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열등의식을 갖고 살자!/ 우상전

우리 모두 열등의식을 갖고 살자!

 

우 상전(연극배우)

 

9월이 시작되자마자 막이 오른 국립극단 공연 ‘아버지와 아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공연이었다. 먼저 ‘내용전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물론이고 객석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게 요새 세계적으로 새롭게 거론되는 ‘서사중심연극’인가 싶었다.

나는 항상 한국연극이 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을 현대연극의 수용에 따른 ‘난해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연극인들 중에 연극을 관람하고, 특히 번역극을 보고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라고 난해성을 거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외국의 번역극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부조리극의 태두 ‘고도를 기다리며’나 ‘에쿠우스’를 관람하고 “재미는 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어” 등의 이야기를 연극인들이 꺼내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한국연극판은 현대연극의 이질적 문화적 요인에 의한 ‘난해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뮤지컬과 국산영화에 앞마당을 내준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내가 연극을 한지 근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내 경험으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극장 문을 나선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한두 작품이 아니다.

따라서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어째서 ‘난해한’ 현대연극(창작극 포함)을 별다른 인식 없이 관대하게 수용하고 있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런 연극이 순조롭게 한국에서 ‘순항’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연극인들의 입에서 ‘이해하기 힘들어!’ 라는 말을 듣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연극인들이 자기 입으로 꺼내는 것을 최고의 수치(?)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무식해 보일까봐’ 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만들어낸 한국연극의 어두운 그림자는 너무나 심각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광주 아시아연극 페스티발’

 

얼마 전에 전라도 광주에서 새로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연극 페스티발을 관람한 주간지 기자의 ‘르뽀 기사’를 읽었다. 우선 기사 타이틀부터가 으스스하다. “으리으리한 예술제조 ‘공장’ ‘제품’도 잘 팔릴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극장은 으리으리한데, 내용이 없으니 흥행이 될까?’의 조롱 섞인 표현일 것이다.

기사는 ‘관객을 수용할 수 없는 난해한 콘텐트’라는 언론의 반응을 전하고 있으며 회의적인 의견들이 개관공연에 쏟아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동시대 예술이 서울에서도 어려운데 광주에서 가능할까?”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원대한 목표를 세웠으면 로드맵이 있어야 하는데, 동시대 아시아예술이란 개념 자체가 정립이 안 돼 있다. 아시아인이 즐길만한 공연은 동시대 예술이 아닌지, 모호한 상황에서 목표만 고집한다면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안호상 국립극장장)

또 이런 말도 있다. “서구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인 시선으로 동시대를 바라보겠다면서 비아시아권과 서양 거장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이에 축제 예술감독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아시아를 편애하는 인터내셔널이 방향성이지 아시아에 갇히면 안 된다.” 그러면서 기사는 무대에서 꼼짝 않고 70여분 잠만 자는 ‘스님’이 출연하는 대만공연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반가운 것은 이제라도 공연의 ‘난해성’을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광주에서의 공연들이 너무나 앞서갔기(?) 때문에 조금은 불쾌했을 것이다. 좌우간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반갑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현대연극’의 세계적 현상과 우리의 수용에 대해서 그동안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머지않아 광주의 아시아연극은 (자칫 관객을 잃고) 거대한 극장마당에서 꽹과리를 두들기며 ‘풍물놀이’나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점에서 서울의 국립극단의 현실은 어떨까? 왜 우리에게는 이런 현상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일까?

 

‘밀양연극촌’의 교훈

 

‘한국연극지’의 복지에 관한 토론을 읽다가 이런 글귀가 눈에 띠었다. “연극인(예술인)으로서 자존감이 높으니 섣불리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고독사 같은 상황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평론가 이은경교수의 말)

사실 연극계의 현실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연극인들의 ‘자존감’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사회적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연극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세계연극계에 대단한 예술가를 배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자존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이를 살필 수 있는 글을 배우 김소희 ‘연희단거리패’대표가 자신들의 밀양에서의 공연풍경으로 남기고 있다.

