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과 예술매체와 검열(3): 나치와 연극 검열/ 이재진

정치권력과 예술매체와 검열(3)

– 나치와 연극검열

 

 

이재진(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연극무대를 규제하고 통제하려는 검열의 역사는 연극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스 연극은 공연 전 검열을 받았다고 전해주고 있다. 리쿠르크(Lykurg)가 제정했다는 스파르타의 법에는 공연하면서 배우가 대본에서 벗어나게 되면 엄한 벌을 받도록 규정해 놓았다, 중세는 교회의 감시 하에 놓여있었고 심지어 15세기 프랑스에서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 독일은 혁명(1848/49) 끝에 검열제도가 잠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1851) 다시 도입하였다. 현재 독일 등 많은 나라에서는 법으로 검열제도를 금지하고 있다.

연극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사회의 일부분으로 사회의 틀을 벗어나 존재한 적은 없다. 연극의 역할과 기능이 오래 전에는 의례나 종교적 형식으로, 점차 정치적 이념적으로 변모했다. 그에 따라 연극에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이나 그에 예속되는 어두운 역사는 어쩔 수 없이 뒤따르게 되었다. 연극은 외부의 영향에 자유로운 적은 없었던 것이다. 국가와 정부에, 그러니까 때로는 권력과 타협하고 아니면 때로는 지원금에 늘 예속되어 왔다. 나치시대의 연극은 검열과 통제 속에서도 숨통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공연계획이 통제되고 많은 작품들의 공연이 취소되거나 금지되었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지원금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자유와 연극무대

19세기 말 갑자기 찾아온 과학발전과 함께 연극은 호된 도전을 받게 된다. 밀려닥친 새로운 예술매체에 대해 즉 영화와 음악과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극예술에게는 이보다 더 큰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 어느 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부자들이 정장하고 극장에 가서 비싼 돈 내고 듣던 베토벤의 음악이 귓가에 직접 와 닿는 것이 아닌가! 장엄하고 화려한 오페라가 얇은 유성기판에 담겨 무더기로 흘러나왔다. 곧이어 라디오방송이 뒤따랐다. 병사들은 참호에서 추위에 떨며 죽어가면서도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새로운 매체의 도전에 연극무대는 너무나 황당하고 난처했다. 새로운 예술매체와의 경쟁이 그리 쉬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찬란하고 독점적이었던 황금시기를 되돌아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로마시대, 중세의 험난하고 어두운 길을 걸으며 무시 받고 홀대 받으면서도 그래도 살아남은 연극무대가 이제 종말을 맞은 듯 암담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자연주의, 표현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서사극 등 어느 때 보다도 다양하고 극단적인 연극적 변혁이 시도 되었다. 변혁이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극 평론가 리쉬비터(Rischbieter)에 따르면 19세기는 소설가의 세기였다. 드라마 작가로는 고작해야 뷔히너, 네스트로이, 고골 정도를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요절한 독일의 뷔히너는 동시대인에게는 무명의 작가였고 오지리의 네스트로이는 오락성을 내세운 2류 작가로 평가절하 되어있었고 러시아의 고골은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며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19세기말 입센, 하우프트만, 체홉, 고르키 등이 등장하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사실 그대로 무대에 보여주자는 자연주의 연극운동이 일어났다. 안트완느(André Antoine. 1858-1943), 브라암(Brahm. 1856-1912), 스타니슬라프스키(Stanislawski. 1863-1938)가 선봉에 나서서 파리, 베를린, 모스코바, 런던을 중심으로 ‘자유무대’를 결성한 것이었다. 유럽연극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피나는 노력과 시도가 전개되었다.

안트완느는 1887년 파리에 아마추어 극단 ‘자유극장’(Théâtre Libre)을 세웠다. 에밀 졸라의 영향(자연주의)을 받으며 프랑스 고전극이나 오락극(Boulevardtheatre)을 멀리하고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나 외국작품들을 공연했다. 1896년부터 프로극단으로 거듭난 앙트완느는 입센,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스트린드베리히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에 고무되어 베를린에서 1889년 비평가 브라암이 ‘자유무대’(Freie Bühne)를 창립했다 모스코바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이끄는 ‘예술가극장’(MCHAT)이 1898년 설립되었다. 이들이 모두 부르짖은 것은 무대의 ‘자유’였다.

