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 양근애

4시 16분, 안을 들여다 볼 시간

– <노란봉투>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이양구

연출 : 전인철

단체 : 연우무대, 손잡고

공연일시 : 2015/04/03~05/10

공연장소 : 대학로 연우소극장

관극일시 : 2015/04/19 pm.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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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우즈’-엔진과 배기통을 연결하는 완충장치를 만드는 회사의 노동조합 사무실, 60일 간의 파업이 끝나고 난 다음날인 4월 16일 오전, 연극 <노란봉투>가 시작되는 시공간이다. 작년 11월~12월 공연에 이어 올해 연우무대 정기공연으로 다시 올라간 <노란봉투>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알리는 모임인 ‘손잡고’가 함께 제작한 공연이다. 안산 반월공단을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은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노동자에게 떠넘겨 수백억 원의 가압류를 청구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세월호 1주기였던 4월에는 극장 안팎에서 그 질문이 더 짙어졌을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허락된다면, 선뜻 이 연극을 보러갈 자신이 없었다는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 사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의 말미에 교복을 입은 여고생 ‘수빈’이 비에 젖은 얼굴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대책 없이 눈물부터 쏟아져 나왔다. 연극을 보고 난 후에도 아직, 세월호 이후를 말하는 언어를 찾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극장을 찾아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극 중에 나오는 대사처럼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안타까워하기만”하는 사람들 속에 나를 숨겨두고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을지도 모른다. <노란봉투>는 고통을 치유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필요성을 감정적으로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그곳에서부터 연대와 실천이 시작된다는, 잊고 있었던 생각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잊으면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도.

 

‘노란봉투’는 쌍용자동차 손배소 패소 판결 이후 노동자들이 부담해야할 금액이 47억 원이라는 뉴스를 본 한 주부가 손편지와 함께 아들의 태권도 학원비 4만 7천원을 보내면서 캠페인이 되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마중물이 되어 ‘손잡고’의 출범을 견인했고 연극 <노란봉투>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양구 작가는 이 극을 쓰기 전까지 노동 문제나 손배가압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손배가압류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노란봉투>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 되는 이러한 문제가 노동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압박하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를 보여준다. 극중 인물인 병로와 지호는 징계 해고를 당해 ‘죽은’ 사람이 되었고 그들을 배신한 강호는 CCTV 아래 감시당하는 ‘노예’로 생활하며 죽음을 유예하고 있다. 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기업 노조에 가입했다가 세월호 사건으로 아들까지 잃은 민성은 결국 자살한다. 그들이 파업에 가담하지 않았다 해도 결국 기업이 팔리면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연극은 노동조합이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완충장치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생산하는 벨로우즈를 의미화하고 결국 세월호 사건에서도 벨로우즈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고한 생명들이 한꺼번에 스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사건은 상황 속에서 발생하나 상황에 속하지 않는다. 이제 세월호는 작년 4월 16일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의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겨진 종이가 이미 구겨져 버렸다는 사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그 고통을 직시해야한다고 이 연극이 말하고 있다. 전광판에 올라가는 ‘병로’를 두고 농담을 하는 어른들에게 쉽게 죽는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수빈의 얼굴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양구 작가의 작품 속에는 기록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받아 적으며 자기 윤리와 싸운다. <일곱집매>의 ‘하나’는 기지촌 여성들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처럼, 우리는 병든 아이 때문에 결국 기업 노조에 가입한 ‘영희’의 마음이나 아들이 마련한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을 매단 ‘민성’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그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가 닿을 길 없는 슬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란봉투>에서 ‘아진’은 그날그날의 일지를 기록하고 방송국 피디인 ‘이고’는 노동조합 사무실에서의 일들을 영상으로 남기면서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도 이제 기록의 윤리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져올 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 눈물을 닦지 말고 서로의 고통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이 연극의 마지막은 그날그날의 카메오 출현으로 이루어진다. 4월 19일의 공연에서는 KTX승무원 노조에서 나온 여승무원이 전광판으로 올라가는 병로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극중 현실과 실재 현실을 만나게 하는 이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웃음이 났다. 아마 현실에서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20대 중반에 싸움을 시작한 그들이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가닿을 수 없는 십 년의 세월이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질문을 하는 관객들은 미안함에 울먹이고 대답을 하는 여승무원들은 고마움에 웃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니 잘못이 아니야, 정말로”의 농담 같은 역설이 펼쳐지는 풍경이 연극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4만 7천원을 보낸 배춘환 주부가 만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죽음에 진지하게 답하지 않는다면 삶은 경박해져갈 것입니다. remember 0416” 극 중에서 새벽 4시 16분에 ‘이고’의 휴대폰 알람이 울리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은 그 알람에 깨어나고 또 어느 날은 그 소리를 스쳐 듣기도 하면서 우리가 남은 시간을 살고 있는 한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들여다보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희망은 그제야 천천히, 힘을 합쳐 철판을 압축하는 일처럼, 반월(半月)의 선미(船尾) 아래를 환히 비추면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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