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연출가는 어떤 존재인가?/ 우상전

우리에게 연출가는 어떤 존재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연극판에 있다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왜? 비(非)상식이 ‘관행’으로 굳어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전업연출가가 사라지고 ‘작 연출’이 일반화된 현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창작초연’이 대종을 이루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작가들이 자기가 희곡을 쓰고 이를 직접 연출하는 게 상식이 되어버렸다.

또 하나는 유일한 연극잡지인 월간 <한국연극>에 필진(筆陣)이 없이, 아예 ‘좌담’이나 ‘대담’(인터뷰)으로만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이제는 이게 상식이 되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다. 이미 당연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료실에 가면 미국과 독일의 연극잡지를 볼 수 있는데, 어디에도 ‘좌담’은 물론이고 ‘대담’도 없다. 전부 다 단독필자들에 의해서 잡지가 꾸며지고 있다.

원래 잡지란 글을 쓰는 필진이 있어야 발행하는 게 상식인데, 우리의 연극잡지인 <한국연극>에는 필진이 없이 늘 ‘끼리끼리’ 모여 ‘좌담’을 하는 게 이제 관행으로 굳어버렸다. 월간 <한국연극>은 그래도 원고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한국연극>이 ‘끼리끼리’ 모여 좌담을 나누니, 연극판에서 ‘반대의견’을 듣기 힘들어진 게 상식이 되었다. 상호간의 의견충돌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한국연극>은 이제 편집자가 의도한대로 기획되어 발행하는 잡지가 되었다.

오죽하면 작가 이윤택이 월간 <한국연극> 창간40주년에 붙여 “블로그를 가진 주체적인 재야 독설가까지 참여하는 지면이 되면 안 될까?” 이런 의견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연극계에 다양한 논리가 사라져 버린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니 자기의견이 없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명색이 예술집단에서 다양한 의견이 사라지고, 몇 사람에 의한 획일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현실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을 조금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관심과 방관이 극에 달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나는 관심이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지원금을 신청을 할 때는 태도가 달라지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관심은 오로지 ‘돈’에 있는데, 단지 그걸 숨기고 있을 뿐인 듯하다.

어쩌면 자기 논리를 펼만한 인재가 이 판에서 사라져 버린 결과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떠들면 ‘슬며시 숟가락이나 얹으면 돼’ 이런 인식이 지배하는 연극판이 되면서 나타나는 풍경인지도 알 수 없다.

 

화식(火食)과 인간의 진화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불(火)로 먹이를 요리하게 되면서, 인간에게 커다란 변화가 야기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그냥 날것으로 먹을 때와 달리 입에서 씹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그러니까 입을 적게 놀리게 되므로 해서 인간이 획기적으로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 ‘이와 턱’의 크기가 줄어들어 얼굴부위에 뇌가 자랄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화식으로 인해 대두아(大頭兒)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화식이 단순히 먹이를 ‘맛있게 먹기 위한’ 일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두뇌를 발전시키는 놀라운 변화로 진화하게 된 것이란다.

이는 연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세기 들어 연극에 ‘연출의 기능’이 첨가되므로 해서 획기적인 변화가 야기되었다. 일단 연극이 ‘종합예술’로 볼거리가 아주 풍성해졌다. 그런데 이런 연출행위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그치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연극인들의 두뇌가 획기적으로 발전(진화)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나다. 그러니까 연극인들이 무대에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다가 덩달아 자신들의 두뇌가 발전하는 ‘진화’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 논리다. 한국연극을 보면 이를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아직도 한국연극은 ‘연출가시대’를 열지 못해 공연에 ‘볼거리’가 없는 건 물론이고, 연극계 전반에 걸쳐 ‘진화’를 목격하기 힘들어진 게 현실이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 세계는 연극에 ‘연출기능’이 첨가되므로 해서 연극과 연극인들이 엄청난 ‘진화’를 맞게 된 게 현실인데, 우리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해서 한국연극은 여전히 ‘진화’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자기 논리를 정리하지 못해 월간 <한국연극>이 ‘좌담’만 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있다. ‘진화’가 멈춰 한국에서 4류로 평가받는 정치판의 논리에 다수의 연극인들이 빠져 그들의 목소리를 쫒아 목청을 높이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연극은 연출 작업을 통해서, 연극이 타 장르(매체)의 모든 장점을 모아 무대에 취합시켜 ‘볼거리’를 제공하는 명실상부한 ‘종합예술’로 승격하게 되었는데, 오로지 한국연극만 진화를 못해 ‘볼거리’도 제공하지 못한 채, 아직도 원시시대의 자급자족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어쨌든 지금 한국연극은 여전히 ‘진화’와는 먼 거리에 있는 게 현실이다. 여전히 ‘극작가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극장에 가도 별로 볼 게 없다. 그러니 당연히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해 흥행에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대는 항상 촌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특별좌담’이 많을까?

