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엄청난 ‘생존’을 지켜보면서/ 우상전

한국 영화의 엄청난 ‘생존’을 지켜보면서

우 상전(연극배우)

아마 많은 연극인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국립극단이 공연해서 화제가 되었던 ‘개구리 사건(?)’을 말이다. 이 연극을 연출한 박근형을 인터뷰해서, 그의 정치성 발언으로 인해 (근래 보기 드물게) ‘연극이 대중의 관심을 끌게 만든’ 중앙일보 문화부의 최민우 기자를 말이다.
그 최민우기자가 정치부로 옮긴 다음,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썼다. 연극계가 이를 되돌려볼 필요가 있어 여기에 그가 쓴 기사를 간략하게 옮겨 본다.
“영화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일등공신은 감독 윤제균도, 주인공 황정민도 아니다. 방송인 허지웅이다.” 그가 일간지와의 좌담에서 “(<국제시장>을 보면) 정말 토가 나온다.”고 말하는 순간, 별점 50개를 받은 것보다 훨씬 값진 ‘선전문구’를 따낸 셈이다.
그의 혹평에 일부 종편과 ‘일베’가 시비를 걸며 논쟁은 에스컬레이터를 탔고, 덩달아 ‘국제시장’의 인기도 탄력을 받았다. 만약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에 대해 보수 논객 변희재가 “역겨워 콧물이 났다”고 했으면 이토록 초라한 성적(겨우 81만 동원)으로 막을 내렸을까.
그러니 “허지웅에게 서운하다.”란 윤 감독의 말은 큰 결례다. 이제 한국영화 시장에서 1000만 관객의 전제조건은 완성도가 아닌, 사회적 논란이다.
(이 영화에 대한) 대개 소위 좌파 성향의 평론가들의 논리는 이렇다. “1970년, 80년대라면 유신, 전두환 군사정권시절 아닌가. 엄혹한 시기를 조명하면서 이와 무관한 에피소드만 나온다면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하는 꼴이다. 결과적으로 독재를 미화하거나 최소한 묵인하게 된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지금 진보가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바로 문화예술계다. 문학, 미술, 공연 등 장르 불문이며 창작자, 기획자, 평론가 등 가리지 않는다. 실제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 당원도 꽤 여럿이다.
기존 것을 타파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게 예술의 속성이기에, 문화계 인사의 진보 성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를 한번 보자. 정치인은 무식하며, 검사는 돈만 받아먹고, 재벌은 연애질만 한다. 상류층이라면 무조건 썩어 있다는 게 기본설정이요, ‘부자=악(惡)’ ‘서민=선(善)’이 공식처럼 굳어져 있다.
여기에 반정부적 트윗을 날리면 바로 ‘개념 연예인’으로 등극하곤 한다. 그러니 ‘국제시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닐까. 당사자들은 색깔 논쟁이 부담스럽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 ‘국제시장’은 분명 우파영화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한국영화는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훌륭하게 ‘생존’을 터득하고 있었다. 인도영화가 춤과 노래를 넣어 대중을 즐겁게 하여 흥행을 하듯이, 한국영화는 ‘이념’을 건드려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관객 1000만을 동원한 ‘괴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첫 장면을 이렇게 시작한다. 미군부대에서 약물을 한강에 무단 방류한 게 괴물을 만들어내는 설정으로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 것이다.
괴기오락영화가 살짝 ‘반미(反美)’로 관객을 자극하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류인 ‘반미’를 슬쩍 끌어들여 오락영화를 ‘개념영화’로 승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관객을 1000만 명 동원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영화는 관객들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재능을 보여 흥행에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는 재주를 한국영화가 오래 전부터 보여주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최초로 관객 1000만을 동원한 <실미도>(2003년 작)나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 작)를 보면 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밖에 없는가를 금방 알게 해주고 있다. 이처럼 한국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민심파악’ 능력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 흥행을 도모하고 있었다.
최근에 <‘변호인>(2013년 작)을 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해서 또 1000만을 동원하는 쾌거를 이룬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말년에 인기가 너무 없어, 다음 대선에서 야당인 이명박 대통령이 500만 표 차이로 여당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는데 크게 일조케 한 분이다.
