를 제시하는 자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조력자를 기다리고 있다. 전문가가 ‘결심’하면, 대중은 움직인다는 이 교묘한 극장의 우상은 원래 연극의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 연극계의 비극은 극장의 우상이 정작 ‘극장’에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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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의 존재의미

주류의 바깥에서 새로운 미적 가치를 생산하는 전사가 바로 아방가르드(전위)이다. 예술의 역사를 보면, 중심부는 항상 전위와 컬트, 아류(epigonen)라는 세 종류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고, 주류는 이들과의 생산적 길항관계를 통해 자기운동을 전개해왔다. 이 세 가지는 중심부의 몸통을 호위하는 완충지대이자 주류의 고상함과 심미성을 떠받쳐주는 하천습지와도 같았다. 특히 전위는 주류 예술의 진화와 발전을 선도하는 추동력이자 핵심 영양공급원이었다.

오늘날 예술의 지배구조도 다르지 않다. 전위가 길을 뚫으면 주류예술이 그 길을 밟고 지나간다. 전위는 늘 앞에 있다. 전위는 뒤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완성을 넘보지도 않고, 제 몸 성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전위는 총탄이 날아오면 먼저 맞는 자이고, 가시덤불을 만나 먼저 넘어지는 자이다. 한마디로 그는 ‘쓰러지는 운명’이고, 쓰러져 소진되는 밀알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의 뒷모습과 포연 자욱한 전장에 나뒹구는 그의 몸뚱이다. 전위는 두려움과 무지의 암막을 뚫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자다. 우리가 할 일은 그의 몸을 밟고 진탕을 건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짓이겨진 시체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아간 거리와 넓어진 영토를 기억할 뿐이다. 전위는 그렇게 불쏘시게다.

우리는 과연 전위를 밟고 갈 용기가 있는가? 전위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진보할 능력이 있는가? 전위는 몸의 진보, 세포의 진보, 감각의 진보를 실천하는 자이다. 머리로 하는 이론적 진보가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진군하는 실천적 진보이다. 정치적 진보를 외치며 예술적 보수를 자행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머리는 진보인데, 예술은 고루하고 낡아빠진 허릅숭이는 지천에 널려있다. 예술은 구호나 도구가 아니다. 전위의 길을 통해 진보할 수 있는 자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이다. 전위에게 살점을 떼어줄 수 있는 자기애적 헌신만이 주류예술가의 자격이 있다.

전위의 전리품을 자기화하고, 자신의 낡은 몸통을 과감히 내팽개칠 때 예술은 발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자기 배반의 역사이다. 예술은 이전 경향과 사조를 거부하고 파괴하면서 진보한다. 개체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보적 예술가는 이전 작품에 어깃장을 놓음으로써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키는 자다. 혹자는 전위의 반예술적 파괴성과 비논리성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예술은 의미를 전달하는 정합적인 체계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예술의 모방대상인 역사나 현실은 정합성보다는 임의성과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그 형식 자체의 힘으로 세계에 일정한 합법칙성과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환상을 부여할 뿐이다. 진실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오류를 통해서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헤겔식 궤변(?)을 신뢰한다면, 예술 또한 반예술적 오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위대한 예술은 말도 안 되는 실수나 정신 나간 일탈에서 시작하거나, 반예술적 오류의 공인을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우리는 전위를 포육해야하고, 전위와 몸을 섞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위대한 공연은 전위를 거쳤거나 전위에 다가가는 순간 탄생한다. 새로운 감각에 열린 몸, 관습에 저항하는 민감한 피부, 파괴와 변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근육만이 연극의 침체를 극복할 처방이다.

 

생성의 운동 0

김현탁의 <자전거>를 옹호하기 위해 무척 먼 길을 돌아왔다. 취향이 탄생하는 과정과 예술이 진보하는 원리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김현탁을 둘러싼 부정적 견해들, 예를 들면, 어렵다, 난해하다, 비논리적이다 등의 의견이 미적 판단과는 무관한 인식론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부재한 취향을 선보인 연출가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반드시 필요하다. 전위를 긍정하는 것은 김현탁을 승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도 하다.

