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초점 / 오세곤

(제68호 편집인의 글)

문제의 초점

 

사람 사는 곳은 으레 그렇겠지만 예술계 또는 연극계에도 늘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어찌 보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확률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안 생기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 큰 문제가 없으면 그 동안 작아서 잘 안 보이던 것들마저 문제로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사회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하는지는 사회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문제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느냐가 중요한데 문제의 핵심이 아닌 엉뚱한 곳에 주목하면 초점이 흐려지고 본질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능력이 부족해서건 불순한 의도에 의해서건 초점 흐리기는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예술인 복지와 관련하여 몇몇 예술인들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매스컴은 영락없이 “복지의 사각”과 “법의 수정”을 주장한다. 때로는 예술인의 어려운 생활을 동정의 시각을 곁들여 보도하기도 하고, 보편적 복지와 예술인을 위한 특별한 복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다시 묻히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 복지란 단어에 대한 기본 인식이다. 사고가 예고 없이 터지듯이 복지 관점에서 긴급 상황 역시 언제 어디서고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긴급 상황의 유형은 아무리 사전에 예측해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24시간 가동되는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며, 또 담당자가 적극 행정을 펼치도록 철저히 교육하고 마땅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야 한다.

적극 행정이란 설령 과잉으로 드러나더라도 절대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소극적이었을 때 문제 삼아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처럼 1년 전에 엄격하게 항목이 정해진 예산 체계 안에서 적극 행정이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뭐든 문제가 되면 위에서 책임지기보다는 실무자에게 떠넘기는 풍토에서는 선진적인 복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에 더해 예술의 특성을 고려한 예술인 복지의 당위성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술은 성공 확률이 거의 제로인 특성을 지닌다. 그런 실패를 무릅쓰고 시도를 계속하는 예술인들 중에는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못 하는 이들도 있다. 일반인에 비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의 예술인들을 위한 맞춤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중단 위기에 처해 있다. 보궐선거로 당선된 신임 군수가 중단 선언을 했으니 결코 상황이 가볍지 않다. 군수는 운영권 다툼을 이유로 들었고 상당수의 언론들도 그렇게 보도하였다. 그러나 과연 “다툼”이란 단어로는 문제의 핵심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초점이 흐려지며 합당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 하면 다툼을 잠재우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착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우선 사건의 전말을 보자면 이렇다. 거창연극제는 처음에는 아마추어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여러 여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중요한 국제연극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질적인 면과 운영 면에서 계속 지적을 받았고 심지어 법적으로 처벌까지 받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자 줄곧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 2선으로 물러나고 다른 이를 책임자로 내세웠다. 이후 전직과 현직 간에 갈등이 발생해 송사로 이어진다. 결국 거창연극제는 실질적인 진행이 어려워진다. 이에 거창군 의회는 거창군이 직접 진행하는 것을 전제로 예산을 통과시킨다. 거창군은 의회의 결정과 문화부 평가 시 나온 개선 지시를 받아들여 이전 집행 조직에게 지원 중단을 통보하고 중앙 연극계 인사들로 새로이 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렇게 약 1개월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거창연극제가 준비되던 중 보궐선거가 있어서 새로 군수가 뽑힌다. 그런데 새 군수는 운영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거 집행 조직을 대폭 포함시키는 이 계획은 현 운영위원회로서는 받기 어려운 제안이었고, 그래서 송사에 걸려 있지 않은 인사로 2명을 받겠다는 역제안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사이 과거 집행 조직은 상표권 소유를 명분으로 연극제 강행을 선언하고 초청 단체 선정 등의 일을 진행시킨다. 그러자 군수는 2개의 연극제가 열리는 일을 수용할 수 없다면서 연극제 포기를 선언한다. 이에 일방적으로 해촉당한 운영위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기자회견을 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연극제가 최초 위기에 빠진 것은 운영 부실이다. 그 다음 조직 내의 다툼이다. 그렇게 위험에 빠진 연극제를 구해달라고 연극계 인사들로 운영위원회를 꾸린 건 분명 하나의 방향 모색이다. 문제는 그 방향의 변경의 시기와 내용이 과연 합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명칭에 대한 상표권 때문이라는 것은 옹색하다. 명칭이 바뀌어도 연속성이 인정되면 예산 지원에 있어 문제가 없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하나의 기초자치단체에서 2개의 연극제를 개최할 수 없다는 것도 절대적인 원칙은 되지 못 한다. 그보다 더 많은 연극제가 개최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군수로서 지역내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중립적인 연극인들이 나서서 연극제를 살려놓은 다음 과거 오랜 세월 고생한 분들의 능력과 수고를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신임 군수의 의욕이 너무 커서인지 무리하게 결합을 시도하다 잘 안 되니 덜컥 포기를 선언해 버렸다. 미세하게 조정해 가며 가야 할 길을 너무 거칠고 크게만 접근했다는 생각이다.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기존 조직은 당분간 자제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굳이 행사를 고집한다면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거창군은 그것과 상관없이 원래 계획된 연극제를 충실하게 준비해서 진행하면 된다. 그것을 위해 선임한 운영위원들의 의지와 능력을 믿고 행사가 잘 되도록 지원해 주면 된다. 이것이 가장 쉽고 빠른 문제 해결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문제의 본질을 연극인들 간의 다툼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앞서 기존 조직 안의 다툼은 엄밀히 보자면 연극인들 간의 다툼이 아니며 기존 조직 구성원들을 대폭 운영위원으로 포함시키려는 군수의 의지와 엄선된 소수만을 수용하겠다는 현 운영위원들의 제안이 부딪치는 것은 연극인들 간의 다툼으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오히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흔든 것은 군수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보는 것이 맞다.

