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3/5)/ 이재진

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3/5)
S T A N I S L A W S K I – B R E C H T

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를 한마디로 구분하자면 자연주의연극과 반자연주의 연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배우의 극중 인물과의 완벽한 일치를 위한 배우양성에 몰두했다면 브레히트는 정확하게 그 반대노선을 위해 노력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관객의 환상세계를 지켜주기 위해 제4의 벽을 굳건히 닫아 건 반면 브레히트는 반대로 제4의 벽을 허물어 관객과의 벽을 제거해 버렸다, 이로서 배우는 이제 관객과 직접 맞닿게 되었다. 브레히트의 말대로 “납치된 관객”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
자연주의 연극과 스타니슬라프스키

 

19세기 말의 경우처럼 사회전체가 모든 문제를, – 희망이던 비참함이던 간에, 무대를 통해 조명하고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려던 시기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은 마르크스 자본론, 다윈의 진화론은 물론 고도로 변화하는 천문학, 새로이 밝혀지는 자연과학,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혁명, 점치 비대해지는 대도시화 속에 신음하며 동시에 도약하며 새 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1880-190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던 지적 문학운동. 사실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표현하자는 운동이 자연주의연극이다. 실험을 통한 증명된 사실을 문학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사회적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여 분석하려는 의도이다. 에밀 졸라 등 자연주의 작가들은 예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고 가능한대로 작가의 개입을 줄이려들었다. 즉 불완전하고 불안정된 예술가의 주관성을 최소화시킴으로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간의 감성이나 환상보다는 수집된 과학적 사실자료에 더욱 신뢰를 갖었다.

 

예술가는 실험실의 화학자 같은 실험자가 되었다. 자연이 그런 것처럼 문학작품도 논리적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픽션이아니라 논픽션으로 그렸다. 현실문제를 자연, 진실, 삶 등 일상생활 속에서 찾았다. 인간을 결정론적(유전, 환경.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했다. 국가권력이나 사회적 모순을 비판했다. 자연주의 연극은 비관적 세계관 속에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희망도 심어주지 않았다. 자연주의연극은 한 마디로 지적 문학저항운동(혁명)이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코러스가 극중 인물과 관객을 매개한다. 관객과 무대의 엄격한 차단은 없다. 관객과 무대, 현실과 가상의 세계는 엄격하게 차단되어 있다.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Parabase의 기법’은 희극에만 가능했다. 무대 위의 인물은 관객과 교류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역에서 이탈하여 제4의 벽을 뚫을 수 있다. 프랑스 고전에 오면 제4의 벽으로 무대와 관객석은 엄격하게 차단된다. 그래도 즉흥적 대사(Extempore) 방백(aside)이란 기법은 그대로 사용했다. Denis Diderot (Discours sur la poésie dramatique. 1758)는 이런 방백을 배우의 불손하고 부정한 습관으로 매도했다. 자연주의 연극은 무대현실을 더욱 사실로 만들기 위해 제4의 벽을 지켰다(입센, 하우프트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관객의 반응에 초연할 것”을 배우들에게 요구했다. 자연주의 극은 관객과 무대를 가로막고 있는 공간을 지킴으로서 관객을 무대현실 속으로 끌어드리는 효과를 얻는다. 이와 반대로 서사극에서는 이 제4의 벽을 허물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의 현실이 하나의 가정된 현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럼으로 자연주의 극은 관객을 가상의 현실로 끌어 드리는 환상적 극이다.

 

그리스 연극에는 없던 연출지시문(stage direction)을 자연주의 연극에서는 특히나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지시문은 연출자, 무대장치, 배우를 위한 지침이다. 상세한 인물설정(나이, 모습, 의상, 소도구 등), 무엇보다 무대배경을 아주 상세하게 지시 혹은 설명해 준다. 나이는 몇 살 몇 개월 등으로 아주 정확하게 명시된다. 창문이 열리며 벽난로의 불꽃이 너울거리면 그 흔들리는 불꽃의 가닥까지 세워가며 섬세하게 표현한다.