“공연이 재미없으면 할머니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객석을 가로질러 나가신다. 그 정도면 감사하련만, 앉아 있던 일행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신다. ‘승훈이 어매야 가자, 재미없다 아이가.’ 하지만 그날 밤 공연이 좋았다면 다음 날 오전부터 예약전화에 불이 난다.”

연희단 공연이 점점 서울연극과 색깔을 달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런 솔직한 할머니들의 ‘외침’ 덕분인 것을 말이다.

우리에게 무슨 사안이 생기기만 하면, 늘 ‘참고사례’로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프랑스와 독일은 어떤가? 프랑스 ‘아비뇽축제’에 가서 놀란 것은 (성당에서의 ‘메인 공연’인데도) 공연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 중에도 적지 않은 관객들이 성큼성큼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가설무대라 유독 발소리가 크게 들린다) 걸어 나가는 광경을 두 차례 방문에서 다 목격할 수 있었다.

또 한국의 연극인들이 그토록 숭배(?)하는 독일연극은 어떠한가? 관객들이 공연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있던 객석좌석을 등받이에 세게 쳐 ‘꽝’소리를 내고는 공연장을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한다.

아마 전 세계에서 재미가 없어도, 극의 이야기를 쫒지 못해도 극이 끝날 때까지 마냥 앉아 졸면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막이 내리면 “아이구, 죽을 뻔했네!”하면서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은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관객은 왜 용기 있게 나갈 수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러한 ‘퇴장’은 관극을 생활화하는 사람들(마니아들)만이 펼칠 수 있는 자신감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연극의 열정 팬만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이자 마니아들의 진정한 자존심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 관객들이야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없으니 감히(?)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일단 관극이 습관화 되지 못해 타 연극과 비교분석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초대권으로 보는 공짜 관객인 주제에, 또는 출연자의 지인(知人)인 처지에 감히 자리를 박차고 ‘밀양연극촌’처럼 과감하게 소리치며 나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이런 관객들의 ‘묵언수행’이 결과적으로 서울연극인들의 ‘자존심’과 기를 살려주고 있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 연극인들은 자기들의 공연이 얼마나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재미없는 공연인지를 모른 채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밀양의 관객들처럼 큰소리치면서 퇴장하면 아무리 자존심이 센 서울연극인들이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자존심’을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어느 관객이 벌떡 일어나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라고 외치는데 연극인들이 지금처럼 자존심으로 무장할 수 있을까?

이런 실정이니, 한국에서 ‘난해성’을 간직한 현대연극을 수용하는데 연극인들이 아무런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고도’와 ‘에쿠우스’가 왜 흥행에 성공했는가?

 

먼저 ‘고도’나 ‘에쿠우스’가 왜 한국에서 계속해 앙코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사실 이들 공연이 절대로 난해하지 않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에쿠우스’만 해도 처음부터 남녀배우들이 ‘팬츠바람’으로 등장한 게 흥미를 유발한 게 사실이다. (요사이는 ‘완전누드’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만한 ‘볼거리’를 무대에서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대무용이 ‘완전누드’로 전환한 것을 보면 현대라는 이름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고도’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전교육으로) 모르는 관람객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배우가 무대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기다리기 지루한데 뭔 짓을 못해!” 20세기 최고의 부조리극이어서 무슨 의미로 그런 대사를 하는지 내용은 잘 몰라도 ‘볼거리’가 쏠쏠한 것은 사실이다.

이건 우리의 창작극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일본의 연출기법을 표절(?)해서라도 나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야 내용은 몰라도 ‘군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최소한 흥행은 안 돼도 평판이라도 좋게 받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현대연극의 공연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흥행과 ‘브랜드화’를 위해서 어떻게든 ‘화제 거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 현대예술의 특징이자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연극이 망조가 든 것은 결과적으로 연극인들이 아무런 ‘볼거리’도 제공하지 않는 공연에서 괜히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가 멸망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령 우리의 창작극작가가 ‘노무현의 죽음’을 썼다고 하자. 이를 번역에 유럽에서 공연을 했다고 하면, 과연 유럽 사람들 중 몇이나 이 작품을 이해하면서 구경할 수 있겠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한국의 별난 정치 환경’을 먼저 이해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생들 가르치듯이 세세하게 역사책을 쓰듯 희곡을 쓸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현대적 감각을 살려 은유, 상징, 생략을 가미해 ‘비틀면’ 서양 관객인들 이해가 가능하겠는가!