김현탁은 우리시대의 유일한 전위이다. 고유한 미학과 방법론을 지녔다는 점에서 ‘유일한’의 수식어는 과장이 아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유일한 전위’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고의 전위’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이미지를 중시하며 ‘생성’의 드라마를 추구하는 그의 미학은 20세기 초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방가르드의 본고장에 유학을 다녀온 많은 해외파 연출가들 중 아방가르드의 역사성을 재구해내는 연출가가 희박한 현실을 볼 때, 자생적 아방가르드가 가능함을 증명한 김현탁의 고군분투는 기이하면서도 신통하다. 게다가 <자전거>에 와서는 그의 연극문법이 탐미적 언어유희와 자기폐쇄적 형식실험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소통과 대중적 교감의 지평까지 뻗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육체적 자극의 강렬함 못지않게 역사적 진보라는 목적의식까지 포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는 김현탁의 실험정신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연출세계가 모종의 진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추론하게 만든다.

<자전거>는 텍스트의 해체에 있어서는 확실히 이전 작품들을 능가한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탈맥락화 하는 기술이나 텍스트의 순서를 뒤죽박죽 뒤섞고 자의적으로 취사선택·조합하는 기법은 어느 작품보다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서사의존과 관습집착이 강한 우리의 구태의연한 습벽은 <자전거> 앞에 고스란히 무장해제 된다. 쥐고 있던 걸 놓아야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듯이, 편견과 아집을 버릴 때 우리는 김현탁을 포착할 수 있다. 김현탁의 작업방식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이지 텍스트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원작 텍스트의 완결성을 훼손하지 않고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배송방식만 색다르게 바꾸는 것은 김현탁의 일이 아니다. 김현탁은 원작 텍스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전해주었으며, 어떤 감흥을 일으켰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탐구하는 자이다. 그는 텍스트를 해체하기보다는 생산하는 사람이고, 의미를 파괴하기보다는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가 해체시킨 원작 텍스트는 비어있는 공허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적 의미로 채워지는 역동적 생성의 공간이다. 파괴의 폐허를 볼 게 아니라, 그 빈 공간으로 육박해오는 생성의 소용돌이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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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의 운동 1

김현탁이 시도하는 텍스트 해체는 첫째, 기표와 기의의 관계(혹은 기호와 사물과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왜곡시키는 의미론적 차원의 변형을 꼽을 수 있다. 텍스트의 기표들은 기의를 연상시키기 위해 호출되고, 기호는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동원된다. 예를 들어, ‘자전거’라는 기호는 두 바퀴로 움직이는 자전거를 떠올리게끔 사회적으로 약속되어있다. 하지만 김현탁은 그런 자동화된 관습을 수용하지 않는다. 예술 외부에서 맺어진 약속은 비예술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대상 종속성(기호는 항상 지시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이 사회적 규율이라면, 예술은 대상(지시체)에 저항하는 기호를 만들어낸다. 예술적 언어격률은 일상적 언어격률을 위반할 때 독립적 존재근거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장도, 맥락도, 상황도, 사건도, 희곡 자체도 자신의 외부를 지시하지 않는다. 언어와 텍스트의 자족성은 전위의 존재증명과도 같다. 전위는 예술의 독립공화국을 꿈꾼다. 기호와 지시대상과의 관습적 결합을 해체시키는 김현탁의 전략은 파괴 자체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파괴의 충격을 통해 인식적 시련 상태에 빠뜨린 다음, 김현탁은 새로운 의미의 결합을 시도한다.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는 몽타주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성형수술 장면이다. 원작 「자전거」는 낭자한 피와 찢겨지는 살의 육체적 이미지가 강렬한 파토스를 뿜어내는 작품이다. 사람의 배를 마구 찢어대는 돌팔이 의사 친구, 사금파리로 얼굴 그어대는 당숙, 죽창이 꽂힌 황석구의 허벅지, 암매장된 처녀, 밀도살 당한 소의 피,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망하는 솔매녀, 피가 질퍽거리는 윤서기의 손 등 훼손당하는 살갗과 피범벅이 된 희생자의 이미지가 수시로 중첩된다. 끔찍한 신체훼손, 그리고 외상없이 42일 동안 두문불출하는 사건이 결합하면 성형수술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단어 차원의 의미론적 변형작업은 때로는 환유적 언어유희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환유는 대상과 인접한 속성을 매개로 대상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수사법인바, 그 환유적 이미지를 연쇄시키면 제3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윤서기는 한씨가 선물하는 더덕을 뇌물이 아닐까 걱정한다. 뇌물은 경찰과 범죄자의 구도를 떠오르게 하고, 순사였던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돌팔이 의사 동창을 신고하고, 불법 소 도살꾼을 잡으려는 윤서기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범죄자와 순사의 구도는 도둑과 경찰이 나오는 채플린의 무성영화 <경찰>(1916) 장면과 연결되고, 채플린 이미지는 다시 독재자 히틀러를 그린 <위대한 독재자>(1940)로 이어지고(독재자의 실루엣에 치를 떠는 소녀를 기억하라!), 독재자 이미지는 정권교체의 염원(선거운동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전거와 영사기는 형태적 유사성을 가진 은유체이고, 영사기는 과거의 시각적 이미지를, 자전거는 윤서기의 기억을 복원시켜준다는 차원에서 기능적 유사성까지 가지고 있다. 흑백영사기는 흑백영화를, 흑백영화는 당연히 찰리 채플린을 떠오르게 한다. <경찰>을 통해 할아버지를 빼다 박듯 닮은 윤서기의 ‘순사스러움’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일본제국주의와 독일제국주의를 결합시킨 후,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세월호 국면의 추악한 권력상을 조롱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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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의 운동 2