최근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30% 이하로 추락하자, 현 정부의 후원자인(?) 종편에 난리가 났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역시도 (임기 3년차를 비교분석) 그때 겨우 지지도가 28%였다니 임기 중 얼마나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문재인후보의 낙선을 아쉬워하는 민심을 노무현 대통령의 복고(復古)민심으로 읽어내면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영화가 나서서 관객 1000만을 동원하는 능력을 보여주면 민심의 기상도가 바뀌는 것이다. 말이 천만이지, 영화 한편으로 한국인들의 의식구조가 바뀌는 엄청난 대업을 지금 한국영화가 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영화를 보면 그들이 민심파악 = 이념코드 = 대박흥행 = 1000만 관객동원의 공식을 충분히 읽어내고 있다. <왕의 남자>, <광해> 등에서도 정치적 민심의 ‘숨은 그림’ 찾기를 통해 흥행에 대박을 터뜨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제시장>이후 모든 용어가 ‘덕수’라는 상징어로 통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다시금 현대사의 ‘복고열풍’이 한반도를 몰아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한국영화가 민심과 여론을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된 게 사실이다. 정말 영화인들이야말로 타고난 ‘흥행감각’의 소유자들이 아닐 수 없다. 연극인인 나로서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을 뿐이다.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성공시킨 영화 <명량>만 해도 그렇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모든 국민들이 대통령 박근혜의 리더십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인사를 제대로 못해’ 리더십에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떠올리게 한 게 바로 이신순장군의 리더십이다. 거기에다 참사가 일어난 그 동네 ‘바다’를 소재로 삼은 영화이니, 당연히 ‘명량’은 관객들에게 진도 팽목항 = 이순신 = 박근혜 리더십 = 강력한(애국적) 리더십을 떠올리게 해, 한국영화 사상 관객 1700만을 동원하는 초유의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 ‘세월호’에 의한 정쟁으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을 때, 한국영화는 진도 앞바다를 소재로 한 ‘이순신장군’ 영화로 민심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영화사상 전후 무후할 대박 영화 <명량>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개개인들의 정치적 이념을 존중한다. 어차피 인류의 역사는 종교적인 신념, 또는 정치적인 이념으로 끝없이 정쟁과 종교전쟁을 지속시켜 온 게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을 무시하고서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조망할 수 없을 정도다. 이를 모른 체하고선 역사와 철학, 예술마저도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이념을 국민의 관심으로 끌어들여, 어떻게 ‘대박’나게 하느냐에 따라 ‘베스트셀러’라는 책으로, 시청률 높은 드라마로, 흥행영화로 생존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 연극판으로 화제를 돌려보면

1.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 연극판도 ‘개구리’를 통해서 민심을 건드리면 금방 ‘만원사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장 신문에 작, 연출을 한 박근형의 인터뷰기사가 나가자마자 공연이 끝 날까지 관객들의 관심이 고조되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예술가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을 갖는 것과 이런 이념이나 신념을 팔아서 흥행을 도모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 어차피 영화나 연극의 종사자들은 내가 아닌 관객의 마음을 읽어 ‘흥행’을 도모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인에게 자신의 개인적 이념이나 신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외려 연극인에게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보여줄 ‘민심의 소재’를 찾는 능력일 거다. 아니 ‘민심’을 읽어내는 연극적 감각일 것이다.
이게 나의 공연에서의 ‘정경(政經)분리’ 이론이다. 즉 예술가 자신의 정치성(이념)과 흥행을 도모하는 경제적 감각은 별개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연극인이라면 이를 분리해서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없이 그저 자기 자신의 정치적 이념만을 드러내니, 흥행은 못하고 ‘말썽’만 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지금 영화계는 자기의 정치성과는 무관하게, 한국인의 정치적 이념을 자극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경멸(?)하는 자본주의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톡톡한 수혜자로서의 행운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연극은 어째서 이런 손쉬운(?) 정치적인 ‘구설수’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기아’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일까?
