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대극장 공연은 ‘언감생심’일까?/ 우상전

우리에게 대극장 공연은 ‘언감생심’일까?

우 상전(연극배우)

 

일주일 사이를 두고 무대에 오른 일본 연극 <해변의 카프카>(LG아트센터)와 한국 연극 <시련>(명동예술극장)은 당연히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열등의식을 갖고 살자’의 4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너무나 절실한 것은, 시급하게 연극공연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장에서 대극장 공연으로 공연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을 것이다. 첫째는 제작비가 없고, 둘째는 무대기법을 갖고 있지 못해서다.

따라서 두 공연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일단 제작비는 제치고 어째서 우리는 대극장 공연에서 연출적인 ‘무대기법’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왜 ‘무대발성’을 못해 배우가 소리만 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먼저 ‘조상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오래 전 동양 3국이 베세토연극제에서 우리의 ‘춘향전’으로 (비록 일부장면이지만) 자기 나라의 전통기법으로 공연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때 일본이나 중국은 자기들의 전통무대기법으로 아주 특색 있게 무대를 꾸며 내는데 반하여, 우리는 보여 줄 아무런 무대기법이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조상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당연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중후기에 서양문물인 안경, 망원경, 자명종, 양금, 거울의 5가지의 물품이 이 땅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영조대왕께서 망원경을 가리키며 “대저 이런 물건은 기교(技巧)한 것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고 말씀하셨단다.

우리 선조들은 성리학에 파묻혀 애당초 새로운 기술과학을 경원시한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조상님들은 망원경으로 먼 미래도 넓은 세계도 찾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연극계야말로 엘리트주의에 휩싸여 과학기술을 멀리하는 선조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 ‘개념’마저 없을까?

그런 이유에선지 우리는 오로지 극작가 양성(문학성)에만 몰두하지, 연출이나 연기와 같은 무대기법의 중요성에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해외의 잘 알려진 유명공연이 와도 한국의 연출가나 배우들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세계조류의 무대기법에 관한 관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 공연은 주로 소극장에서 이루어져 무대기법의 구사는 언감생심인 게 현실이다.

하지만 평론가나 기자들은 다르다. 해외공연의 관람은 그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심이 크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노상하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게 현실이다. 왜 이럴까?

“기획력과 마케팅 파워가 큰 극장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면 민간 극단 소극장의 공연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번 좌담에서는 ‘민간 소극장’의 인상 깊었던 공연이나 공연 경향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세계의 뛰어난 무대기법을 구사하는 해외공연을 빼놓지 않고 노상 접하고 즐기는 그들이 한국의 그 열악한 소극장 공연을 보고 건지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고 싶을 정도다.

또 ‘한국연극’에 써놓은 그들의 공연평에는 이런 글도 보인다.

“00(작품명)은 구속과 해방, 희망과 절망, 공존과 고립이라는 대립적 상황 속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비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애매모호한 어휘들로 무엇을 의미(설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또 “000(작가)은 윤리와 복수에 대한 집단적 연대, 복수가 권선징악의 실현이라는 고대적 세계관을 현대인의 시각으로 회의한다.” 이게 무슨 소린지 다들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를 포함한 모든 연극인들은 이런 글을 반세기가 넘게 읽고 있다. 정말 평가와 시상을 담당하는 평론가들이 이런 관점을 갖고 있으니, 해외의 유명예술인들의 공연조차도 보지 않는 현장연극인들에게 무대기법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윌슨’의 공연을 보러 KTX를 타고 전라도 광주까지 가서 자그마치 20억의 거액을 들여서 초청한 5시간짜리 공연을 보고 다니는 평론가들은 그래도 뭔가 현장 연극인들과는 생각이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현장 연극인들의 무대기법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무서운 질타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오랜 세월동안 알 듯 모를 듯한 공연평으로 엘리트 냄새만 풍기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영조대왕의 그림자를 보는 게 고작이라면 우리 연극공동체는 정말이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마치 망원경을 손에 쥐어주어도 ‘기교한 것을 만들지 않는 게 도리’라고 말하는 성리학을 숭상하는 조상님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여 한심스럽다.

