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문화체육관광부 원로예술인 지원사업 선정작 공연총평/ 박정기

2016 문화체육관광부 원로예술인 지원사업 선정작 공연총평

 

1, 극단 춘추의 문고헌 예술감독, 김영무 작, 송훈상 연출의 <노자일기>

 

대학로 문화공간 엘림홀에서 극단 춘추의 문고헌 예술감독, 김영무 작, 송훈상 연출의 <노자일기>를 관람했다.

 

김영무(1943~)는 대구 대륜 고등학교와 대구 교육대학 출신으로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쫓겨난 사람들>로 입상하고 같은 해 국방부 현상공모 장막극 당선해 등단했다.

 

<쫓겨난 사람들><할미의 씨앗><구름 가고 푸른 하늘> <신랑나이 65세> <우리들의 김무용> <역풍(逆風)> <하늘 천 따지><선녀는 땅위에 산다><스타열전><탈속(脫俗)> <당나무가 우는 밤에> <(무용극) 한밭에 살고 지고> <별에서 들리는 소리> <소나무집> <퇴계선생 상소문> <황진이> <강변 블루스> <달은 달><오토바이 옆에서><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오페라)아 고구려 고구려- 광개토 호태왕> <매화가 피는 뜻> <토스카 인 서울> <포옹 그리고 50년> <부활 그 다음> <시집가는 날> 등을 집필 공연했다.

 

한국 희곡 문학상, 행원 문학상(行願 文學賞), 한국문학상, 예총예술문화상, 예술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무대는 깊은 산 속에 있는 산장인 듯하다. 정면에 한 단 높이의 무대 좌우로 연결된 단이 있고,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단 좌우 끝에 나비 날개 같은 벽면이 눈에 띤다. 하수 쪽에 등퇴장 로가 있고, 무대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긴 안락의자가 놓여있다.

 

나이가 든 가장과 과년한 딸이 산장에 살고, 투숙객은 장정 2인으로, 한명은 형사, 한명은 장기복역수인데 가석방 중 산사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는 설정이다. 가장은 인물이 단정하고 말씨나 행동거지에서 품격이 드러나, 국 공영 기업이나 대학에서 퇴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딸은 노처녀인 듯싶지만 예쁘디예쁜 모습에 교양미가 넘쳐 남성관객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층 투숙객은 형사로, 장기 복역수가 가석방 기일이 지났음에도 교도소로 되돌아오지를 않으니, 그를 체포하려고 뒤따라 온 것으로 소개가 된다. 그리고 이 산장에서 그를 발견하고 복역수에게 수갑을 채운다. 그러나 비록 범인일지라도 자신의 산장 투숙객에게는 수갑을 채울 수 없다며 가장은 사냥총을 형사에게 겨누고 수갑을 풀어주도록 요구한다. 형사는 가장의 요구를 따른다.

 

장기 복역수는 실은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으로 소개가 된다. 길거리에 쓰러져 신음하는 여인을 도와주려고 부축한 것이 칼의 묻은 지문으로 해서 여인살해범으로 오인되어 억울하게 장기 복역한 것으로 소개가 된다. 복역수는 가석방 기간이 지나도록 자신의 모친이 머물고 있다는 산사를 찾아 다녔고, 그 산사 부근에 위치한 바로 이 산장에 투숙을 했다가 그를 추적해 온 형사에게 발견되어 체포된 것이다.

 

이 산장의 딸과 복역수와의 짧은 만남에서 복역수의 모습이나 심성이 착해 뵈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동정심에서 두 남녀의 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동침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복역수는 다시 어머니가 머무르고 있다는 산사를 찾아 떠나려한다. 가장이나 딸 그리고 형사가 그를 제지하려 들지만, 복역수는 모친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산장을 떠나는 장면에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정 욱이 가장으로 출연해 모처럼 연기의 진수를 보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대사에서 경륜이 느껴지고 극이 고품격 고 수준으로 조성된다. 권남희가 딸로 출연해 예쁜 모습과 열연으로 무대를 꽃밭으로 장식하고 향기까지 흩날리는 분위기로 이끈다. 윤상현이 형사, 이창익이 복역수로 출연해 2인 모두 훤칠한 키에 잘생긴 모습과 호연으로 여성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갈채를 이끌어 낸다.