고작 한다는 게 ‘진보인사’ 선거운동에서 ‘서명’이나 하고 있는 게 전부이니, 정말 한심하다 해도 너무 한심한 경지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인들과의 수준차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바보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무뇌아’인지 마냥 우리 자신이 참담할 뿐이다.

2. 한동안 연극계가 연극제 ‘대관탈락사태’로 시끄러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계가 커다란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생겼다. 사연인즉, 보도에 의하면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 절반을 지원하는 부산시가 영화제의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란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조직위원장인 부산시장이 ‘다이빙벨’ 상영을 하지 말도록 한 요구를 집행위원장이 묵살하고 이를 강행한 게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단다.
연극계는 지난 해 ‘서울연극제’에서 세월호 모금운동을 한 게 도화선이 되어 ‘대관탈락사태’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좌우간 세월호 사건이 양쪽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세월호로 인해. 지원을 하는 공공기관과 행사주체 사이에 정치적 견해(이념)로 충돌이 파생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만 해도 차라리 세월호의 문제점(정치적 관점)을 다루는 공연을 하다 ‘대관’이 탈락되었으면 짜증(?)이라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예술성과는 무관한 단순한 모금행사로 인해 싸움이 유발하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할 뿐이다. 무슨 작품(공연)에 대한 예술적 견해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공적인 행사가 예술적 성과와는 무관한 이념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힘겨루기’로 발전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우리의 문화적 풍토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마치 문화계에서는 이게 행사의 필수코스가 된 듯하다.
1940년대 후반 해방공간에서의 좌우파의 생존을 위한 대결도 아니고, 선진국을 눈앞에 둔 한국에서 그것도 문화계에서 이런 유치한 이념대립에 의한 힘겨루기가 번번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유치하고 소모적인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연극제나 영화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도 아니고, 하긴 그런 것으로는 투쟁할 일도 없겠지만. 자기들의 행사에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내세워 싸움을 벌이는 문화판에 환멸이 이는 게 사실이다.
정말 한국에서 현대예술가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싶어 한심할 뿐이다. 그저 소일거리 없는 예술가들에게 집회열고, 성명서 낭독하는 ‘심심풀이’만 제공하는 꼴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쨌든 세월호 유가족들은 나중에 몇 억대의 보상금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제대로 지원금도 받지 못하고 공연하는 연극인 주제에, 또 자신들은 수입이 없어 빌빌대는 처지에서 꼭 나서서(모금행사를 해서) 자신들의 이념의 명확성을 만천하에 밝혀야 속이 시원한지를 묻고 싶다.
어쩌면 자신들은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신념을 내세우겠지만. 이건 독재시대에는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왜? 민주시대에 ‘정의’란 만인의 공감을 수반해야 가능한 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투쟁에서도 성공의 관건은 노조원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아시아에서 최고로 성공한 축제라고 칭송받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하찮은 이념으로 분열돼 영화인들만 손해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 부산시장이야 다음번 선거를 도모하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니 선거에 당선만 되면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예술성을 고양시키는 일과 전혀 무관한 ‘이념적’인 일로 제발 손해 보는 문화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표현의 자유’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자칫 여론의 희생자가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게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다.

 
나의 관점으로 본 <국제시장>의 흥행코드

나는 영화 <국제시장>에 관한 한 최민우기자와 생각이 좀 다르다. 그는 방송인 허지웅 덕으로 <국제시장>이 떴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
내가 보기에 <국제시장>이 흥행을 이루게 된 것은 방송인 허지웅이 아니라, 이제 한국에서 서서히 ‘진보이념’이 한물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즉 영화인들이 변화된 ‘민심’을 잽싸게 읽은 결과를 <국제시장>이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따라서 나는 영화 <국제시장>이 그저 ‘좌파들의 시비’로 인해 흥행을 도모하게 된 게 아니라, 그들이 국민들의 변화된 ‘민심’을 잘 읽어내므로 해서 흥행에 성공한 사례라고 여기고 싶다.