단적으로 지금 세계연극을 이끌고 있는 것은 희곡(문학)이 아니다. 무대기술과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우리는 정말 ‘대극장 공연’을 할 수 없나?

‘해변의 카프카’를 만든 일본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는 당년 80세의 원로라고 한다. 그런 노인네가 어떻게 저런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기술과 연출을 무대에 도입할 수 있을까, 정말 감탄만 나올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연극은 정말이지 기술과 과학을 도입할 의도마저 갖지 못한 듯하다. 커다란 공간인 대극장에서 도대체 무엇으로 무대를 채울 것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항상 대사전달도 시원스럽지 않은 배우들로 채울 생각인지?

그래도 누구 하나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개선책을 논하는 사람도 없다. 오로지 소극장 공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대극장에서는 얼마나 손님이 많이 드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다 기획자들이 나서서 죽도록 학생들을 동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1. 그럼 왜 ‘대극장 공연’인가?
  2. 우리는 왜 ‘대극장 공연’이 불가능한가?

 

왜 대극장 공연인가? 한마디로 대극장 공연을 통해서 변화된 세상을 사는 연극관객들을 위해 ‘자본화’와 ‘대중화’로 봉사하지 않으면 연극의 명맥을 유지해 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어서 그렇다.

이건 뮤지컬의 번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연극은 암묵적으로 이를 포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소극장 공연이야말로 대극장 공연을 위한 ‘트레이닝코스’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출가나 배우들에게는 말이다. 또 소극장은 대극장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 극작가들을 위한 공연장일 뿐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대극장에 ‘무대기법’을 도입하려면?

 

먼저 대극장을 활성화시키려면 연출가들이 ‘무대기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 무대에 아무런 ‘볼거리’가 없어 점점 관객을 잃어가는 심각한 현상에 직면해 있다.

또 배우들 역시 무대에서 발성이 안 돼 오로지 마구 소리만 질러대고 있는 게 고작이다. 즉 연출과 연기가 실종되어 있는 게 우리의 대극장 공연이다. 그러니 연극의 자본화와 대중화가 실종되어 지원금에만 기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럼 우리는 왜 무대기법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 주장은) 국립극단이 매번 신작을 올리는 게 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비교적 평가가 좋았던 명동예술극장의 공연 중에서 골라 앙코르를 시도하며 무대기법을 확장하고, 신작은 신중히 고려해 무대기법에 관한 기본적인 기술연마를 시도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연출가 단독의 제작 체제를 ‘다원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즉 예술감독, 극작가, 번역가, 미술(조명, 음향)감독, 드라마트루거, 연기코치, 보이스코치, 홍보담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처음부터 제작에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총합제작시스템으로 바꾸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매번 공연 때마다 자기 식구들끼리 모여 ‘가내수공업’을 이어가서는 대극장 공연은 희망이 없다.

 

우리는 왜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을까?

 

한국의 현대연극은 전통적으로 기술(기법)을 천시해 왔다. 아니 무대기술에 대한 개념과 인식을 갖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런 처지에서 – 무대기법에 대한 관심 없이 한국연극이 명동예술극장에서 대극장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입으로는 실험극을 외치면서 전혀 실험이 없는 무대를 선호해 왔을 뿐이다. 이러다가 자칫 ‘동원된 관객’이 아닌 일반 관객들의 외면으로 한국연극 전체가 공멸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왜? 이제는 ‘글로벌 시대’를 맞아 외국의 훌륭한 공연들이 SPAF나 LG아트센터를 통해 속속 도입되므로 해서 (요사이는 국립극장의 스크린공연을 통해서도) 관객들의 눈이 점점 더 높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어서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 연극인들의 기술에의 관심도는 어떠한가?

 

  1. ‘모노로그’란 무엇인가?

 

먼저 연기의 ‘모노로그’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대학입시전형을 통해서 정착한 게 ‘모노로그’일 것이다. 이게 오래전부터 연기에 입문을 도모하는 입시생들의 실기전형으로 정착한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연기의 입문을 모두가 ‘모노로그’로 시작하는 나라다.