둘째, 단어의 결합체로서 문장의 완결성을 파괴하는 통사론적 차원의 변형은 독일어 통역 장면에서 코믹하게 나타난다. 냉전체제의 희생물이었던 6.25동란은 분단 경험을 가진 독일의 역사와 연결되고, 거위집으로 입양된 솔매집 남매들의 처지는 독일로 입양된 한 남매의 상황과 정확히 겹쳐진다. 친구들의 따돌림과 양부모와의 갈등을 겪는 동생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말하는 누이는 동생에게 가출하라고 다그치는 거위집 언니와 일치한다. 하지만 독일 입양아의 문장은 전혀 엉뚱한 한국말로 뒤바뀐다. 출발어와 도착어의 상응관계가 파괴된 엉터리 통역은 언어 간 번역불가능성(untranslatability)을 넘어 통사적 결합체(문장)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드러낸다. 번역불가능성은 번역이 의미와 의미간의 등가교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로운 의미생산 활동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연출가가 텍스트를 행위로, 희곡을 연극으로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정확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 극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극작가의 텍스트가 있다면, 연출작가의 텍스트도 분명히 존재한다. 연출가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후자이다.

 

생성의 운동 3

셋째,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관객)의 수용상황을 교란시키는 화용론적 차원의 변형은 원작 텍스트 위에 세월호 참사라는 현실의 텍스트를 개입시키면서 이뤄진다. 원작 <자전거>의 윤서기는 결근계 작성(현재)을 위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고, 관객은 윤서기의 현재를 통해 과거의 등기소 사건을 추적해나간다. 현재의 필요성에 의해 과거를 상기하는 것, 그리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재해석하는 것이 원작의 주된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김현탁은 원작 <자전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자이다. 그는 원작 텍스트 안에 위치한 게 아니라, 관객들이 위치한 텍스트 밖에서 텍스트를 사유한다. 텍스트 밖에서 관객들의 현재를 예술화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위적 실험은 의미심장한 진화를 성취했다.

김현탁의 윤서기는 원작을 뛰쳐나온 인물이다. 관객들은 윤서기를 통해 원작 <자전거>와 김현탁의 <자전거>를 동시에 본다. 윤서기의 기억회복 프로젝트가 솔매집 화재와 등기소 화재를 결합시키는 과정이라면, 김현탁의 기억회복 프로젝트는 원작 「자전거」를 세월호 사건과 결합시키는 과정이다. 관객들은 윤서기의 프로젝트를 해석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 개입된 김현탁 프로젝트를 교차적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나가”란 외침은 입양아의 것, 솔매집 큰딸의 것인 동시에 세월호의 그것이다. 나 살자고 혈육을 죽인 자라는 차원에서 당숙과 큰딸이 동일범이라면, 세월호 아이들을 죽게 만든 우리들의 탐욕 또한 응징받아 마땅하다. 사금파리로 얼굴을 긋는 당숙처럼 큰딸도 수없는 ‘성형수술’을 해야할 것이다. 성형수술 공화국에 거주하는 우리들도 매일 같이 얼굴을 긋는 사람들이다. 세월호 참사라는 비예술적 사건을 예술의 문법으로 사유하는 김현탁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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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만가, 애도가

