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지원 정책의 기조 전환을 위한 제언 / 오세곤

예술 지원 정책의 기조 전환을 위한 제언

 

오세곤(순천향대 교수)

 

  1. 전제

 

예술은 물이나 공기와 같은 필수 기본재이다. 물론 예술이 없다고 물이나 공기처럼 단시간에 생명이 끊어지지는 않으므로 자주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양이 아무리 좋아도 비타민이 부족하면 탈이 나듯 인간에게 예술이 없으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비타민을 무시해도 의사라면 당연히 그 섭취를 강조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의 시각에서는 필요성을 못 느끼더라도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예술이 사회의 안녕을 보장하는 필수 요소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에 있어 예술을 일반의 시각이나 무한 경쟁, 즉 대중 여론이나 자유 시장 경제에 맡기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대중은 스스로 얼마나 예술의 혜택을 받는지 모를 확률이 높으며 비효율을 근본 속성으로 하는 예술이 자유 경쟁 체제에서 생존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이 필수 기본재라 할 때 “지원”이란 표현이 과연 합당한지도 의문이다. 그 단어에서는 마치 자립이 힘든 이웃을 돕는 것과 같은 동정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지원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을 수는 없다. 예술의 존재는 남이 아닌 바로 나의 문제이며 예술의 위기는 곧 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에 관한 한 이미 “지원”이란 표현이 굳어졌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 “국가가 언제까지 예술을 지원해야 하느냐” 따위의 무지한 소리는 없어져야 한다. 경영 효율화를 내세우며 예술 관련 기관들에 대하여 섣부른 통폐합을 거론하기보다는 혹시라도 사각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웬만한 중첩은 용인하는 것이 현명하다. 만에 하나라도 예술을 지키지 못 할 경우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한 재앙일 뿐이라는 절박함이 예술 지원의 바탕으로 깔려야 한다.

 

  1. 기조

 

1) 무조건 지원

 

예술은 실패의 확률이 대단히 높다. 역설적이지만 실패가 많을수록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따라서 실패는 성공의 필수 요소이다. (주석: 실패한 도자기를 깨버리는 도공에게 깨고 남기는 구분은 자신의 엄격한 기준에 의한 것이다. 100개를 깨고 하나를 남기는 도공과 1,000개를 개고 하나를 남기는 도공이 있을 때 그 남기는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어떤 차이를 보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패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 지원은 너무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다. 더욱이 성공 여부를 판정하는 정확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 한 터에 이루어지는 선택은 너무도 위험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선 “무조건 지원” 정책이다. 까다로운 질적 평가 없이 기본적인 요건만 갖추면 지원하는 이 정책은 특히 신진 예술가들에게 적합하다. 물론 꼭 연령이나 활동 연한에 의거한 신진이 아니어도 아직 성과 확인이 안 된 작품에 대해 언제고 신청할 수 있는 소액다건 방식의 지원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석: 공공극장 중 일부를 가능한 한 많은 단체들에게 대관해 주고 홍보 마케팅을 지원해 주는 제도도 일종의 “무조건 지원”에 해당된다.  졸고 ‘공공 공연장의 역할 정립을 위한 제언’, 공연과 이론 제57호,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첨부자료 참고)

이에 대해 무조건 지원해 주기로 했다가 누구나 다 예술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쩌겠느냐는 걱정들도 한다. 그러나 예술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나 비용 정도를 지원하는 제도 때문에 모두가 그 어렵고 위험한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건 너무 과한 예측이다. 게다가 이렇게 지원을 받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한 세밀한 평가가 있을 것이고 그러한 평가 결과가 계속 축적되며 일생 따라다닌다면 아무리 “무조건 지원”이라도 신중하게 판단해서 신청하게 될 것이다. (주석: 사실 “무조건 지원”에는 한계가 따른다. 아무래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요가 많으면 이후 설계에서 예산을 늘리고 예산 소진이 다 안 되면 줄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적정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2) 찾아서 지원

 

현재 우리의 예술 지원은 공모제 중심이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적합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대단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나머지 스스로 내세우기를 주저할 수도 있다.

더욱이 대부분 서류로 진행되는 지원 심사는 본질을 왜곡할 우려가 크다. 즉 소위 서류 전문가들이 개입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진주도 진흙 속에 묻힌 채 사장되고 마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판별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망각한 채 오로지 판별을 위한 판별로 흐른다면 오히려 예술을 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찾아서 지원” 정책이다. 그 대상은 예술가 개인일 수도 있고 단체일 수도 있다. 물론 신청을 받을 수도 있고 추천을 받을 수도 있으나 지원기관의 적극적인 제안에 대해 동의 표명만 있으면 되는 정도가 좋다. 아무리 지원해 주려고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더 두고 지켜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렇게 동의 표명이 된 이후 해당 단체나 개인, 또 계획에 대한 검토 및 판단은 지원기관이 맡아야 한다.