그래서 시중에 ‘모노로그’를 모은 ‘독백 집(集)’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런 (입시의 관문인) ‘모노로그’조차도 연극계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원래 ‘독백’이란 배우가 혼자서 말을 하는 극작에서의 테크닉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시대에 크게 발달한 극작술(무대기술)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등장인물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길게 말만 해도 (단순히 길게 말한다는 이유로) 이를 ‘독백’이라고 분류해서 독백 집에 넣어 초보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배우지망생들은 연기입문에서부터 (상대를 향해) 말을 못하고 ‘읊어대기’부터 배우는 꼴이 되고 있다. 그러니 자연히 한국의 연극배우들은 ‘말을 못하는’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현실이니, 한국의 관객들은 소리만 지르는 배우의 연기를 늘 대극장에서 구경하게 될 뿐이다.

거기다 기법을 모르는 기자와 평론가들이 읊조리는 연기를 ‘명연기’라고 칭하면서 아우성을 치니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처럼 개념도 없고, 기술을 위한 탐구도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대극장을 위한 연기술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1. 실험극과 상업극의 구별

 

우리는 연극을 일반적으로 ‘실험극’과 ‘상업극’으로 분류한다. 언제부터인가, ‘대중극’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 공연을 실험이나 상업으로 분류하는 것은 미술계로부터 유래된 듯하다. 아직도 미술계는 실험미술과 상업미술로 즐겨 분류하고 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피카소의 추상미술은 실험미술인가, 상업미술인가? 분명 처음에는 ‘실험미술’이 확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상이 미술계의 대세가 되자 그의 입체화는 엄청난 팬을 확보하게 되고, 거기다 화상들에 의해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느니, 결과적으로 ‘상업미술’로 전환하게 된 게 분명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상업적 목적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이발소 그림’도 없지 않다. 하지만 미술계는 이를 미술로 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실험과 상업이라는 분류가 얼마나 애매모호한 분류이자 부정확한 예술용어일까 싶다.

그걸 항상 관객을 모아 매일 밤 흥행을 도모해야 하는 연극이 그런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 사용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일까? 이런 용어사용으로 부적절한 ‘고정관념’이 생겨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는 게 우리 연극계의 현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다.

오래전 ‘실험극장’이 ‘Experiment Theater company’이름으로 미국공연을 갖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들었다. 미국연극인들이 극단이름만 보고 ‘실험극’인줄 알고 구경을 왔다가 아니라고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공연이 ‘상업극’이라고 불리어지면 치욕으로 여기는 관행(?)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한국연극은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비(非) 상식적이고 무(無) 개념적인 게 태반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결국 한국연극의 건실한 무대기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한국연극이 기술발전의 토대가 되는 ‘자본화’와 ‘대중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험극단의 연극 ‘에쿠우스’

 

여전히 실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실험극단의 ‘에쿠우스’를 예로 들어보자. 단적으로 이 공연은 ‘실험연극’일까 아니면 ‘상업연극’일까? 실험극 성격이 강했던 초창기에 이 공연을 무대화하려면 당연히 ‘실험적’인 무대기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험극장이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실험적 무대기법을 알 턱이 없어 고생한 에피소드를 한번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초연 당시 무대감독을 한 양성진의 회고담은 이렇다. 당시 실험극단은 운현궁소극장에서 주로 활동하던 때였다.

‘에쿠우스’를 연습하다고 무대기법에서 벽에 부딪쳤다고 한다. 바로 ‘권투링’처럼 만들어진 무대를 회전시키며 말(馬)형상의 투구를 쓴 배우들이 벌이는 ‘몹신’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본을 들여다보아도 이 장면을 처리할 연출적 상상력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대본만 보고는 이 장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씬 연습’을 하다가 이 장면에 오면 자연히 연습을 멈춰질 수밖에. 그러니 스텝들의 고민이 날로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당시는 ‘로열티’라는 개념도 없던 시대여서 당연히 외국 연출가를 초빙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그런 불상사(?)를 피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우리의 초창기의 뮤지컬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대기술을 몰라 쩔쩔매던 시절 말이다.