 

<한국연극>지 2월 호에 실린 ‘창작산실 사태와 검열에 대항하는 다양한 연대와 소통의 방식’이라는 긴 제목의 특별좌담 (매달 무슨 ‘특별좌담’이 그렇게 많은지)을 보자.

그것도 명색이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결론도 없는 횡설수설로 엄청난 양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자그마치 무려 ‘10페이지’에 달하고 있다.

이번 ‘100만 불 프로젝트’인 ‘창작산실’에 참가한 연출가와 극작가들이 모여, 어째서 ‘작 연출’인 박근형이 정부로부터 핍박받을 때 (그들은 이를 ‘검열’이라고 주장한다) ‘행동통일’을 못했나를 갖고 변명도, 해명도 아닌 수다성(?) 방담을 길게 나누고 있다.

정말 사회자의 마무리는 백미가 아닐 수 없다. “난상토론처럼 진행된 좌담이지만 서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나마 할 수 있었고 빚어진 앙금도 조금은 풀린 것 같아요.” 비록 횡설수설일망정 모여서 떠들고 나니 나름 속이 좀 시원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편집을 하는 잡지가 어떻게 ‘전문성’을 취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전문예술잡지가 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우리 연극판은 ‘1억 원의 지원’을 받는 연극인들조차도 자기논리를 제대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끼리끼리’ 모여서 ‘두루뭉술’ 남의 의견에 슬며시 끼어들어 횡설수설로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한국연극>이 이제는 개인들의 변명이나 늘어놓는 사사로운 잡지로 전락한 것이고, 다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연극인들이 연극판의 유일한 전문잡지를 좌지우지하게 된 현실일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차라리 좌담이 아닌 ‘개인의 논리’로 소회를 밝히는 게 훨씬 솔직하고 예술가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늘 선배를 앞장세워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는 노력을 보면서 우리가 아직도 서양처럼 ‘연출가시대’를 열지 못한 한국연극의 초라함을 실감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창간 40돌이 된 월간 <한국연극>의 ‘노림수’

 

이번 3월호 <한국연극>의 표지에 ‘특집좌담, 한국의 연극잡지들을 말한다’는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드디어 <한국연극>이 나름 ‘반성의 시간’을 갖는구나싶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새 이사장체제가 들어서면서 위기를 느낀 편집진이 ‘장기집권’(?)을 노리고 좌담을 이끌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동지들 우선 <한국연극>을 사수하시오. 좀 있으면 정권이 바뀔 겁니다. 그때까지 투쟁하셔야 합니다.”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나의 상상력이 너무 정치적인 것일까? 설마 이런 의도는 아니었겠지 싶다.

그동안 <한국연극>은 발행인 윤봉구, 편집주간 최치림, (자그마치 25명이나 되는) 편집위원으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질적으로 ‘책임편집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가 늘 궁금했다.

왜? 언제부터인가 전문가들의 목소리보다는, 정치권에서도 이미 버려야 할 구태로 여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국연극>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박장렬 서울협회장이 이번 협회이사장 선거에서 낙선을 하게 되자, 제일 먼저 불안감을 느낀 게 월간 <한국연극>인 듯하다.

그래서 부랴부랴 고명하신 김미도와 홍창수교수를 앞세워서 협회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나선 듯하다. 변변한 독립예산도 없고, 필진도 없이 매번 ‘좌담’으로 겨우 지면을 채우고 있는 처지에 ‘독립’이라니, 그러면서 무엇으로 전문성을 유지하는 잡지를 만들겠다고 편집진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동안 협회나 <한국연극>은 나름 ‘좌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진화’를 못한 연극판이라 해도 이렇게 가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싶다.