베를린의 ‘프라이에 뷔네’는 소위 ‘닫힌 공연’을 위한 회원을 공모했다.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극장을 빌리고 배우를 섭외하였다. ‘닫힌-공연’이란 초대된 일정한 회원관객 앞에서 비공개로 공연하는 연극행위를 말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프로이센 제국의 검열과 경찰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베를린 ‘프라이에뷔네’는 1889년 여름 창립공연으로 입센의 [유령]을 무대에 올렸고, 그해 가을에 독일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의 [해뜨기 전]을 공연했다. 이 두 번째 공연에서 커다란 스캔들이 벌어졌다. 연극사에 등장하는 공연스캔들도 너무나 커다란 주제이기에 별도로 다룰 수밖에 없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군도]와 함께 [해뜨기 전]의 스캔들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실러의 [군도]

1782년 1월 13일 만하임 극장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오후 5시에 [군도]의 막이 오르기 때문이었다. 1시부터 관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4시간에 걸친 긴 공연이 끝나고 9시에 막이 내리자 극장 안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실러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작품은 눈앞의 정치적 현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봉건군주를 몰아내자고 혁명을 외치는 듯 너무나 관객은 흥분하였다. 기절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일부 과열된 관객은 광적으로 날뛰었다. 마치 정신병원처럼 소란했다. 관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발을 구르며 고함을 쳐댔다. 낯선 사람들끼리도 흐느끼며 서로 얼싸 안았다. 기절하듯 쓰러지듯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눈물을 닦으며 힘들게 극장 문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혼돈의 순간이었다. 일 년 전에 죽은 레씽도, 열 살 위인 괴테도 이룩하지 못했던 엄청난 무대 성공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기다리던 독일의 셰익스피어가 드디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우프트만의 [해뜨기 전]

19세기 말 ‘자유’를 내걸고 일어난 극단들은 대부분 자연주의 작품을 선호했다. 그중 으뜸은 단연 입센이었지만 입센은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다. 프라이에 뷔네는 1889년 하우프트만의 사회극 [해뜨기 전]을 무대에 올렸다. 자연주의 연극에 아직 길들지 못했던 관객들 사이에 험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의사 하나는 가지고 있던 의료기구를 마구 집어던졌다. 이로서 독일무대는 자연주의연극에 돌입하게 되었고 무명의 하우프트만은 일약 극자가로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해뜨기 전]은 입센의 가족-분석 극 [유령](1881)의 후속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연주의 세계관이 주제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자연스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 환경, 교육 등에 지배되며 그런 환경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자연주의 연극의 핵심이다.

 

베를린 프라이에 뷔네

현재 어려움에 처해있는 연극 운영과 과열된 경쟁에서 벗어나고자 베를린에 몇 사람이 모여 ‘프라이에 뷔네’라는 극단을 설립하고 그에 뜻을 같이하는 관극회원을 공모하였다. 1889년 가을을 시작으로 10편의 작품을 공연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극단이라면 공연하기가 어려운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면 입센이나 하우프트만과 같은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은 그 시기에는 검열에 걸려 (입센은 금지되어 있었다.) 공연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공연하려면 경찰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이 정해져있었다. 극단(협회) 프라이에 뷔네의 설립취지나 목적에는 검열을 피해 현대작품(자연주의 작품)을 공연하는데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비공개적인 공연은 공연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연은 극단회원만이(관극회원)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은 회원가입을 했다. 극단은 회원의 회비와 기업의 후원에 의존하였다. 대표는 Otto Brahm이었다.

창립단원은 비평가, 법률가, 출판업자 등 10명이었다. 회비를 내는 회원들은 매 공연마다 좌석 하나를 받게 된다. 회원들은 작품선정과 같은 극단운영에는 개입하지 못한다. 극단운영은 주로 브라암이 도맡았다. 공연에 맞는 극장을 우선 섭외했다. 창립되자 회원이 360 명이 가입했다. [해뜨기 전]의 공연이 끝나자 회원이 900명으로 늘었다. 귀족이나 고급관리, 직업군인들 중에는 가입자가 별로 없었고 연극에 관련된 종사자들이나 문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회원의 80%가 베를린 지역의 유태인이었다. 실제로 이 당시 베를린 지역의 자유로운 시민권의 수호나 문화적 행사는 부유한 유태인들의 후원으로 보장받고 있었다.

1889년 6월 회원은 독일 프라이에 뷔네의 ‘닫힌-공연’은 1895년 금지되었다. 브라암도 파리의 안트완느의 ‘자유극장’처럼 프로극단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다. 1890년부터 브라암은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을 위한 ‘자유민중극단’을 병행해서 운영하였다. 창립공연작품은 입센의 [사회의 기둥들] (1877)이었다.