 

의상감곡 이규태, 음악감독 강석훈, 무대디자인 민병구, 무대감독 신명기, 기획 안민상, 소품 김 단, 조명기술 박주창, 홍보 백이주, 온라인 홍보 서현호, 진행 전애린, 하우스매니저 박준우, 조연출 조용훈, 음향기술 신선호, 사진 포스터 팸플릿 그래픽시선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기량과 열정이 제대로 드러나, 극단 춘추의 문고헌 예술감독, 김영무 작, 송훈상 연출의 <노자일기>를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어 냈다.

1월 11일

 

2, 극단 한밝의 무세중 극본 연출의 민족 굿 <얼빛 아리랑>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극단 한밝의 무세중 대본 연출의 <민족 굿 얼빛 아리랑>을 관람했다.

 

무세중(巫世衆1937~ 본명 金世中)은 서울고와 성균관대학교 출신이다. 1960~70년대 꼭두각시 연극 박첨지 놀이 해설가로 활약했다. 돌연 유럽으로 떠나 1977년 독일 베를린에 정착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극단 테아트로 무(Teatro Mu)을 설립하고, 유럽 연기자들과 전위 실험 공연을 하는 동시에 우리 탈춤 순회공연과 전시 강연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82년 잠시 귀국하여 완전히 벌거벗고 하는 공연으로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84년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 해 대동전위극회를 만들어 무당이나 굿과 연관된 공연과 각종 행사에서 나체로 출연하는 등 일부 관객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20년 전 북한산성 입구 맞은편 부락에 정착해 현재까지 500여 개가 넘는 민속 굿과 연관된 공연과 나체공연을 지속해 오고, 자신의 공연과 연관된 학술발표나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얼빛 아리랑은 삼신할머니를 등장시켜 아리랑의 유래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외래종교가 들어와 민족 고유의 신앙을 붕궤시킨 과정을 그려낸 연극이다.

 

무대는 삼면 벽을 백색 광목으로 감싸고, 정면 중앙에 비석을 세웠다. 삼신할미는 백색광목천으로 만든 한복을 입었고, 초혼녀와 청년 남녀 출연자 역시 백색광목의상을 착용하고 출연해 마치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듯싶은 느낌이 들도록 연출된다. 환인과 단군의 의상이 제왕의 풍을 띄고,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부처는 황금빛 왕관과 금빛의상, 명 청 시절의 유교의 대표로 상징되는 공자는 도포와 의관, 일제치하에서의 신사참배와 신상은 왜색 복장으로, “내 고향 앨라배마” 노래와 미국으로 상징되는 모자와 복장으로 기독신앙의 전파가 구현되는가 하면, 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외래 종교가 이 땅 고유의 신앙을 무속으로 몰아붙이고 백의민족이 4천년 이상 섬겨왔던 옥황상제를 한낱 잡귀로 몰아 부친, 조상 상실 내지 민족성 상실의 역사가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속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절세미녀인 아리랑 초혼녀가 연극의 도입을 장식하고, 이어서 등장한 삼신할머니는 우리 겨레를 포옹하고 감싸 안으려는 듯싶은 자애롭고 아름답고 모성애가 넘치는 미소와 동작, 그리고 빼어난 미모로 관객을 일시에 자신의 일신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단군, 부처, 공자, 서양신의 도래가 차례로 펼쳐지면서 민족고유의 의식과 신앙은 물론 민족의 자존까지 붕궤되는 과정이 그려지고, 그래서는 결단코 아니 된다는 출연자들의 함성이 관객의 갈채를 이끌어 낸다.

대단원에서 우리의 조상은 물론 우리의 얼과 고유의 믿음을 상실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래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삼신할머니의 절규와 통곡이 아리랑의 선율과 함께 깊은 반향과 공감대를 형성시키면서 관객의 자각은 물론 우레와 같은 갈채와 함께 공연은 마무리가 된다.