 

동독과 브레히트

 

브레히트가 동독당국의 눈에는 그리 탐탁하지만은 않았다. 동독1등 국가훈장,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탄 브레히트지만 사실은 서독에서 보다도 더 심한 냉대와 비판을 받으며 그곳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외부에 브레히트는 동독 사회주의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듯 보였으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브레히트를 형식주의 경향의 실험주의자로 몰아갔다. 브레히트는 이들을 무르크스주의자들(Murxisten)이라 불렀다. 브레히트의 하는 일이 그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브레히트와 함께 이룩한 성과를 쉽게 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반대편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월계관을 쓰고 聖人으로 칭송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Berliner Ensemble의 공연이 뛰어난 공적을 쌓으며 널리 인정을 받자 그럴수록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옹호자들은 혹은 무르크스주의자들은 브레히트를 몰아세웠다. 고급공무원들이 브레히트에게 수시로 작품의 내용([억척어멈] 등)을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때로는 작품제목([루쿨루스 심문])까지 강요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가장 혁명적인 작품으로 생각하는 [조처]에서도 주인공이 혁명적인 영웅이 아니라고 당국은 비판했다. 동독 사회주의가 탄생할 때 브레히트는 미국에 있었다. 사회주의의 성장에 동참하기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브레히트는 너무나 성분이 좋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완성하려면 어떤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지만 브레히트는 [억척어멈]에서 평화주의, 반전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소련이나 중국은 한국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 않은가?! 극작가로서 너무나 행복에(!) 겨운 브레히트는 “세상 어느 나라에 높은 공무원이 이렇게 연극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였다. 하지만 당국에서 예술작품을 양계장의 닭처럼 이렇게 일률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려 든다면 결국 작품은 하나같이 똑같아 질 것이라 브레히트는 비아냥거렸다. 당서기장 Ulbricht에게서 작품 쓰는 법까지 배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컴퍼런스

 

당국은 브레히트의 극장을 경찰청사로 쓰겠다고 까지 통보해왔다. 브레히트는 강하게 항의했다. 그럭저럭 무마되었지만 이번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 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공표했다. 주제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방법에 우리는 어떻게 적응할까?”였다. 그런 주제를 논하는 콘퍼런스를 브레히트가 받아드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서사극에 대한 모종의 연막전술작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베를리너 앙상블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보았다. 콘퍼런스를 막을 수 없기에 브레히트는 공격적으로 맞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시험대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동독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에 관한 번역서나 저서가 굉장히 많이 출판되어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1947) 이미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번역본을 접한 적이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불신의 골은 깊기만 했다. 그 유명한 연극스승이 말하는 시스템이 미국연극계를 위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너무 보수적으로 러시아의 계급갈등이라든지 자르시대의 부르주와 등을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주관적 감성이나 배우가 스스로 창출해낼 창조력에 비중이 크게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도 연극을 개혁하려는 흐름에 있었다. 아방가르드와 그와 유사한 혁신적인 연극개혁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심하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험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사실적 연기를 요구했다. 러시아의 일부 젊은 연극인들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이런 “체험연극”을 공격했다. 브레히트도 이들과 비슷하게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감성적 연극을 거부했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집단을 위한 집단에 의한 집단을 내세우는 집단연극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은 개인의 문제를 중시하는 개인을 위한 연극이다. 브레히트는 바그너 음악에 취한 청중이 그러하듯 아편에 중독된 관객을 일깨우려했다. 브레히트는 이들 마술에 걸린 관객과 배우를 잠에서 깨어나도록 제4의 벽을 무너트리고 벽속에 인질로 잡혀있는 관객을 구출해 내려했다. 약기운에 빠지지 못하도록 무대와 관객석에 불을 밝히고 무대를 텅 비워놓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았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적인 연극세계를 구현하고자 노력했기에 브레히트는 개인적인 “체험연극”이라 비난하며 한 인간에 한 개인에 국한된 연극이라며 그 당시 다른 어시아의 젊은 아방가르드 연극인들과 같이 세찬 공격을 하였다. 배우란 자기역할과 거리를 두고 의도적으로 무대환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회비판적 관점을 극대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 특히 스타니슬라프스키와 자신의 연극관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이론서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았기에 브레히트는 직접 접해보지 못했다. 죽기 얼마 전에야 비로소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세계(배우, 연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생각을 바꾸기에 이른다.

