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 판소리 <춘향가>/ 윤진현

완창 판소리 <춘향가>, 춘향을 보며 춘향이 되다

 

윤진현(연극평론가)

 

김세종제 <춘향가> 완창

소리꾼: 김경아

단체 : 한국판소리보존회 인천지부

공연일시 : 2015/11/07

공연장소 :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관극일시 : 2015/11/07 pm2:00

 

동초제 <춘향가> 완창

소리꾼: 장문희

단체 : 국립창극단

공연일시 : 2015/11/28

공연장소 : 국립극장 하늘극장

관극일시 : 2015/11/28 pm3:00

 

 

 

1980년대 중반까지 ‘판소리’의 장르가 무엇인가를 두고 학계의 논쟁이 쟁쟁했었다. 이는 정확히 표현하면 ‘판소리 사설’의 문학적 장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후 학계는 서정, 서사, 극장르 하나에 단일하게 부합하지 않는 한국고전문학의 특수한 작품군을 수렴하기 위해 ‘교술장르’라는 용어를 정립하고 판소리문학을 교술문학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판소리’는 공연이다. 사설만으로도 훌륭한 문학이기는 하나 소리로 들으면 더 좋고 소리를 하는 광대를 보면서 즐기면 더욱 좋다. 광대의 소리를 직접 보고 듣지 못할 때 소리만 듣는 것이고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때 글을 읽는 것이니 글로 장르를 다투는 것이 생산적인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공연이란 모름지기 풀버전으로 봐야 제 맛이다. 오페라의 유명 아리아나 발레의 유명장면이 소위 갈라쇼로 공연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풀버전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즐기는 것이지 풀버전은 모르는 채 부분이 충분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가 아름답다지만 작품의 해석방향에 따라 엘레나 오브라츠소바의 노래는 즐겁고 개구지고, 애나 카테리나 안토나치는 마성적이며 엘레나 가랑차는 몹시도 아름답고 유혹적이어서 그야말로 관객의 정념에 불을 지핀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광대마다 어떤 인물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풀버전은 필수다.

그러나 판소리는 풀버전, 완창이 드물다. 최근 들어 조금씩 시도된다고는 하나 소리꾼 입장에서도 모험이요, 도전이다. 짧게는 6시간, 길게는 10시간도 걸리는 완창이 소리꾼이라고 저마다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6시간, 10시간 공연을 해보지도 않고 함께할 관객이 없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도 당연한 생각은 아니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16시간이 소요되어도 공연이 되고 1999년 미국 링컨센터에서는 중국 곤극 <모란정>이 19시간 동안 공연되었으며 현대판으로 축약된 <모란정>도 3시간씩 3일에 걸쳐 상연하는 9시간 공연이다. 우리라고 그런 공연을 바라지도 못할까. 옛날에는 큰 잔치에 소리꾼들을 불러 소리를 시작하면 2박3일 계속했으니 노래하다가 쉬고 노래하다가 밥도 먹고 잠도 자며 공연했었다. 물론 예전에도 매우 큰 잔치에서나 있었던 일이니 흔한 일은 아니었다지만 예전에 가능했던 것이 오늘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말 일이다. 1년에 한 차례라도 좋은 잔치에 좋은 완창공연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날마다 바라는 것도 아니니 기왕이면 삼남의 만석꾼 큰 부자의 잔치처럼 밥도 얻어먹고 잠도 얻어 자며 소리까지 들으며 노는 자리를 상상한다.

무엇보다 판소리는 관객으로서 정말 편하고 집중하기 좋은 공연 장르이다. 판소리에서 시작된 창극처럼 볼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음악과 소리의 조화, 여러 창자의 저마다 다른 기량의 편차를 감당하며 평균치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무대 전체를 관찰하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중압감 없이 부채 하나 들고 고수 장단에 의지하여 객석을 향하는 소리꾼에 집중하면 된다. 광대 또한 솔직, 대담하게 자신의 재주를 통째로 내놓고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 나는 잘하는데 남이 못해서 언걸을 입을 걱정이 없다.

더 좋은 것은 판소리가 미학적으로 서양의 모노드라마처럼 일방적 발신만 존재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점이다. 판소리 광대는 허다한 등장인물의 대사와 입장을 묘사하고 전달할 뿐만 아니라 광대 자신이 관찰한 내용, 광대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전달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인물과 동일시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 아니라 인물에게서 떨어져 광대와 함께 극중 사건과 인물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작품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극으로 개편되면 여러 인물의 대사는 극으로 분창될 수 있으나 소리광대라는 관찰자, 전달자를 제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 이는 또한 창극이 판소리에서 나왔으되 판소리를 대체하지는 않으며 대체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긴 창극이 판소리에서 나왔다고 판소리를 대체할 필요가 무엇인가. 판소리는 판소리대로, 창극은 창극대로 즐기면 두 배로 즐거운 것을!

