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관객과 ‘소통’하지 못할까?/ 우상전

우리는 왜 관객과 ‘소통’하지 못할까?

우 상전(연극배우)

 

국립극단의 공연 ‘겨울이야기’를 보러갔다가 깜작 놀랐다. 프로그램을 펼쳤더니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백정국 숭실대영문과 교수의 글인데,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전 지식 없이 ‘거울이야기’를 처음 보는 관객들 중에 이 극을 선뜻 셰익스피어의 후기작으로 상상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전 지식 없이’라는 글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동안 우리는 관객들이 늘 ‘사전 지식 없이’ 연극을 구경하러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우리처럼 ‘고전’없이 마냥 ‘창작초연’과 ‘최신 번역극’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 우리나라 관객들은 항상 ‘사전 지식 없이’ 관극을 하는 게 일상화(?) 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새삼스럽지만 한국연극의 비극은 우리에게는 ‘고전’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셰익스피어도, 몰리엘도, 안톤 체호프도, 브레히트도 없다. 그래서 항상 창작초연으로 우리의 연극무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니 우리는 관객에 대한 배려를 하며 공연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새는 지원이 ‘창작초연’에만 몰려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연히 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다보니 당연히 우리는 ‘자기과시’, ‘자기만족’, ‘자아도취’에 빠져 공연을 하고 글을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전문지식이 없으면 읽을 수 없는 글과 이해하기 어려운 공연이 연극판에 만연했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이해하기 쉬운 공연을 하거나 글을 쓰면 동료들에게 ‘무시당할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작업해온 사람들이 한국의 연극인들일 거다. 그러니 ‘사전 지식 없이’로 시작하는 글이 새삼스러울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정말이지, 이제는 우리도 관객과의 소통이 한국연극의 살길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가 되었다. 그보다 먼저 우리끼리라도 소통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런 실정이니 항상 지원금이 우선이고, 이에 따른 심사와 시상, 평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특정세력이나 특정인들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점점 더 관객과 멀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연극이 판을 치게 되고, 대학로에는 ‘삐끼’에 의한 저질 연극이 대중극(?)을 내세워 활보하는 추태를 막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그 뿐인가 연극인들이 ‘엘리트주의’에 빠져, 자신들도 이해가 불가능한 횡설수설하는 글을 쓰지를 않나 명색이 예술집단인 연극판이 정치권에서도 한물간 지난시절의 운동권 구호나 외치고 있는 딱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연극은 왜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가?

 

첫째, 한국연극이 해방 이후, 연극제작시스템이 ‘동인제’로 출발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프로화 되지 못한 채 아마추어들의 행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호사가들의 공연 잔치’로 연극공연을 시작한 게 관객과의 ‘불통’의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끼리끼리 모여, 각자 몇 푼씩 거두어 비정기적으로 극단 활동을 해 온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 관객을 대상으로 한 ‘소통’을 염두에 두고 공연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연극인들은 연극공연이 ‘관객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자체가 없이 자신들만의 마스터베이션을 위한 ‘잔치’로 여겼던 게 사실이다.

둘째는 연극공연은 관객을 모아서 ‘흥행 = 돈벌이’를 해야 하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공연예술이다. 이런 공연예술을 ‘지원금에 의존할 생각을 한 게 패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한계로 연극의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의 부자나라들도 ‘연극의 국유화(?)’를 도모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절대로 유럽처럼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실험극’ 같은 예술지상주의를 내걸고 번잡을 떨었으니 점점 더 관객과 소통하기 어려워진 게 사실일 것이다.

 

부조리가 지배하는 한국연극

 

여기서 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당면한 고민이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세계가 오래 전부터 절대군주제를 버리고 선거를 통한 (민의수렴) 민주제를 택하고 있는데, (그것도 바뀐 지 오래 되었는데) 이들 나라만이 선거 없이 세상을 유지하려고 들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회부조리가 그들 사회전반에 만연되어 있겠는가? 그리고 그 한계가 그들 나라의 지도자들을 영원히 괴롭히는 난제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소련은 멸망했고, 이들 두 나라는 항상 ‘민중봉기’ (폭동)가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거가 없는 군사독재체제를 경험해 보아서 능히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니 북한은 지도자를 우상화하는데 매진하며 늘 ‘핵무기’만 주무르고 있고, 거대한 중국은 홍콩에 시위만 일어나도 떨지를 않나, ‘페이스북’마저도 개방을 못하고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이런 환경에서 죽어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사는 평범한 인민들뿐이다.