우선 통진당이 헌재에서 ‘해산’당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제 서서히 국민들이 ‘진보’에 싫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선거에서 두 야당이 연대를 한 것에 국민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이게 ‘이석기 사건’으로 발전하자, 그만 국민들이 ‘좌파’에 실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야당인 새민련이 최하의 지지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로도 이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무시할 수 없는 게 또 하나, 국민들이 지난해 세월호로 인해 심하게 정치적으로 ‘피곤증’을 느끼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안타까운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정치권이 이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거기다 일부 유가족들의 파행적인 정치형태에 실망한 국민들이 진보좌파의 ‘진정성’에 의구심과 싫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말이 없던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 신물(?)을 내고, 자신들의 발언을 시작한 새로운 기류를 타고 나타난 현실이 ‘국제시장’의 흥행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진보에게 그동안 많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들이 보수를 ‘부패의 온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진보에게 나름 새로운 ‘건전세력’으로서의 기대를 걸고 있었고, 또 그들의 발언에 나름 공감해 기가 죽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RO’다 뭐다해서 계속 진보에게 실망을 하게 되자, 서서히 국민들이 진보좌파에 마음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단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민심을 영화 <국제시장>이 읽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이걸 흥행으로 적중시킨 것이다.
아마 관객들이 진보좌파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허지웅’이 떠들어도 <국제시장>이 진보영화 <카트>처럼 100만을 동원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진보에게 국민들이 서서히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을 영화인들이 재빨리 눈치 챈 게 <국제시장>의 흥행에 크게 일조하게 된 것일 거다.
국민들이 진보가 ‘보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아챈 후에, 영화인들이 잽싸게 이에 적합한 소재를 <국제시장>에서 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거기다 요즘 20대에게는 이념보다 취업이 더 급한 게 현실이어서 대학에서도 젊은이들이 서서히 이념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이런 ‘취업난’과 같은 경제적 상황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부질없는 이념싸움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거두기 시작했을 것이다.
좌우간 앞으로 한국영화를 바라보면 우리의 ‘민심’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의 ‘이념코드’를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연극판의 현실은?

그런데 우리 연극판은 어째서 이토록 세상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화성인들’처럼 행동하고 있을까? 우리말에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즉 ‘흥행도 해본 놈이 한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흥행을 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미 오래 전부터 민심을 읽는 ‘감각’이 쇠한 것일 거다. 아니 ‘민심’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연극도 이전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극단 연우무대가 민주화운동시절 관객들로부터 크게 각광을 받은 것으로도 충분히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 받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까놓고 현실을 비판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은유와 상징, 풍자’가 가능한 곳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알릴 수는 있었다.
그래서 간간히 공연 중간에 정치성 짙은 ‘애드리브’라도 배우가 할라치면 관객들은 의미심장한 ‘신음소리’를 내곤 한 게 사실이다.
그때 나는 “연극을 보면 민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정치인들여,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민심을 파악하도록 하라!” 혼자서 이렇게 지껄일 정도였다.
정말 연극공연장은 유일하게 ‘민심’을 읽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제는 이를 영화관에 빼앗기고 만 것이다. 정말 그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아마 그 때가 한국 연극사상 처음으로 관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었고, 연극이 대중의 관심을 끌던 최고의 시절이었다. 이는 연극이 세상의 흐름을 찾아 나설 때, 시류나 민심에 관심을 가질 때 관객들의 호응이 컸던 것을 알게 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그 후, 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부터 관객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때부터 연극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관점을 잃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째서, 무슨 이유로 연극이 우리의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일까?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전에도 한번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그 이유는 어쩌면 너무나 확연할지 모른다.
그 후 연극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자 연극인들 모두가 ‘논문’을 쓰려고, 또 쓰는 데만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다. 모두가 (대학 언저리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과거의 참고문헌과 자료만 뒤적이며, 별 가치도 없는 ‘논문쓰기’에만 매달리다 현실을 읽는 능력을 잃게 된 것이다.
과거를 뒤져 논문을 써야 대학에서 ‘한자리’= 생존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대다수 연극인들이 ‘체홉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게 우리 연극판의 현실이다.