 

3) 맞춰서 지원

 

예술가들에게 골고루 모든 능력을 갖추라는 건 과한 주문이다. 오히려 아주 좁고 깊게 몰두하는 게 예술가의 특성이라 할 때 여러 요소에서 골고루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은 경우보다는 비록 전체적으로 점수가 낮더라도 일부 요소의 점수가 대단히 높은 경우 지원 대상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예술 지원은 거의 모든 것을 갖춘 대상에게 부족한 일부만을 채워주는 형태이다. 그 부족한 일부란 십중팔구 돈이다. 물론 최근 예술 지원 내용으로 컨설팅 지원이나 인적 네트워킹 지원도 종종 거론되기는 하지만 대부분 예산 지원에만 한정된 형태이다. 그러나 예술의 특성을 생각할 때 현재의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극히 일부만 가진 대상에게 나머지 부분을 채워주는 지원 형태도 가능해야 한다.(주석: 이것은 일반인을 위한 예술 교육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다. 즉 어떤 예술 활동에 필요한 요소가 10가지라 할 때 교육 대상의 상태에 따라 5가지 지원이 필요할 경우도 있고 1가지 지원이면 충분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노인들이 연극을 한다면 마치 노래방에서 자막을 보여주듯 커다란 종이에 대사를 써서 보여주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더라도 연극의 즐거움은 상당 정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대상에 대한 발상 전환과 함께 지원의 내용도 유연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홍보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고, 대중성이 높을 경우 단순한 예산 지원이 아닌 융자나 투자 유치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예술성은 있지만 관객이 쉽게 선택하지 않을 작품이라면 관람료 대부분을 지원하는 방책이 필요할 것이다. 또 외국 작품 저작권에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고 인적 정보력이 약하면 그것을 도와줄 일이다.

 

  1. 운영

 

1) 평가

 

“무조건 지원”이 소액다건 방식의 지원이라면 “찾아서 지원”과 “맞춰서 지원”은 선택과 집중이 기본이다. 그런데 선택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평가가 필요하다. 게다가 “무조건 지원”도 결과물에 대한 사후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원 수혜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사업의 효과성 측정 차원에서가 아니라 향후 선택과 집중 지원의 대상을 가려낼 때 기본 평가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주석: 평가에는 객관적 평가와 주관적 평가가 있다. 객관적 평가는 지원기관이 확보하고 있는 정보에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예술 지원과 관련한 최종 결정은 더 전문화된 평가진의 주관적 평가에 맡기는 것이 옳다. 물론 앞서의 객관적 평가 결과는 중요한 근거가 되겠지만 그것과 상반되는 주관적 평가 및 최종 결정도 가능해야 한다. 물론 그 경우 결정에 대한 이유 설명은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

그러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역시 조심스럽다. 분야에 따라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동의까지 상당히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만약 예술적 질에 대한 판정 기준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면 다면평가가 바람직하다. 평가에 나서는 전문가도 다면화하고 여기에 일반 향유자 그룹을 더할 수도 있다. 즉 예술 평가에 일종의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주석: 예를 들어 연극 분야라면 평론가 그룹과 창작자 그룹으로 이원화된 전문평가단을 구성하여 그들로부터 심층 평가서를 받고, 별도로 일반 관객 평가단을 모집하여 관람료를 지원한 뒤 그들로부터 개괄평가서를 받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특히 관객평가단을 대규모로 할 경우 관람료를 통한 창작 지원의 효과도 있다.)

그래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판단이 일치하면 그대로 인정하고, 만약 서로 엇갈리면 전문가들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다. 사실 꼭 엇갈리는 경우가 아니어도 전문가들은 일정 항목에 대한 평가와 함께 특기할 만한 내용에 대한 서술식 평가를 함께 하도록 권하는 게 좋다. 특히 한 가지만 좋은 것이 있어도 나머지를 지원한다는 “맞춰서 지원”의 실행을 위해서는 그런 서술식 평가가 합당하다.