이번에 개인전을 연 민중미술 1세대인 화가(주재환 76)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린 공중전화 쓰던 세대고 지금은 스마트폰 세대 아니오. 우린 연 날리던 세대인데, 이젠 드론 날리고 있잖소. 민중미술도 새 시대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요. 맨날 하던 사람들끼리 모여서 해석하며 보는 것 말고 (웃음)”

우리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 진보인사도 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연출가시대’를 열지 못했다 해도 이 정도로 ‘진화’를 못했을까 싶을 정도다.

 

‘알파고’의 교훈

 

요즘 ‘인공지능(AI)’이 세상에 알려져 난리다. 나도 처음 듣는 용어라 무척 궁금해서 이에 관한 글을 여기저기 들춰보았다. 도대체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으로는 현재 왓슨(IBM)과 알파고(구글)가 있다고 한다. 이들의 하드웨어 수준은 ‘수퍼컴퓨터’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컴퓨터의 성능은 빠른 연산처리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니 그 속도가 엄청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런 컴퓨터의 연산성능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에 있다고 한다. 즉 컴퓨터가 입력된 자료를 빠르게 분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능력(지능)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른 게 ‘인공지능’이란다.

따라서 우리가 ‘알파고’를 통해서 되레 명확해진 것은, ‘기계와 인간’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연산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이 없으면 그저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컴퓨터에 ‘지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면 컴퓨터가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학습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한국연극에도 절실한 게 인공지능처럼 ‘알고리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싶어 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연극의 유일한 연극잡지인 <한국연극>에 글을 쓸 필진이 없는 것도, 아직도 공연에서 ‘작 연출’이라는 원시작업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직 연극판이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기계적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매호마다 (작가가 널려있는 연극계에서) 자기의 논리를 글로 풀어낼 연극인이 없어서 매번 사람을 모아 ‘수다’로 기사를 채우고 있는 것일 거다.

그러니까 학위를 따느라고 공부를 많이 해 정보는 엄청나게 입력되어 있는데, ‘신경망 알고리즘’으로 학습이 되어 있지 않아 이를 판단할 지능이나 직관이 부족한 초기단계 인공지능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게 연극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연극계가 인공지능처럼 ‘신경망알고리즘’을 통한 학습효과를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점에서 우선 세계적 흐름을 따라 연출가의 양성, 연출가적 안목과 인재를 길러내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삐끼’가 사라진 대학로

지금 대학로를 20년 동안 장악하고 있던 볼썽사나운 ‘삐끼’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등장하지 않을까 연극인들 모두가 초조해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앙일보 문화부 최민우차장이 이를 상세히 보도하자 문체부와 청와대가 이의 심각성을 깨달은 결과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이 관광으로 연명해야 할 처지에서 대학로의 ‘삐끼’야말로 국제적 망신이라는 것을 박근혜정부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그런데 한번 묻고 싶다. 그동안 늘 입만 열면 ‘민주와 자유’를 외치며 나라를 걱정하던 월간 <한국연극> 편집인들 중에 누구도 나서서 ‘삐끼’에 대해서는 ‘특집좌담’을 꾸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우리자신의 일에는 그토록 무관심한 것일까?

하긴 3년 전 대선을 앞에 둔 시점에 내가 이를 공개석상에서 거론했더니, 연극인 모두가 “삐끼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에 동조했다. 자포자기적 체념상태에 빠져 있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소심해서 대학로가 ‘삐끼’라도 없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었는데, 이 땅에서 민주주의와 검열을 걱정하던 인사들은 그동안 무엇을 꿈꾸며 살아왔는가를 묻고 싶다. 오로지 지원금 끊길까봐 ‘나라걱정’만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한국연극이 아직도 세계적 흐름인 ‘연출가시대’를 열지 못하므로 해서, 진화를 멈춘 곳이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왜 우리는 ‘연출가시대’를 열지 못한 것일까?

 

국립극단의 ‘빛의 제국’을 보니 더욱 명확해진다. ‘연극은 연출에 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지난번 ‘겨울 이야기’에 이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분명한 것은 연극의 미래는 극작(희곡)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동시기에 공연된 ‘1억 지원프로젝트’인 ‘떠도는 땅’ (동이향 작, 연출)과 당연히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초반부터 둘 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공연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중간휴식 없이 자그마치 런닝타임이 2시간을 넘긴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빛의 제국’은 객석을 박차고 나가기 힘든 어떤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일단 연출이 ‘떠도는 땅’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대단히 세련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도대체 한국연극은 언제까지 ‘작 연출’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파고’에 한번 묻고 싶을 정도였다.