예를 들어 ‘사랑가’ 대목을 보자. 이처럼 다양하고 유려하고 아름다운 묘사로 남녀의 사랑놀음을 노래하는 것은 흔치 않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이는 다 덥쑥 빠져 먹든 못허고 으르르렁어헝 넘노난 듯, 단산 봉황이 죽실을 물고 오동 속을 넘노난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물고 채운간을 넘노난 듯, 구곡 청학이 난초를 물고 송백간의 넘노난 듯

 

춘향이와 이도령은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움켜안고 핥듯이, 봉황이 죽실을 물고 너푼너푼 넓은 이파리의 오동나무 속을 어른거리듯이, 흑룡이 구름 속을 넘나들 듯이, 청학이 난초를 물고 솔숲을 들락거리듯이 논다. 더구나 누런 범은 금빛 봉황이었다가 검은 용이었다가 푸른 학이 되고, 암캐가 푸른 오동나무, 하얀 구름, 푸른 난초에 푸른 솔숲으로 변화하니 그 색채감도 놀랍다. 게다가 종국에는 푸른 학, 푸른 난초, 푸른 솔숲으로 통일되면서 뜨거움과 열정이 푸른 안정의 세계로 귀결된다. 남녀의 모습으로 상상하면 이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장면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 극이나 영화로 표현한다면 로맨틱한 음악에 침실을 비추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1997년 당시 의욕적으로 시도되었던 완판장막창극 <춘향전>에서 이 장면은 다음처럼 형상화되었다.

 

창극 <춘향전>(국립창극단, 1997) 

 

은희진 명창과 안숙선 명창의 연기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두 분의 파드되는 낭만적인 상상에 도달하기는 미흡하고 합창으로 구성된 소리는 에로틱한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기에는 첫날밤에 방문 밖에 모여든 구경꾼 같아서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는 영화 <춘향뎐>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 춘향이, 몽룡이 대신 범이니, 봉황이 등장하면 얼마나 이상할 것인가. 연극보다 자유로운 영화라지만 시각화하는 데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사람은 그대로일망정 그 정(情)은 범도 되고 봉황도 되고 흑룡도 되고 청학도 될 수 있는데 하필 사람에 한정할 것인가.

즉 판소리는 그 소리꾼의 소리만으로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열어놓으니 소리가 보여주는 현란한 상상의 세계를 재현적인 방법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사랑가’ 끝부분은 부분창에서도 일쑤 생략된다.

 

김경아, <춘향가> 완창 공연(2015.11.7)

https://vimeo.com/147423610

 

아이고 우리 도령님 말씀도 잘도 허시네.

어디 그것뿐이랴. 자 노래 한번 들어볼래? 이 노래는 조금 거시기허기는 허나 나와 나와 둘이 있는 무슨 노래를 못 부르겠느냐?

자 노래를 들어라. ‘자 노래를 들어라. 초분천지개탁후 웅장허다 창덕궁, 강태공의 조작궁, 진시황의 아방궁, 진진허구나 홍문연을 들어간다. 번쾌자궁, 이궁저궁을 다 버리고, “이애 춘향아, 이리 오러나, 밤이 깊어간다. 이리 와.”, “아이고 부끄러워 나는 못 가것소.” “아서라 이 계집, 안될 말이로다. 어서 벗어라. 잠자자와락 뛰어 달려들어 저고리, 치마, 속적삼 벗겨, 병풍 위의 걸어놓고, 덩뚱땅 법중 여로다. 초동 아이 낫자루 잡듯, 우악한놈 상투 잡듯, 양각을 취어드니, 베개는 우그로 솟구치고, 이불이 벗겨지며 촛불은 제대로 꺼졌고나. 병풍이 우당퉁탕,

이리 한참 요란헐 제 말하지 않더래도 알리로다.