 

김인태, 백수련, 박찬빈, 김혜련, 기정수, 엄경환, 무나미, 양윤석, 김춘기, 장성진, 한호선, 장윤정, 윤대영, 유희제, 김도연, 윤희정, 김현진, 임영선 등 출연자 모두의 호연과 열연 그리고 성격창출은 관객을 도입부터 극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고 갈채를 이끌어 낸다.

 

제작 김혜련, 예술감독 무나미, 문학감독 양윤석, 기획 송기정, 무대디자인 이다겸, 무대미술 서현석, 음악감독 김태근, 의상디자인 이신재 통미, 의상제작 김혜민, 분장디자인 김선미(통미분장예술연구소) 분장스텝 장은실 안소연 박상아 김민지 황인지, 사진 윤준섭, 조명 김민우, 무대감독 권혁우, 음향오퍼 하상욱, 무대진행 신 우, 김바우 고여숙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기량이 제대로 드러나, 극단 한밝의 무세중 대본 연출의 민족 굿 얼빛 아리랑>을 우리 모두가 함께 관람하고 깊이 되새겨야 할 명작연극으로 창출시켰다.

1월 21일

 

3,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의 김지숙 예술감독, 안톤 체호프 원작, 이윤택 각색 연출의 <바냐 아저씨>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중견연극인 창작집단 김지숙 예술감독, 안톤 체호프 원작, 이윤택 각색 연출의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를 관람했다.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타간로그(Taganrog)에서 출생했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농노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중학 생활을 마쳤다. 1879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전반, 수년에 걸쳐 〈어느 관리의 죽음〉〈카멜레온〉〈하사관 프리시베예프〉〈슬픔〉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희곡 〈이바노프〉〈지루한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 지식인들의 우울한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 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단편소설 〈결투〉〈검은 수사〉〈귀여운 여인〉〈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골짜기〉 등을 집필했다.

 

1896년 희곡 〈갈매기〉의 공연 실패는 그를 담시 극작을 멀리 하기도 했으나, 〈바냐 아저씨〉를 집필한 이듬해인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단의 스타니슬라브스키 연출의〈갈매기〉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00년〈세 자매〉를 썼다. 만년의 병환 속에서 〈벚꽃 동산〉을 집필해 1904년에 공연하고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해 요양지인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작고했다.

 

<숲의 정령, 숲 귀신>은 1989년 29세의 나이에 쓴 체호프의 세 번째 장막극으로서 <바냐 아저씨>의 원작이다. <숲의 정령>이 1989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당시에는 세간의 혹평을 받았으나, 체호프는 작품 수정을 통해 <바냐 아저씨>를 새로운 희곡으로 완성했다. 두 작품 의 주인공은 <숲의 정령>과 <바냐 아저씨>다. <숲의 정령>에서는 의사인 호르쇼프가 극의 중심에 서고, 아저씨는 바냐가 아니라 이고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반면 <바냐 아저씨>에서는 의사의 이름이 아스뜨롭으로 바뀌고, 바냐 아저씨는 이고르라는 이름에서 바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극의 중심인물이 된다. 두 작품에는 세레브랴꼬프, 엘레나, 쏘냐, 마리아, 이반 등 같은 인물이 등장해 흡사한 부분도 있지만, 극적 구성이 다르기에 새롭게 전달된다.

 

주인공인 바냐 아저씨는 죽은 누이동생의 남편인 세레브랴꼬프 교수를 위해서 누이동생의 딸 소냐와 함께 매부의 시골 토지를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런데 퇴직교수인 매부가 젊고 아름다운 후처 엘레나를 데리고 시골영지로 돌아온다. 바냐 아저씨는 첫눈에 엘레나의 미모에 빠진다. 퇴직교수인 매부는 지성의 표본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속물근성이 강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나이든 인물이면 별의별 병이 따르듯 병투성이 인물이라, 이에 실망한 바냐 아저씨는 일종의 동정심에서 출발한 감정이 연모의 정으로 바뀌어 엘레나를 대하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친구인 의사 아스뜨롭은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다. 바냐 아저씨의 조카인 소냐는 그런 의사 아스뜨롭을 남몰래 좋아하고 사랑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정작 아스뜨롭 마저 미모의 엘레나에게 빠지고 만다.