공연 날은 임박해 오고, 풀리지는 않고, 그래서 스텝 모두가 한숨을 쉬며 극장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때 마침 홀로 여행 중이던 네덜란드 배우가 극장 앞을 지나다가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는 지나가다가 포스트를 보고 너무나 반가웠다며, 자신이 네덜란드의 ‘에쿠우스’공연에서 ‘말’역을 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그가 자세히 그 장면을 몸소 가르쳐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쿠우스’가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했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실험극단은 흥행공연을 지속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30년도 더 된 시절의 옛이야기다.

이처럼 현대연극의 공연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 바로 연출가에 의한 무대기법의 창조다. 한마디로 실험과 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연극은 여태껏 이에 대한 이해도 개념도 없고 기술축적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번역극의 경우는 아직도 ‘그저 베끼면(표절)’ 된다는 안이함이 전부다.

그러니 창작극을 하면 그나만 ‘베낄 것’도 없어 일본연극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70년대 식’ 연출로 그냥 밀어붙이는 게 현실이다.

그에 반하여 일본연극 ‘해변의 카프카’는 외려 내용은 하루키의 소설을 무대화해서 별로인데도 불구하고, 무대기법이 새로워 현대적인 ‘실험극’으로, (비싼 입장료인데도 불구하고) 관객친화적인 ‘상업극’으로 변신에 성공해 관객의 환호를 받고 있는 현실을 우리 땅에서 우리 모두가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귀감삼아서라도 보다 발전된 무대기법을 익힐 ‘상상력의 확대’와 ‘교육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연극의 ‘현대사’ 고찰

 

우리도 일찌감치 대극장에 뮤지컬공연을 도입한 나라다. 현대극단의 ‘빠담빠담’이 1970년대 후반에 공연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 대극장 공연인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이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아니 그 이전에 추송웅 선생의 연극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가 이미 70년대 말에 시민회관 대극장(1100석)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그런 한국연극이 이제는 대극장 공연을 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초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연극이 어쩌다가 소극장 위주의 ‘부조리연극’에만 빠져들었을까를 먼저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건 한국연극의 이론가들이 먼저 답을 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좌우간 왜 한국연극은 그동안 ‘소극장 공연’에 모든 것을 걸었을까?

내 생각에는, 우선 우리의 창작극들이 대극장을 넘보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창작극은 해야 하고, 대극장을 소화할 희곡은 나오지 않으니, 마치 한국연극은 소극장 공연을 해야 ‘예술적’이라는 고정관념이 정착된 것일 거다. 그러면서 점점 공연규모가 쪼그라들었고, 동시에 무대기술마저 점점 더 퇴화해 간 것일 거다.

그런 처지에서도 대극장 공연은 평론가들에 의해 ‘상업극’ 취급을 받게 되고, 자연히 소극장에서만 놀게 되니, 당연히 대극장 공연을 위한 무대기법은 더욱 더 무시될게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제작비가 없음을 핑계 삼아, 마치 소극장에서 놀아야 예술가인척 허세를 부린 꼴이 되었다. 그러면서 무대기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한국연극이 지탱되고 있었던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우리는 현대연극의 세계적 추세마저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가난을 이유로 해서 말이다. 세계가 어떤 무대기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어떻게 무대에서 연출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마저 두지 않게 된 것이다.

매번 엄청난 돈을 들여 해외의 유명공연을 들여와도, 외려 무대기법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평론가나 이론가만 구경할 뿐, 현장연극인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는 무대기법을 모르는 평론가들에게 절대로 무대기법의 무식함을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연극인들이 말이다.

그러면서 외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대극장연극을 ‘공공극장에 의한 공연’으로 폄훼되기 일쑤며, 마치 ‘상업극’을 하는 것처럼 매도되고 있었던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처지에서 명동예술극장의 공연은 늘 대학의 워크숍공연 수준을 넘기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지적을 하는 연극인도, 물론 평론가들도, 그리고 당연히 극장 운영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극장공연의 발전을 위해서) 국립현대미술관처럼 외국인의 영입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대연극에서의 무대기법의 중요성 때문에라도 외국연출가나 외국인 예술감독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현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왜 ‘무대발성’을 못할까?