이럴 경우, 한국의 연극인들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가 그걸 알아듣는다고 유럽까지 가서 해외공연을 하나!” 그런데도 불가사의하게도 ‘외국번역극이나 외국공연’을 보고나서는 이런 말을 하는 한국연극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신문기자들(평론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는 척하는’ 기사를 읽고 공연에서 이해 못했던 관객들은 모두가 열등의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일 것이다.

이런 현실이니 “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 연출이나 출연을 못하겠는데요.” 하고 말하는 연극인을 기대하기 더욱 힘들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척’을 하면서 공연을 올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르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무대작업을 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어려운데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오는 관객들이야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겠어!” 이런 말을 하면서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연극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인식해도 한국연극에서 ‘난해성’은 상당부분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정말이지 우리 연극인들은 ‘별난 자존심’을 갖고 있다. 자신들도 겨우 자료를 통해서 조금 이해하는 주제에 어떻게 관객들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정말 이런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대단한 연극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한국연극이 살아나려면 연극인들이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과가 결국 뮤지컬과 국산영화에 관객을 빼앗기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고, 연극인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빈곤’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왜 ‘현대음악’은 사라졌는가?

 

지금 연극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예술에서 유독 ‘현대음악’만이 사라져버린 사실일 거다. 결론적으로 관객들에게 난해함만을 제공할 뿐 ‘음악적 감동’을 주지 못한 결과다.

백남준선생도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내가 음악을 하다 미술로 전환하게 된 것은 음악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였다.” 그러면서 그 예로 “미국에서 화가라고 하는 사람은 줄잡아 8만 명가량이 되는데, 음악가는 3천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만큼 현대음악으로 생존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노력해도 (관객이 없어) 수입도 불가능하고 되레 창작하기만 힘든 현대음악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 이런 ‘반면교사’를 두고도 그토록 ‘난해한’ 현대연극에 목숨을 거는 걸까? 역설적으로 한국에는 현대연극의 팬이 없기 때문인가?

솔직히 현대연극은 이제 한국연극판에서도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현대’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다 앞서가는 예술인 줄 알지만, 우리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비웃는 관객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고독사로 TV를 달구는 주제들이 아는 척’은 할 것이다. 어느 누가 돈 내고 극장에서 졸고 싶겠는가?

한국의 연극인들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지원금’을 달라, ‘복지’를 개선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난해한 현대연극에 자신들의 자존심을 걸고 있느니.

20세기 후반 들어 활기를 띤 ‘현대예술’의 특징은 수용자(향수자)를 위한 게 아닌 예술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음악’은 이 벽을 넘지 못하고 자멸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음악계는 고전음악의 재해석을 즐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존하려면 고전연극의 재해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연극에서 ‘난해성’이 유독 문제가 되는 이유

 

예컨대 판소리는 다섯 마당이 전부다. 따라서 관객들이 공연의 ‘내용’으로 불편할 게 전혀 없다. 그건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신작이 없이 고전만으로 공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해는 서울에서만 고전인 ‘라 트라비아타’가 대여섯 오페라단에서 연속적으로 공연될 때도 있다.

여기에다 판소리나 오페라의 관극을 더욱 수월하게 한 것은 바로 ‘자막처리’라는 신기술을 도입하고부터다. ‘자막처리’가 불가능할 때는 판소리가 어려운 한자의 ‘사자성어’로 되어있는데다 연기자들의 목소리마저 탁성이어서 전달에 애를 먹었다.

이건 오페라도 마찬가지였다. 가사전달이 최대의 난점이었다. 번역가사가 잘 들릴 수 없어 관객들이 흥미를 잃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막처리’가 가능해져 가수가 원어로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면 가사가 번역되어 자막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오페라도 관객들에게 친근한 장르가 되었다. 거기다 오페라 가수들의 발성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어 가사전달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런 ‘자막처리’가 판소리와 오페라를 살려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건 발레도 마찬가지다. 신작이 나올 수 없어 이미 고전발레로만 공연되고 있으며, 한때 ‘해설이 있는 발레’가 큰 인기를 끌어 사전교육을 획기적으로 성공시킨 케이스다.