내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한국연극에 ‘세상의 이치’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지금 한국연극이 그나마 살아나려면 ‘흥행’을 해야 옳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일단 한국은 부유하고 안정된 서유럽과는 처지가 다르다. 그들은 복지를 앞세운 완벽한 국유화(?)로 연극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나라의 연극인은 ‘흥행’을 염두에 두고 연극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실험극’을 해도 무방하다. 국가가 모든 제작비를 대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복지도 부실한데다, 미국과 일본방식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나라 경제가 허약해 ‘국유화’를 꿈꾸기도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연극공연은 ‘흥행’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열심히 관객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 연극인들은 툭하면 서유럽을 거론한다. 그러면서 공연에 관객을 모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연극공연을 자신들의 일회성 예술행사(?)로 여기고 지원금타령만 하고 있다.

그러니 북한처럼 한국연극이 온갖 모순과 부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자기 주제를 모르고 ‘실험극’을 내세워 내용도 애매하고 산만한 공연을 시도하면서, 그래도 자긍심은 높아 어려운 글이나 쓰면서 지원책 타령만 하고 있다. 300여년을 약소국의 식민지배로 부를 이룬 유럽처럼 연극이 되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순에 빠져 매사가 꼬이고 부조리가 만연한 연극판이 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지금 한국사회가 철저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여서 자신을 지키려면 ‘흥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전히 ‘관객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있으니, 북한처럼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지배해 연극인들이 심한 고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인식을 전환해 공연에 관객을 위한 ‘서비스정신’을 살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온갖 부조리에 발목이 잡혀 꼼짝달싹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선 직면한 문제가 바로 ‘좋은 인적자원’의 고갈이다. 자본이 판치는 세상에서 관객과 소통을 거부하며 ‘쥐꼬리’만한 지원금으로 체제를 유지하려고 드니 연극판에 인재가 몰릴 턱이 없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영화, TV, 뮤지컬 등에 ‘인재와 관객’을 빼앗기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게 한국연극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는 아무리 많은 지원금을 퍼부어대도 예술로의 입신은 물론이고, 어떤 모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연극인들이 앞장서 이런 분위기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한, 아무리 연극대학을 많이 만들어 인재를 발굴하려 해도, 또 아무리 많은 지원금을 퍼부어댄다 해도 현재의 모순투성이의 곤궁한 현실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배우가 ‘소통’의 첨병

 

  1. 대사가 전달되지 않아서야

 

공연프로그램의 해설이야 관객과의 ‘소통’의 보조교재일 뿐이고, 정작 연극에서의 ‘소통’의 핵심은 배우의 연기다. 왜? 관객은 배우의 입과 몸짓을 통해서 공연에 접근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연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연기의 발전’을 도모하기에는은 너무나 어려움이 많은 게 현실이다.

왜? 연기의 핵심인 화술이 우리말을 사용하므로 해서 무용이나 오페라처럼 외국으로부터 기법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거기다 ‘라이브예술’이어서 TV나 영화처럼 과학기술(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라이브예술’은 편집마저 불가능하다. 즉 좋은 연기력을 보이는 장면만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는 영상매체와 달리, 연극은 처음부터 좋은 ‘훈련시스템’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소통’이 ‘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이런 ‘라이브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무대에 서야 하는 배우의 화술 – 대사전달일 것이다. 그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소리의 전달’과 ‘내용의 전달’을 도모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창작극 육성’에만 매달려 있다. 오로지 관심은 ‘극작가’에게만 있을 뿐 연출가나 배우의 육성이나 기술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재미없는’ 연극은 없다‘가 연극세계의 ’진리‘일 것이다. 러시아연극을 보면 충분히 이를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사전 지식 없이’ 구경 온 관객에게 배우의 연기가 아니면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이도 우리의 연극공연은 관객들에게 인색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1.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2. 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3. 배우의 연기에 카리스마가 없다.

 

이런 현실이라면 관객이 어떻게 ‘관극의 맛’을 느낄 수 없겠는가. 영화나 TV, 뮤지컬을 보자. 주연배우가 제작비를 몽땅 가져갈 정도다. 왜? 관객이 보러 오는 게 바로 주연배우여서 그렇다. 따라서 우리 관객이 ‘촌스러워서’ 이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 연극은 어떤가?

