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론] 프랑켄슈타인/ 최승연

* 이 글은 <<연극평론>> 2016년 봄호에 수록되었던 것입니다.

 

슬프고 뜨겁고 문제적인,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최승연(뮤지컬 평론가)

 

 

원작: 메리 셸리
각색/작사/연출: 왕용범

작곡: 이성준

제작: 충무아트홀

공연일시: 2015/11/26-2016/03/20

공연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관극일시: 2016/02/26 2pm

 

 

그들은 결국 북극의 빙하에서 만나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은 <머더 발라드(Murder Ballad)>의 탐과 마이클의 그것처럼 날렵하고 정확한 연출적 ‘합’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경사진 무대에서, 헐떡거리는 숨과 어기적거리고 끈적거리는 몸이 부딪힌다. 그들이 숨을 더 몰아쉬고 몸을 더 비트는 시간만큼, 관극의 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관객은 결국 알게 된다. 이들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기다려 왔는지를. 괴물은 천형처럼 주어진 자신의 ‘외로움’을 창조주 빅터에게 돌려주는 ‘복수’를 결행하려고 하고, 빅터는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의 결과물을 스스로 파괴하려고 한다. 이 마지막 장면을 함께 하면서 관극의 피로도는 사실 정점에 달한다. 그동안 심각하게 어그러졌던 질서는 마지막 북극 장면을 기점으로 해소되지만, 카타르시스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공연까지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현상-이 작품을 제작한 충무아트홀측은 재공연의 평균 객석 점유율이 98퍼센트에 달하자, 폐막 예정일을 3주 뒤로 미루며 작품의 흥행력을 공식화했다. 또한 개막 10주 만에 1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 놓았다-은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작/연출 왕용범, 음악 이성준, 제작 충무아트홀, 2015. 11. 26~2016. 3. 20)의 흡입력은 어디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 것일까.

 

대형 창작뮤지컬의 귀환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손익분기점(Break Even Point)을 넘기며 2014년 초연에 성공했을 때, 업계는 공연의 성공이 몰고 올 영향력을 조심스럽게 점쳤다. 대형 창작뮤지컬의 시도 자체가 쉽지 않은 시장의 흐름이 이 작품의 성공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초대형의 규모로 제작되는 창작 뮤지컬들이 2016년 라인업을 채웠다. <마타하리>(EMK 제작,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2016/03/29-06/12), <웃는 남자>(CJ E&M 제작,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페스트>(스포트라이트 제작, LG 아트센터). 그리고 2016년 8월에 공연 예정이었던 <벤허>(충무아트홀 제작)는 1년 뒤로 개막을 미루며 대열의 끝을 장식했다. 가히 ‘대형 창작뮤지컬의 시대’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던 2007년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다. <하루>, <대장금>, <댄싱 섀도우>, <해어화>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급속한 성장을 전시하듯 동시대에 줄지어 등장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에 도쿄 메이지좌에서 짧게 공연된 <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초연으로 생명력을 다 했다. 물론 <대장금>은 초연의 약점을 보완한 ‘퓨전화된’ 고궁 뮤지컬 <대장금>으로 부활했지만 이미 초연 때의 기대감과 긴장감은 사라진 상황이었다. 당시 대형 창작뮤지컬의 공통된 특징을 요약하면, ‘한국적인 것’을 향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이라 이야기될 수 있다. 특히 <대장금>과 <댄싱 섀도우>는 이 자신감이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로컬’의 텍스트(각각 드라마 <대장금>과 차범석의 희곡 <산불>이 원작이다)로 ‘글로벌’한 시장을 공략하려는 욕망을 보여주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낭만적 구호가 한국 뮤지컬 시장의 망탈리테를 대변했다.

그러나 2016년의 상황은 매우 달라졌다. 현재 공연되고 있는 <마타하리>를 포함하여 그 어느 것도 ‘한국적인 것’을 텍스트의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이며 <페스트>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서태지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또한 <벤허> 역시 1880년에 출간된 미국 작가 루 월리스의 소설이 원작이다. 현재 <마타하리>는 작품의 공략 대상을 표나게 세계 시장으로 삼고 있고, 다른 작품들 역시 로컬 시장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형 창작뮤지컬의 귀환은 이제 보편적인 텍스트로 세계 시장을 향한다는 생각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보편적’이며 ‘마니아적’인 드라마