 

서울 프라이에 뷔네

1967년 서울에 독일희곡을 전공하거나 관심을 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극회를 하나 결성하고자 모였다. 그해 말 서울에 ‘프라이에 뷔네’가 탄생하였다. 지도 교수가 우리 극회이름으로 ‘프라이에 뷔네’를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베를린보다 대략 7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드라마센터에서 1968년 4월에 창립공연을 올렸다. 베를린의 경우처럼 하우프트만의 [해뜨기 전]을 선택했다. 공연은 베를린처럼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연출을 맡았던 나는 그 당시 자연주의 연극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왜 떠나는 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간 우리는 100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 하우프트만은 물론 브레히트, 귄터그라스, 페터 바이스 등 검열에 걸릴만한 작가들의 작품도 무대에 올렸다. 필요하면 독일문화원의 날개 속에 숨어들어 소위 ‘닫힌-공연’으로 위장했다. 서울 ‘프라이에 뷔네’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러나 그에 비해 깊이 눈에 띄지 않는 단체도 드물 것이다. 우리 ‘프라이에 뷔네’처럼 한국연극사에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높이 인정받지 못하는 단체도 없을 것이다. 후대에 이르도록 ‘프라이에 뷔네’의 역할과 가치는 한국연극사의 한 구석에 작게 기록되며 희미하게, 하지만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나치시대의 연극통제

히틀러는 (독일)연극은 이제(1924년 히틀러는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였다) 그 역할과 기능이 끝났다고 보았다. 사실 20세기 들어와 연극은 이념적으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운영면에서도 엄청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년대 말의 상황을 보면 극장수입과 지원금의 비율은 40대 60이었다. 지원금의 대부분은 지역사회가 맡고 있었고 주정부가 20퍼센트 정도고 주정부의 지원은 아주 미비했다. 정부의 지원이 적으면 그만큼 정부의 간섭도 적을 것이라는 변명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으리라.

1차 대전으로 붕괴된 독일경제가 점차 다시 일어날 즈음 뉴욕 증시가 폭삭 망하고 말았다. 소위 “검은 금요일”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은 목요일이었지만 유럽은 금요일이었다. 더구나 예수의 죽음과도 연관되어 ‘검은 금요일’이라 부르며 불길한 날로 이름 지어 부르게 되었다. 이런 경제위기는 독일경제도 함께 흔들어댔다. 연극계도 타격을 크게 입었음은 물론이다. 극장수입은 반으로 줄었고 지원금은 잔인할 정도로 삭감되거나 아예 동결되었다. 개인적으로 운영되던 극단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공연횟수를 줄이고 공연비가 많이 드는 오페라, 발레공연 대신에 비교적 제작비가 적게 드는 가벼운 연극공연으로 돌렸다. 공연장을 흔히 기업이나 다른 용도로 쓰게끔 임대해 주었다. 실업자가 증가하면서 관객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극장에 종사하는 사람들 역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자동으로 연장되곤 하던 일자리도 차단되고 오랫동안 일해오던 나이 먹은 직원은 분기가 끝나면 불안해졌다. 개인극단에는 젊은 연기자들로 그득했다. 임금도 싸고 쉽게 내보낼 수가 있으니 오히려 경험 없는 배우들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1932년 경우를 보면 연극매체의 종사자 중 3분의 2(대략 15000명)가 일자리를 잃었다. 남자배우의 48%, 여자배우의 경우 58%가 실업자가 된 것이었다.

연극계도 좌우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좌우(누렁이와 빨갱이)로 분열되면서 시민들 사이에 불상사가 끊이지 않고 사회는 불안했다. 1919 독일연극을 관장하는 ‘연극심의회’가 결성되었다. 공연 및 기타 무대예술에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하는 기구였다. 1925년 설립된 국립무대, 독일 민중극단 등은 우파인 독일민중당에 가까웠다. 좌파를 지지하는 극단은 전통이 빈약했기에 비교적 약세였다. 1928년 나치당원으로 이루어진 독일문화투쟁결사가 창설되었고 이 ‘투쟁무대’는 주로 순회공연을 통해 나치를 선전하고 지지세력을 격려하였다. 이를 주관하던 힌켈(Hans Hinkel)은 후에 선전청(RMVP)의 주무장관이 된다.

1931년부터 정치적 소요를 막기 위한 지침이 정해진다. 예술무대의 정치적 소요를 막기 위한 조처였지만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우파의 선동이나 소요는 하지만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우파의 선동과 테러는 무대를 통해 관객에게 국가관,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허무주의, 퇴폐성 등을 타파하려는 시도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규정에 따라 어떤 사회적 분란을 일으킬만한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그런 공연은 즉각 금지시켰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경찰력의 보호조치’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검열이었다.