전달을 책임질 대사의 핵심적 어휘가 배우의 입에서 뭉개지고 있다는 게 관객들의 ‘불평’이다. 따라서 관객이 배우의 소리를 듣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게 한국연극의 현실이다.

그럼 전달되어야 할 어휘가 왜 배우의 입에서 뭉개지는 것일까? 사실은 ‘발음’에 있지 않다. 장애자가 하는 말도 당사자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이해가 가능한 게 현실인데 배우의 전달이 부실한 이유는 전혀 다른 것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배우가 자기 대사의 흐름을 쫒지 못하는데 있다. 즉 무슨 말인지 모르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말이 단순히 대사를 ‘암기’한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배우가 자기가 하는 말에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말을 해야 관객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기술적으로 말하면) 배우가 자기가 하는 말에 ‘휴지와 강조’, 억양, 제대로 된 어미처리를 해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관객들이 “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배우의 대사가 끝까지 잘 들리지 않는다.” 또는 “우리말이 아니다.” 등의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달리 말하면 배우에게 ‘말하기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실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술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 바로 배우의 ‘말하기 감각’이다. 그리고 ‘말하기 감각’이 좋은 배우는 절대로 그런 평가를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배우의 ‘말하기 감각’이란?

 

요사이 장안의 화제는 최고인기 뮤지컬가수의 ‘발 연기’다. 난 한 번도 그의 연기를 본 일이 없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가 대사를 치면 일상처럼 ‘말을 하는’ 목소리(리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생각과 느낌을 살려서 목소리(리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한 목소리를 낸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게 바로 배우에게 ‘말하기 감각’이 없으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전에 경찰수사를 통해 사회범죄를 소개하는 TV프로가 있었다. 그때마다 현직에 있는 수사경찰관이 화면에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곤 했다.

“저는 종로경찰서 홍길동 경사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어투가 마치 초등이들이 “동숭초등학교 4학년 5반 김철수입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들리곤 했다.

이처럼 ‘말하기 감각’이 없으면 TV카메라 앞에서 자기 말을 하는데도 초등이처럼 말을 하게 된다. 이게 바로 ‘말하는 감각’이 없는 대표적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너는 배우가 될 ‘끼’가 없어!”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리듬’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에 듣게 되는 소리다.

따라서 배우에게 가장 중요시해야 될 게 바로 ‘말하기 감각’이다. 물론 이를 ‘말하는 재능’ 또는 ‘음성화 감각’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는 ‘선천성’이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선천성 감각’을 연극대학의 입시현장에서조차 무시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수험생들에게 현장에서 ‘즉석대사’를 주면 고작 책을 읽듯 읽어버리고 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대학이 무엇으로 연기지망생을 선발하는지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학이 무엇으로 수험생의 연기적 재능을 평가하려고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예술적 감각에는 항상 선천성이 작동하게 마련이고, 연기 역시도 연기력의 판단이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선천성이고, 이게 배우의 장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정말 위대한 연극대학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 대학은 배우의 선천성 재능을 버리고, 사교육으로 ‘주입된’ 후천적 연기를 판단하고 있는 게 고작이다. 이러니 우리의 연극대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1. ‘말하기 감각’이 왜 선천적 재능인가?

 

아역배우를 보면 ‘말하기 감각’이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재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의 이해를 위해 ‘음치’가 존재하는 음악세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가수들이 가끔 TV의 예능프로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시창(視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레코딩 할 때, 먼저 작곡가가 곡의 리듬을 자기 목소리로 내주면 그걸 듣고 내 것으로 만들어 멋지게 노래 부르곤 한다.” “우리는 외국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으면 그냥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가수들에게 존재하는 천부적인 ‘노래하는 감각(재능)’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감각(재능)이 없으면 가수가 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의 ‘말하기 감각’도 일치할 것이다. 선천성이 좋은 배우는 훈련이 없이도 어렵지 않게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럼 그들이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일단 대사(글말)를 읽으면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충동’을 일으켜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가수가 작곡가의 노래를 들으면 금방 익힐 수 있는 것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는 대본을 읽으면 자기 말을 하듯 저절로 ‘말하기 감각’이 살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자기 말을 하듯 대사를 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말을 (언어생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대본을 보고 자기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천부적인 ‘말하기 감각’이다. 그래서 천재적 배우는 자기의 말을 할 때처럼 대사에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바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수와 배우가 다른 점이다. 노래는 ‘리듬’이 주를 이루어서 작곡가의 선창(?)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배우는 평소에 늘 하던 말이어서 글만 읽을 줄 알면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에게는 ‘악보’가 없다. 일상에서 하는 말이 ‘악보’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냥 일상의 자기 말을 할 때처럼 ‘충동’을 일으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건 이를 방해하는 게 연기에서 너무 많기 때문이다.

