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오셀로/ 백승무

***이 글은 <<공연과 이론>>(63호)에 수록된 것을 재수록 한 것입니다.

 

 

김현탁의 <오델로>

: 양식의 모자이크, 혹은 차별의 백과사전

 

백승무(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회원)

 

모든 텍스트는 인용문들로 이뤄진 모자이크이다.

-J. 크리스테바

 

 

0. 연극, 내러티브, 미래

 

# 장면1: <올드보이>의 저수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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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에서 수아의 자살 장면

 

<올드보이>에서 물의 이미지는 영원한 사랑으로서 어머니의 양수를 뜻하는 동시에 누이 수아를 삼킨 저수지처럼 죽음을 표상하기도 한다. 오프닝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설치된 검은 수로, 벽에 걸린 거대한 파도 사진 등 물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추적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배경으로 한 수아의 자살 장면은 이우진이 가진 트라우마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최고의 쇼트(shot)이다. 이처럼 일련의 물 이미지는 이우진과 오대수의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를 조형해주는 훌륭한 내러티브 기제이다.

 

# 장면2: <전명출 평전>의 합천댐 모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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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출 평전>의 피날레

 

전명출의 아내 순님은 ‘합천댐 메기 매운탕’을 운영한다. 1990년대부터 그녀는 매일같이 댐 아래 물속을 내려다본다. “순님에게 합천댐의 수면은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우울의 공간이다. 원상복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수몰의 현장은 안전하게 자기애를 투사시킬 수 있는 완벽한 폐쇄회로이다. 금지와 불가능은 모든 욕망의 출발점이고, 다른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철저한 폐쇄회로는 완벽한 자기연민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합천댐이 상기시키는 실향민의 애환이나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애수는 자기연민의 빌미이다. 그 수면 위에서 순님이 보는 것은 명출의 ‘환한 미소’이다. 더 정확히는 그런 미소를 가진 명출이 바라보고 있는 순님 자신의 모습이다. 그녀는 명출에 대한 (유일한) 아름다운 기억을 물신화함으로써 그 기억이 포위하고 있는, 그 기억과 동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자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합천댐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가 상실된 대상과의 상상적 관계를 지속하는 공간이다.”(졸고 “<전명출 평전>: 악의 기원과 기원 없는 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연에서는 이 합천댐이 등장하지 않는다. 희곡에 물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순님의 애도행위를 정당화하는 결정적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형은 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차마 잊지 못할 기억”(공연의 마지막 대사)이 합천댐 밑에 수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출가는 물 한 방울 내놓지 않았다. 내러티브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연극은 이미지를 사유하는 예술이고 이미지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관통 이미지의 선택과 활용 여부는 희곡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연출의도에 따라 이미지의 가감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처럼 강한 상징성과 반복성을 가진 이미지라면 관점이나 표현법의 차이라고 눙칠 수는 없다. 그 이미지가 생존을 위해선 (추억이든 양심이든) 무엇이든 수몰시켜야 했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물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내러티브의 완결성과 관련된 박근형의 실수는 한 개인의 오류라기보다 연극 장르의 태생적 한계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하다. 쇼트 몇 개로 자살 씬(scene)을 완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카메라움직임, 거리, 앵글, 시점에 따라 복잡다단한 내러티브를 구사할 수 있는 영화! 반면 연극은 무대세팅이래봤자 4~5개가 고작이고 클로즈업이나 패닝은 엄두도 못 낸다. 상황을 설명하고 사건의 전개를 주도하는 서사적 장치로서 내러티브 수단이 (영화에 비해) 너무나 미약한 것이다. 정보와 정서를 전달하는 영화의 가공할 능력을 생각하면 연극의 내러티브 전달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자르고 붙이고 끼워서 필요한 것만 뭉텅이로 보여줄 수 있지만, 사람이 직접 등장하는 연극은 영화처럼 압축적이고 능률적으로 정보를 쏟아낼 수 없다. 그 대신 관객들 스스로 정보와 정서를 찾아내고 발굴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의미부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연극은 생래적으로 불친절한 예술이다. 영화는 이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경쟁력을 확보했다.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관객들은 친절하고 강력한 영화의 내러티브에 익숙해진 나머지 텁텁한 미지근한 연극의 내러티브 구사력에 정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활동사진에 불과했던 영화가 쇼트라는 발명품을 통해 풍성한 수다를 장전하는 동안 연극은 두 가지 대응전략을 마련했다. 첫째는 영화의 강력한 현실재현력에 맞서 자상하고 친절한 화법을 개발하는 것. 영화보다 열악한 내러티브 수단을 보강하는 전략을 구상한 이들이 바로 브레히트, 손톤 와일드, 피터 셰퍼 등이다. 이들은 연극에서 아무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장면과 상황을 해석해주는 안내자를 배치했다. 이와 정반대로 내러티브 자체를 지우는 역발상 전략가들도 존재한다. 체호프, 베케트, 피란델로 같은 극작가와 메이예르홀트, 아르토, 그로톱스키 같은 연출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연극적 총체성의 도식인 ‘행위-담화-성격’의 일치를 부정하고 연극이 좀 더 불편하고 불친절해지도록 만들었다. 영화의 발화법이 심오해질수록 연극 또한 어렵고 아플 수밖에 없는 이치다.
영화와 경쟁을 통한 정면승부냐(前者), ‘명예로운 고립’을 통한 독자생존이냐(後者)! 필자는 후자를 선호하는 편이다. 영화와 뮤지컬이 하고 있는 일을 연극이 흉내낼 필요는 없다. 틈새에 끼어 영토가 줄어들거나 변방으로 쫓겨나 황무지에 나앉았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연극만이 할 일을 찾으면 그만이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미답지를 개척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위가 필요하다. 경계에서 진격하는 자가 필요하다. 어둡고 추운 국경에서 검증되지 못한 것, 보장할 수 없는 것, 확인되지 않은 것,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앞서서 주선하고 대신해주는 전사가 필요하다. 군사용어로 첨병이고 경제용어로 따지자면 벤처기업이다. “우리는 전위를 포육해야하고, 전위와 몸을 섞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위대한 공연은 전위를 거쳤거나 전위에 다가가는 순간 탄생한다. 새로운 감각에 열린 몸, 관습에 저항하는 민감한 피부, 파괴와 변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근육만이 연극의 침체를 극복할 처방이다.”(졸고 「김현탁의 「자전거」: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변화란 미래가 우리의 삶에 침입하는 과정이다.