 

2) 설계

 

모든 지원에는 설계가 필요하다. “무조건 지원”조차 분명한 계획 아래 진행되어야 한다. 분야에 따라 일정액의 예산 지원만 하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공간 지원이나 행정 지원, 홍보 지원, 마케팅 지원, 인력 지원, 네트워킹 지원 등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정해 놓은 항목 외에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즉시 수용할 수 있는 태세는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설계의 필요성은 대상을 발굴하고 맞춰서 지원하려 할 때 더욱 커진다. 정확한 분석을 토대로 어떤 부분에 대한 어떤 형태의 지원이 필요한지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예술 지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자칫 불필요한 부분에 지원이 가해져 일종의 부영양화(富營養化)가 발생할 수도 있고, 꼭 필요한 부분에 제대로 지원이 안 이루어져 부분적 영양실조(營養失調)와 그로 인한 궁극적 사망(死亡)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정밀도이다. 즉, 예술이란 워낙 민감한 존재라서 잘못 손대면 오히려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앞서 부영양화나 영양실조, 사망 등의 표현은 모두 그런 경우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0.01의 단위가 필요한데 0.1 정도의 기준으로 지원 정책을 펼친다면 무늬만 지원일 뿐 실제 예술에는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3) 예산

지원에는 돈이 필요하다. 설령 예산 지원이 아닌 인력 지원이나 행정 지원이라도 결국에는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문예진흥기금은 그 존폐 자체가 불확실하다. 그런데 뚜렷한 대책도 없다. 그냥 국고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1년 단위로 이루어지는 예산 편성이 얼마나 불안한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러니 예술 지원을 위한 특별한 성격의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10여년 전 문예진흥원을 민간 주도의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하던 당시 정상적인 예술 지원을 위해서는 예산에 획기적 확대가 필요하며 당장 부족한 부분은 문예진흥기금을 깨서라도 충당하자는 주장들을 펼쳤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이 참담한 상황을 초래하리하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무대책으로 일관한 당국의 책임도 크지만 아예 모르거나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한 예술계 또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물론 민간 주도라는 전환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 한 건 양쪽 모두의 잘못이다.

역시 방법은 문예진흥기금의 안정적 확충이다. 정기적 국고 출연이든, 특별목적세 신설이든, 관광이나 복권 등 타 기금의 의무 부담이든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뭉칫돈을 마련해 놓고 나서 앞서의 평가든 설계든 하라고 주문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눈치를 보지 않고”라는 표현은 결국 앞서 “민간 주도”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원기관과 예술가 사이뿐 아니라 정부와 지원기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한 것이다.

 

  1. 과제

 

문화예술 관련 기관의 통폐합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예술교육진흥원,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역할 사이의 중첩 부분이 많으니 하나로 합쳐서 효율성을 높이자는 게 그 취지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도 위험한 발상이다. 적정한 정도의 중첩은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너무 경계를 뚜렷이 하면 그 경계의 두께만큼 사각이 생긴다. 멀리서 보면 두께가 없는 선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는 분명 수많은 생명이 서식하는 삶의 터전이라 할 때 칼 같은 구분은 무척 위험하다.

사실 역할 중첩으로 말하면 예술인복지재단과 문화예술위원회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 ‘복지’, ‘교육’ 등의 핵심단어가 말해 주듯 강조점이 다르다. 물론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경우 앞서 다양한 지원 내용에 일부 포함되므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번 만든 기관을 없앨 때는 그 부작용부터 우선 생각해야 한다. 특히 애써 축적한 역량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채 사장되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일은 없을지 잘 따져 보아야 한다.

사실 지금 필요한 건 기관 통폐합과 같이 그 효과가 불확실한 제도 개편이 아니라 실제 예술 지원의 역량과 효과를 키우는 일이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것을 실행하는 능력이 약하다면 실패는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술 지원의 기조를 바꾸고 합당한 운영 방법을 정하는 것과 함께 실행 능력 제고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지원 대상을 찾아내고 꼭 맞는 지원 방법을 결정하는 능력은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물론 이해 이전에 예술을 살리려는 열정이 필요하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조건이다.