 

우선 먼저, 한국에서 공연은 물론이고 연기를 논하면서까지 ‘대극장 공연’이니 ‘소극장 공연’이니, ‘영상매체’니 운운해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너무 부끄럽게 하는 게 사실이다.

사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배경에는 바로 무대기법의 가장 중요한 ‘연기적 요소’인 무대발성을 우리 연극계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게 원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한, 얼마 전 한국에 온 영국의 ‘글로벌극장’의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야외공연을 통해서 (음향기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홍콩 여배우의 무대발성을 떠올리면, 서양배우에 비해 동양배우들에게 무대발성이 얼마나 벅찬 일이며 이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 우리는 왜 대극장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기법’인 ‘무대발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직도 이를 논하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무대발성’이란 무엇이며, 왜 대극장에서 무대발성이 중요한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극장에서 ‘무대발성’이 되지 않는 이유

 

사실 내가 국립극단에 입단하던 1990년 초반만 해도, 국립극단 배우들 역시도 대극장 공연에서의 무대발성이 신통치 않아서, 무대 전면에 낮게 마이크를 설치하거나 천정에 매달아놓고 공연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 후부터 그런 일은 무대에서 사라졌다. 왜? 나름 이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전하지 못했다. (개념도 모른 채) 초대형극장에서 ‘소리 지르기’가 전부였던 게 사실이다. 이 극장은 배우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대사가 들리지 않는 무대여서 배우들이 대사를 칠 때는 항상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면 국립극장의 해오름 무대는 배우의 ‘무대발성’이 불가능해서 연극공연장으로서는 부적합한 무대인 게 사실이다. 이런 무대에서 배우가 활동을 하게 되니 당연히 단원들의 연기가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이를 이해하지 못해, (30여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동예술극장에서 천정에 마이크를 매달고 공연을 해야 하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대극장 공연에서의 무대발성이 전진은커녕 되레 뒷걸음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말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왜 우리는 ‘무대발성’을 해결하지 못할까?

 

연기술에서 무대발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연극배우들’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게 안 된다는 것은 일단 연극배우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대발성’은 단순히 ‘무대기법’에만 머물지 않는, 연극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 할 수밖에 없다. 이게 연극이라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이렇다.

 

  1. 대학의 연기교육을 망치고 있는 것은 ‘무대발성’이다.
  2. 연극배우의 연기를 망치고 있는 것은 ‘무대발성’이다.
  3. 연극배우의 영상매체 진출을 막고 있는 것도 ‘무대발성’이다.
  4. 연극배우가 아무리 영상매체에 가서 출세해도, 연극무대에서 졸연(拙演)을 하게 되는 것은 ‘무대발성’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무대기법인 ‘무대발성’을 왜 한국연극계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무대발성’이 필요 없는 영상매체에서는 배우가 아무렇게 발성을 해도 ‘음향기기의 편집’ 덕분에 그다지 흉이 되지 않는다. 또 이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일도 없다. 하지만 ‘라이브’인 연극무대에서는 무대발성이 안 되면 공연을 망치게 된다. 왜 그럴까?

 

  1. 전달력이 훼손된다.
  2. ‘말을 못하는’ 배우가 된다.
  3. 이로 인해 ‘인물창조’가 안 되기 때문이다.
  4. 번역극의 경우 ‘번역극쪼 연기’를 극복하기 힘들다.
  5. 항상 TV를 통해 용이하게 배우의 대사를 들었던 관객들이 배우의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관극에 크게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대발성’을 위한 ‘발성’과 ‘호흡’의 개념

 

하나, 화술에서 발성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발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발성이 가능해, 구태여 ‘발성’이란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술에서는 다르다. 배우가 일상처럼 자기 의지대로 목소리를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가 하는 말이 아니어서 ‘충동’이 작용하기 힘들어서 그렇다. 극작가가 써놓은 등장인물의 말이어서, 자연히 암기를 해서 목소리를 내야 해서 일상처럼 언어메커니즘이 저절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술에서 좋은 배우란 일상처럼 언어메커니즘을 능숙하게 발휘하는 배우를 일컫는다.