 

  1. ‘충동’을 방해하는 것들

 

그럼 일상처럼 ‘충동’을 방해해 ‘말하기 감각’이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1. ‘암기’를 해서 말을 하는 게 긴장을 발생시켜서 그렇다.
  2. 화술이 일상어와 구조가 달라서 그렇다.
  3. 잘 하려는 의욕이 (부담감) 너무 과해서 그렇다.
  4. 타고난 ‘악기의 성능’이 나빠서 그렇다.
  5. 음성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배우가 목소리를 내면, ‘말하기 감각’이 발휘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휴지와 강조, 억양, 어미처리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가 당연히 무슨 말인지 모르고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또 이런 상태에서 목소리를 내면 흔히 ‘쪼’‘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 말하기(화술) 의 3종류

 

언어생활에서 ‘말하기’를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일 것이다.

 

  1. 일상에서 하는 말의 대부분은 생활의 도구(용도)로 사용되는 말들이다. 주로 ‘이리와!’ ‘어디 가니?’ ‘저리 비켜!’처럼 ‘의사소통’을 위한 말하기다.

 

  1. 화자가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한 말하기가 있다. 즉 어떤 사안이나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을 하려는 의도로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자기의 생각을 상대에게 설득시키려는 목적으로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1. 자기의 내면의 느낌이나 직접 체험한 일의 ‘감상’ 등을 말로 표현하는 경우다. 그러니까 하소연을 한다든가, 아니면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 또는 감격했던 일 등을 말하는 게 이에 포함될 것이다.

 

따라서 배우들이 ‘말하기 감각’을 살려내지 못해 ‘소통’에 실패하는 말하기는 대체로 2와 3의 경우다. 1은 일단 대사도 짧고 생활도구(?)여서 일상에서 충분히 훈련되어 있어 ‘말하기 감각’을 발휘하기에 크게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2와 3은 대체로 긴 문장으로 되어 있고 등장인물의 말이어서 상당한 이해력을 요한다. 따라서 관객과의 소통부족은 대체로 2와 3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긴 대사를 처리할 경우에는 배우에게 발성을 위한 ‘호흡의 지지력’이 있어야 한다. 왜? 그래야 길게 말을 하면서 ‘끊어 말하기’, 강조, 억양, 어미처리 등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음성훈련’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건 2와 3이다.

또 대사에 숨겨진 (잠겨진) 의미라도 있게 되면, 이를 파악하기 위해 ‘토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우에게 ‘독해력’(문학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물론 ‘사극’처럼 강한 ‘리듬감’이 요구되는 말하기도 있다. 이는 ‘충동’만으로 ‘말하기 감각’을 살려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노래처럼 (작곡가인) 작가의 리듬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연극이 예술이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1. ‘음성훈련’이 필요한 이유

 

1의 경우는 일상처럼 호흡, 발성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와 3의 경우는 다르다. 일단 음성훈련을 해서 ‘호흡의 지지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일상처럼 소리를 내기도 힘들고 ‘리듬’에 쪼가 생기는 게 마련이다.

물론 1도 짧지 않은 긴 문장으로 되어 있을 때가 있어 한마디로 화술에는 ‘음성훈련’이 필수다. 거기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표출하기 위해서도, 풍부한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지지력이 있어야 호흡운용, ‘휴지’ – ‘도둑 숨’이나 ‘끊어 말하기’ 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서 일상의 호, 발성법으로는 불가능하다. 2와 3처럼 긴 대사를 구사하려면 자주 호흡을 바꾸고 ‘휴지’를 잘 살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음성훈련’이 필수다.

작가가 갖가지 말투나 화법을 요구하기도 하고, 인물의 성격구축을 시도하기도 해서 호흡, 발성, 공명 등의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관객을 향한 ‘목소리의 전달’을 위해서도 그렇다.