 

판소리에 상소리며 자극적인 내용이 적지 않은 것은 비밀이 아니지만 부분을 공연할 때는 이러한 부분들을 제외하기 마련이다. 창극으로 만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춘향이와 이도령 두 인물이 노래를 부를 때는 관객이 있어도 기본적인 청자는 이도령, 춘향으로 서로를 향해 노래를 불러준다는 설정이다. 성적인 표현이 구체적 대상을 향해 발화되니 불편한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판소리 광대가 혼자 소리를 할 때는 상황이 다르다. 이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관객 일반을 향해 발화된다. 자극적이기보다는 해학적이기 마련이다. 더욱이 이 대목에서도 ‘합궁’에서 나온 ‘궁’을 멀리 창덕궁에서 시작하더니 강태공이 방아를 만들고 ‘조작’이라 새겼다는 고사를 빌어다 방아와 성행위를 연관지어 조작궁이라 잇고 여기에 음란하기로 소문한 아방궁을 이으며 항우와 유방이 함께했다는 홍문의 잔치를 동음이의어로 불러와 에로틱한 상상을 확대해가는 전략을 구사하니 동음이의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합궁의 뜻을 강화해가는 묘미도 새롭거니와 솔직하고 과감하게 인간의 성적 욕망을 승인하는 인간주의에 또한 수월하게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완창 <춘향가> 2편을 연속해서 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소리꾼이 어떤 인물에 기반하여 스토리를 들려주는가이다. 계보마다 특징이 있으니 그에도 연관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소리꾼마다 음색이 조금씩은 다르고 광대로서 연상되는 인물도 다르다. 춘향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듣는 것이 좋을까? ‘춘향가’이니까 ‘춘향’ 자신에게 듣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월매나, 방자처럼 춘향 가까이에서 춘향의 일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듣는 것이 좋을까? ‘춘향’ 자신에게 들을 수 있다면 ‘춘향’의 감정을 좀 더 핍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춘향’ 주변 인물에게서 듣는다면 좀더 객관적인 상태로 춘향의 상황을 생각하며 판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이다.

 

 

김경아, 인간적 해학과 그 너머의 힘 김세종제 <춘향가> 완창 공연

 

kkapansori

 

 

이상의 영상은 11월 7일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있었던 소리꾼 김경아의 <김세종제 춘향가> 완창 공연이다. ‘김세종제’는 흔히 일컫는 동편제의 대표적 바디로 임권택의 영화 <춘향뎐>의 소리 주인공 조상현 명창, 2015년 올초 영면하신 성우향 명창 등으로 이어지는 유파로서 김경아는 성우향 명창에게 사사하였다. 1회 휴식시간을 가졌을 뿐 6시간 여를 홀로 감당한 김경아는 체력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인천은 전통보다는 근대 이후의 신문물이 승한 도시이다. 이 가운데 김경아는 자신의 노래공부뿐 아니라 애호가를 모으고 학당을 운영하면서 십수년 매진하였다. 그 결과 200석 공연장을 거의 채우고 무엇보다 이렇게 모인 관객이 긴 시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소박하기는 해도 아주 중요한 시사점이다.

TV 등 대중매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닌 바에야 광대든 배우든 결국은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는 관객을 스스로 얼마나 창출하느냐가 광대의 생애를 보장한다.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광대란 자신을 알아주는 팬덤의 열광 없이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팬덤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되 대중매체의 지원 없이 제 힘으로 도생하려면 관객이 알아서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관객을 만들어가며 일인다역으로 매진할 일인 것이다. 일개 소리꾼 김경아의 공연이 장하고 갸륵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노력 위에서 자력으로 공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행이 원만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휴식 1회에 해설시간 30분 등 총 6시간으로 기획된 공연은 소리꾼이 체력을 회복해가며 소리를 이어가기에는 촉박하였다. 게다가 순수하게 5시간에 완창을 소화하자니 충분히 창과 개별 장면을 음미하기에는 여유가 없어 얼마간은 쫓기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해설과 인터미션을 포함한 총공연시간을 8~9시간으로 잡고 휴식시간을 최소 2회 정도를 잡거나 저녁부터 시작하여 밤들도록 노니는 심야 판소리의 밤을 기획해보면 어떨까 싶다. 시간이 촉박하여 단가를 생략한 탓에 초반 소리가 다소 불안했던 것도 이후 구상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관객으로서 이번 공연의 성과는 앞서 언급했듯 광대가 ‘춘향 스토리’를 어떤 위치에서 살펴보고 들려주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경아의 <춘향가>를 듣고 있자니 마치 춘향의 어미가 된 기분이었다. 아끼던 내 자식, 소중하게 키우고 잘 되기를 바랐던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이 속절없이 곤장 아래 부서지고 가혹한 옥방에 갇혀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춘향’이, 외모나 밝히는, ‘춘향’의 진짜 가치는 알아보지도 못하는 천박한 놈에게 당치 않은 고문을 당하며 핍박받는 것에 가슴이 미어져 지나온 삶까지 모두 잘못이다 부정하며 함께 통곡하고픈 심정이 되었다.

