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과 예술매체와 검열(2) – 나치시대의 검열/ 이재진

정치권력과 예술매체와 검열

이재진(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나치시대의 검열

선전청(RMVP)

 

 

이 칼럼을 통해 한 번 넋두리처럼 늘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회가 한 국가가 한 민족이 정신적으로 풍족하게 성숙해 지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요 철학(이념)이요 예술이라고 말입니다. 종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면 철학이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론을 정립하고 예술이 이를 실천가능한지 실험해 봅니다. 이런 세 가지 틀이 확립되고 커다란 뿌리를 힘차게 땅속에 박게 되면 그 민족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때때로 정치권력 혹은 이익집단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더욱 공고히 굳히고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더욱 증대시키기 위해 이런 뿌리들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가꾸려 덤빕니다. 뿌리에 물을 붓고 태양빛을 가리고 잎을 따주고 가지를 처 줍니다. 이를 우리는 검열이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뿌리에 이상이 생기면 자연이 이를 치유해 줍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런 뿌리는 썩어 문드러집니다. 뿌리가 썩어서 흙이 되면 그 영양분을 먹고 건강한 뿌리가 그곳에서 새로이 자라게 됩니다. 이런 자연치유방법이 가장 건전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역사를 훑어보려는 것입니다.

 

검열의 가장 위험한 적은 무지와 무시와 오만과 편견 입니다. 이들 중 가장 위험하기로는 무지입니다. 자신들의 무지를 덮으려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합니다, 때로는 애국으로 치장합니다. 이에 가장 좋은 예를 역사에서 찾자면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Dreyfus) 사건입니다. 프랑스를 고발한 이 사건(“나는 고발한다!“, J’accuse!, 1898) 역시 상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이만 접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은 세 번에 걸쳐 커다란 변혁기를 겪게 된다. 250여개의 작고 큰 제국은 1871년 ‘보불전쟁’을 계기로 비스마르크의 영도 하에 빌헬름 제국의 틀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독일제국으로 결속하게 된다. 이는 1차 대전을 불러오고 패전한 빌헬름 왕조(1871-1918)는 결국 막을 내린다. 왕조를 물려받은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은 국가와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민주국가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끝내 히틀러에게 나라의 운명을 넘겨주고 말았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나치정권(1933-1945)의 야망은 2차 대전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 격동의 3 시기를 연극은 줄기차게 함께 했다. 빌헬름 왕조는 자연주의 연극이, 바이마르 공화국은 표현주의의 연극무대가 사회를 이끄는 동력으로서 그 시대의 동반자이고 그 시대를 바라보는 증인으로 자처했다. 어느 시대나 그렇기는 했지만 특히 히틀러 시대에 이르러 연극이나 대중예술매체는 정권의 하녀로 전락하고 희생자가 되었다.

 

 

[나의 투쟁]([Mein Kampf])

나치정권이 마련한 연극의 기능, 역할, 임무 등 연극의 기본 틀은 1933년 히틀러의 제3제국이 설립되기 훨씬 전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1923년 혁명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 이는 히틀러의 자서전적 이념서이다. 정치가로 성장하는 과정과 혁명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나치의 지침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1권은 1925년, 2권은 1926년 출간되었다. 특히 첫 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1932년까지) 베스트셀러였다. 히틀러는 그 속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견하며 동시에 연극의 몰락을 탄식하고 있었다. 정권을 잡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연극의 과제를 새롭게 부여하기로 마음먹는다.

 

히틀러가 예견한 것처럼 실제로 20세기 초반의 연극은 정치적인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난관에 봉착되어 있었다. 경제공항이 일어난 1928/29년도를 보면 더욱 심각하다. 그 당시 입장수입과 보조금의 지원현황은 40대 60이었다. 지원금은 지역사회가 대부분을 부담했다. 예를 들어 그 해 지원금 9천 3백만 마르크 중, 주에서는 2천 6백만 마르크, 중앙정부에서는 아주 일부만을 지원했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지원금이 많아지면 그만큼 입김이 더 거세질 것을 두려워했다. 일차대전 후 몰락한 독일경제가 점차 회복기를 맞고 있을 20년대 말 뉴욕증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검은 금요일”의 저주였다. 이에 연극계가 받은 타격역시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에 따라 입장수입은 반으로 줄었고 지원금은 동결되거나 반으로 줄어들었고 결국 많은 극장이 문을 닫았다. 공연이 당연히 줄거나 취소되었다. 특히 비용이 연극보다 더 많이 드는 오페라나 발레 공연에 타격이 더욱 컸다. 공연에 성공하기란 복권놀이와 같았기 때문에 극장건물을 다른 용도로 기업에 세를 내주는 경우가 흔한 일이 되었다. 실업자가 늘고 관객이 당연히 줄었고 좌우충돌(누렁이와 빨갱이)이 잦아지고 게다가 영화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연극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극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임금이 감봉되고 매년 자동으로 연장되던 계약이 파기되어 쫓겨나지 않을 가 떨어야 될 신세가 되었다. 작은 극단에서는 나이 먹은 배우들을 내보내고 비교적 싼 젊은 배우들을 불러들였다. 무엇보다 젊은 배우들은 경우에 따라 내보내기도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1931/32년 대 초 독일연극계의 현황을 정리해 보면 연극종사자의 3분의 2가 즉 1 만 5천 여 명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 이듬인 1933년 남자배우 48%, 여배우 58%가 무대를 설 수 없어 배를 곯았다. 이 때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다.