  1. ‘말하기 감각’을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일

 

배우가 ‘말하기 감각’을 잘 살려내려면 다음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 처음부터 대본을 들여다보며 읽지 말라! 처음엔 자기 목소리(리듬)를 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배우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일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며 말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의 말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배우가 하는 말은 자기 말이 아니다. 작가가 요구하는 말하기다. 따라서 자신이 정확히 목소리(리듬)를 내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특히 번역극을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극 쪼’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둘, 처음에는 자기의 목소리를 작게 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목소리를 듣기에 용이하고 적절히 목소리를 조절할 수 있고 감정을 분출하기에도 좋다.

 

셋, 작가나 번역가를 믿지 말라. 이들에게도 대사구사력에 차등이 있기 마련이다. 글말(문어체)여서 그렇다. 자칫 잘못된 문어체나 번역문장이 초보자의 ‘말하기 감각’을 망칠 위험이 있다.

 

넷, 상대방을 향해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말을 할 때 혼잣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대개는 상대를 향해 말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를 ‘대화’라고 한다. 이때 필요한 게 상대에게 말을 건네는 ‘대화체’ 감각(말투)이다. 그런데 우리는 입시에서 독백을 위주로 전형을 치룬 탓인지 대화체로 어미를 살리는데 서툴다.

다섯, ‘용도’가 없이 말을 한다. 왜 그럴까? 배우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말하기에서 정확한 표현보다는 ‘내용전달’에 더 많이 신경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이나 시청자들도 정확성보다는 배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자기 귀에 들리면 그냥 만족해 버리기 때문이다. 일상의 언어행위와 달리 말에 ‘뉘앙스’를 너무 가볍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관객이 무대에서 배우가 상대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가를 확인하는데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사랑하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 보다도 내용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의 용도에 따른 정확한 리듬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외려 ‘딕션’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화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용도’를 살려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야 배우의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 말하는 사람의 태도도 명확해진다. 따라서 배우가 말을 할 때 상대에게 사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타를 하는 것인지 관객이 명확히 알 수 있게 큼 ‘용도’를 살려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연기가 가능해진다.

 

여섯, 오랜 연습으로, 이미 배우들이 자기 대사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내용전달’을 소홀히 하기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처음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때가 많다. 공연 참가자들이 다 알아듣는 말(대사)을 객석의 관객만 못 알아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배우에게 ‘말하기 감각’이 있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왜? 일단 이에 정통한 배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 반드시 연출가에게 물어보게 마련이고, 자신도 ‘정신 줄’을 놓치지 않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술에서 중요한 게 배우가 자기 대사의 흐름을 쫒아 명확하게 목소리를 내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이다.

 

  1. ‘말하기에서 리듬’을 결정하는 것

 

  1. 용도

1) 모든 말하기에는 약속된 ‘화법’ 있게 마련이다. 흔히 어휘만 일치하면 되는 줄 알지만 화법도 일치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화법이 일치하므로 해서 (‘리듬’이 일치해서) 관객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에 ‘리듬’이 생기는 것은 ‘용도’가 목소리에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기에는 ‘용도’에 따른 약속된 리듬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일상과 일치시키는 게 바로 배우의 연기력이 된다.

 

2) 또 ‘용도’는 리듬만이 아니라, 감정이나 말하는 태도도 결정한다. 왜? ‘용도’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즉 액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정할 때와 꾸짖을 때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감정이나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배우의 연기를 결정하는 것은 ‘용도’다.

그런데 ‘암기’로 인해 충동을 일으키기 힘들어 배우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게 ‘용도’를 살리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이 좋은 배우를 천재적 배우라고 칭한다.

 

  1. 강조

 

말하기에서 화자의 충동은 목소리의 강세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왜? 말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목소리의 강세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의 말하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해지면, 목소리의 강세가 살아나 무슨 말인지 알고 목소리를 내는 배우로 보이게 마련이다.

 

  1. 끊어 말하기

 

일상의 말하기에서는 ‘용도와 강세’가 목소리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왜? 일상에서는 짧게 말을 해서 ‘끊어 말하기’를 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문어체인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어 말하기’다. 이게 휴지를 만들어 리듬을 형성한다. 따라서 ‘끊어 말하기’가 화술의 핵심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문어체인 화술에서는 인물의 성격도 어떻게 끊어 말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포즈’를 잘 살리는 배우가 ‘명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어미처리

 

화술에서 어미처리는 아주 중요하다. 어미처리를 잘하면 긴 대사도 짧은 ‘소리 말’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특히 말의 중간에서의 어미처리가 크게 공헌한다. 이게 좋으면 ‘책을 읽지 않고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의 중간에 어떻게 어미를 처리하는가가 ‘소리 말의 리듬’을 만드는 관건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용도’와도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배우가 자칫 대사의 어미처리를 못해서 연기력에 손상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1. 비언어적 요소 – 제스처, 표정 등