Alvin Toffler

 

 

1. <오델로; Oh THe yELLOw>: 차용, 이식, 접목

<자전거?가 단어 차원의 의미론적 변형, 문장의 완결성을 파괴하는 통사론적 차원의 변형, 관객의 인지를 교란시키는 화용론적 차원의 변형을 시도함으로써 파괴와 재구(再構)를 통한 생성의 역동성을 보여줬다면, <오델로; Oh THe yELLOw>(이하 <오델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양한 문화예술 양식들을 원작의 표피에 이식하여 ‘양식의 모자이크’라는 새로운 실험을 감행한다. 세상의 모든 차별과 소외를 잇대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면 그것은 ‘부분’의 총계로서 ‘전체’를 넘어 부분과 전체가 서로를 반영하면서 통일성을 구축하는 유기적 세계(헤겔)가 된다는 것이 그 의도이다.

양식(style)이란 예술작품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 특성, 즉 작품의 창작원리나 그 표현방식을 일컫는다. 붓-필적-문체로 전의된 초기 의미는 개별성과 부분성이 두드러지지만, 예술 전반의 ‘양식’으로 확대해석될 때는 시대와 사조를 반영하는 예술적 형식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들을 의도적으로 모방하는 행위, 즉 다른 장르나 경향의 형식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차용하는 기법을 양식화(stylization)라 한다. 양식화는 일정한 미학적·이념적 입장을 가진 타자의 양식을 새로운 예술적 맥락 속에서 ‘의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나의 텍스트 속에 타자의 양식을 인입하는 것, 혹은 타자의 양식으로 나의 텍스트를 배양하는 것, 벗겨진 나의 피부와 타자의 살갗을 그대로 맞대는 것. 피카소가 원시미술 양식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사례나 야수파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붓터치를 수용한 것도 양식화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의 자기지시적 경향을 대변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는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예술 양식을 차용하여 자신의 몸을 미학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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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양식화 기법은 삶을 예술로 호출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선택과 압축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술은 현실을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 <…> 완전한 현실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서 현실의 도식화라는 예술의 원리가 생겨난다. 특히 양식화가 그런 예이다.”(안드레이 벨리). 삶을 있는 그대로 무대로 가져온다고 예술이 되지는 않는다. 삶의 본질적인 측면이 시공간적 왜곡을 통해 무대형식으로 가공되어야 예술이 된다. “현실을 간결하게 모형화한 형태, 혹은 현실의 특성들을 본질로 축약하여 재현하는 방식”(P. 파비스)이 양식화이다. 따라서 하나의 양식을 선택하는 행위는 “모든 표현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시대나 현상의 내적 총체성을 드러내는 것”(메이예르홀트)과도 같다.