그럼 고전이 있을 수 없는 현대무용이나 모던발레는 어떠한가? 다행이도 무용의 표현 도구가 ‘춤’(몸)이어서 (언어가 아니라) 당연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어서 괜찮다. 설령 ‘애매모호’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나름 상상해가면서 관람이 가능하다. 이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노래와 춤으로 되어 있어 내용전달에 전혀 문제가 없다. 혹 내용을 몰라도 이들 장르는 ‘볼거리’로 충분히 지루함을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현대연극’만은 처지가 다르다. ‘언어’를 사용하는데다 신작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리의 경우는 배우의 발성훈련도 미미하다. 동양인으로서의 발성의 약점도 갖고 있다.

그러니 문화권이 다른 ‘해외번역극’을 수시로 접하는 한국관객들만이 ‘난해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미 고전이 된 셰익스피어 연극은 무방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공연이 호황을 맞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연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많은 신작들은 관객들이 ‘내용전달’의 어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게 한국연극계인 것이다.

그런데도 ‘보도자료’만 읽고 기자들은 다 알아들은 척하며 ‘명작’운운하며 떠벌리고 있으며, 연극인들도 이에 대한 관객서비스가 없다보니 자연히 관객들만 더욱 멀리 떨어져나갈 뿐인 실정이다.

연출가가 해석을 잘하지 못해도, 홍보가 미진해도 노상 ‘난해성’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게 우리 연극계의 현실이다. 따라서 공연에서 ‘난해성’이 관건이 되고 있는 유일한 장르는 연극뿐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현대미술’이다. ‘난해성’으로 말하면 최고의 경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되레 이게 전화위복이 되고 있다. 왜? 새롭고 다양한 기법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은 이런 것들이 ‘희소성’으로 전환되어 외려 부자들에게 투자가치를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환영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희소성이 강한 작품일수록 잘 ‘사두면’ 엄청난 재산적 가치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전달의 ‘난해성’으로 죽을 쑤고(?) 있는 것은 현대음악과 현대연극뿐인데, 음악이야 이미 자포자기를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연극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현대연극이 난해성을 극복하느냐가 우리나라에서 연극이 다시금 영광을 찾는 길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거야말로 한국연극에 ‘감동, 공감, 재미’를 복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음악계는 “바흐의 소나타가 발표된 지 3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큰사랑을 받고 있다. 음악이 진심으로 한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이처럼 음악계는 아직도 서슴없이 고전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 연극계에서는 이런 말들이 되레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많은 관객을 한국영화와 뮤지컬에 빼앗기고 ‘지원금’과 ‘복지타령’만 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연극에 관객을 모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이유 없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일까? 정말 왜 그럴까?

 

‘국립극단’이 왜 중요한가?

 

내가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은, 한국평론계의 대두이자 세계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한 김윤철선배가 한국의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의 총책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평론가의 위치에 있을 때는 “서사중심의 연극이 다시 중심을 회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연극계에 세계적 흐름을 알려주는 귀중한 발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제는 국립공연의 제작자이자 한국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총책임자로 처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감독에게 (개인적으로 해도 될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국립극단에 관한 일이라면 위로는 청와대, 문광부로부터 시작해 아래로는 젊은 극장 스텝에 이르기까지 필히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독립적인 생각만으로 국립극단, 나아가 한국연극의 흐름이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옛 동료인 평론가들은 필히 이런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대학에서 ‘자존심’만 훈련시킬 것인가?

이제 김감독은 세계연극의 조류보다 한국연극의 상황과 한국 대중들의 기호를 더 중요시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왜? 한국연극의 최고이자 최대의 극단 공연제작자와 극장운영자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연극의 명실상부한 ‘리더’다. 따라서 단순히 세계연극의 흐름을 소개하는 사람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건 모든 연극이론가들의 그동안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했다.

이제는 평론가로서 객관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리더’로서의 한국연극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많은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한국연극을 만들어가야 하는 위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유명 뮤지컬의 ‘초대공연’이 있는 날이면 초대받은 연극인들이 하나같이 자기들의 가족과 함께 극장에 나타난다. 부인이나 자녀들을 데리고 나타나기 일쑤다.