 

브레히트는 계속해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수업을 연구했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1930년대 후반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나름대로 극작가로 인정을 받고 러시아에까지 알려질 무렵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죽었기 때문이다. 50년대 비로소 브레히트는 부분적으로 [배우수업]의 번역본을 접하게 된다. 무엇보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연극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등한시 했다고 브레히트는 비판했다. “배우는 작품주제에 맞추어 움직이면 된다.”고 브레히트는 생각했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를 “주관적 감성에 따라 움직이는 주체”라고 강조했다. 브레히트가 가장 비판적으로 거부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법은 ‘감정이입’ 이었다. 이는 스타니슬라프스키 역시 바로 히스테리(Hysterie)라며 이를 거부하고 비판했다. ‘연극노트’ (Theaterarbeit. 1952)에서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방법론을 추천하기까지 한다.

 

감정이입과 히스테리 (Empathy and Hysterics)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기 위해 자연주의 연극이 표방하는 ‘환상의 세계‘(Illusion)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사건을 사실처럼 꾸미려 드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이야기하려드는 것이다. 배우는 극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 무대는 브레히트에게는 관객의 가슴을 움직여 계몽하려는 도덕적 산실이 아니라 관객의 머리를 움직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나도록 설득하고 선동한다.

 

연극이 종합예술이란 점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한다. 연기, 무용, 조명 등 모두 연극행위에 포함시켰다. 연극무대는 음악, 무용, 미술 뿐 아니라 기술적인 기능까지 모두 (브레히트는 이를 “자매예술”이라 불렀다) 동원하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브레히트는 일찍이 피스카토아의 조연출로 그 아래에서 ‘정치극’을 실제로 수학하고 체험한 적도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모두 주인공보다도 조연배역의 배우를 더 중시했다. 다시 말해 주인공 중심의 극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비중 있는 배우에게 아주 비중 없는 배역을 맡기는 연출기법이다. 이로서 성공적인 앙상블을 끌어냈다.

 

브레히트는 자신은 극작가이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였음으로 서로 비교함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 적도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물론 배우의 입장에서 연기력이란 창의력에 주안점(‘시스템’)을 두는 반면 극작가인 브레히트는 사회변혁의 근간을 가져올 연극(서사극)을 구축할 이론을 정립하는데 몰두했다. 브레히트는 희곡작품을 쓰고 때로는 직접 자신이 연출을 맡은 반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오로지 배우의 시각으로 연극을 바라보았다. 이런 직업상의 차이점으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론이나 작업방식을 생각해 내었다.

 

STANISLAWSKI-SYSTEM

 

배우는 자신과 배역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방황하게 된다. 러시아 국립연극 아카데미(GITIS. 1878 설립)가 주도하던 시절에는 배역이란 자아(작중 인물)는 실제 여러 체험 속에서 살아가는 배우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예술적 자아”로 이해했다. 배우는 체험과 느낌을 토대로 즉 “감성적 기억” 속에서 자신의 극중 역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생각했다. 기억되는 어떤 상황과 역할과 일치시키라는 이런 요구가 그리 쉽지 않자 내적 체험을 외적 동작으로 바꾸는 “신체적 동작방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른다. 이를 ”심리 신체적 움직임“으로 정리하게 된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만약 그랬다면”, 혹시나 그랬다면 어찌 되었을까”을 가정한다. 배우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어떤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체험했던 어떤 상황을 찾아내 서로 병행시킨다. 즉 자신의 체험 속에서 그와 유사한 상황을 기억해 내고 그에 맞추어 실제처럼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연극을 신봉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육체와 영혼)가 될 때 가장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내적으로 느끼는 것을 밖으로 표출할 때는 동작, 자세, 몸짓, 습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적으로 변화하는 의지, 이성, 감정, 상상력, 무의식 등을 몸뚱이는 예민한 기압계처럼 밖으로 그대로 드러낸다는 생각이다.

 

다음번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법(시스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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