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9일 한국연극협회 연극인 선영 순회참배/ 박정기

20151019일 한국연극협회 연극인 선영 순회참배

2015년 10월 19일 작고(作故) 원로 연극인 박진 선생을 비롯해 변기종, 이진순, 오영진, 이해랑, 권오일, 김동훈, 장민호, 강유정, 그리고 유치진 선생의 선영(先塋)을 참배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한국연극협회 윤봉구 이사장과 정재호 사무총장을 비롯해, 박병모, 현천행, 김병호, 김용을, 이동준, 이진영, 임대일 등 각 극단 대표와 강유일, 김덕주, 김동현, 김진명, 나진우, 박지우, 배우빈, 우현진, 유기욱, 오주수, 이승훈, 임영민, 전병주, 정지원, 정지훈, 한성욱, 하예슬, 유정호 기자, 유은분 기자, 협회 직원 차혜근, 권예리, 황다은, 그리고 덴마크 출신 배우 2인과 체코예술대학 서울분교 학생들, 그리고 원로연극인 최대웅(배우), 김두석(소품디자이너), 전세권(연출가), 그리고 필자가 참가했다.

 

첫 번째로 남양주시 천주교 영복동산에 안장된 박 진 (朴珍:19051974) 선생 묘소에 참배를 했다.

 

박 진 선생은 연출가 겸 극작가로 서울 출신이다. 1923년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동경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다.

1925년 토월회(土月會) 간부로 연극계에 투신한 뒤, 1927년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여 홍노작(洪露雀)의 <향토심 鄕土心>을 연출했다.1928년 극단 화조회(火鳥會)를 조직하였고,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근무하면서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를 연출하였다.1930년 단막희곡인 ‘절도병환자’를 시작으로 하여 희극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특히 동양극장의 연출가 겸 전속작가로 활약할 때가 전성기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를 지냈고, 한때 연극계를 떠나 중국을 방랑하기도 하였다.

 

8.15광복과 함께 연극계에 다시 투신하여, 1948년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김영수(金永壽) 작 ‘혈맥 血脈’을 연출하여 연출상을 받았다. 그 뒤 국립극단 단장(1959)으로 활약하면서 연출에 전념하였다.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1950)을 비롯, 예술원 회원(1960).한국연극협회 이사장(1962) 등을 역임하였다.주요 연출작품은 ‘향토심'(1927).’아리랑고개'(1929).’춘향전'(1935).’꽃피는 나무'(1943).’혈맥'(1948) 등이 있고, 주요 희곡작품으로는 ‘공작선생'(1951).’끝없는 사랑'(1951)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자전적인 저술인 ‘세세년년 歲歲年年’이 있다.

 

두 번째로 같은 묘원에 안장된 변기종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변기종 (卞基鍾:1895∼1977)은 서울에서 출생해 계성학교(啓星學校)를 졸업하고, 1912년 연흥사(演興社)에서 혁신단(革新團)이 공연한 신파극 ‘진중설 陣中雪’을 보고 연극을 할 결심을 했다.1912년 11월 극단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을 조직하여 지방공연까지 하였으나 평양에서 해산되자, 곧 이어 개성에 있는 유일단(唯一團)에 가입하여 배우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유일단이 1914년 말에 해산되자 이기세(李基世)를 따라 예성좌(藝星座)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7월에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에 잠시 참여한 뒤, 1920년 4월에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新劇座)로 옮겨 연쇄극에 출연하였다.

 

박승희(朴勝喜)가 조직한 토월회(土月會)의 신극을 보고 자신의 연극에 통속성이 짙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파성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민립극단(民立劇團)을 창설하여 활약하였으며, 1926년에는 복혜숙(卜惠淑).최성해 등 신파극의 인기배우들을 결집하여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를 창설하였다.