 

둘, 발성의 에너지인 ‘호흡’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의 호흡은 ‘들숨’뿐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날숨’은 없다. 생명유지를 위해서는 ‘들숨’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숨은 그저 들숨의 반작용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날숨을 이용해’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예술 활동은 날숨을 잘 이용하는 것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날숨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날숨’을 예술 활동에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호흡, 발성, 공명훈련을 하는 것이다. 배우가 무대발성을 하는 것도 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셋, 무대발성에서 ‘복식호흡’을 거론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화술을 위한 발성훈련에서 연극인들은 ‘복식호흡’을 거론한다. 하지만 일반적(의학적)으로 복식호흡이라 함은 ‘아랫배를 누르면서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쉴 때는 입으로 천천히 (날숨을 2배로 해서) 내뱉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니까 의학적으로 설명되는 복식호흡은 건강유지를 위한 것으로 예술적 ‘목소리’를 내기 위한 화술에서의 호흡법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럼 화술에서 요구되는 복식호흡이란, 한마디로 ‘빨리 코로 숨을 마시고, 실제로는 마시는 줄도 모르게 마시면서, (건강호흡보다 더 많은) 날숨을 확보해 쉽게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데 있다. 항상 사용하기 좋게 날숨을 넉넉히 확보하는데 있다. 이를 나는 화술에서의 ‘호흡의 지지력’이라고 칭한다.

 

넷, 왜 무대발성에서 ‘호흡지지력’이 필요한가?

한마디로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배우가 목으로 소리 내지 않아야 한다. 무대발성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목으로 소리를 내면 ‘성대 결절’의 위험만 커질 뿐, 무대발성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되레 딕션에 문제가 생겨 대사를 잘 알아듣기만 힘들 뿐이다. 그래서 호흡의 지지력에 의한 발성을 해야 한다.

따라서 지지력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발성법이 목으로 하지 않고 ‘가슴을 울려’ 목소리를 내는 발성법인 것이다. 그래야 ‘소리를 증폭시킬’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는 호흡지지력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오랜 경험에 의해서, 또 영국의 시실리 베리 할머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공인된 훈련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무대발성’이란 무엇인가?

 

혹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 달라서 배우들이 당황해 할지도 모르겠다.

 

첫째, 인간의 ‘말하기’에는 혼자 말(獨白: 제1말하기)과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며 말을 하는 대화(對話: 제2말하기)가 있다. 그런데 유독 연극배우들에게만 이도저도 아닌 ‘제3의 말하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3말하기’를 설명하면 이렇다.

‘제2말하기’에서는 상대가 자기의 말을 잘 알아듣도록 하는 방법은 ‘소리 지르기’가 전부다. 직접 상대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 된다. 그런데 ‘제3의 말하기’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전달의 대상이 ‘다중’인 관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대에서 ‘제2말하기’처럼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소리를 지르면 ‘관객인 다중’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왜? 막상 배우가 실질적으로 무대에서 말을 건네는 상대는 관객이 아닌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상대배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말하기’처럼 소리를 지르면 상대와 말하는 ‘리듬과 톤’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제3 말하기’는 배우가 상대배우에게 말하는 리듬과 톤을 파괴시키지 않게 말을 하면서, 동시에 다중인 관객에게도 잘 들리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무작정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게 바로 무대발성이다. 무작정 소리를 지르면 말하는 리듬이 파괴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에서 ‘무대발성’이란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에게만 요구되는 독특한 기술인 것이다. 따라서 무대배우가 개념이 없이 ‘제3의 말하기’를 시도하면 국립극단의 ‘시련’의 배우들처럼 소리만 지르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말하기를 평소에는 하지 않아 개념이 없고 훈련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데 있다. 물론 일상에서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 말은 하지만, 결국에는 그 옆에 있는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의도적으로 말하는 경우다.

