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 오세곤

(제63호 편집인의 글)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브레히트는 “이화효과”를 주장했다. 다른 말로 “낯설게하기”라고도 하고 “거리만들기”라고도 하는 이 표현은 뭐든 너무 집착하며 가까이만 들여다보면 전체의 모양이 안 보인다는 말과 통한다.

1987년 6.29 선언이 있었다. 드디어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될 거라고 믿으며 다들 환호했다. 그러나 두 김씨가 모두 대통령이 되겠다고 우겼다. 그리고는 둘 다 대통령 선거에 나섰고 결국 12.12 반란의 주역이자 군부독재의 2인자 노태우를 당선시키고 말았다. 물론 결선투표 제도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우리에게는 아직도 요원하다.

그때 두 김씨는 모두 3자 대결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양 진영을 지지하는 훌륭한 논객들이 나서서 현란한 언술로 그 허망한 논리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국민들 대부분은 결선투표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결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역시 상식대로였다. 어릴 때부터 배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구호가 그대로 입증되고 만 것이다. 그런 뻔한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 국민들은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사실 이후 벌어진 3당 합당과 망국적 지역 갈등 심화, 그리고 과거 청산의 무산 등은 모두 그때부터 잉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착은 조급증을 낳는다. 그것은 자주 순리를 거스르게 한다. 조금만 거리를 떼고 보면 쉽게 보이는 것도 못 보게 만든다. 그래서 나설 일과 안 나설 일을 구분 못 하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판단 못 한다. 그렇게 파멸한 역사적 사례가 수없이 많아도 이번만은 예외라고 억지를 쓴다.

대통령이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요것이 돼야 다음 것을 하고, 고것이 돼야 또 다음 것을 할 텐데 도무지 첫 단추를 끼울 수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조급한 것이다. 임기 5년 중 3년을 썼건만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는 것 같다. 그래 더욱 조급해서 주위를 닦달한다.

확률이 있건 없건 정해진 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겠다는 건 국가 경영에서는 금물이다. 오히려 그건 예술가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확률이 거의 없어도,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서도 끝까지 매달린다. 그래서 예술을 미친 짓이라 하는 것이다. 숱한 실패를 딛고 일생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하는 예술가는 작품과 이름을 남기지만 대부분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 미친 짓을 계속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예술은 자신을 망치는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비록 실패해도 자신만 망치거나 가족 등 주위 사람 약간만 조금 불편하게 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나랏일에 외줄 타기는 곤란하다. 최선과 차선, 차차선, 차차차선의 방도를 갖고 임해야 한다. 단 하나의 길을 정해 놓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 용납될 수 있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그 길을 따르는 것만이 선이고 그것을 거부하면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고 미신이다. 시대착오적인 교과서 국정화도, 예술에 대한 치졸한 검열도, 위안부 졸속 합의도 모두 그 독선의 산물이다.

조급증을 벗어버려야 한다. 지금 당장, 여기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아집과 독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책에 코를 처박지 말고 멀리 떼어 놓고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가 아닌 숲의 전체 모양을 보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온 사회가 날마다 가마솥 끓듯 뜨겁기만 하다. 이 흥분 상태를 식히고 차분한 이성을 찾는 방법으로 브레히트의 “이화효과”를 제안한다.

2016년 1월 4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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