 

실제로 일상의 말하기에서는 말만 하지 않는다. 즉 목소리만 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스처, 표정, 시선 등을 동반한다. 어쩌면 일상에서 소통에 더 많이 기능을 하는 것도 이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일상에서는 “돈 좀 뀌어줘” 그랬더니 상대가 “예”라고 대답을 했는데도 “왜, 싫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상대의 표정이나 시선에서 뭔가 못마땅해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일상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뉘앙스’와 ‘비언어적 요소’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들도 이를 잘 활용하면 ‘소통’을 얻는데 아주 유용할 것이다.

 

  1. 화술에서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는 이유

 

옛날에 돌아가신 추송웅선생이 극단 자유에서 연수단원들(출연자가 9명?)과 워크숍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관극을 한 연극인들이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무대에 추송웅밖에 안 보여, 모두가 다 추송웅이야!” 하면서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출연자들에게 자기 식의 독특한 말하기를 그대로 강요(?)한 결과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옛 국립극단의 나이든 단원들은 곧잘 “우리 화술은 이해랑선생 때문에 망쳤어.”라고 말하곤 했다. 이건 옛 국립배우의 ‘음성화’의 기준이 바로 이해랑선생의 ‘귀’에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전언에 의하면 이해랑선생은 배우가 대사를 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작은 소리로 대사를 친다고 한다. 그래서 배우의 목소리가 이에 미치지 못하면 계속해서 이에 이를 때까지 밀어붙이곤 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작곡가의 가수수업과는 달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는 철저히 악보에 의해 리듬이 정해져 있지만 배우의 대사는 배우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악보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술교육에서는 배우가 (대사를 읽고) 각자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리듬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게 바로 노래와 화술이 구별되는 점이다. 그래서 대사는 노래처럼 ‘악보’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연기교육에서 스승의 강요는 절대 금물이다. 배우는 반드시 자기의 충동으로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말처럼 자연스러운 말하기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화술교육에서의 ‘따라 하기’는 절대로 좋은 교육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피교육자에게 따라하도록 강요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게 바로 말과 노래가 다른 점이다. 따라서 화술교육에서는 교사가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

 

  1. ‘즉흥훈련’의 중요성

 

배우의 연기력, ‘말하기 감각’은 배우의 ‘귀’ ‘뇌’ ‘입’ 삼위일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귀’와 ‘뇌’가 없으면 듣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고, ‘입’이 없으면 당연히 ‘표현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배우에게는 ‘듣는 귀’가 있어야 하며, 목소리를 인식하고 자기의 판단을 갖는 ‘뇌의 기능’이 있어야 하며, ‘입’으로는 표현력을 갖춰야 한다.

가령 작곡가에게 ‘귀와 뇌’가 있어도 이를 표현할 ‘입’이 없으면 가수가 될 수 없는 것에서 ‘입’의 중요성, 표현력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입’의 재능에서 요구되는 게 바로 ‘음성훈련’이다.

그렇다면 배우의 ‘말하기 감각’ – 리듬감각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교육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가 뒤따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이도 이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교육에 대한 체계는 고사하고 개념도 정립되어 있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는 이의 해법으로 우선 ‘즉흥훈련’을 권한다. 왜? 배우는 가수처럼 처음부터 ‘리듬’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니어서 그렇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언어생활을 해오고 있어서 이미 리듬감을 모두가 다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음성화가 ‘방해물’에 의해서 차단되고 있어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게 ‘즉흥훈련’에 의한 접근법이다. 하지만 대개가 ‘즉흥훈련’의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게 현실이다.

왜 무용론이 나오는가? 한마디로 일상처럼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즉 ‘화술을 위한 발성법’으로 전환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목소리를 위한 ‘즉흥훈련’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일상처럼 발성을 하면서 ‘즉흥훈련’을 하니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액션을 위한’ 즉흥훈련만 실시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1의 말하기, 2와 3의 말하기를 충분히 즉흥으로 훈련해서 배우가 ‘리듬감’을 익혀야 한다. 우리처럼 대사위주의 공연이 주를 이루는 나라에서는 반드시 발성법을 바꾼 다음에 즉흥훈련에 돌입하면 즉흥훈련의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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