 

이 극단은 호남.서울.원산 등지의 공연을 끝내고, 북만주까지 가려고 함경남도 단천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35년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그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의 대표적인 배우로 활동하였다.광복 직후 극단 자유극장을 창단, 1955년에는 극단 민극(民劇)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예술원회원, 1957년 국립극단 단장, 1957년 서울시 문화위원, 1961년 개편된 국립극단원 및 연극협회 고문, 1972년 국립극단 명예단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초창기 신파극부터 연극 외길만을 걸어온 뛰어난 연기자로 평가되고 있다.

 

세 번째는 남양주시 영락교회 공원묘원에 모신 이진순 (李眞淳:19161984) 선생 묘소에 들러 참배를 했다.

 

이진순 선생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1938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선생은 재학시절부터 신극운동에 뛰어들어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 선생 등과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를 조직해 일본에서부터 아마추어 연극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대학을 마치고 즉시 귀국하여 1938년부터 극연좌(劇硏座)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그 단체가 해산 당하자 광복될 때까지 연극계를 떠나 있었다.

 

광복과 함께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극단 신지극사(新地劇社)를 창단하여 조우(曺禹)의 ‘태양이 그리워’를 연출함으로써 연출가로 변신하였다. 하지만 연출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데다가 생활고까지 겹쳐서 상업적인 악극과 여성국극(女性國劇) 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본 각색과 연출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생이 정통극 연출가로 본격 진출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고, 국립극단의 ‘태풍지대’.’우물’ 등이 그의 초기작품이다.

 

연극전문지 ‘연극’을 창간하기도 한 선생은 1966년 극단 광장(廣場)을 창단하여 동인제 시스템의 주도하의 한 사람으로서 창작극 개발과 근대극 소개에 진력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중진연출가로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와 예술원 회원, 그리고 연극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연극의 방향을 상업주의 쪽으로 돌려갔다. 즉, 극단 광장을 선두로 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전쟁과 평화’ 등의 대형작품을 자주 무대에 올린 것도 그러한 상업주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만년에는 창극연출에 심혈을 쏟았다.

 

네 번째는 같은 영락교회 공원묘원 내, 오영진(吳泳鎭:19161974)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했다.

 

오영진 선생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에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고, 1938년에 ‘영남여성의 내방가사’라는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작가가 되기 위해서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를 연구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 근무하고, 1945년 조선민주당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사무국차장에 피임되었다.1952년 중앙문화사 사장 및 월간 ‘문학예술’ 주간을 역임하였고, 그 뒤로도 예술원 회원·국제펜클럽회원.국제연극인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ITI) 한국본부부위원장.시나리오작가협회 고문.국제대학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에 처녀시나리오 ‘배뱅이굿’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

 

선생은 안창호(安昌浩).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검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만식의 측근으로 우익민족주의 정치운동을 벌이다가 월남하여 공산테러리스트에게 총격을 받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을 만큼 철저한 항일반공투사였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로는 희곡과 시나리오, 영화평론 등을 썼으며, 오리온영화사를 설립, 운영하였다. 6.25전쟁중에는 월남문인들과 함께 문총북한지부(文總北韓支部)도 만들었고, 월간 ‘문학예술’지도 운영하였다. 전쟁 직후 미국을 시찰하였고, ITI한국본부부위원장으로 유럽도 여행하였다.

 

대표적 시나리오로 꼽히는 ‘시집가는 날’로 아시아영화제의 최우수희극상을 받았고 ‘배뱅이굿’.’맹진사댁 경사’.’한네의 승천’ 등 3부작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소재의 원천으로 한 작품이며, ‘나의 당신’이나 ‘허생전’ 같은 작품은 고전소설의 현대적 재창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섯 번째는 경기도 광주시 용문산 이해랑(李海浪:19161989) 선생 묘소다.