김경아의 <춘향가>는 확실히 춘향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기보다는 미적 거리를 확보하고 춘향이를 아끼는 인물의 입장에서 춘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표현력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판소리의 극적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광대가 춘향의 연기를 할 때는 춘향 그 자체인 것이 좋다고 하겠지만 판소리에는 창극에는 없는 ‘광대 자신의 목소리’가 있다. 이 미적 거리는 ‘춘향’이 단지 이야기 속의 일개 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 소중하고 아끼던 존재, 가치, 의미 그 자체로 확대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시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춘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묻게 만드는 것이다. 소리꾼 김경아는 인간적인 해학과 그 너머에 부글거리는 분노의 힘을 표현하는 데 장점이 있다.

 

 

장문희, 강한 것을 이기는 부드러움 동초제 <춘향가> 완창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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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선물, 생각지 못했던 떡보따리는 김경아의 완창 <춘향가>만이 아니다. 28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국립창극단 레퍼토리 시즌의 판소리 완창 무대가 소리꾼 장문희의 <춘향가>였다. 한 달 안에 <춘향가>를 2번이나 듣다니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김경아의 <춘향가>는 동편제요, 장문희의 <춘향가>는 서편제여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번 장문희의 <춘향가>는 동초 김연수제였다. 완창이라고는 하지만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3시간 가량 편집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니 완창이라고 하는 것이 딱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판소리 공연이 여러 창자가 출연하여 판소리의 여러 대목을 들려주거나 <춘향가>라고 해도 ‘사랑가’, ‘이별가’ ‘옥중가’, ‘어사출도’ 등 몇몇 대목을 골라 한두 시간에 공연될 뿐인 점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가며 인물의 발전과 사건의 전개를 함께 겪는 시초를 삼을 수는 있으니 ‘완창’을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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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희, <춘향가> 완창판소리, 사진제공 : 국립극장

 

이번에는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한 뒤 홀로 외롭게 지내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김연수제의 특장이 있는 변사또 신연맞이를 거쳐 춘향이 옥고를 치르는 한편 이도령은 어사가 되어 내려와 춘향과 재회하는 장면까지였다. 유명한 어사출도 대목을 생략하는 대신 춘향이의 상황과 감정에 집중하였다. 서편제가 인물의 감정을 깊이 있게 묘사하여 애절하고 아름다운 <춘향가>로 특히 주목을 받는 터이며 동초제 <춘향가>는 여기에 더욱 장처가 있으니 소리는 제대로 골랐다고 할 것이다.

장문희의 소리는 청소년 시절부터 유명했다지만 따로 들은 적은 없던 터에 단가도 없이 시작한 첫 목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는 평우조나 평조에서 얼마나 여유 있게 맑고 부드러운 소리를 구사하는가를 중요하게 듣는데 장문희의 소리는 듣는 순간 반할 정도였다.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은 일왈(一曰) 청이라 하니 타고난 재능부터 남다르다는 평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연이 있었던 것이 불과 2일 전이라 따져볼 시간이 적은 것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장문희의 소리로 춘향의 애처로운 심사, 고통스럽고 불안한 심사를 함께 겪노라니 김경아의 <춘향가>와 확실히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김경아 <춘향가>에서 마치 춘향이를 잃은 듯이, 잃을까 두렵듯이 아프던 마음이 단지 춘향보다 월매에 가까운 나이 때문이었던 것이 아니라 소리꾼의 해석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김경아의 <춘향가>가 내 자식, 내 딸이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면 장문희의 <춘향가>는 춘향이가 되어 매를 맞는 기분이었달까. 고통의 강약, 가치나 대의보다 생존의 당위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소리꾼이 긴 소리를 하면서 한 번쯤 막히는 것은 용혹무괴라 하여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이 되면 허다한 사정도 모두 변명이 되는 법이다. 광대가 홀로 소리를 연마하며 독공을 하는 것은 자신의 소리를 참으로 알아듣는 것이 자신인 데서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평가나 주변의 칭찬에 안주하여 자신을 스스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지랖 넓은 걱정이 들었다.

국립창극단 레퍼토리 시즌으로 마련된 ‘완창판소리’는 10월 31일 정은혜 소리꾼의 <심청가>, 이번 11월 28일 장문희의 <춘향가>에 이어 12월 31일에는 제야의 판소리로 안숙선 명창의 박봉술제 <적벽가>를 앞두고 있다.

완창의 의미와 가치를 솔선해온 안숙선 명창의 활약에서 국립창극단의 완창판소리라는 기획도 시작되었다 할 것이나 이러한 도전이 좀 더 지평을 넓혀 젊은 소리꾼의 의욕적인 도전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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