 

어느 날 세레브랴꼬프 교수는 사람들을 집합시키고는 영지를 팔고 도회지로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바냐 아저씨>는 세레브랴꼬프 교수가 땅을 팔겠다고 선언을 하자 바냐가 30년 가까이 땅 지키기와 가꾸기에 젊음을 바친 노력의 대가가 날아가려 하니 상실감과 분노로 총으로 교수를 죽이려 하지만 결국 불발에 그치고 만다. 교수는 <바냐 아저씨>의 행동에 경악하고 이곳을 떠나려 결심한다. 의사 아스뜨롭과 엘레나의 이별의 키스, 이 모습을 보는 바냐 아쩌씨의 심정이 그려지고, 대단원에서 바냐 아저씨와 소냐가 힘든 현실을 감내하며 당연한 일상인 듯 살아가는 모습에서 극은 마무리가 된다.

 

무대는 갈색풍이 감도는 저택의 거실이다. 정면 벽 가까이에 술 장, 건반악기, 긴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고, 무대 좌우로 한 단 높이의 단을 깔고, 하수 쪽에는 탁자와 의자, 상수 쪽에는 장서가 꽂힌 책장과 그 앞에 책상과 의자가 있다. 무대 좌우에 등퇴장 로가 있다.

 

연극은 도입에 찔레긴이 기타를 들고 등장해 부드러운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상수 쪽 의자에 앉으면,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분장과 의상, 그리고 가발이나 소품 등이 극에 어울리고, 중견그룹을 대표하는 연기자들이라 그런지 출연진의 개성이 뚜렷하고 제대로 된 성격설정에다가 호연과 열연을 해낸다. 바냐나 소냐가 등장을 하면 우리 바로 이웃 아저씨나 이웃 처녀나 다름이 없어 금세 친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배우 친화적 심정마저 형성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변화가 밀려온다. 훤칠한 신사풍의 의사 아스뜨롭, 백발이지만 탁월한 미모의 어머니인 바이니쯔 까야와 역시 출중한 미모의 유모 마리나, 중후한 멋과 지성의 표본인 교수 세레브랴꼬프, 온화하고 인정미가 넘쳐 보이는 지주 찔레긴, 거기에 미모와 관능미를 겸한 엘레나가 등장해 극을 친 대중적이면서도 고수준 고품격으로 이끌어 가, 연극 <바냐 아저씨>를 무척 재미있는 연극으로 만들어 낸다.

 

기주봉이 바냐 아저씨로 출연해 일생일대의 명연을 해내며 대사는 물론 호흡 하나하나 까지 전달을 시킨다. 김지숙이 엘레나로 출연해 미모와 관능미는 물론 자제하는 듯싶은 연기로 남성관객의 시선을 일신에 집중시킨다. 곽동철이 의사 아스뜨롭으로 출연해 신선한 품격과 감성으로 여성관객의 눈길을 끈다. 이용녀가 어머니로 출연해 마치 귀족부인 같은 품성과 품격으로 고아한 매력을 풍긴다. 고인배가 세례브라꼬프 교수로 출연해 귀족적 풍모와 지성적 풍모로 일관하다가 속성으로의 변화를 제대로 표현해 내어 갈채를 받는다. 이재희가 백발의 이모 마리나로 출연해 고아한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뜨개질하는 모습까지 우아한 그녀를 어찌 더 묘사 하리오? 이봉규가 지주인 찔레긴으로 기타를 들고 출연해 무대 분위기를 주도한다. 잘 생긴 모습과 서글서글한 눈매에 온화한 미소, 그리고 부드러운 저음으로의 노래는 관객을 서정적 감상의 세계와 친 대중적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 김미수가 소냐로 출연해 열연과 호연으로 갈채를 받는다. 미모인데도 아닌 척 하는 모습이 더욱 예뻐 남성관객의 시선을 일신에 집중시킨다. 신재일이 심부름꾼으로 출연해 호연을 보인다.