하지만 이는 짧은 거리인데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하는 것이어서, 무대의 배우처럼 먼 거리의 많은 다중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는 어려움에서 차이가 크다.

 

셋째, 따라서 ‘제3말하기’를 시도하려면 개념과 기술이 필요하다. 우선 배우가 자기의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발성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즉 ‘호흡의 지지력’을 확보할 줄 알아야 한다.

이의 핵심이 바로 ‘가슴을 울려’ 발성을 발성법인 것이다. 그래야 무대발성을 위해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그런데 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슴을 울리는’ 발성을 하면 그냥 목으로 발성하는 일상보다도 더 목소리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자기 신체의 공명기능을 확대해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무대발성’이란 결과적으로 연극배우의 이율배적인 연기술인 셈이다. 즉 객석을 향해 잘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면 관객은 잘 들리는 대신에, 상대에게 말을 하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파괴되고, 자연스러운 리듬을 살리면 관객의 귀에 대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의 상반된 결과를 잘 극복하는 게 ‘무대발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대발성’이란 이 둘(상대와 객석)을 다 만족시켜야 하는 연기술의 고도의 테크닉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호흡과 발성, 공명기능을 확대시키는 훈련이 필수적이다.

 

다섯째, 여기서 분명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배우의 ‘무대발성’이 불가능한 공간(극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소리만 지르면’ 별문제지만, ‘말하는 리듬’까지 살려내려면 이를 이룰 수 있는 적합한 공간이 배우에게는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국립극장의 ‘해오름 무대’는 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무대인 것이다. 따라서 안호상극장장이 극장을 새로 개축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객석 뒤에 앉으면 배우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무대이니 그렇다.

이런 결함으로, 옛 국립극단 단원들은 소리를 지르다 ‘말을 못하는’ 배우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배우가 무대발성을 하려다 자기 목소리의 조절력을 상실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극장에서의 공연은 아예 하지 않든가 아니면 야외공연처럼 음향기기(와이어레스 마이크) 등의 철저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당시에 이를 건의했더니, 극장 측이 이에 필요한 음향기기의 도입에 2억 원이 든다며 예산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해서 무산된 적이 있다.

 

  1. 그럼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가?

 

1) 발성훈련의 3원칙

 

배우가 ‘제3의 말하기’를 이행하려면 먼저 ‘발성훈련의 3원칙’을 알아야 한다. 이를 고수해야 일반적 화술발성- 말하는 리듬과 톤을 유지하면서 무대발성도 완성시킬 수 있다. 그리고 배우가 이를 위해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1. ‘가슴을 울려’ 발성한다.
  2. 코 부위를 울려 (사이너스공명을 살려)발성한다.
  3. 입술 끝으로 소리가 나가게 한다. 그렇게 해서 몸 전체가 공명기능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가슴을 울려’ 발성을 하라! – 에너지를 얻기 위한 발성

 

‘발성의 3원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가슴을 울려’ 발성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가 ‘제3의 말하기’에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처음부터 소리를 지르면 상대에게 말하는 ‘리듬’이 파괴되므로 반드시 배우가 ‘작은 목소리’로 대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리듬을 파괴하지 않는 ‘작은 목소리’를 내는데 유용하고, 배우가 자기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데 용이한 발성법이 바로 ‘가슴을 울리는’ 발성법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연극배우라면 이 발성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 발성법을 추구하면 영상매체나 소극장에서 활동하더라도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극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기에도 아주 안성맞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다음에 ‘지지력’과 공명기능을 확보해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면 된다. 그리고 목으로 소리를 내는 배우는 절대로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연기에 입문하는 입시생들이 선행학습으로 (입시학원이나 사교육에서) 입시전형을 위한 오디션에 대비한다고 (목으로) ‘소리를 지르기’를 시작하면 배우의 연기와 발성이 망가지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여기서 한국의 연극배우의 비극(?)이 싹트기 시작하는 게 분명하다.