 

이해랑 선생은 서울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항일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카와중학(金川中學)을 졸업하고, 중국 상해의 후장대학과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여 연극을 공부하였으며, 재학 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여 연기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극연좌(劇硏座)에 가입해 단역 배우노릇을 하였으나, 극 연좌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자 친 대중적인 극단 고협(高協)에 정 단원으로 가입하였다.선생은 연극계의 젊은 지도자로,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좌우익 연극인들이 주도권다툼을 할 때 그 당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좌익 연극에 대항하여 극단 전선(全線)뿐만 아니라 극예술협회(약칭 극협)를 조직하는 등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장에 서서 연극의 정통성을 지켰다.

 

1950년 봄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창단된 극단 신협(新協)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 국립극장 활동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전쟁 중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연기생활과 함께 연출도 겸하기 시작했다. 예술원 발족과 함께 3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9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잠시 동안 환도(還都)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단원으로 있다가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연극 외적인 일, 즉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5선)과 민주공화당 창당멤버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으며, 다시 연극에 복귀하여 주로 국립극단의 연출을 많이 맡았다. 1984∼1987년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천사여 고향을 보라’.’들오리’.’황금연못’.’뇌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과 ‘허상과 진실’이 있다.

 

여섯 번째는 역시 경기도 광주시 시안공원묘지에 모신 권오일(權五鎰:1931 ~2008) 선생의 납골당으로 갔다.

 

권오일 선생은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으로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3학년때 硏劇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졸업 후 제작극회 활동을 걸쳐 1969년 극단 星座를 창단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블랙코메디’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등의 대표 연출작품이 있으며 ‘봄날’이라는 작품으로 대한민국연극제대상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대표 연출작으로는 ‘성난얼굴로 돌아보라, 70’ ‘노틀담의 곱추, 71’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80’ ‘블랙코메디, 82’ ‘시련, 82’ ‘페드라’ ‘적과백, 83’ ‘밤으로의 긴 여로, 84’ ‘봄날, 84’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85’ ‘쟁기와 별, 89’ ‘초승에서 그믐까지, 86’ ‘젖섬시그리블, 88’ ‘베니스의 상인, 92’ ‘통 뛰어넘기, 9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아카시아 흰 꽃은 바람에 날리고, 98’ ‘소나무집 여인아, 00’ ‘오코치의 화려한 가출, 01’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02′ 외 다수이고, 수상경력은 83′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적과백) / 84′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연출상(봄날) / 90′ 대한민국 예술대상 / 95′ 서울시 문화상 / 02’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7 특별상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이 있다.

 

 

순회참배 중 시간이 초과되어, 각 공원묘소마다 문을 닫는 시간이 되었기에, 김동훈(金東勳 ) 장민호(張民虎), 강유정(姜由楨), 유치진(柳致眞)선생의 선영참배 대신,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앞에서 네 분의 추모제례를 지냈다.

 

김동훈(19391996) 선생은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연극 ‘혈거부족’ ‘군도’ ‘암야의 집’ 등에 출연하고,1960년 극단 실험극장의 창립단원으로서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햄릿’.’포기와 베스’에 출연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실험극장 대표로서 타계할 때까지 연극계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아들을 위하여’.’심판’.’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 등이 있다. TBC, KBS 등의 전속탤런트로도 활약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도 많이 했다.선생의 대표작으로는 ‘휘가로의 결혼’.’오셀로’.’화니’ 등이 있다. 운니동에 실험소극장을 열어서 ‘에쿠우스'(1976년) 공연으로 연극 판도를 크게 변화시켜 장기공연 체제 확립과 연극 직업화를 펼쳤다. 그는 연극사상 처음으로 지방연극제를 창설하였다.한국연극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하였으며, 동아연극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운니동의 소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거의 무대에 서지 않고 단국대학교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장민호(張民虎) 선생은 1924년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명신(明新)중학교(황해도 재령 명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피란지 부산에서 상경한 이해랑 선생과 신협재건을 위해 함께 작업하면서 이 두 분은 그 이후 연극인생의 파트너가 되었다. 재건 신협의 핵심단원으로 많은 작품에 주 조연으로 활발한 활동 펼치면서 종전 후에는 방송국 스타 성우, 신협의 주연, 영화의 주연까지 활동 영역 넓혔다. ‘소리의 마술사’, ‘극계의 정의파’로 불리며, 국립극단의 단장으로서 극단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레퍼토리, 연출가 초빙, 배역 선정 등을 극단 측과 협의하게 하였고, 프롬프터를 없애고, 낮 공연을 없애고, 장기공연체계를 갖춤으로서 극단의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다. 배우로서 프로 정신과 철저한 생활관리, 보수적인 기독교식 정신으로 가정과 일에 충실하였다. 스스로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 생각하며 철저한 연습으로 우리나라 프로 배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연극에서는 백여 편에 걸쳐 저력 있는 연기를 과시, 한국연극의 과묵한 무대 연기자로 각광을 받았다. 파우스트의 연기가 뛰어나 ‘파우스트 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지막 공연작품은 국립극단의 삼월의 봄이다. 2012년 향년 89세 폐 기 흉으로 별세하였다.