그렇다면 무엇을 보편적인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성공에 대한 관찰은 바로 이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작품은 인간 창조라는 금기의 영역에 도전한 빅터와 이로 인해 탄생한 괴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빅터의 비뚤어진 욕망과 창조주에게 칼끝을 겨누는 괴물의 아이러니한 운명이 작품의 두 축을 이룬다. 작품의 마지막 북극 장면은 드디어 만난 이들의 대결과 파괴를 초점화한다. 이러한 작품의 근간에 ‘욕망’과 ‘복수’가 있다. 이 두 핵심어는 인간의 역사를 지속시키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고급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서사에서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좀 부족하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을 그대로 공연한 것이 아니라,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왕용범은 원작의 주된 정서를 ‘슬픔’으로 파악했다. 여러 존재들의 버려진 몸이 혼성적으로 결합된 괴물의 몸은 괴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원래 ‘누군가의 몸’이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슬픔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누군가’가 아니라 빅터의 막역한 친구, 앙리로 만든 것은 이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앙리는 빅터의 고향 친구로서 원작에도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뮤지컬은 앙리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를 고향 친구가 아닌 전쟁터에서 만난 ‘신체접합술의 대가’로 변주한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이 오래 전부터 인간 창조를 연구하던 빅터가 자신의 실험에 앙리를 끌어 들이려던 계획에 의한 것이었음을 덧붙인다. 생명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빅터의 실험에 반대하던 앙리가 결국 빅터를 ‘태양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이 브로맨스로 인식될 만큼의 관계로 발전하도록 만든 것은, 괴물로 재탄생한 앙리와 빅터의 변질되어 가는 관계에서 ‘슬픔’이 더 극적으로 표현되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앙리가 빅터의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단두대에서 사형당한 직후부터 이들의 관계가 왜곡되기 시작함으로써 슬픔과 허무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각색의 방향은 초연 당시 작품의 마니아를 대거 양산하는 원인이 되었다. 마니아들이 스스로를 ‘빅터맘’, ‘괴물맘’으로 호명하며 두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는 동시에 팬덤을 내부에서 구별짓는 적극적인 활동을 견인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괴물이 된 앙리가 자신을 ‘괴물’로 선언하는 넘버 ‘난 괴물’의 밀도만큼, 빅터의 심리 역시 작품에서 매우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또한 찾을 수 있다.

작품은 드라마의 상황에 따라 특정 공간을 표현하는 중간막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무대를 구획 짓는다. 가령, 프랑켄슈타인의 성은 무대를 가로로 완전히 이분화하는 중간막으로 구현되고 빅터의 실험실은 무대의 양 사이드를 커다란 창문으로 막아 놓고 중간에 위치한 빅터의 거대한 실험도구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무대가 안쪽까지 완전히 열리는 시점은 빅터의 과거, 즉 빅터의 내면이 과거 회상을 통해서 설명되는 장면(1막의 넘버 ‘외로운 소년의 이야기’와 2막의 넘버 ‘그 날에 내가’)과 빅터가 욕망의 노예였던 자신을 ‘후회’하는 장면(2막의 넘버 ‘후회’)에서 특징적으로 포착된다.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줄리아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무감각한 빅터는, 사실 흑사병으로 죽은 어머니가 마녀로 몰렸던 ‘슬픈’ 과거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빅터에게 인간 창조의 문제는 사실 반쯤 타다 만 어머니를 회생시키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이것이 어린 시절 줄리아의 번개 맞은 강아지를 부활시키는 문제로까지 진전된 것이었다. 이러한 빅터의 ‘특별한’ 과거가 완전히 열린 무대 안쪽에서 연출될 때, 빅터는 더 이상 ‘미친 과학자’가 아닌 욕망에 몸을 떠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빅터의 과거는 앙리의 인물형과 더불어 뮤지컬이 원작 소설에서 탈주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욕망과 피조물의 복수라는 원작의 틀 위에 한국의 뮤지컬 마니아들이 특히 반응하는 요소들을 명민하게 삽입하여 ‘새로 쓰기’한 작품이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실험을 지속하는 빅터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스릴러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지킬’을 상기시키고, 빅터 대신 죽는 앙리의 희생은 수많은 뮤지컬에서 발견되는 ‘숭고한 희생’이라는 맥락을 타고 있다. 이들의 점점 내밀해지는 관계가 마니아들의 취향을 저격한다는 점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하다. 이에 더하여, 인물들의 강렬한 사연을 휘감는 넘버들은 클라이막스를 자주 오르내리며 극적인 음악을 선호하는 한국 뮤지컬 관객을 자극한다.