그동안 우리 연극인들은 모두가 과거에 매달려 ‘생존’을 꿈꾸고 있었다. 솔직히 한국연극은 이미 한물 간, 전혀 세상을 읽어낼 수 없는 오리무중을 모토로 하는 ‘부조리극’에서 겨우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형편이니 연극판이 ‘현실감각’을 잃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국영화와 비교하면 아직도 한국연극은 여전히 ‘그리스, 로마’나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연극인들의 현실인식 수준이 현격히 낮아진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세상을 인식하는 수준에서 다른 장르와 비교해 너무나 뒤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예술을 하기에는 너무나 낮은 현실인식 수준을 견지해 온 게 사실이다.
거기다 오락물인 ‘뮤지컬’의 득세가 크게 한 몫 한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배우들이 입으로 곡에 맞춰 노래만 부르니, 전혀 머리를 쓸 필요가 없게 된 것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현실이니 미래는 고사하고, 우리의 현재(현실)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조차 없는 게 연극판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연극동네에서는 정치 감각은 물론이고 (요즘 트렌드인) 창의성은 고사하고 ‘비전’이라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연극판에서 활약하는 진보좌파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단지 세상에 불만이 많은 ‘불만분자들’(?)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니면 맹목적 추종자(?)이거나.
한마디로 가난에 찌든 ‘무늬만 진보’인 사람들이 전부인 게 우리 연극판의 현실이 아닐까? 이런 현실이니 좋은 ‘일자리’만 생기면 언제든지 자신의 정치적 이념 정도는 포기할 사람들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선거 때면 ‘특정인’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도모하고 있은 게 고작일 것이다. 나름 막연한 꿈(?)을 간직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한국만큼 세상이 빨리 변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흘러간 ‘진보타령’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젊은 연극인들이 적지 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영화를 칭찬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부턴가 나는 한국영화가 보기 싫어졌다. 선입견이 먼저 작용해서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관에 가기 전부터 (개봉을 하면) ‘이념논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구나, 그래서 이런 평가를 사람들에게 받는구나!” 한국영화가 관객을 1000만씩 동원하려면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고는 불가능한 현실이 그다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현실에서는 당연히 영화의 ‘예술성’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정치권에서 쓰는 말이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는 말이다. 이는 정치꾼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정략이나 ‘정치공작’에 매몰돼 제대로 민심을 알기가 너무 어려운 현실을 에둘러 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들에게 이를 대신해 알려주는 게 역사적으로 연극과 같은 공연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경우는) 이를 연극이 아닌 영화가 대신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한국연극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연우무대의 교훈

연우무대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검열’이 존재했고, 요즘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SNS도 없었다. 그래서 언로가 막혀있어 모두가 답답해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검열을 피해 상징과 은유가 숨 쉬는 곳은 오로지 연극무대 뿐이었다.
반면에 한국영화는 독재정권에 붙어 연명하는 부패집단인 제작자들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제는 ‘표현의 자유’가 만개해 있고, 모두가 자기의 SNS를 통해 (온갖 블로거를 통해) 언론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바로미터’ 기능을 하던 연극이 이제는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소통체계를 갖지 못해 아무런 기능도 못하는 장르로 전락해 버린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보다도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민주화 이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과 호응을 관객들로부터 받았던 공연들이 민주화 이후에 다시금 ‘앙코르공연’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실망감만을 안겨준 사실일 것이다.
이미 ‘한물간’ 소재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하는 내용의 공연이 되어버린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재미없는’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어째서 그 시절에는 그렇게 신선했으며, 흥미를 끌었던 것일까? 한마디로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마냥 ‘이슈’만을 쫒다보면 이슈가 사라지면 무가치해지는 게 연극이라는 장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새삼 깨닫게 해준 것이다. 정말이지 정치성이 강한 ‘이슈 연극'(?)의 말로는 너무나 비참했다.