언론은 여론을 만들고 여론은 정책 결정자들을 움직인다. 문제의 초점을 맞추고 핵심을 찾아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임무이다. 그런데 언론은 때때로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거나 초점을 흐려 놓기도 한다. 그런 탁류를 헤치고 초점과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독자나 시청자는 드물다. 무엇보다 언론의 책임이 막중함을 깊이 깨닫고 크게 각성해 줄 것을 촉구한다.

201661

오늘의 서울연극편집인 오세곤

4 thoughts on “문제의 초점 / 오세곤

  1. 오세곤교수는 지금 연극계의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내가 농담으로 ‘직업이 회장’이라고 할 정도다. 일단 TTIS를 통해 연극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거기다 현재 모든 젊은 연극인의 꿈은 ‘전임교수’다. 그러니 젊은 연극인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기득권세력이다.
    언제나 본인은 마음대로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어느 자리도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 연극인 세미나에서 객석에 앉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단위에 계시면서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곤 한다.
    그러니 연극계는 매번 ‘성명서’을 낭독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본인이 당연히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연극계가 소용돌이치기는 기대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성’이라는 단어로 남을 매도하기도 한다.
    원고를 보내도 제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고, 이제는 실지 않겠다고 통보도 한다. 글에 문제가 있으면 댓글로 항의도 하고 모욕도 주는 곳이 연극계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다 결정하는 것이다. 제발 연극계를 위해서 많은 자리를 내놓기를 바란다. 이제 TTIS도 협회장이 바뀌었으니, 그만 후배에게 물려주시길을 기원하다. 뭔드지 오래 하면 독재자가 되기 마련이다. 거창연극제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다. 상대방의 발언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해서 교수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곰곰히 생각해보길 바란다.