예술 지원 기관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위해 현장 예술가들에게 여러 역할을 맡긴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이 심사와 자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 현장에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 한다. 그래서 심사건 자문이건 지원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다. 결국 어떤 종류의 정보를 어떤 깊이로 제공하느냐에 따라 결과를 유도할 수도 있다. 이에 있어 최악은 지원기관은 주인이 되고 예술가는 손님이 되어 주인이 원하는 결정에 거수기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정보를 많이 제공하면 약점도 드러난다. 올바른 자문이란 그런 약점까지 낱낱이 보일 때 가능하다. 심사도 마찬가지이다. 판별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가 없는 정보는 괜히 지엽적인 부분만 강조해서 엉뚱한 판단을 유도하기도 한다. 지원기관에서 책임지고 정리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그런 근거 위에서 예술가의 현장 감각이 발휘되어야 하건만 정반대 상황이 전개될 때가 많다. 그럴 경우 지원기관은 예술가들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제로 예술가들은 장님 문고리 만지기 식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앞서 예산과 관련하여 문예진흥기금 확충과 함께 정부의 불간섭을 거론했다. 사실 간섭과 지원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홀로서기라는 말이 자칫 외로움과 동의어가 되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분명 간섭이 너무 심한 경우로 여겨진다.

10년 전 문예진흥법 개정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의 임기는 3년이었다. 그것이 인사 관련 다른 법의 개정과 함께 2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건 위원 추천이나 위원장 선임 방식이 어느새 바뀌었다는 것이다. 위원추천위원회가 그대로 있기는 하지만 위원 후보를 복수 추천하여 장관이 임명하는 방식이고 위원장은 위원들이 호선하는 방식이었는데 어느새 임원추천위원회라는 게 생겨 역시 후보를 복수 추천하면 장관이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감독기관의 역할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각은 예술 현장과 기조를 같이 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작 예술계는 소외된 상태에서 감독기관인 문화부와 지원기관인 문화예술위원회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관계는 예술 지원과 관련하여 바람직하지 않다. 사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이 예술 지원 전문 기관인 문화예술위원회의 업무라면 예술 현장의 다양한 현상을 관찰해 가며 지원기관을 감독하는 것이 문화부의 임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사업 하나 하나에 대한 예산을 세우고 사전에 여러 단계 판정을 거쳐 최종 국회에서 확정되는 현 체제에서는 앞서 제시한 기조나 운영 방법이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사실 문화부의 간섭도 현 체제상 불가피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문예진흥기금도 안정적으로 확충하고, 위원과 위원장 선임에 있어 민간 주도의 취지도 살리고, 불필요한 간섭이 아닌 건설적 감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예진흥법의 수술이 필요하다. 사실 그 동안 여러 관련법의 개정과 함께 문예진흥법은 많이 훼손되었다. 또한 예술 현장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특히 기초예술 내지는 순수예술에 대한 부분은 산업적 분위기에 상당히 묻혀 버린 느낌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법의 대폭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법이나 제도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역시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정신이 중요하다. 그러나 법과 제도 마련이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올바른 정신과 상식을 토대로 예술 지원 관련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올바른 정신과 상식으로 그것을 운영하며, 올바른 정신과 상식이 대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예술 발전을 위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란 말로 글을 맺는다.

 

(첨부자료)

 

공공 공연장의 역할 정립을 위한 제언

 

오세곤

 

작년 말 서울연극제의 한국공연예술센터 대관 탈락 사태 이후 공공 공연장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렇다면 공공 공연장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공공(公共)’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니 흔히 생각하듯 ‘국공립’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해 설령 ‘사립 공연장’이라도 ‘공공’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사실 ‘공연(公演)’ 자체가 “음악, 무용, 연극 따위를 많은 사람 앞에서 보이는 일”이니 이미 ‘공공’의 성격을 띤다. 결국 ‘공공 공연장’은 동어반복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상이 국공립과 사립을 망라한 모든 공연장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역시 국가의 정책이 직접 관여하는 국공립에 국한된다는 뜻이다. 물론 국공립 공연장에 대한 정책을 세우는 데 있어 사립 공연장의 상황까지 살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일단 여기서 그것은 공연계의 환경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고려될 뿐이다.

공연장이란 공연하는 장소를 뜻한다. 즉 공연을 하는 이와 그것을 보는 이가 만나는 장소로서 공연에 필요한 하나의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자체 공연장을 갖지 못 한 공연단체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때로 그것은 권력이 되어 공연을 지배하기도 하고 거느리기도 한다. 특히 대형의 공공 공연장들은 이른바 공연계의 ‘슈퍼 갑’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현재 우리나라 공공 공연장은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국립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처럼 여러 개의 산하단체를 두고 있는 경우, 예술의 전당이나 명동예술극장처럼 상주단체나 연고단체 정도만 있는 경우, 한국공연예술센터나 남산예술센터처럼 그런 단체 없이 운영되는 경우, 국립극단의 극장처럼 완전히 전용으로 사용되는 경우, 정동극장처럼 공연계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복수의 공연장으로 구성된 경우, 단일 공연장인 경우, 지역의 문화예술회관들처럼 복합문화공간적 성격을 지니는 경우, 오로지 공연장으로만 사용되는 경우 등, 실로 다양하다.