 

2011년 2월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국립극단은 새로 극장을 개관하면서 극장을 장민호 선생과 백성희 선생의 이름을 따 ‘백성희장민호극장’으로 명명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대한민국 예술상, 동랑연극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강유정(姜由楨 1932~2005) 선생은 경상남도 진주출신으로 부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극회에서 활동 중에 극단 ‘신협’을 찾아가서 연극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 중에는 전선을 찾아다니며 공연하였다.

 

1955년 임영수와 결혼한 후 연극계를 떠났다. 1957년 부친 별세 후 영화계로 진출하였다가 이해랑(李海浪) 선생의 권유로 다시 연극계로 복귀하였다.

 

1966년 10월 강유정 선생을 중심으로 극단 ‘여인극장’이 탄생하였다. 대표 백성희 선생을 비롯하여 강유정‧진랑‧강성희‧전윤희‧강추자‧정은숙‧선우용녀‧김복희‧임옥영‧김영애‧김혜숙‧서계영 이승옥 등 방송국 성우와 아나운서 및 작가지망생으로 구성되었다.

 

1968년 제4회 정기공연부터 연출을 시작한 이래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인극장’을 통해서 100여 편을 연출하였다.

 

주요 연출작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여인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학이여 사랑일레라>, <키리에>, <마스터 클래스>, <키 큰 세 여자>, <아름다운 여인의 작별>, 외 100여 편이다.

 

수상경력으로는 <대한민국 연극제> 작품상, <한국연극, 영화, TV 대상> 작품상, <동아연극상>, <서울시 문화예술상> 연극부문수상, ”91연극의 해 <사랑의 연극제> 작품상, 한국예총 예술문화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공연예술부문 등이다.

 

유치진(柳致眞, 1905~ 1974) 선생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아호는 동랑(東朗)이다.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한 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교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하여 곧바로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월간》에 연재한 〈토막 (土幕)〉을 시작으로 농촌을 무대로 한 사실주의 작품을 발표하며 극작가로 활동했다.

 

〈토막〉을 비롯하여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빈민가〉(1935), 〈소〉(1935) 등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한 평론인 〈노동자 구락부극에 대한 고찰〉(1932) 등에도 계몽적 한계는 엿보이나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유치진의 초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광복 후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을 공연했고,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기의 대표 희곡으로는 좌익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이 포함된 〈조국〉(1946), 〈자명고〉(1946), 〈별〉(1948), 〈흔들리는 지축〉(1949)이 있다. 한국 전쟁이후로는 우파적 경향성은 희석되고 영화,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실험적 기법을 시도했다.

 

1958년에는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이 되는 한국연극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60년대 이후로는 희곡 창작보다 드라마 센터 건립 등 연극 교육에 몰두했다. 국립극장 극장장, 한국연극협회 회장,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도 역임했다.

 

 

네 분 선생의 추모제례행사를 마친 후 일행은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 초승달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차기 연극인 선영 순회참배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10월 19일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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