왜 우리는 그동안 창작극에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작 연출’이 대세가 된 현실을 마냥 손을 놓고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일까?

일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공적인 국립극단의 두 공연이 ‘창작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빛의 제국’은 김영하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고 ‘겨울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전혀 ‘창작초연’이 아닌데도 연극의 재미(관극의 재미)를 만끽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게 바로 ‘연출가의 힘’일 것이다. 그러니까 연출만 잘하면 ‘창작초연’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연극의 맛’을 느끼는데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성공적인 두 공연의 연출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 연출’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창작극 패러독스’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혹시 좋은 작가는 좋은 연출적 능력도 갖고 있다고 여긴 결과일까? 그것도 아니면 ‘창작초연’만이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일까? 이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사실이다.

 

왜 ‘전업연출가’가 힘을 쓰지 못할까?

<한국연극> 3월 호 말미에 ‘작, 연출가가 말하는 희곡이야기’가 실려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이 역시도 편집위원인 극작가 최명숙이 이끄는 ‘연속좌담’프로다. 마침 ‘동이향 작가가 좌담에 참석을 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괄목할 점은, 어째서 우리 극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자신이 직접 연출하기를 소망하는 것일까 하는 아주 귀중한 질문을 꺼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게 ‘천생배필론’이다. 자기들의 희곡을 가장 이상적으로 연출해줄 연출가를 찾지 못해서, 즉 좋은 배필을 구하기 힘들어 작가들이 스스로 연출에 나서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건 나도 인정한다. 왜? 한국에는 공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좋은 연출가가 많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관찰로는, 한국연극에서의 전업연출가의 존재는 서울예대 유덕형이사장을 끝으로 마감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순수(전업) 연출가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마지막 연출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그 분은 무대에서 ‘볼거리’를 제공한 유일한 연출가였다.

그러니까 전업연출가 시대를 마감한 게 벌써 30여년이 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출가 유덕형 이 후로, 한국연극은 ‘작 연출’의 시대로 곧바로 접어들어 현재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분은 연출가로서 모든 것(제반여건)을 다 갖춘 상태에서 연출을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해외유학에다, 극장주(드라마센터)에다, 제자가 있는 대학교수(서울예대의 학장)에다, 연출가로서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행운아였던 게 사실이다.

그럼 왜 연출가에게 제반여건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

사실 배우는 뒷골목에서 연기를 하던, 앞 골목에서 놀던 상관이 없다. 또 영화, TV든 어느 장르에서 연기를 해도 충분히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자기의 기량을 보이는 데 아무런 제약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연출가는 다르다. 우선 제작비가 풍족해 한다. 그리고 인맥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스텝, 좋은 배우와 작업이 가능하다. 이게 충족되어야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연출가로서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다. 이게 연극의 다른 파트와 다른 점일 것이다.

따라서 연출가에게는 연출을 잘할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따라서 여건이 미비해서 한국에서 좋은 전업연출가들이 배출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우선 여건이 열악하면 당장 마음에 여유가 없어 연출가가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건이 충족치 못해 한국연극에서 전업연출가가 사라지게 됐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덩달아 한국연극 전반에 ‘진화’가 멈추게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 현실에서 유덕형이사장처럼 제반여건을 다 갖추고 연출가로 입신을 꾀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찾기는 너무 힘든 것도 현실이다. 그렇다면 마냥 체념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따라서 우리의 현실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출가 양성을 위한 제언

 