 

여전히 남는 문제들

그러나 초연 때부터 ‘새로 쓰기’의 부산물들은 작품에 균열을 일으켜왔다.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우연한 것’으로 보는 빅터와 생명의 ‘절대성’을 믿는 앙리가 작품의 초반부에 갈등을 끝내고 함께 실험하며 결국 희생하는 1막의 전 과정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이 맥락에는 두 개의 문제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생명관을 놓고 대립하던 생면부지의 빅터와 앙리가 너무 빠르게 갈등을 봉합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넘버 ‘단 하나의 미래’를 부르는 도중 앙리는 빅터의 생각 안으로 흡수되고 그로써 갈등은 끝난다. 그리고 드라마는 곧 바로 새로운 흐름을 맞이한다. 이는 앙리의 인물형을 약화시켜 이후 빅터를 위해 희생하는 1막의 정점에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앙리가 희생을 감당할 만큼의 ‘의외성’을 갖고 있었는지, 1막은 사실상 앙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앙리가 죽기 직전 부르는 빅터를 향한 고백의 넘버 ‘너의 꿈 속에서’의 일부를 종전 협정 장면에 삽입하여, 앙리가 빅터의 세계를 이해하고 이미 그 안으로 충분히 개입해 들어가고 있음을 음악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뮤지컬이 원작과 가장 다른 지점, 즉 ‘앙리의 희생과 앙리-괴물의 탄생’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두 번째는 빅터가 앙리의 희생을 왜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전쟁터에서 앙리를 영입하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치밀한 모습을 보이던 빅터가 앙리의 희생 앞에서 ‘감정적’으로만 대응하는 모습은 아무리 빅터의 트라우마를 고려한다고 해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러한 설정에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빅터는 강렬한 자기고백적인 노래(‘나는 왜’, ‘후회’)를 부르지만,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그러다보니 반복적으로 ‘야망에 굴복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논리는 사실상 추상적이다. 이 점은 재공연에서도 극복되지 못했고, 따라서 공연이 후반부로 갈수록 빅터의 자기고백은 관객에게 스스로를 설득시키려는 의지의 과잉으로 남게 되었다. 원작의 빅터가, ‘왜 괴물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광기로 일관하다가 극한의 공포와 절망을 느껴 심신 쇠약의 상태에 빠지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뮤지컬의 과잉된 빅터는 앙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앙리-괴물의 탄생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한 부산물로 느껴진다. 재공연은 앙리-괴물에 집중되어야 하는 드라마의 공백을 2막의 장면과 넘버의 위치를 바꾸고 압축하는 방식으로 채우려 노력했지만, 플롯은 섬세한 건축물과도 같아서 근본부터 그 틀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이러한 공백은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배우들의 열연으로 채워지고 있었는데, 특히 초연부터 앙리를 연기하고 있는 박은태와 한지상은 앙리의 나약함과 앙리-괴물의 파괴력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각각 앙리에 최적화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또한 초연 당시 비교적 많은 비판을 받았던 줄리아의 애매한 역할은 원래 부여되어 있던 아리아를 삭제함으로써 아예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줄리아와 1인 2역의 관계로 묶여 있는 까뜨린느의 드라마를 더 강조함과 동시에 줄리아의 운명을 도구적 인물로 종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줄리아의 축소는 빅터의 어머니를 대신하는 엘렌의 비중을 높이고 그녀에게 1막에서 묘사되는 빅터의 과거를 전부 노래로 표현하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작품의 논리를 강화시킴으로써 공연이 ‘설명적’으로 진화하도록 도왔지만, 앙리와 빅터의 관계가 ‘그렇다 치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점은 여전한 문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최대 미덕은 라이선스 뮤지컬에 뒤지지 않는 ‘명품의 아우라’를 입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잘린 발, 잘린 머리, 시체 더미를 사실적으로 구현한 그로테스크한 소품과 특수 분장, 그리고 무대 위에 신속하게 자리 잡고 교체되는 대형 구조물들은 한국 뮤지컬 시장이 보유한 제작의 노하우와 인프라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또한 이성준의 음악은 매우 극적인 드라마 진행과 결을 함께 하면서 동시에 작품 밖에서 가창되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오랫동안 창작뮤지컬의 흥행을 방해했던 멜로디와 화성의 촌스러움은 젊은 작곡가들이 투입되면서 점차 극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번 재공연의 배우 라인업에는 기존 배우들에 비해 신예에 속하는 전동석과 최우혁(이 작품으로 데뷔했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선택은 작품 자체에 대한 제작진의 신뢰도를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채워지는 순간 또 다시 공백으로 남는 작품이다. 여전히 진화를 기다리는 뜨거운 유기체와 같다. 이 매커니즘은 작품의 여전한 공백을 스스로 채워 나가며 숱한 스핀오프 버전을 만드는 팬덤에 힘입어 재공연에서 한층 더 가열되었다. 왕용범과 이성준, 그리고 충무아트홀이 또 다시 함께 만드는 차기작 <벤허>가 거두어들일 성과가 자못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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