하지만 명동예술극장 ‘초청일’에 가족을 데리고 오는 연극인은 없다. 이제 한국연극은 자기의 가족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연극이 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연극은 언제부터인가 예쁘게 생긴 제자나 후배와 동행해서 구경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이제 연극은 연극인 자신들에게도 재미가 없는 장르라는 인식이 굳어진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나부터도 가운데 좌석을 주면 걱정이 앞선다. 혹 재미가 없으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자존심’으로 우리 자신들을 무장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니 연극계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극심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있다면 그나마 국립극단이 유일할 것이다.

 

‘현대연극’이 정착하기 어려운 이유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한국연극은 세계적 추세를 쫓아 ‘현대연극’을 소화할 제반 여건이 전혀 성숙되어 있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그런 앞서갈 작품을 소화할 창작자의 지적자질이나 연출기법, 연기술, 무대기법 등 어느 것 하나도 갖추어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관객들이 우리의 연극공연에서 ‘경탄이나 감동, 재미’를 찾을 수가 없다. 제작비가 적어 솔직히 ‘볼거리’를 갖추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이른바 ‘실험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현대극을 아무런 개념 없이 도입해 결과적으로 연극과 관객이 더 소원해지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개선하려는 의지는커녕 날로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연극에 ‘감동이니 공감이니 재미’란 말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에게는 동시대를 이어갈 세계적인 예술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예술에서 필수적인 게 세계적인 예술스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국내용’이라도) 스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니아’가 생기고 덩달아 현대연극도 생존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본만 해도 스즈키 등 세계적 반열에 오른 연출가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가까운 대만만 해도 ‘린화이민(林懷民)’이라는 세계적 안무가가 있다. 그가 또 LG아트센터에 온다고 해서 얼마 전 한국 무용계가 야단법석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적 예술가가 없다. 그러면서도 계속 세계적 흐름을 쫓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동시대 연극’은 흥미도 끌지 못하고 지루하고 난해하기만 할 뿐인 것이다. 난해해도 스타 예술가가 존재하면 그냥 ‘그 맛’에 관심이라도 가질 텐데, 정말 난감한 현실이다. 이게 다른 나라와 처지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난해한’ 현대연극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그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현대성을 간직한 예술가가 존재한다는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그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그들에게 현대예술의 생존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작업에 독창성도 없고 이론적으로도 ‘말발’이 너무 허약하다. 거기다 그런 잠재력을 가진 사람을 살려낼 이론가나 비평가도 없다. 따라서 외국에 나가면 아직도 일본의 아류로 평가받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스럽게 ‘현대성’과 ‘동시대성’만을 관객에게 강요하니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광주잔치’에 낄만한 한국연극인조차도 없으니 누가 개관공연에 관심을 갖겠는가! 이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현대연극을 육성시키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으니 점점 더 관객과는 멀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현대연극’을 수용할 것인가?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현대연극’의 난해성에 대해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프로그램의 김윤철예술감독의 인사말도 이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체홉적 일상을 한국에서 표현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문화차이라고 할까, 심리 구조적 차이라고 할까, 그런 장벽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가 투르게네프의 극문학의 정점인 원작을 체호프의 양식으로 절묘하게 재창작한 걸작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작인 건 확실하데, 어떻게 ‘난해성’의 장벽을 넘어 한국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 제시는 생략되어 있는 게 아쉽다. 한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처럼 (3시간 가까운 공연을) 관객이 모를 연극을 앞으로도 계속 관객들에게 보이겠다는 말인지? 이번은 어쩔 수 없으니 양해를 해달라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는 게 사실이다.

 

  1. ‘작소서= 작품소개서’를 잘 만들어야 하는 이유

 

집에 와서 답답한 심정으로 공연프로그램을 들춰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쓰여 있는 내용이 더 나를 어렵게 했다. 발언자들이 공연의 핵심을 꿰뚫지 못해선지 글로 전달되는 게 너무 없었다.