 

2. 총체성이냐 양식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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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 주입된 인종주의적 요소에 착안하여 <오델로>를 ‘창안’한 김현탁 연출의 아이디어는 기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다>>(2005)를 집필한 박홍규 교수는 이 주제의 대가이다. 허나 400년 전에 서거한 극작가를 놓고 오늘날의 인권감각을 들이대는 것이 정당한가? 여러 타당한 논거에도 불구하고 “마치 햄릿의 망령처럼, 카키색 군복을 입고 수천 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침략하라고 부시에게 미친 듯이 고함치는 셰익스피어의 망령이 분명히 보인다.”(박홍규)라는 주장은 악담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인간”(브라벤시오)이라는 험담부터 두터운 입술, 검은 피부, 악마성, 호색한, 변덕쟁이, 격정 등 온갖 모함이 난무하다보니 잔인한 제국주의자의 형상이 떠오를 법도 하지만, 그런 모진 언술들은 셰익스피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당대 유럽인의 일반적 관점이라고 보는 게 맞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존재가 처한 사회적, 물질적 환경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설파한 루카치의 계급의식론을 상기한다면, 한 인간이 처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고려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다.

사실 사회·역사적 환경과 의식 간의 온전한 포섭관계를 상정한 것은 루카치의 미덕이자 오류였다. 세계의 사회경제적 제조건이 의식을 포괄한다면 예술가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조건들에 대한 이성적 탐구가 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세계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총체성이 형성되고 그 총체성이 예술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에 부합하는 예술적 형식이란 역사적으로 주어져있다! 하지만 루카치의 명석판명한 논리와는 다르게 현대사회는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어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식불가능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예술의 총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모순적이고 균열된 세계상에 적합한 예술형식은 루카치가 부르주아의 퇴폐적 예술이라 힐난한 표현주의가 더 어울렸다. 예술의 총체성을 보류했을 때 열리는 다양한 실험 가능성에 주목한 이가 브레히트였다. 예술의 혁신은 형식적 실험에 의해 좌우되고, 다양한 형식적 실험이야말로 예술의 핵심 기능이다! 앞서 말한 ‘행위-담화-성격’의 일치 모델이 붕괴되는 순간이다. 세계상 자체가 파편화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행위란 게 이미 파편적·부분적이라서 총체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무대예술은 행위의 양식화를 통해, 즉 단순하고 압축적인 행위를 통해 현실의 일부(부분)를 특징적으로 재현할 뿐이다. “실제의 세계를 단순화시키고 몇 가지 기호화된 오브제로 그 세계를 고정시켜야”(P. 파비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오스카, 인종차별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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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y III>의 설욕전 장면

 

<오델로>는 문화예술 전반의 다양한 형식과 양식들을 차용하면서 짜깁기한다. 이식된 양식은 일반적 기호처럼 대상지시적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오델로>를 표현하는 한 형식적 요소로 침윤된다. 형식미학의 일부였던 양식이 다른 작품에 차용되면서 형식과 내용의 분화를 겪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제가 <Eye Of The Tiger>와 함께 등장하는 <Rocky III>(1982)의 권투 장면을 보자. 록키는 지저분한 언동으로 사람들을 언짢게 하는 흑인 복서 클러버 랭에게 패하지만 곧 재도전을 통해 상대를 때려눕힌다. 작품의 구도는 록키와 랭 간의 사적인 대결이 아니라, ‘백인=정의=미국’이라는 공식에 입각하여 백인 록키가 망나니 흑인을 제압하는 권선징악 형국이다. 록키가 입고 있는 성조기 트렁크는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오만불손한 참칭자-흑인을 응징하는 백색 칼날이고, 록키의 승리를 응원하는 것은 스포츠맨십이 아니라 정의롭고 위대한 미국이라는 애국심 코드이다. <Rocky III>의 권투경기 양식은 그 자체로 낯뜨거운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오델로>의 대사를 수행하는 형식적 틀이 되어 ‘인종차별 비판’이라는 작품의 최종목표에 복무하게 된다. 타자의 의도를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변용하는 전략인 양식화는 본질적으로 “타자의 말을 지향”(바흐친)한다. “두 목소리야말로 삶의 최소한이며, 존재의 최소한이다.”는 바흐친의 명제가 이때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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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델로>의 골간이자 사유의 출발점은 2016년 2월 28일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이 시상식의 인종차별은 뿌리가 깊은데, 작년과 올해는 각 부분 약 40명의 후보가 모두 백인일 정도로 노골적으로 편파적이었다.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였던 윌 스미스는 시상식 불참을 선언했고 많은 인사들이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치하에서 최악의 흑인 차별이라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와중에 이병헌은 아시아인 최초로 시상자로 참석했으니, 오스카상을 쥔 옐로우는 결국 이병헌이었던 셈이다. 오스카상의 인종차별 문제를 최초로 드러낸 영화가 바로 <In The Heat Of The Night>(1967). 존 볼의 소설을 영화화한 <밤의 열기 속으로>는 두 백인 경관과 흑인 파견형사 간의 신뢰 형성과정을 통해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있다. 인종차별을 언급하는 것 자체도 불온시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영화였는데, 주연 시드니 포이티어가 아니라 로드 스타이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한참 논란이 되었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은 <오델로>의 술집장면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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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Heat of the Night>의 한 장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셀마 항전을 그린 <Selma>(2014)는 평단과 대중의 높은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감독, 흑인 주연 모두 후보에도 끼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90%가 백인(그 중 70%가 남성)인 심사위원단의 편파적 구성을 보면 이런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오스카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Glory와 hallelujah를 외치는 장면은 영화의 한 컷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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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ma>의 한 장면