우선 한국에서 연출가 양성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창작극에는 고전(古典)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많은 극작가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게 좋은 연출가 배출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왜? ‘생존 작가’들의 작품을 연출하게 되면, 당연히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연출하는 연출가에게 간섭하려고 들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그렇다. 한마디로 연출가들이 자유롭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고전이 없으므로 해서 연출가들이 각색이나 윤색 등을 통해서 자기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둘을 종합하면, 연출가들이 일단 자유롭게 연출을 펼칠 작고한 창작극 작가들의 좋은 작품이 너무 적다는 것이고, 대부분의 작가가 생존해 있어서 작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어 연출가가 자기의 창의성이나 상상력을 발휘해 연출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연 때 극작가들이 나서서 자기의 희곡에 어떤 수정도, 첨삭도 가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 흔하게 발생해, 한국의 연출가들은 대체로 ‘기가 죽어있는’ 채 연출가로 입신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까 한국처럼 생존 작가의 ‘검열’(?)이 심한 곳에서는 좋은 연출가가 탄생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연출가들이 이를 극복하려면 애당초 셰익스피어나 소설을 각색해서 연출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작가에 의한 ‘검열’이 불가능한 텍스트를 골라 전업연출가로서 출발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거기다 공연을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연출가의 편이 아니다. 오로지 관심은 ‘작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따라서 희곡의 내러티브에만 침잠해 연극과 희곡이 어떻게, 또 무엇이 다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심사와 평가를 담당하는 평론가들이 연출가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연출에는 관심이 없는 나라다.

그러니 연출가들이 작가들에게 신뢰를 얻기 힘들어, 당연히 작가들이 자기희곡을 연출가들에게 맡기는 것을 꺼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히 ‘작 연출’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고, 작가들이 ‘천생배필론’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연극판에서 급선무는 연출가들이 작가들에게서 어떻게 신뢰를 얻느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무런 개념도 시스템도 없고, 이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게 연극계의 현실이다.

외국에서는 작가들이 자기의 ‘초연’을 보고 연출가의 첨삭을 그대로 살려서 출판할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자기가 쓴 희곡을 그대로를 출판할 것인가를 고민할 정도로 연출가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에는, 작가가 출판된 자기 희곡집에 “완성된 공연으로 만들어준 연출가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하는데 우리는 기본적인 신뢰조차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유일한 접근방법이 있다면, 작가의 ‘검열’이 없는 텍스트를 골라 연출가가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 작가들에게 신뢰를 얻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여 우리 연극배우들이 왜 현장에서 마냥 비실거리고 있는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제대로 연기를 익혀서(배워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에 나가면 연기를 잘 모르는 연출가들에게까지도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배우협회를 운영할 때도 마냥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연출가들이 배우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작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들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량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연출가들이 마냥 알려진 작가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작품하나 줘!” 하며 구걸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그나마 창작극이어야 제작을 위한 지원금을 얻어내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이 내심 연출가들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연출가들의 불행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연출실력을 창작 작가들에게 의존하려고 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다가 ‘연출가시대’도 열지 못하고, ‘두뇌의 발전’도 꾀하지 못한 채 추락하고 만 게 한국연극의 현실이다.

 

둘째는 한국연극이 소극장공연으로 연명해온 현실이 연출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극장 공연이 대세일 경우에 가장 치명상을 입는 게 연출이고 가장 덕을 보는 게 극작가일 것이다.

왜? 공연의 규모가 작을수록 연출이나 극작가 모두에게 어려움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연출의 발전에는 치명적이 되는 게 사실이다. 연출은 별로 할 게 없어 자연히 발전보다는 퇴보하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연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극장에서는 ‘무대발성’이라는 벽을 넘어서야 하는데, 소극장 공연에서는 이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연기도 소극장 공연이 주를 이루면서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 발전을 도모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러니 대극장공연이 늘어나면서 지금 한국연극은 온갖 어려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대극장공연으로 인해서 많은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극장 공연의 활성화가 전반적인 연극발전의 지름길이 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한국연출가의 또 다른 불행은 연출을 하려면 반드시 ‘극단을 만들어’ 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프로덕션체제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지원도 협회를 통해 극단으로 이입되기 때문이다.

물론 극작가들도 자기 작품으로 ‘연출’을 할 때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극작가로 출발하면 신인 때부터 지원금을 받기 용이한데 반해 연출가로 출발하면 시작부터 불리한 게 현실이어서 그렇다.