금방 진부해진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한, 이슈를 극복하는 연극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어젠다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사이 연극계에서도 젊은 연극인들이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서울연극제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젊은이들에게 진보든 보수든, 우파든 좌파든 자기들의 삶에 전혀 변화를 주지 못하는 ‘행사용 연극’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가령 ‘개구리’처럼 정치적 이슈만을 건드려서는 이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약발’이 먹히겠지만, 이슈가 사라지면 그저 공허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연극은 ‘소재’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제는 뭔가 색다른 공연(소재나 주제)으로 이런 현실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럼 연극에 ‘무엇이 존재해야’ 지속적으로 관객몰이가 가능하며, 무엇이 ‘고전’으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단적으로, 과연 연극에서 ‘앙코르공연’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비록 이슈를 소재로 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건드리는 힘(능력)이 없으면 ‘앙코르공연’이 불가능해지는 게 연극일 것이다. 아무리 이슈를 소재로 해도 인간(인생)의 불변적 진리를 간직하지 못하면 몇 년 못가 ‘재공연’이 불가능해져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게 연극이라는 장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당장의 흥행만을 노려도 되는 영화와 연극이 다른 점일 것이다. 지금 한국연극은 이를 명확히 깨닫지 못해, 연극이 우리 연극사에서 ‘고전’으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계속해 연극제 등을 통해 신작을 창작해 내야 하는 고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연극은 ‘앙코르공연’을 통해 관객을 모을 고전이 전무한 상태여서 끊임없이 ‘신작’을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지속하고 있는 꼴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그때그때마다 꺼내 쓸 고전적 재료(공연물)가 전무한 상태에 있는 게 우리 연극이다.
지금 한국연극은 당장에 시대를 읽어낼 만한 창작품을 양산해 내지도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미래를 기약할 ‘고전’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저 영화판의 흥행을 ‘닭 쫒던 개처럼’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을 뿐인 게 현실이다.
이게 한국연극이 지금과 같은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한 예로 ‘우리가 왜 이념의 노예로 살고 있으며’, ‘어째서 인간이 이념에 이끌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가’ 등 사실극이든, 풍자극이로든 심도 있게 건드릴 능력이 없으니 당연히 연극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일 거다.
우리가 공연하고 있는 연극에 독특한 ‘소재’와 동시에 ‘주제’를 부각시키는 힘을 갖지 못하면 연극은 생존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고사하고 진보후보들 선거운동에나 나서고, 세월호 모금행사를 펼치는 게 자신들의 ‘이념달성’의 전부이라고 생각하니 예술성은 고사하고 연극인으로서의 품위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는 연극이야말로 한국영화처럼 정치, 사회적 이슈만을 좆아서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 거다. 이는 연극이 단순히 정치 사회적 이슈만을 쫒아서는 공연에 예술성이 떨어지는 모순을 극복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현실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추구하던, 이른바 386세대는 민주화 이후에 ‘연극’이라는 장르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영화’였다. 아마 그런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였을 것이다.
즉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연극에 일반 대중이 개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그들이 판단했을 것이다. 왜? 지금까지도 연극은 엘리트들이 하는 예술인줄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관객을 폭넓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게 된 것일 거다. 즉 많은 이들이 ‘민중’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장르로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영화가 국민들의 관심사를 독차지 하는 이런 현실에서, 지금이라도 연극인들은 무엇으로 우리의 생존을 이어갈 것인가를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거기다 대학이 우후준순으로 생겨나자, 연극인들 모두가 현장을 버리고 대학에서 ‘일거리’를 찾을 생각에 몰두하게 된 게 사실이다. 그저 모두가 대학원에 진학해 ‘대학’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게 꿈인 시대가 된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연극은 점점 더 ‘엘리트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대학이야말로 ‘엘리트주의’를 표방해야 생존이 가능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연극은 점점 일반 관객들이 내용을 알기 어려운 ‘부조리극’에서 예술성을 찾는데 몰두하게 되고, 그래서 한국 창작극을 이끈 것은 누가 보아도 이해가 불가능한 ‘엘리트주의’ 연극이 대세로 자리 잡아 점점 더 관객들과 멀어지는 공연예술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오락물인 ‘뮤지컬’에게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어떻게 생존을 도모해야 하나?