  2. 상대의 발언이 없다고 했더니 거창군의 취소통보서를 실어? 자꾸 이런 꼼수를 제발 쓰지 말라! 그런 지혜(?)가 있다면 연극계를 위해 써라! 당장 내 글을 실어다오! 마치 내가 글에 악이라도 쓰서 실지 않은 것처럼 연극인들에게 느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왜 내가 거창연극제에 관한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고명하신 교수님이 왜 이런 보잘 것없는 나같은 연극인의 글을 두려워하냐! 찔리는 게 있는가!
    나는 한겨레 신문 초창기에 신문을 살리려고 전면에 실리는 문화계 특종을 제공하기도 하고, 문화계 인사로는 최초의 칼럼을 써 당시 독재정권에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다. 내 정치색깔을 의심하지 말라!
    많은 연극인들이 궁금해 한다. 왜 ‘서울연극제’의 발전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저 멀리 있는 거창에는 그톡록 관심이 많을까 하고 말이다. 소송에 휘말리는 지방행사에 왜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을까 하는 것이다.
    ‘스님이 절공부하기 싫으면 서울로 올라와 종단 일에 관여하는 법’이라고 하듯, 교수님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지방행사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삐끼’가 날뛰어도 그것 하나를 해결할 뜻이 없는 ‘무관심쟁이’들이 왜 저 멀리있는 지방행사에, 그것도 자기들끼리 피투기며 싸우는 행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극인들은 모여 앉으면 ‘논문쓰기’ 싫어서 대신 직책에 연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표하기도 한다.
    제발 ‘서울연극’에 관심을 가져라! 한국의 예술경영의 후진성을 논한 ‘안 실린’ 내 글을 읽어보면 그런 행사에 관여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교수님들은 제자들 잘 가르치고 염불에 관심을 갖도록 기원한다. 매달 월급나오는 정규직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사회를 향해 반응도 없는 성명서을 낭독하고 기자회견를 하는가! 체홉이 외치듯 ‘제대로 된 일을 하자!’ 사랑싸움으로 연극계가 멍들 때가 아니다.

    1. 우상전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TTIS 편집위원 백승무입니다.
      먼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동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매달 장문의 원고를 써주시는 데 대해 한 번도 감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라도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선생님 생각에 동의하든 안 하든,
      매번 장문의 글을 쓰는 것은 어지간한 애정과 관심이 아니면 하기 힘든 행위이고,
      그 내용 또한 오랜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
      (역시 이에 동의하든 안 하든), 연극계의 자기성찰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TIS는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개진을 통해 문제해결방안 모색하는 것, 동시대 연극계의 전반적 양상에 대한 기록과 증언을 본분으로 하는바, 선생님처럼 꿋꿋하게 소신을 펼치는 분을 항상 존중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의 활동은 연극인으로서의 소중한 실천이고,
      (또한 그 내용에 동의하든 안 하든) 침묵이나 회피보다는 훨씬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고상함이나 중립으로 착각하고, 게으름과 옹졸함을 점잖음과 품위로 오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면 선생님의 거침없고 당당한 웅변은 고독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호기와 열정 때문에 저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이번 TTIS 68호에 거창연극제 사태를 언급하는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투고 글을 게재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적시는 삼가겠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 글을 게재할 수 없었던 이유와 그 절차에 대한 논의과정입니다.
      연극인들이 국가지원에 목매지 말고 자활능력을 키워야한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것은 지상과제와도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인력과 능력의 선순환이 이뤄지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겁니다. 문제는 그 자립의 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거창에서 사달에 났고, 구원요청이 있기에 뜻있는 분들이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쥔 행정가가 최악의 사태로 몰고갑니다. 자립할 수 없으니 굴종해야할까요? 모 아니면 도일까요? 지원을 거부하든가, 지원받으려면 적극 협조하든가?
      아닙니다. 싸워야죠. 이건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추구하는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금권, 행정권을 동원한 부당한 세력과 싸우는 정의의 문제이고 상식의 문제이니까요. 이건 연극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건전한 시민의식과 기본적 상규의 문제이니까요. 고상한 예술적 판단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 이치와 사리분별의 문제이니까요. 예술가의 타이틀은 벗어던질 수 있지만,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의 본분까지 내팽개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패기도, 자존심도 없냐, 힘없으면 드러눕기라도 해야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느냐고 다그치시는 거라면 수용합니다. 연극인의 유일한 무기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인데, 권력자 몇몇도 설득하지 못하면 무슨 연극인이냐고 꾸짖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이 염치도 없이 설레발이냐고 야단치시는 거라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주먹밥 싸주며 불의에 항거하라고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지원을 거부할 배짱도, 권력에 협조할 근성도 없냐고 타박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 글을 받고 편집위원들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온라인 토론도 거쳤고요. 여러 안이 나왔지만, 결국 사태가 정리되기 전에 선생님 글을 올리는 것은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연극인에 대한 예의에 맞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들의 결정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의 글이 게재되지 못한 것은 저희들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원고가 잡지에 게재가능한지 판단하는 것도 편집위원의 소임입니다. 저희들의 고심어린 결정이 선생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점에 대해서는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감히 선생님께 청하옵건대, 이번 사태에 관해서는 그 추이를 지켜보신 후에 사자후를 토해냄이 어쩌실지 여쭙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기득권이든 사탕붕어든, 그래도 한솥밥 식구이고 동네 어른들인데, 야멸차고 박정한 동네에 불려가서 큰 소리 한번 못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명예도, 위신도, 실리도 다 잃을 판인데, 손가락질 하기 전에 일단 제대로 한번 오지게 싸워나보라고, 원 없이 옳은 소리 쏟아붓고 할만큼 하고 오라고 격려하고 종용하는 건 어떤지 여쭙습니다. 돈줄 쥔 행정가와 노련한 지방토호들의 불의에는 눈감고 우리 식구 흉에만 눈을 부라리는 건 부당합니다.
      선생님의 건승을 비오며, 늘 강건한 글로 만나 뵈옵길 기원합니다.