왜? 우리의 지원체제가 ‘창작극 육성’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작가들에 비해서 연출가가 훨씬 불리하게 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연출지망생들이 자기 돈이 없으면 극단을 만들지 못해 유명해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낭인생활(?)을 면치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국공립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시스템이 가장 바람직한데, 우리에게는 그런 시스템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리고 일단 이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국공립에 대한 관심은 그저 배우인 단원을 뽑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배우만 있으면 연극이 되는가! 사실 배우는 널려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넷째는 현재의 대학교육이 엉터리라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연출교육의 실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연극대학에 ‘연출전공’이라는 게 있었다. 아주 인기가 많아 연출전공자가 그 대학의 전체수석에 들 정도로 ‘유명세’(?)를 탄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인재들을 연극대학이 뽑아놓고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또 현장에 ‘연출가’를 배출할 교육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연출이 무언지를 모르는 ‘현장무경험자’들에 의해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재능 있는 연출가의 배출이 막혀버린 셈이다. 따라서 대학은 우수한 인재가 영입되어도 ‘바보’로 만드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여간 지금 한국연극은 앞으로 어떻게 연출가를 양성할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차라리 학교교육보다는 ‘도제교육’이 더 낫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국공립단체에 입단을 시켜 직접 실기를 통한 ‘도제교육’을 펼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여겨진다. 구태여 연극대학출신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창작초연’이 한국연극을 이끌기 힘든 이유

 

  1. 시인(詩人)들이 모여 토론하다

 

한국의 원로시인들이 모여 계간 <시인수첩> 봄호 ‘한국 현대시의 반성과 전망’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여기에 이를 소개하는 것은 한국문학이 당면한 현실을 우리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여기도 <한국연극>처럼 모여서 ‘좌담’을 나누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처럼 매번 정부를 향해 검열이나 외치고 있지는 않아 부럽다. 왜? 그들은 지원금에 목을 매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시인세계에서는 우리처럼 정치구호를 외치지 않고, 자신들에 대한 자아비판과 자성이 존재한다는 게 우리와 다른 점일 것이다. 그것도 원로들이 나서는 게 부럽다. 우리는 심사위원이라도 할까 싶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젊은 시인들의 ‘난해 시’의 유행과 시를 읽는 독자의 감소”로 압축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외려 시인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독자는 ‘시의 홍수’ 속에 빠져 오히려 시를 외면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를 싣는 월간지와 계간지가 200여종이나 되다보니 등단이 과거에 비해 쉬워지면서 수준 이하의 시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 본보기로 그들은 지하철에 게시된 시를 거론하고 있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시에 대한 혐오감 혹은 모멸감을 확산시켜 시로부터 독자들을 추방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원로시인들은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평론가들도 성토하고 있다고 한다, 신달자 시인은 “소통이 되지 않는 시가 독자를 밀어내고 시집 판매까지 어둔하게 한다. 시를 써온 전문가도 알아듣지 못하는 시가 좋은 시로 떠받들리는 일에 대해 좀 더 핵심을 파고들어 그 단위를 가려내야 한다.”

시인 오세영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풍을 너무 쉬운 ‘사실의 시’와 너무 어려운 ‘망상의 시’로 나눠 분석했다고 한다. 연극판도 뒷골목에서 막가는 ‘사실의 공연’과 앞 골목에서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망상의 공연’이 공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의 시’는 일상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베껴놓곤 은유도 상징도 없이 쉬운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지칭하며, ‘망상의 시’는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어떤 이질적이며 상호 단절된 의미들이나 관념을 무책임하게 그저 토설하는 것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시인 이건청은 “젊은 시인들이 시를 존재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문화센터의 시 창작 강좌에서 시인이 수강생의 작품을 첨삭 지도해 등단을 돕는 현상마저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비록 시에 관한 이야기지만 희곡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현실도 이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연극인들도 경청할 만하다. 이런 판국에 점점 창작극 작가를 위한 지원금 액수마저 커져가니 우리도 ‘망상의 희곡’만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1. ‘한국연극’과 ‘한국영화’의 비교

 