현대예술이 생존하려면 외려 공연보다 이론가의 설명이 더 가치를 갖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왜? 현대예술은 ‘가슴’보다 ‘머리’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에게 논리정연하고 흥미를 유발하도록 작품이나 공연을 소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현대미술이 관람객들에게 흥미롭게 해설을 해서 그들의 흥미를 유도하듯이 말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히 ‘자소서 =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고들 야단이다. 그래서 학원도 생긴 모양이다. 이처럼 현대연극도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소서’=‘작(作品)소서’를 잘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난해한 공연일수록 ‘자막처리’는 못한다 해도, 왜 이런 연극을 제작하게 되었으며, 이 연극의 내용은 무엇이고, 무엇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관람객의 입장에서 즐겨 읽을 수 있는 ‘멋진 해설’이 필수라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그래야 그나마 공연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이 모인 관객들이 자신들의 ‘난해성’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연극계는 글을 어렵게 써야 ‘엘리트’처럼 보인다는 망상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필진들이 극의 내용을 명확히 몰라서 글로 소개된 내용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이해하기 쉽게 글로 서비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극의 경우 사전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가 없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고 극장 문을 나서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1. ‘눈 = 볼거리’를 즐겁게 해야 하는 이유

 

여기서 우리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에서 말한 ‘고도를 기다리며’ ‘에쿠우스’, 스타배우가 출연한 ‘신의 아그네스’ 등이 ‘난해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했다. 사실 이런 번역극들이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앞에서 말한 나름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까 ‘난해한’ 현대연극일수록 관객들이 ‘귀’를 포기하고 ‘눈’을 챙기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현대음악이 실패하고 현대미술이 성공한 원인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입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아야 ‘볼거리’가 없으면 꽝이다. 앉아서 배우가 말만 하고 있으면 연극은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고작 원로배우의 야릇한 대사처리로 웃음을 자아내는 게 전부라면 국립공연의 미래가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이건 비단 번역극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용이 생소한 ‘신작 창작극’도 마찬가지다. 일본연극에서 눈치껏 연출기법이라도 훔쳐와 마치 자신의 창작인양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있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무대장치, 배우의 연기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예술’에서 절실한 것은 ‘눈’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로 배우와 배우의 연기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전부터 부조리극을 소화한다고 하면서 배우와 배우의 연기를 모두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진정한 연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나라가 되었다.

‘부조리연극’은 우리 연극판에서 작품분석, 인물분석, 인물창조라는 연극용어를 빼앗아 갔다. 그게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결과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의 양식(스타일)과 인물설정에 따라 바뀌지 않고 노상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개인기’를 뽐내는 게 전부가 되었다. 이런 형편에 이제 와서 ‘배우중심의 연극’을 하겠다고 하니 이게 가능한 일이겠나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문기자들이 (요새는 연극평을 기자들이 쓰니) 그걸 명연기로 알고 대서특필해주니 ‘배우중심’ 운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유명 여배우의 연기에 시비를 거는 연극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그건 연기가 아니라 ‘장기자랑’이야!”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실제로 연기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나라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니 배우들이 ‘자기방식의 연기’를 고집하며 개선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도 이를 ‘메소드 연기’라고 칭찬한다. 그러니 연기의 발전이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사실 이런 연기야말로 작품이나 배역의 스타일에 상관없이 자신이 늘 잘하는 연기를 매번 반복해서 보이는 ‘개인기’이자 ‘장기자랑’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럼 우리는 이걸 왜 명연기라 하는가? 배우가 경력이 쌓이면 (늙으면) ‘개인기’가 늘어 당연히 명연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기가 숙련(?)되어 잘하는 연기로 보이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관극경험이 일천한 신참평론가(?)인 신문기자들이 이를 착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타니슬랍스키 할아버지가 100년 전에 나타나셔서 ‘배우의 개인기’란 해서는 안 되는 연기라는 것을 세계의 연극인들에게 설파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껏, 러시아 유학파들조차도 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으로 ‘배우중심의 연극’을 구가하려는지? 너무 많이 보아 싫증난 연기로? 아무리 ‘장기자랑’에 능해도 자주 보면 싫증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서사적 연극’에 크게 염려할 것은 바로 ‘눈으로’ 즐길 게 너무나 허약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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