 

중견연극인 창작집단 대표 김지숙, PD 임덕희, 조연출 김소희, 조혜영, 기술감독 김형도, 무대디자인 김경수, 조명감독 조인곤, 분장 박팔영, 조명오퍼 최충욱, 음향오퍼 윤희준, 무대크루 이효은 정재환 강송희 조연출 이동준, 음향감독 강정훈, 영상편집 김보미, 디자인 김명남, 티켓매니저 김아람 장달님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이 일치되어,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의 김지숙 예술감독, 안톤 체호프 작, 이윤택 각색 연출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가와 출연진의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친 대중적이자 고 수준 고품격의 걸작연극으로 탄생시켰다.

1월 28일

 

4, OLD AND WISE THEATRE의 조중환 작, 이종훈 연출의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아트원씨어터에서 OLD ANDWISE THERTRE의 2015년 원로예술인 공연지원사업 선정작 조중환 작, 이종훈 연출의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관람했다.

 

일재 조중환(一齋 趙重桓, 1884?1947)은 근대 초창기의 언론인으로서 1910년대 한국근대문학의 정립기에 번안과 번역 및 희곡의 창작을 통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기꾸찌 유우호오(菊池幽芳)의「오노가쯔미(己」が罪를)」의 번안한「쌍옥루」, 토쿠토미 로까(德富盧花)의「호도도기스(不如歸)」를 번역한「불여귀」, 오자끼 고오요오(尾崎紅葉)의「곤지끼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장한몽(長恨夢)」을 발표하여 한계에 봉착한 신소설의 시대를 넘어서면서‘근대소설(novel)’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정립하고「무정」으로 대변되는 한국근대초기 장편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최초의 근대적 희곡「병자삼인(病者三人)」을 발표하고 신파극단‘문수성(文秀星)’을 창단하여 이들 번역·번안 작품의 연극화에도 관여하여 한국희곡사 및 연극사에도 반드시 거쳐야할 족적을 남겼다.

 

일재 조중환은 한말 대표적인 사립일본어학교였던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졸업하고 도일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와 그 지령을 승계한 <매일신보>에 1918년까지 윤백남, 심우섭, 방태영, 이상협, 민태원 등과 대략 10여년을 근무하였으며 1912년에는 매일신보사에 근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극개량의 기치를 내걸고 극단‘문수성’을 창단하였다.

 

조중환의 출현은 최대의 항일 민족언론에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탈바꿈한 <매일신보>의 편집방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에서 완전히 대립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매일신보>가 주요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지면혁신을 통한 대중성의 강화를 통한 독자확대였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이 연재소설이었으니 병합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이해조의 신소설이 쉬지 않고 연재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매일신보>의 전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조의 시대가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새로운 감각의 번안소설을 연재하고 근대희곡을 선보이는 동시에 신파극단을 창립하고 각 번안?번역소설을 신파극으로 재구성하여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모은 조중환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극단 문수성은 1916년 해산되었지만 조중환의 번안 및 각색자로서의 역할은 1920년대까지 이어진다. 조중환은 1922년 윤백남이 조직한‘민중극단(民衆劇團)’에 참여하여 각본을 맡았고 신파극이 서구적 의미의 신극의 도전을 받아 무력해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영화에 눈을 돌린다. 1925년 조중환은 그의 번안작「쌍옥루」를 영화화한‘고려영화제작소’와 윤백남이 이끌던‘백남프로덕션’의 주요 제작진을 중심으로‘계림영화협회(鷄林映畵協會)’를 창립하고 첫 작품「장한몽」을 기획하여 1926년 3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초창기 한국영화사에 남긴 조중환의 역할 또한 새로운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일제 말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다만 몇 편의 소설을 단속적으로 연재하였고 1941년에는 경성방송국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해방 후에는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의 제호를 따 속간된 우익정론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근무하였다. 여기에「해방전후」를 20회까지 연재하다가 1947년 10월 사망하였다.

 

<장한몽(長恨夢)>은 일본소설이 원작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 작품이다. 그러나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원작은 영국의 여류작가인 버서 클레이(Bertha M.Clay)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에서 인물과 내용을 따오고 무대와 이름만 일본으로 옮긴 것임이 2000년에 밝혀졌다. 그러니까 <장한몽, 이수일과 심순애>는 번안작의 번안작인 셈이다.