나치세력이 확장대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이전에 이미 베를린 시가지에는 나치깃발이 나부꼈고 구호로 뒤덮였다. 위대한 독일제국을 상기시키는 작품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했다. 경찰력은 이들 세력을 통제할 힘이 없었고 무력화 되었다. 투쟁은 이제 끝이 났다. 정권이양은 기정사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총통(FÜHRER)은 구세주처럼 등장하고 있었다.

지난번 선전청의 설립에서 보았듯이 나치는 1933년 정권을 잡자마자 연극도 손아귀에 넣고 자기들 입맛대로 조정하려고 들었다. 희곡작가나 연출에게 나치정권에 완벽하게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거나 연극의 길을 포기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어떤 조건도 용납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애국심인 쇼뱅이즘(Chauvinism), 현실에 부응하는 완벽하게 정권의 지시를 따르고 노선을 지키는 나치와 타협하는 연극만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예술가, 지식들이 쌓았던 정신적 자유, 세계인으로서의 위상, 실험정신 등은 모두 뒷전으로 물러났다.

 

예술매체의 획일화

선전청의 총책임자로서 괴벨스는 예술분야와 언론계를 모두 획일화 시키고 통제하려는 작업에 착수했다. 연극계의 관변화(官邊化)는 나치 선전청의 임무이기도 했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치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선전하고 종사자들을 정리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1933년부터 공연계획이 조정되고 어떤 작품은 경우에 따라 공연에서 배제되었다. 이시기에 공연심의회를 만들어 연극인들의 출신성분과 정치적 성향을 조사해서 축출했다. 심의회는 1933년 65명중 44명의 연극중진들을 축출하고 전체 122 극장장중 75명을 해고했다. 많은 지식인들, 문인들, 예술가들은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치는 정권을 잡자 예술분야를 총괄해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연극도 조직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독일국립극장’으로 통합하고자 서둘렀다. 히틀러 자신은 연극을 굳이 현대화하려는 구조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19세기의 독일 고전극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훨씬 좋은 예술을 창조해 낸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고전작품으로도 충분하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그에 반해 그 당시 시대극에 해당하는 자연주의 연극은 배제되었다. 자연주의 연극은 영웅적인 인간의 모습보다는 환경에 예속되는 인간의 심리적 모순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자연주의 노선의 연극형태는 바이마르 연극의 특색이기도 했기에 나치는 더욱 이를 비난하고 거부했다. 개인이란 개인자체로서가 아니라 한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런 소속감을 가지고 무대에 표출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한 개인의 개인적인 심리적, 환경적, 유전적 요인들은 주제로 삼은 작품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중 속에서 개인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는 작품을 선호했다.

1933년 선전청의 개관에 즈음하여 괴벨스는 축하연설에서 독일예술의 앞날을 예언하듯 전망했다. “앞으로의 독일 예술은 영웅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강철 같지만 낭만적으로, 감상적이지만 객관적으로, 온 나라를 격정적으로 몰고 갈 것이며 국민과 연대감을 가지고 그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무대가 결성되고 책을 태우고 대중집회가 이루어졌다.

 

통치권자와 연극

나치정권은 연극과 영화의 기능과 영향력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락성, 문학성을 내세워 대내외로 나치를 선전할 수 있고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극만큼이나 연극인에 대한 배려도 극진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총통을 앞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대중집회의 연출가가 된 것이다. 대중집회를 일종의 연극공연으로, 전당대회를 일종의 예배형식으로 연출했던 것이다. 환호하는 관중을 틀에 맞는 대중으로 제조했다. 나치정권이 벌린 뜨거운 축제 같은 대중집회는 일차대전의 패배로 망가진 자존심, 경제공항으로 인한 빈곤 등 침체된 독일민족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히틀러는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빈 예술대학에 몇 번이나 지원했다. 특히 오페라(로헨그린)를 좋아했다. 성장하면서 목소리에 장애가 생겼고 심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대중 앞에 서기를 주저했다. 정권에 도전하면서 전문배우로부터 매달 엄청난 돈을 주고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의 대사법, 연기법 등을 배웠다. 대중연설은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을 것이다.