영사기에서 나온 원뿔형 빛은 세월호의 형상을 은유한다. 세상을 넘어서는(世越) 배이지만, 아이들은 결국 세월호를 벗어나지 못했다. 등기소에서 죽은 주민들, 솔매집에서 치명적 화상을 입은 어머니, 독일가정에 갇혀버린 입양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기억이다. 반복되는 역사와 사랑의 상실, 고통스러운 기억을 키워드로 해서 반복적인 후렴구를 가진 <붉은 노을>이 나온다. “난 너를 사랑해 / 이 세상은 너뿐이야 / 소리쳐 부르지만 /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솔매녀가 “연지야, 집에 가라”고 외친다.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란 의미이다. 큰딸이 “왜 소리도 없어?”라고 외치지만, 솔매집은 그저 붉게 탈 뿐이다. 그리고 “연극반,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란 세월호 소녀의 외침이 나온다.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사내들… ‘저 대답 없는 노을’은 팽목항의 저녁이다. 연가는 사랑의 표현이자 기억의 형식이다. 사랑을 파괴하고 기억을 막는 자들에게 연가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붉은 노을>은 저항을 상징화하는 몸부림이다.

저항의 몸부림을 기억의 맹세로 변주한 것이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이다. “소중한 기억 속으로 접어들”어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가버린 흐린 기억속의 그대 모습 떠올리”는 제의가 대단원을 장식한다. 노래 중반까지 배우들은 세월호(를 상징하는 원뿔형 광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사기 조명이 꺼지는 순간(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세월호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대와 객석은 같은 빛을 받는다. 배우는 배역에서, 자전거 탑승자는 ‘노동’에서, 관객들은 어둠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기억의 제의는 해방의 제의로 승화되는 것이다.

 

빛과 기억의 진혼곡

김현탁표 <자전거>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공연형식 속에 공연내용을 담고, 공연내용 속에 공연형식을 주조하는 다의적 무대설정에 있다. 자전거는 제목이자 소재이며, 주제이자 내용이고, 표현형식이자 표현대상이다. 이런 중층적 의미의 두께를 과시한 상징물이 대학로에 있었던가? 내용과 형식, 개념과 표현이 이처럼 육중한 의미의 겹을 두르고 시각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리 연극계의 쾌거이다.
원작의 자전거는 윤서기의 기억회로를 복원하는 도구이자 사라진 ‘과거’를 굴려 ‘현재’의 회전력을 회복하는 동력이다. 후륜과 전륜의 두 바퀴는 다르면서 같은 모양이고, 체인으로 결합되어야만 가동되는 하나의 몸체이다. 멈추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뒤쳐진다는 점에서 자전거는 구르는 존재이며 굴려야 하는 존재이다. 원작에서 구현된 이원성의 상징구조(윤서기와 구서기, 과거와 현재, 가해자와 피해자, 죄와 벌,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 삶과 죽음, 가상과 실재)는 김현탁에 와서는 예술과 현실, 텍스트와 세계, 희곡과 공연, 작품과 관객으로 확장되고 있다. 김현탁은 원작을 후륜으로 하여 공연이라는 전륜을 전진시키고, 텍스트의 정보를 현실 세계의 이미지와 연계시키며, 작품에 관객이 개입하는 양상을 이원적으로 구조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공연의 조건과 연행의 방식도 철저히 자전거의 원리에 입각한다. 자전거를 돌리는 관객의 노동력은 <자전거>를 구현하는 동력(조명제공)이다. 자전거를 돌림으로서 발생하는 기억회복이라는 편익은 영사기를 돌림으로서 재현되는 영상으로 등치된다. 윤서기와 구서기의 가상적 체험이 구술에서 구연으로 전환되는 존재론적 변환이라면, 문자텍스트(희곡)가 배우의 행위(연극)로, 그리고 영사기의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는 구도는 2차원적 텍스트가 3차원적 텍스트로 활인화되는 인식론적 변환을 보여준다(배우의 행위는 입체화된 영화인 것이다). 특히 흑백영화의 영사기와 자전거가 맺는 은유적 관계는 눈부시다. ‘빛을 쏘는 bicycle’이 영사기라면, 윤서기 자전거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연이의 모습(원작에서 황석구의 태극기 장면을 재현하는 장면)은 역사/과거를 재현하는 영사기로서 자전거의 은유를 정확하게 시각화한다. 자전거와 영사기의 은유적 관계는 필연성과 인과관계로 확장된다. 즉, 우연적으로 선택된 은유는 굴려야 작동한다는 인과관계로, 그리고 굴리는 숙명은 결국 기억이라는 성과를 산출한다는 필연성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돌리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는다는 이 절묘한 인과관계는 역사의 우연성을 예술적 필연성으로 가공하려는 안간힘이다. 이는 역사가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는 우연성을 배척하라는, 다시 말해, 죽음을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통해 역사적 진보의 필연성을 회복하라는 준엄한 명령과도 같다.