 

이수일(李守一)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돌아간 아버지의 친구 심택(沈澤)의 집에서 그집 딸 심순애(沈順愛)와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어버이들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은 약혼한다.

 

어느 날 두 남녀는 서울 다방 골의 부호인 김씨 집으로 초대받아 갔다가 그곳에서 도쿄 유학생인 그 집 아들 김중배(金重培)를 알게 되고 심순애는 김중배의 보석에 유혹된다. 심순애의 부모도 이수일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김중배와 결혼시킨다. 실연한 이수일은 그 집을 나와 금력에의 원한으로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심순애의 결혼 생활도 죄책감과 이수일에 대한 애정 때문에 불행해지지만 이수일은 냉담하다.

 

고민하던 심순애는 비관하고 대동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우연히 이수일의 친구 백낙관(白樂觀)에 의해 구출된다. 백낙관은 이수일에게 재회를 권하지만 이수일은 금전에만 몰두할 뿐 듣지 않는다. 한편 심순애는 친정으로 돌아와 이수일에 대한 연모의 정이 지나쳐 광증을 일으킨다. 백낙관의 중재로 이수일과 심순애는 결국 서로 과거를 재회한다. 그러나 금전에 눈이 먼 이수일 앞에서 심순애는 자결의 길을 택한다.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의 진정을 안 이수일은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고 심순애 곁에서 자결을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에서는 시대적 상황과 장면변화를 영상을 배경 막에 투사해 극적효과를 상승시킨다. 낭만악극답게 노래도 귀에 익은 흘러간 명 가요를 출연자들이 열창해 관객의 감성을 고조시킨다. 원로연극인다운 기량과 호연 그리고 열창은 관객을 도입부터 공연에 몰입을 시키고 분장과 의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공을 들인 게 분명해 대단원에서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이끌어 낸다.

 

정 현이 이수일, 우상민이 심순애, 김재건이 김중배, 임일애가 순애모, 김봉환이 전대준, 최효상이 백낙관, 진아라가 김정연, 이종렬이 일인 다역으로 출연해, 출연자 전원의 친 대중적이면서 고품격, 고수준의 연기와 신파극적 열연, 그리고 열창으로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음악감독 최종혁, 작화 차성진, 의상 분장 손진숙, 무대 박재범, 조명 이상봉, 조명오퍼 김수민, 조연출 무대감독 이호정, 기획 ㈜ 인아크(홍이룡, 양지훈, 오윤재) 등 기술진과 제작진의 열정과 기량이 제대로 드러나, OLD ANDWISE THERTRE의 2015년 원로예술인 공연지원사업 선정작 조중환 작, 이종훈 연출의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남녀노소 누구나 보아도 좋을 명작공연으로 탄생시켰다.

2월 14일

 

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스튜디오 반 극단 동양레퍼토리 공동제작 노경식 작, 김도훈 예술감독, 김성노 연출, 이우천 협력연출의 <두 영웅>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노경식 작, 김도훈 예술감독, 김성노 연출, 이우천 협력연출의 <두 영웅>을 관람했다.

 

노경식(1938~) 작가는 1936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남. 1950년 남원용성국교(41회) 및 1957년 남원용성중(3회)을 거쳐 남원농고(18회, 남원용성고교의 전신)졸업. 1962년 경희대학교 경제학과(10회)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타 演劇아카데미 수료.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철새> 당선. 한국연극협회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및 이사. 한국 펜클럽 ITI한국본부 한국희곡작가협회 회원. 서울연극제 전국연극제 근로자문화예술제 전국대학연극제 전국청소년 연극제 등 심사위원. 추계예술대학 재능대학(인천)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강사 및 <한국연극>지 편집위원.’남북연극교류위원장’등 역임. 주요수상 :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한국연극예술상(1983), 서울연극제대상(1985), 동아연극상 작품상, (1999) ‘대산문학상’(희곡) 수상, (2003) ‘동랑유치진 연극상’ 수상, (2005) ‘한국희곡문학상 대상’ (한국희곡작가협회), (2006) ‘서울시문화상’ 수상, (2009) ‘한국예총예술문화상 대상’ (연극) (2015) 한국연극협회 자랑스러운 연극인상 등을 수상했다.