괴벨스와 괴링은 끝이 보이지 않게 서로 경쟁하던 사이었다. 배우지망생이었던 괴링은 그 당시 연극을 지원하는 대부였고 특히 베를린 연극을 수호해 주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메피스토의 배우 그륀트겐스(Gustav Gründgens)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괴벨스는 연극보다는 영화를 우선했다. 새로운 기술의 산물인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보았다. 물론 연극도 지원했다.

 

대중집회극(Thingspiele)

고대 그리스극의 특징을 요약하면 종교극, 대중극, 야외극, 음악극, 축제극, 가면극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나치시대의 대중집회극은 축제극이며 동시에 정치집회극이었다. 1920년대부터 노조들은 조직적으로 집단시위를 벌리곤 했다. 이를 보고 나치는 대대적인 집단공연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공연장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리스 원형극장을 방불케 했다. 5십만 도시 같으면 천명을 수용하는 공연장을 만들도록 되어있었다. 2만 명을 수용하는 공연장도 있었다. 야외극인 나치의 집단집회극은 합창극이기도 했다. (Thing이란 단어는 고대 독일어로 대중집회를 의미한다. 영어의 assembly에 해당한다.)

호수나 숲, 산언덕, 교회계단이나 성터 등을 무대나 배경으로 이용했다. 널리 알려진 작품보다는 새로 쓰인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런 작품에는 게르만의 피가 흐르고 나치이념이 요동쳤다. 신파조로 감정에 호소하는 감성적인 극이었다. 작품의 주제는 민족공동체의 피와 민족의 운명이었다. 무대 중심에 개인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이, 공동체가 등장하였다.

나치시대에서 연극의 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고국의 따뜻한 사랑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높이고 젊은이들에게 영웅적 포부를 심어주는 것 또한 연극의 과정이었다. 고전작품은 새로이 분석하고 해석하였다. 괴테나 실러, 클라이스트, 바그너 등이 사랑을 받았다. 특히 히틀러는 실러를 나치의 선구자로 칭송했다. 나치는 이들 고전작가들을 자기들 이념에 맞추어 마음대로 주물렀다. 실러의 [간계와 사랑]은 자주 공연했지만 [빌헬름 텔]은 멀리했다. 텔은 독재자와 싸워 승리하기 때문이다.

뮌헨에는 지금도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와 같이 수천 명이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거대한 맥주집이 여럿 있다. 히틀러는 가끔 이곳에 들려 추종자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세를 과시했다. 연극도 이와 같이 집단으로 함께 어울려 민족정기와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대중집회극(大衆集會劇)을 생각해 냈다. 마치 그리스 연극과 같이 국민을 단합시키는 총체적 연극이었다.

이런 대규모의 ‘집회 극’은 특히 젊은 관객에게 게르만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과 기능을 하였다.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심화하라/마음을 정제하라/힘을 배양하라”와 같이 감성적인 구호가 난무했다. 대중집회극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면 무엇보다 합창이 중요한 비중을 갖는다. 민중과 지도자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스 연극을 모델로 삼아 2만여 명이 들어차는 거대한 야외극장을 건립했다. 좋은 작품이 없어 괴테와 같은 고전작가의 작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극형식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나치는 전 세대의 무대가 이룩한 창조적 원동력을 파괴하고 그간 쌓여왔던 전통을 무시하였다. 순수 독일혈통(아리안 – 게르만족)이 아니거나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는 배척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첫 번째 숙청의 회오리가 바로 1933년 벌어진 나치 판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할 수 있다. 진시황제가 책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묻어서 죽인 분서갱유(기원전 213년)와 같은 테러는 동서양은 물론 고대, 현대를 막론하고 항상 어대서나 일어났다. 사도행전(19장 19절)에도 마법의 책을 태우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나치는 학생회를 동원해서 1933년 베를린을 위시해서 여러 도시에서 책을 불살랐다. 학생, 교수, 나치당원들이 못마땅한 작가들의 저서를 베를린 광장에서 불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반)독일 정신을 타파하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반전주의자 그 외 반정부 작가들을 조직적으로 내몰았다. 이때부터 많은 연출가. 배우, 희곡작가들이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순수 독일 혈통이어야 하고 나치정권과 충성맹세를 하지 않을 경우 작가나 배우로 활동할 수 없었다. 그 중 몇 사람만 열거해본다. 브레히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 독일작가들 뿐 아니었다. 몇 몇 외국작가들을 예로 들어보면 André Gide, Ernest Hemingway, Maxim Gorki 등 …

 

(‘검열의 역사’, ‘나치시대의 저항문학’ ‘연극 스캔들’ 등은 워낙 방대한 주제라 기회보아 별도로 차분하게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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