  3. 글 잘읽었소. 내가 부당함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오. 정말 남의 글의 진의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연극을 하고 평론을 한다고? 내가 왜 정명훈사건을 예로 들었겠소, 부산국제영화제를 보시오, 정치적인 해결만이 가능한 일이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제는 공무원들에게 우리 자신을 대책없이 맡기기 전에 ‘가방끈’ 긴 우리가 예술경영의 논리를 펴서 우리가 바라는 일이 긴 세월을 두고 선순환되게 해아 한다는 게 아니요.
    그리고 이는 분명 ‘그들만의 싸움’이요. 오죽하면 ‘지방토호’라는 말이 있겠오. 지방군수가 정치적으로 살아남겠다고 벌리는 싸움에 애초에 서울서생들이 무작정 달려들일이 아니요, 너무 복잡하고 말도 안 되는 싸움에 제발 진부한 방법으로 달려들지 마시오.
    그리고 지원이 현실인 세상에 현실로 재벌이 관여하면 아예 없애버리니 그나마 공무원과의 생존을 도모하는 게 우리가 할일이라는 거요. 그래서 힘을 끼워야 하오. 이제는 투쟁의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요.지금의 우리의 대응은 너무 진부하다는 말이요.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입맛대로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요.
    제대로 ‘행간’을 읽어낼 수 없으니 당신의 글만으로는 많은 오해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요. 지금이라도 읽고 논의를 합시다. 얼마나 야비한 일이요. 자기들만 읽고 ‘진지하게 논의’를 했다고? 내 생각에는 내글이 당신들의 투쟁에 흠집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그런 모양인데, 이제는 그런 식의 투쟁은 너무 식상했오, 그리고 공무원의 태도를 고칠 수도 없오. 연극이 관객의 지지도 못 받는 게 현실아니요. 그러니 글을 실은 후에 논의를 하든 비판을 하든 욕을 하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한번은 오세곤편집인의 글에 댓글을 달았더니 그게 자기의 권위에 손상이 온다고 생각했든지 아예 자기글까지 도려내어 댓글을 죽이고 새로운 글로 실읍디다. 당신들이 진실로 두려움을 느끼는 건 공무원이 아니요, 외려 내부의 소리요. 그걸 더 두려워하는 거요.

    차 참 할 말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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