그렇다면 연극은 어떤 생존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지금 연극의 주요 고객인 20대들에게 다가오는 시급함은 ‘생존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용주의 사고에 지배되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소득도 없고, 자신들의 삶에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하는 이념정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 여건이 갈수록 나빠져 ‘이념’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젊은이들에게는 취업이 더 큰 문제고, 여성들에게는 육아가 더 관심거리이며, 늙은이들은 노후의 생존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놓여진 것이다.
백화점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던 젊은이가 고객이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릎을 꿇어’ 생존을 유지하려 드는 시대가 되었다. 주차요원을 관리하는 대장이 그들을 불러 꿇어앉힌 게 아니라 스스로 ‘알바자리’를 놓칠까봐 스스로 무릎을 꾼 것이다.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런 정도의 모욕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걸 두고 사람들은 이것도 나름 젊은이의 패기(?)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건 인천의 어린이집은 더욱 가관이다. 너 댓살 된 꼬마 애들이 친구가 맞는 걸 보더니 스스로 자리로 돌아가서 무릎을 꿇는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게 요즘의 한국의 현실이다. 생존을 위한 노력이 우리의 대세가 된 게 현실이다. 또 이런 사례가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 발행한 ‘절망의 나라에 행복한 젊은이들’라는 책에 의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삶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현재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게 그들의 목표여서 그렇단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를 가리켜 ‘사토리 = 득도’의 경지에 있는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 진보좌파의 이념은 이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정치적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연극판은 아직까지 이념에 목을 매고 있다. 차라리 이념을 팔아 개인의 영달이라도 꾀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외치면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노무현’을 사모한다고 자기의 삶이 좋아질 것인가? 이제 정치는 우리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시대가 되었다.
차라리 종교에 미치면 ‘마음의 안식’이라도 얻을 수 있으련만. 정치에 미쳐서는 아무 것도 나아질 게 없다. 지금 보수우파나 진보좌파를 지지한다고 해서 연극인으로서의 삶에 보탬이 될 게 있는가?
누구를 지지해도 영원히 연극에 가난은 지속될 것이다. 이게 연극의 운명이다. 지금 돈이 없어서, ‘삼무시대’니 ‘오무시대’니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게 정치 때문인가? 더욱 이념과는 무관하다.
아예 김대중, 노무현시대를 겪어보지 않았으면 진보정치에 나름 희망이라도 가져보겠지만, 이제는 어떤 정치체제라 할지라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우리만 정신 차리면 잘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세계 경제가 좋아져야 우리도 덩달아 좋아지는 글로벌 시대여서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냉전이 사라진 후 정치체제가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거의 무용지물인 시대가 되었다. (자기 집안에 권력자가 생기지 않는 한) 누가 대통령이 되던 자기와 상관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젊은 후배들, 그대들은 무엇을 얻고자 전혀 전망도 불투명한 정치편향성에 몸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을 던져 보도록, 이제는 각자가 조용히 자기의 연극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허무한 기대감

실례를 들어보겠다. 작년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사람 중에 하나가 프랑스의 ‘피케티’라는 경제학자일 것이다. 그가 쓴 부와 불평등을 비판한 ‘21세기 자본’은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재벌이 부를 독점하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크게 인기를 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의 올랑드 후보가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부유세를 최고 75%까지 과세하겠다고 하자, 피케티는 당연히 이에 동참을 했다고 한다. 불평등을 외치는 그가 올랑드를 지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올랑드가 당선된 후에 이를 실행하려고 하자 프랑스의 부자들이 해외로 자기의 재산을 옮기는 파란이 일자, 헬멧을 눌러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애인을 만나려 다니던 올랑드 대통령이 겁을 먹고 부유세를 취소한 것이다.
그러자 화가 난 피케트가 정부에서 주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요즘 식자들 입에서 이 사건(?)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는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봐, 프랑스를 보라구!”
그런데 한 푼의 지원금이 아쉬운 우리의 연극 현실에서 실권도 없는 ‘좌파’에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니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