 

2004년-2012년 <노경식희곡집>(전7권)/ 연극과인간, 2004년 프랑스희곡집 <Un pays aussi lointain que le ciel> (‘하늘만큼 먼나라’ 외), 2011년 <韓國現代戱曲集 5> (일본어번역 <달집> 게재)/ 日韓演劇交流센터, 2013년 <압록강 이뿌콰를 아십니까> (노경식 산문집)/ 도서출판 同行, 2013년 <구술 예술사 노경식>/ 국립예술자료원, 역사소설 <무학대사>(상하 2권) <사명대사>(상중하 3권) <신돈>/ 문원북.

공연작품으로는 1971년 <달집> 국립극단/ 명동국립극장, 1982년 <井邑詞> 극단 민예극장/ 문화회관대극장(아르코), 1985년 <하늘만큼 먼나라> 극단 산울림/ 문화회관대극장(아르코), 1994년 <징게맹개 너른들>(뮤지컬) 서울예술단/ 예술의전당 대극장, 2005년 <서울 가는 길>(佛語번역극) 파리극단 ‘사람나무’/ 대전문화예술의전당, 2013년 <달집>(日語번역극) 東京극단 ‘新宿梁山泊’/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16년 <두 영웅> 극단 스튜디오 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외 40여 편을 발표 공연했다. <두 영웅>은 노경식 작가의 등단 50주년 기념공연이다.

 

연출을 한 김성노는 홍익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경기대학교 공연예술학 석사출신으로<리틀 말콤>, <등신과 머저리>, <에쿠우스>, <검정고무신>, <홍어> <아버지> <두 영웅>등 활발한 연출활동을 이어오며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 동아 연극상 작품상, 서울연극제 연출상 등을 수상하고 ‘신춘문예 단막극 제’, ‘아시아연출가전’, ‘연출가포럼’ 등 기존 사업과 더불어 ‘한국연극100년 시리즈’, ‘차세대 연출가 인큐베이팅’ 등 신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고 한국연출가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서울연극협회 산악대 대장으로 활약한 건강하고 훤칠한 미남인 중견 연출가다. 현재 동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영웅>은 사명대사(四溟大師)와 도쿠가와 이예야스(德川家康,とくがわ いえやす) )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귀국문제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치하의 일본막부(日本幕府)의 정치적 상황을 그려낸 역사극이다.

 

유정(惟政, 1544년~1610년)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부른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조약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휴정이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의 문답이 희대의 명언으로 남았다.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냐 묻자 유정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에 없고 일본에 있다”고 했다. 의아해진 가토가 그 보배가 무엇이냐고 묻자 유정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유정이 포로 석방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유정의 이 문답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왕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다만 이 와중에 노쇠한 스승 휴정 대신 사명당이 전국 승려들의 우두머리처럼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본 이순신이 그를 탄핵하기도 했다.

 

1604년(선조 37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직위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이 비석은 불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데, 무려 2백년 만에 세워진 고승 비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16세기 동안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 하였는데, 사명당을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개가 세워졌다.저서로는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とくがわ いえやす)1543~1616)는 일본센고쿠·아즈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이자 정치가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향토 삼 영걸로 불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사망 이후 1600년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였으며, 승전 이후 에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1603~1605)이 되었다. 1605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자격으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으며,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이에야스는 마쓰라의 센류에 제시된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내의 귀재”로 평가 받는다.이에야스는 어린 시절에 부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계속 복종을 강요당해왔다.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임진왜란 도중에도 영지만 지키며 신중히 대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때문에 이에야스의 삶은 일본에서 여러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반면 에도 시대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의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여 상반되는 평가를 가지고 있다.

 

이에야스가 남긴 명언을 소개하면,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人の一生は重荷を負て遠き道をゆくがごとし。 いそぐべからず。不自由を常とおも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堪忍は無事長久の基、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害其身にいたる。おのれを責て人をせむるな。 及ばざるは過たるよりまされり.)