 

Hans Zimmer의 <Thunderbird>를 시작으로 재현되는 <델마와 루이스>(1991) 장면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백인-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동렬의 범죄임을, 차별의 형태는 다양해도 차별의 본질은 동일함을 웅변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인종차별적 캐스팅이 문제시되기도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희생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부각된다. 두 못난 남자(오델로, 이아고)에 의해 무고한 죽음을 맞는 데스데모나와 에밀리아는 델마와 루이스와 정확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때늦게 달려온 슬로컴브 형사의 질주는 2천년 여성학대사에 대한 반성문 같아 묘한 쾌감을 준다. 오델로를 포함해 수없이 반복되어온 반성하는 남성들의 서사는 지겨울 만도 하지만 인종차별 피해자가 가정폭력 가해자로 둔갑하는 양상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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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의 피날레

 

4. 이분법, 흑백논리, 차별 – 1

 

<오델로>는 나와 이질적인 타자의 양식을 질료로 삼는 작품이다. 타자의 텍스트 속에 내재했던 양식을 자기 텍스트에 종속·변용시킨다. 이때 타자는 전적으로 ‘나’가 될 수 없고, 타자 그 자체로 유지될 수도 없다. 나도 타자도 아닌, ‘우리’의 상태로 공존하는 것. 나의 몰각도 타자의 배척도 아닌 유연한 협생이 <오델로>가 지향하는 텍스트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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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과 타자의 양식 사이에서 긴장과 유희가 발생한다. 총체성을 교란하는 양식화의 혼종양상은 관객의 신경을 곧추세우는 동시에 의미탐색이라는 지적 유희를 유도한다. 공연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도록 관객들을 의도적인 지적 교착상태에 빠뜨린 다음, 양식화의 의미와 의도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선택된 양식들이 원텍스트에서 어떤 맥락과 의미를 지녔던 것인가? 그 양식이 원작 <<오델로>>와 만나 어떤 맥락과 의미를 생산하는가? 새로이 탄생한 <오델로>는 어떤 작품인가? 양식화는 관습과 규범을 파괴하여 인식적 차이를 발생시키고 그 차이 내부를 유희의 공간으로 개조한다.
앞서 언급한 문화예술 양식들 외에도 피하로 인입된 여러 텍스트들을 나열하고 그 접목방식과 배열원리, 유희양상을 논구하는 것은 <오델로>의 이해에 핵심적인 사안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연을 앞뒤에서 열고 닫는 노래 <목화밭>. <스타워즈>나 <스타트랙>을 연상시키는 우주선 장면 이후 오델로는 흑인 착취의 상징공간인 ‘목화밭’으로 이동한다. Leadbelly의 「Cotton Fields」(1940)은 제도로서 노예제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사회경제적 구속상태에 놓인 흑인 화자의 목가적 동경을 그린 포크송이었는데, 이후 CCR, Beach Boys 등이 리바이벌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원곡과 번안곡을 양괄식으로 배치한 것은 흑과 백, 진짜와 가짜, 오리지널과 카피, 순종과 혼종의 이분법 등 구별과 차별을 일삼는 온갖 양분논리에 대한 반박이다. 피날레에서 포크송-컨트리뮤직을 흥얼대며 인디언 때려잡는 서부극을 흉내내는 것은 진짜-오리지널-순종의 구분이 강자의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핑계임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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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한 장면
‘목화밭’ 직후 무대로 끌려나온 오델로는 <뿌리>(1977)의 쿤타킨테 자체이다. 흑인을 경시하고 모욕하는 언사들이 난무하는 이 장면은 구국의 전사 오델로가 한낱 ‘엉클 톰’(특유의 재능과 온순함으로 백인을 도와주는 기특한 흑인)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델로의 세레나데인 「I’ll Be There」는 원곡-리바이벌의 관계를 넘어 30년 동안 100차례 가까운 성형수술을 한 Michael Jackson의 파란만장한 삶으로 이월된다. 백반증과 사고로 인한 불가피한 수술이란 게 그의 주장이었지만, 동기야 어떻든 점점 백인과 유사해지는 그의 변화를 보고 인종 콤플렉스 논란이 이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점점 백인화 되고 있는 비욘세, 그리고 잭슨을 가리켜 “He lost tremendous confidence because of honestly bad, bad, bad surgery.”라 말한 불량 인종주의자 트럼프의 오지랖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전 생애를 보면 야릇한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것은 명백하다. 잭슨의 이런 이력 때문에 「I’ll Be There」 장면은 인종차별의 원리가 원곡-리바이벌, 라이브-립싱크의 이분법과 강하게 결속되는 듯하다. 흑인은 뭔가 결핍된 존재인가, 아니면 어떤 잉여를 타고난 존재인가? 리바이벌이 더 아름다우면 원곡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가? 리바이벌은 결핍인가, 잉여인가? 립싱크는 공연인가, 사기인가? 완벽한 보컬과 화끈한 댄스를 포기하고 이도저도 아닌 라이브를 고집하는 게 정답인가? 이러한 흑백논리는 가능한가? 이러한 이분법은 유의미한가? 달콤한 연애담의 무대인 <목화밭>과 잔혹한 폭력의 공간인 「Cotton Fields」는 과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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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분법, 흑백논리, 차별 – 2