따라서 수험장에서 교수들이 입시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대발성이 아니라, 작은 소리로 얼마나 잘 ‘말하는 리듬’을 표현하는가를 관찰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입학을 한 후) 개념을 이해하고 제대로 된 발성훈련을 익혀 ‘무대발성’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교육과 입시를 통해 잘못된 ‘소리 지르기’를 강요받게 되면, 그들은 자칫 ‘리듬’이 파괴돼 말을 못하는 일생을 ‘불쌍한 배우’로 성장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3) 그런 다음에 공명기관을 이용해 목소리를 확장시켜라. 배우가 자신의 공명기능을 총동원해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유지하면서도 객석에 목소리가 깊이 침투할 수 있도록 무대발성을 훈련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배우 중에서 ‘지지력이 확보된’ 가슴을 울려 대사를 치는 배우는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그것도 훈련에 의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대극장 무대에 서면 ‘소리를 지르는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이른바 ‘스타’라고 칭하는 배우 중에 가슴을 울리며 대사를 치고 있는 것을 간혹 목격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 조금만 훈련하면 무대발성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대발성과 번역쪼 대사구사

국립극단의 ‘시련’의 경우, 아직도 일부 배우들이 ‘번역쪼 대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옛날에는 이를 ‘노랑 목소리’라 칭하며 번역극을 할 때면 무척 심한 현상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런 ‘노랑 목소리’의 특징은 ‘말하는 리듬’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리듬은 일정한데 목소리로 인물을 창조하려는 의욕(흉내?)은 앞서는 게 특징이다. 그러면서 적당히 대사를 굴려 멋을 부리는데 있다. 대표적인 어느 여배우의 대사를 상정하면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는 창작극을 할 때 목소리의 변화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건 아마 번역극을 하는 동양배우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좌우간 요즘 젊은 배우들이 ‘노랑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의문이 들기조차 한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배우가 멋을 부리려는 것일까? 또는 번역문장의 대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가 ‘제3의 말하기’가 제대로 안 되는 처지에서 등장인물을 창조하려는 고육책에 의해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이런 과정에서 배우가 인물의 목소리를 내려다가 번역문장인 대사에 홀려(?) ‘노랑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거기에는 배우의 ‘멋 부리기’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작용해 ‘노랑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게 사실이다.

좌우간 이는 다음에 ‘연기에서의 발성의 가치’를 논하면서 깊이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ps. 이미 나는 화술에 관한 많을 글을 ‘오늘의 연극’(www.ttis.kr 26호, 2012년 11월)을 시작으로 계속해 많은 글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누구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 따라서 이를 기화로 다시금 ‘무대기법’에 관한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3 thoughts on “우리에게 대극장 공연은 ‘언감생심’일까?/ 우상전

  1. 우리 배우가 무대발성에 취약한 중요한 원인을 빠뜨린 것 같아 추가하고자 한다. 우리는 대극장의 경우에도 무대연습을 삼사일 하는 게 고작이다. 이게 배우들이 무대에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서양처럼 아예 자기들이 설 무대에서 연습을 시작하는 게 정석인 것 같다. 우리도 국공립극장에서는 자기 극장이 확보되어 있으므로 이런 관행을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우리 배우들의 무대발성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대학에서부터 이런 연습과정을 익히는 게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번에 공연될 국립극단의 ‘겨울이야기’의 헝가리연출가의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한국경제지에 실린 내용이다.”셰익스피어 시대에는 극장에 관객이 오지 않으면 배우들이 굶어죽었어요.그만큼 대중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죠. 우리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고급예술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대중과 호흡하는 작품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고급문화와 대중예술을 완벽하게 결합한 사람입니다.그의 연극을 보면 성공적인 연출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도구가 없습니다. 소의 피도 사용하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음악을 넣기도 했어요. 대중이 예술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한 사람이예요. 연출가로서의 셰익스피어는 또 다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장인’이었다.” 음미해볼 이야기인 것 같아 추가한다.

  2. 하수상한 세원에 좋은 글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그간 십수년간의 구력을 통해 어설프게나마 행했던 발성과 화술을 이렇게 실질적인 사례를 들어 편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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