이러한 공연장들을 채우는 것은 우선 산하단체나 상주단체, 연고단체 등의 공연이고, 다음으로 자체 제작이나 기획 초청 공연이다. 그런 뒤 남는 부분에 대해 일반 단체들에게 대관을 해주는데 여기에 특별히 정해진 비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공공 공연장들이 상대적으로 시설이 좋고 지명도가 높아 대부분의 단체들이 사용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결국 원하는 단체는 많고 대관 가능한 일수는 적다 보니 대관을 위한 경쟁 또한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반 단체들이 공공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초청을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관을 하는 것이다. 초청이건 대관이건 공공 공연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단체는 공연계의 주류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단체나 그 안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할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러한 초청이나 대관에 있어 어떤 기준이 적용되느냐 하는 것은 공연 단체들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공연계 주류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라면 단체들에게 무척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공공 공연장에서 적용하는 선정의 기준이 잘못 되면 자칫 공연예술의 지형 자체를 왜곡시킬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특히 서울에서 심할 것이다. 왜냐 하면 지역의 경우 단체 수가 많지 않아 아예 경쟁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 밖의 단체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초청의 경우 역시 일정한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공공 공연장에서 단체 또는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현장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역시 질적 수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 연극계가 질적 평가에 대한 합의된 기준을 확립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술에 대한 판단이 단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편차가 너무 심하다면 현장은 혼란을 겪거나 기준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렇듯 심정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기준에 근거한 결과는 역시 반발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해 볼 수 있는 건 다면 평가와 집단 지성의 활용이다. 원래 평가는 평론가들이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평론가들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고, 그래서 특히 연극계에서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평가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초청의 경우 기획자들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평가단 안에 평론가와 연출가, 배우들을 섞어 놓았다고 다면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평론가들의 평가와 연출가, 배우, 디자이너 등 형상화 참여자들의 평가를 따로 하여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에 일반 관객들의 평가까지 더한다면 최소한 3면 평가가 되고, 기획 차원의 평가가 포함되면 4면 평가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다면평가의 장점은 여러 그룹의 평가가 일치하면 당연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서로 어긋나더라도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또 적절한 가중치를 설정한 뒤 모든 결과를 종합하여 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일부만을 중시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실제 활용법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한다.

다음으로 집단 지성은 기본 요건으로 다수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평론가 그룹도 가능한 한 다수로 편성하고, 그 외 전문가들도 되도록 많은 수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에 더해 관객 평가단은 많을수록 좋다. 물론 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관리도 힘들고 예산도 많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한두 명씩으로 구색을 맞추는 정도라면 시도 안 하는 편이 낫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공공 공연장이 과연 어떻게 역할 정립을 해야 할지 정확한 설계가 필요하다. 우선 공공 공연장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기본적으로 모든 단체에게 골고루 열려야 한다. 원하는 단체는 적어도 1년에 1회 이상 시설 좋은 공공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단체 당 할애할 최소 기간과 활동 단체 수를 고려한 공간과 기간 책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공연예술센터의 경우 중극장은 1주일, 소극장은 2주일을 최소 기간으로 한다면 산하 주요 4개 극장에서 1년에 수용할 수 있는 단체는 약 150개가 된다. 물론 공공 공연장이라도 입지와 시설에 따라 다소 선호가 갈릴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공평해지도록 기간 등에 차등을 두는 방법도 괜찮을 것이다.

공공 공연장은 대관 자체를 지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지역 문화재단의 지원이 중복되지 않도록 서로 조절하듯이 어떤 공연장이 어느 정도의 대관 일자를 책정해야 할지 서로 협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 이렇게 골고루 기회를 부여받은 단체들에 대해 추가로 홍보 마케팅 등의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우리 공연 단체들은 작품 창작에 들일 힘 이상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홍보 마케팅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래서 애써 만든 작품에 관객이 없어 빛을 못 보는 악순환이 발생하기도 한다.