그래서 김현탁이 선택한 <자전거>의 부제는 ‘Bye Cycle’이다. 반복되는 역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결별의 선언! 잊혀지고 감춰진 것에 빛을 주고, 그 아픔을 통째로 기억하자! 동력 없이는 쓰러지고 마는 자전거처럼 동력 없이는 진행되지 않는 김현탁의 <자전거>는 빛과 기억의 진혼곡이다. 주기적인 애도 없이는 조금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잊혀지면 덧나고, 지워지면 터져버린다. 기억은 의도와 무관하게 추모의 정을 환기시킨다. 김현탁의 <자전거>는 등기소 사건과 솔매집 화재, 세월호 참사를 하나의 아픔으로, 하나의 상처로, 하나의 기억으로 묶어준다. 우리는 이렇게 진지한 애도를 본 적이 없다.

지금, 아직도, 여전히, 광화문광장에는 ‘아픔’이라는 팻말이 적힌 거대한 구멍이 있다. 나날이 그 어둠의 깊이는 무거워져만 간다. 아픔은 고통이고, 과거이고, 기억이고, 무엇보다 권력을 향한 비수이다. 우리가 발을 구를 때, 아픔은 줄어든다. 우리가 바퀴를 굴릴 때, 슬픔은 가벼워진다. 기억을 지우고, 망각을 주도하는 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자전거」가 비추는 빛은 소통이고 교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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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탁 사용법

소 뛴다고 소리치니 안채서 우루루 사람들이 뛰쳐나왔다는 황석구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마라톤처럼 지리멸렬한 냉전의 질주가 벌어진다. 10분 이상 이어지는 고강도 체력전은 약육강식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20세기의 참혹한 역사를 지시하는 기표이다. 세상은 전쟁터라는 은유에 대한 실감나는 도상이지만, 배우 혹사라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탁을 옹호하자면, 언어로, 논리로, 추상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것, 강렬한 육체적 이미지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엄존한다는 것이다. 언어/이성중심주의가 도달할 수 없는 감각의 성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언어체계 내부에서 그 상응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마라톤 장면은 일종의 ‘부유하는 기표’(floating signifiant)이다. 몸과 감각은 알고 이해하지만, 언어적으로 딱히 규정할 실체가 없는 것! 사실 김현탁에게 세월호 참사는 그 자체로 이미 ‘부유하는 기표’이다. 숨을 탁 막히게 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충격 앞에 우리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라는 표현은 결코 그 충격과 아픔의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만큼 거대한 언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라는 부유하는 기표를 대체한 김현탁식 표현은 세월호 소녀의 대사, “다들 사랑해.. 정말로.. 아 진짜 진지하게. 진짜 사랑해. 우리 진짜 죽을 거 같애. 진짜로.. 배 기울고.. <…> 애들아, 진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 얘들아… 연극부 사랑해..”이다. ‘진짜’를 남발하는 소녀의 대사는 불타는 솔매집을 보며 제대로 말을 못하고 연신 ‘엄니, 아이고 엄니’를 되뇌는 큰딸의 절규에 대한 김현탁식 번역이다. 세월호 소녀의 대사는 기표 그 자체이다. 그것이 지시하는 기의를 우리는 이해도, 유추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충격의 규모와 정서적 강도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의 절규와 입을 틀어막는 배우의 행위는 거칠고 투박하다. 발성도, 제스처도, 타이밍도 퍼포먼스에 가까울 정도로 조야하다. 전위에게 탐미적 정교함은 사치이다. 전선에서 육박전을 치르는 자에게 우아함과 기품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연극부 사랑해”라는 부유하는 기표를 논리와 개념이 있는 텍스트 내부로 안착시키고 세공하는 것은 주류연극의 몫이다. 이것이 김현탁 사용법이다. 정형화된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연극언어와 표현기법을 마구 진열하는 것이 김현탁의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거친 땅을 일군 그 개간지에서 복스러운 열매를 길러내는 것이다. ‘연극, 사랑해’란 구호는 결코 ‘부유하는 기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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