한국연극처럼 ‘작 연출’이 심하게 행해지는 곳이 있다면 바로 ‘한국영화’일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는 연극처럼 자기가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이 연출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한국영화는 연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흥행성적’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관객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과는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일단 한국영화는 해마다 개최되는 부산영화제 등에 납품(?)하려고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연극은 ‘서울연극제’에 납품하려고, 지원금을 목표로 창작극을 토해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극작가들은 희곡생산을 일종의 ‘연중행사’(?)로 여긴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에 반하여 한국영화는 ‘흥행’에 자신감을 가질 때 – 비록 결과적으로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 제작에 착수한다. 연극처럼 ‘연중행사’로 영화를 양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한국영화는 관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돈벌이’를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인상을 주는 영화도 없지 않다. 하지만 영화제 출품용이라고 오해를 받던 김기덕감독의 영화가 결국 두 손을 든 게 한국영화의 현실이다. 하지만 연극은 아직도 연극제의 시상을 목표로 창작초연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는 한국영화는 연극과 달리 관객이 접근하기 어려운 내용의 작품을 뻔뻔하게 내놓지는 않는다. ‘흥행’을 목표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연극은 ‘실험극’이라는 이름으로 난해한 예술(?)연극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관객이 들지 않아 점점 더 지원금에 의존하게 되고 지원기관은 ‘검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1. 현대연극에서 ‘극작’이 위축되는 이유

 

1) 현대연극의 세계적 추세

 

지금 세계연극은 ‘연출가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래서 극작가에 의한 신작이 빈곤상태에 있는 게 현실이다. 현재 어떤 나라도 주목을 끌만한 새로운 극작가의 신작이 탄생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대를 대표할 극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베케트’에서 거명이 끝날 정도다. 왜 그럴까? 좌우간 이 시대에 희곡이 관객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출중한 작가의 탄생을 막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작가의 천재성이 요구되는 장르인 희곡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거기다 뮤지컬이 판치는 시대에 연극이 각광을 받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요새는 연출가들이 ‘연극작가’를 겸하고 있는 게 세계적 대세다. 거기다 연출가들이 고전이나 소설 등의 다른 장르의 각색이나 윤색 등을 통해서 ‘텍스트’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 일단 ‘경쟁 장르’가 너무 많아

 

영화의 오락성이 연극의 장르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TV와 뮤지컬, 요사이는 인터넷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영상매체의 오락이 강한 경쟁력을 앞세워 연극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되레 연극은 이런 장르와의 차별성을 내세워 지나치게 난해하고 비(非)오락성으로 치달아 점점 더 관객을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여러 장르를 아우를 줄 아는 연출가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진 게 현실이다.

 

3) 오락성을 확보해야 하는 연극

 

연극은 다른 장르와 대결은 고사하고 독자적인 생존마저도 위협받게 된 게 현실이다. 따라서 희곡보다는 연출력을 통한 표현력 확대와 연기력을 통해서 생존을 유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선 독서인구의 감소로 ‘책’이 팔리지 않는 출판의 위기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비주얼시대가 만개했다. 따라서 문학성을 내세우는 희곡이야말로 대본(텍스트)의 구실밖에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시대에 ‘창작극’인 희곡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연출가를 위한 제언

 

아무리 외적요인이 연출가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해도, 연출가 자신들의 깊은 반성도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연출가들이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SPAF 공연에도 객석을 채우는 사람은 되레 소극장 공연을 선호하는 평론가들인 게 현실이다. 외려 객석에서 연출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도대체 글로벌적 관심도가 꽝이다.

오래전에 정부가 ‘해외연수제도’를 실시했는데도 자신들의 이기심만을 앞세워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공헌하지 못한 점 등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 연출가란 어떤 기능을 하는가? 또 연출가가 부실하면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는가를 한국의 연극인들 모두가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 단기간에 걸친 현장을 위한 외국유학을 다시 부활해야 한다. 또 외국의 연출가 등을 초청해 교육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다른 장르’를 연극에 도입하는 방법론을 익히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 국공립단체가 시급하게 연출가를 양성하기 위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지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이제는 지원정책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처럼 ‘창작초연’에만 지원이 기울어서야 영원히 ‘연출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지원이 가장 필요한 분야가 제작을 담당하는 연출가(극단대표) 파트인데도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공공단체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더욱 연출가(극단대표)에게 제작지원이 필요한 형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외려 창작극에 지원을 해주므로 해서 일단 극작파트가 아닌 분야는 연극판의 ‘곁다리’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모두가 제작지원을 수월하게 받으려고 창작극을 올리는데 몰두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것도 신작으로 말이다. 그러니 더욱 더 연출가들에 의한 고전(古典)공연이 양산되기 힘들어, 우리에게 우리의 고전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지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지원체계의 패러다임을 시급히 바꿀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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