공공 공연장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경영합리화라며 지출 예산 대비 수입 액수를 따지는 식의 점검을 한다. 수입이 아닌 실적으로 따지는 게 옳다고 하지만 그건 대단히 전문적인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관객 숫자나 수입 액수 등, 확연히 드러나는 수치를 가지고 효율성을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에 들이댈 원칙은 절대 아니다. 예술 지원의 가치 판단은 대단히 정밀한 기준이 아니면 오히려 예술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민의 세금을 얼마나 잘 쓰느냐 하는 것은 질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공 공연장이 모든 단체들에게 골고루 대관해 준다 할 때 대관료는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그건 결코 예산 낭비가 아니다. 왜냐 하면 어떤 단체는 대관료 부담으로 대관을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있어 대관 단체에게 어떤 취약점이 있는지 살펴서 그 부분을 도와줄 정도의 맞춤 지원까지도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 앞서 다면 평가와 대관 단체에 대한 지원을 결합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관 단체들이 공연할 때 평가단을 유료 관객으로 파견하는 방식이다. 전문가 평가 그룹이야 상대적으로 소수니까 크게 영향이 없겠지만 대규모 관객 평가단을 운영한다면 분명 지원의 의미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각 작품마다 500명 내지 1,000명의 관객을 보내주고 그들로부터 개괄 평가서를 받는다면 지원과 평가가 결합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예술지원은 “맞춰서, 찾아서, 무조건 지원”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모든 공연단체에 골고루 대관을 해주고 또 홍보 마케팅과 관객 지원을 해준다면 이건 “무조건 지원”에 해당한다. 물론 “무조건”이란 말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대상이 무한정 늘어날 경우 속수무책이 될 수 있으며, 또 질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게 과연 예술의 본성과 맞느냐 하는 이의 제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정 늘어나는 건 기우이다. 이 정도 지원이 있다고 무한정 많은 이들이 어렵기로 이미 알려진 예술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너무 과한 추측이다. 더욱이 여기에 평가를 결합한다면 그렇게 쉽게 받은 지원에 대해 영원히 책임지는 셈이 된다.

지금의 상황이라면 일단 이렇게 대관을 골고루 해주면서 남는 부분을 자체 제작이나 기획 초청에 할애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이란 앞으로 모든 단체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시설 좋은 공연장이 확보되는 희망적 상황을 고려한 표현이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는 자체 제작이나 기획 초청이 가능할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그 대상을 선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앞서의 다면평가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성격이 다른 그룹들이 내린 평가 결과를 종합하여 활용할 수도 있고 그 중 일부를 뽑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향유자들을 중심에 둔다면 관객 평가단의 결과를 기준으로 초청 작품을 선택할 것이고, 예술성을 우선시한다면 평론가 그룹의 결과만, 또는 평론가 그룹과 형상화 참여자 그룹의 결과를 결합하여 판단할 것이다.

물론 각 공연장이 어떤 방향을 추구하느냐에 대해서도 전체 차원에서 균형이 잡혀야 한다. 이에 있어 최근 몇 년 동안 대부분의 공공 공연장들이 기획적 판단에 너무 치우쳤으며, 심지어 평론가들마저도 그 기획적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를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기획적 판단”이란 예술 창작자와 향유자를 모두 감안한 수준 높은 기획이 아니라 단기적 성과만을 중시하는 부정적 의미의 표현이다.

공공 공연장은 대관과 기획 초청 외에도 여러 가지 책무가 있다. 산하단체가 있을 경우 단원 선발과 연수도 해야 하고, 전문가 재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것이 좋으며, 법적으로 문화예술교육시설이므로 교육 프로그램과 전문인력을 갖추고 일반인을 위한 예술교육도 펼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앞서의 공연 관련 여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전에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이런 부수적인 성과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는 기관 평가 등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공공(公共)’은 ‘공익(公益)’ 내지 ‘공공선(公共善)’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 창작자와 향유자 중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 하는 것은 근시안적 기준이다. 어느 쪽이고 올바르게 정진하다 보면 결국 하나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과연 그 둘이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하나로 합쳐 방향과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 공연장 운영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공공 공연장에 대한 논의나 대책 마련은 결국 공연 환경을 개선하고 나아가 공연예술을 발전시켜 창작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공공 공연장에 국한된 정책 개발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사립 공연장을 포함한 전체 환경에 대한 정책 마련이 필요할 것이며, 나아가 국공립 예술단체나, 기초자치단체와 읍면동과 같은 더 작은 단위의 상주단체나 연고단체 정책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 공연장이 공연예술인과 일반인 모두에게 제대로 봉사하는 상황이 될 때까지 중앙정부와 국회, 문화예술위원회, 지방정부와 의회, 지역 문화재단, 그리고 공연예술계가 모두 나서 계속 관찰하며 끝까지 노력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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