 

나치의 예술계 장악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연극풍토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첫째 연극이라는 대중매체는 나치정권에게는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도구였다. 그 목적에 연극은 성실히 부응시켜 이용하고자 했다. 두 번째로는 이데올로기적 숙청과업에 연계시키는 일이었다. 즉 반정부요인이나 비우호적으로 낙인찍힌 저명인사(예를 들어 유대인)들을 요직에서 끌어내려 옷을 벗기는 데 연극매체를 활용하였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파면하거나 요직개편 등을 자행했다. 아리엔 혈통이 아니거나 국가를 위해 헌신할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투철하지 않은 예술인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부분 활동이 금지된 예술인들은 망명의 길을 떠났다. 나치시대 독일을 떠난 예술가들은 대략 5만 명에 이른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그것도 오래전 있었던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를 내가 왜 이리 길게 상세히 늘어놓는지는 독자들도 웬만큼 짐작하리라 믿는다. 우리의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우리에게 별로 낯설지 않아 오히려 신기할 뿐이다. 현실을 볼 수 있는 거울은 없다. 서로 이해관계가 심하게 얽혀있어 제대로 비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 있다 해도 잘 닦아놓지 않아 우리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날의 거울을 가지고 우리의 현재모습을 훑어보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묘하게도 늘 되풀이된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기 위해 암울했던 나치시대로 되돌아감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 보기위해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운명일지 모른다. 분열된 민의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려는 집권자들의 무모함을 이미 그곳에서 읽지 못하고 되풀이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치욕일 것이다. 분노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비극이 될지 모른다.

 

슈타우프의 논문 [3제국의 연극](Das Theater im Ditten Reich. Andrea Staub. 2006)에서 자료를 모았다.

 

3제국의 예술무대

소위 숙청을 끝낸 제3제국 즉 나치정권은 예숦매체를 정치적 목적에 쓰기 위해 새로운 구조조정과 끈임 없는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히틀러의 집권전략은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divide et impera”, “쪼개어 지배하라”(divide and conquer)로 요약할 수 있다. 적이나 어떤 공동체(국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일단 분산시키려는 작전이다. 임무를 세분화시키고 그다음 총괄하는 전략이다. 히틀러는 총통(Führer), 영도자로서 온갖 분쟁을 해결하고 분산된 국민을 총통합하고 이끌어 나가는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각된다. 예술문화 분야, 연극에서도 이 원칙을 적용하였다.

 

나치가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신설한 부서는 국민선도 및 선전부서 즉 선전청(RMVP. 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Reichs 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 이었다. 이 부처는 당의 노선에 맞추어 국민을 선도하고 선전(프로파간다)을 전담하는 중앙기구였다. 감옥에서 생각하던 예술매체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완전히 정권을 잡기도 전에 실현되었다. 내각 내에서는 실효성에 대해 회의하며 찬반으로 나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새로운 부처의 신설을 관철시켰다. 언론, 문학, 미술, 영화, 연극, 음악, 방송 등 대중예술매체를 총망라해서 관리, 감독하는 부서이다. 이 부서를 지휘 감독한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는 이 선전부처의 신설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방부가 국방의 임무를 다하는 것처럼 선전청은 독일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서 총궐기시키는데 그 임무가 있다. 독일국민의 정신무장은 물질적 무장보다 더 필요하고 더 절실하다.” 히틀러는 이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프로파간다 및 국민선도부처는 국가의 정신적인 계몽 및 개발, 국가선전, 문화, 경제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수행하며 이를 국내외에 대표하는 부서이다. 이런 목적을 모두 관리하고 달성하는데 정진해야 된다.”

 

선전청(RMVP)의 구조

선전청은 계속 비대해갔다. 1933년 5부에 350명의 요원으로 시작했다. 그해 10월 구조개편을 하면서 7개 부서로 늘었다, 법률 및 행정(I), 프로파간다(II), 라디오방송(III), 언론(IV), 영화(V), 연극/음악/예술(VI), 보안(VII)등이었다. 일곱 번째는 국내외를 망라한 거짓선동을 차단, 방어하는 부서라는 꼬리가 붙어있었다. 1939년에 이르면 직원이 2000명에 17부서로 늘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선전청의 예산도 1천4백만 마르크에서 1억 8천 7백만 마르크로 크게 증액되었다. 선전처의 장관은 물론 괴벨스였다. 차관이 셋이 부서를 분리감독하며 이를 보좌했다,

 

선전청의 언론지침

1933년 7월 이후 RMVP에서는 매일 회의를 열어 필요한 언론지침을 만들었다. 해당되는 언론사 책임자들은 그 회의 참석해서 어떤 기사를 어떤 형식으로 보도해야 될 지 상세하고 세밀하게 작성된 지침을 받았다.

 

RMVP에서 하달되는 지침은 원칙적으로 사전검열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후검열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당되는 기사나 문건을 검사한 후 직접 비난하거나 칭찬도 한다.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내랴진 언론지침은 8만에서 10만 정도나 된다. 대부분 언론(신문)에 내려진 조처였다.

 

회의참석자들은 일단 조처가 끝난 지침들은 폐기해야 된다. RMVP의 지침들은 외국 언론사에 통보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 기자는 국가반역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1945년까지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언론대표자회의 외에도 문화정책회의(일주일에 한 번), 간담회(수시), 경제관련회의, 해외통신원회의(하루에 두 번) 등이 열렸었다.

 

다음번에는 나치시대의 연극검열, 영화검열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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