 

무대는 배경 가까이 세자 높이의 단이 좌우로 놓였을 뿐 다른 장치는 없고, 배경막에 막부 건물 오사카 성 같은 당대 일본 고성의 영상을 투사해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극적효과를 높인다. 의상 또한 고증을 거친 듯 조선병사나 서민들의 옷, 장수복식과 승려의상에서부터 그리고 당대 일본복식과 쇼군의상 등이 관객의 눈길을 끌고

장면변화에 따른 음향효과 또한 박력감을 느껴 관객을 공연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분조명으로 장면변화에 대응하고 배경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영상 역시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사명당은 부산 다대포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서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에 도착한다. 亂初에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애첩을 찾기 위해 밤거리에 나섰다가 살해의 위협을 받고, 후시미성으로 돌아와 경호문제에 항의한다. 일본측이 정해준 임제종(臨濟宗)의 혼포지(本法寺)에서 7개월간이나 거처하면서 고우쇼지(興聖寺) 절의 주지 원이선사(圓耳禪師)를 제자로 삼는다. 후시미성에서 7년전쟁을 논박하고, 도쿠가와막부의 사열식을 관람한다. 이 사열식은 조선측에게 은연중에 무력을 과시하고 위협을 가하려는 술책이다. 두 영웅이 본격적으로 대좌해 소기의 협상이 이루어진다(제8장, 제10장). 일본의 주자학을 일으킨 조선의 강항(姜沆) 선생과 그 일본 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면모도 알려진다.

 

귀국하는 길에 후지산, 비와호, 오사카성, 하카타, 구마모토성(熊本城), 나고야성(名護屋城), 고우타쿠지(廣澤寺), 이즈하라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온다. 구마모토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재회하고, 그의 안내로 왜란의 출진지(出陣地)였던 사가현(佐賀縣) 나고야성(일본 중부의 나고야(名古屋)와는 다른 지역)의 내부를 시찰한다.

 

고우타쿠지에서는 승려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히로사와(廣澤)를 알게 되고, 왜란에 끌려간 도공 심당길(沈堂吉)과 감격적으로 만난다(제14장). 두 영웅은 시종 동양 전체를 관망하며, 송학야계(松鶴野鷄)의 기질, 난형난제(難兄難弟)의 품격 있는 마음씨,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지도자적인 리더쉽을 지닌 채, 협상을 이끌어 성사시킨다.

 

오영수, 김종구, 남일우, 권성덕, 이인철, 이호성, 정환금, 문경민, 고동업, 신현종, 최승일, 배상돈, 장연익, 민경록, 노석채, 조승욱, 오봄길, 장지수, 양대국, 임상현, 김대희, 김춘식, 김민진, 박소현, 이 준 등 출연자들의 호연과 열연 그리고 성격창출은 관객을 도입부터 극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고, 극적 감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오영수의 사명당(泗溟堂)과 김종구의 덕천가강(德川家康) 이인철의 풍신수길(豐臣秀吉) 역은 3인의 발군의 기량과 탁월한 성격창출에 따르는 명연으로 관객의 감상안을 부추기고 대미에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장연익의 히로사와 역과 노석채의 혜구 역도 2인의 성격창출에 따르는 호연과 함께 기억에 남는다.

 

기획 이강선 문경량, 분장감독 박팔영, 분장지도교수 한지수, 분장팀 남주희 안정민 강다영 이서영 순현정 성정언, 무대감독 송훈상, 무대 민병구, 영상 황정남 장재호, 음향 김경남, 음악감독 서상완, 조명 김재억, 조명팀 오정훈 이한용 김병주 박수빈, 의상디자인 김정향, 동작지도 이광복, 그래픽디자인 아트그램, 사진 박인구, 조연출 최윤정, 인쇄 동방인쇄공사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기량이 합하여,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와 스튜디오 반 그리고 극단 동양레퍼토리의 노경식 작, 김도훈 예술감독, 김성노 연출, 이우천 협력연출의 <두 영웅>을 명화 같은 명작 역사극으로 탄생시켰다.

2월 21일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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