 

이쯤 되면 <오델로>가 겨누고 있는 탄착점이 이분법의 무용성과 차별의 부당성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단일 형태의 순수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탈근대적 상상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별과 폭력의 출발점으로서 단일 주체성이란 판타지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다. 주체의 절대화가 타자에 대한 폭력의 빌미가 됨을 인식하고, 주체란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정된 전제임을 깨닫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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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의 한 장면

 

<미녀와 야수>(1991)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주체가 명징한 이성으로 탐지하더라도 타자는 결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주체는 타자를 식민지화·도구화함으로써 낯선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착각하지만 타자는 절대 주체의 인식 영역 내부에 머무르지 않는다. 낯선 대상에 의한 두려움은 내 두려움의 망막에 맺힌 자아상일 뿐이다. 나에 대한 인식, 즉 내가 아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주체는 결코 고정된 형태로 ‘정립’하지 않는다. “자아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서사에 불과하다.”(브루스 후드). 나는 야수이자 왕자이고, 백인이자 흑인이며, 남자이자 여자이다.
<페이스-오프>(1997)는 너와 나의 경계를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빠뜨린다. 안면 피부의 교환으로 인해 선악의 윤리적 판단까지 뒤바뀐 두 사람. 손바닥만한 안면 피부가 그 모든 총격과 살인을 야기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인종적 차이는 피질 일부의 차이일 뿐이고, 문화적 차이는 인성의 본질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진정으로, 확실히, 분명하게 나와 너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래서 묻는다. “댁은 누구요? 대체 어느 편이오? 선량한 시민이오? 악당이오?” 결국 <오델로> 배우들은 아군을 죽이고 만다. 진실에 눈먼 자 오델로처럼 가면과 맨얼굴을 구분하지 못한 이들은 선량한 시민을 죽이고 만다. 인간이 편견과 아집을 무기로 사용할 때 그 위험성이란 얼마나 광범위하고 파괴적인가? 이 장면은 인간-보편을 구분하고 판별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손하고 불온한 것임을 경고한다(<페이스-오프>는 인종차별에 시달린 조승희가 좋아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액션을 좋아했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영화에 투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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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Off>의 한 장면

 

6.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고종석)

 

세계화 시대 다민족국가로서 우리나라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수없이 많다. 살색이나 단일민족 같은 ‘고대어’를 척결하는 문제부터 외래 방언의 수용, 표준어의 해체, 한국어의 범위 확장 등 처리할 문제가 산더미다. <오델로>가 선보이는 차별척결 메시지 중 가장 강력한 구호는 역시 언어 자체에서 유래한다. 차별의 근거가 피부색이나 종교, 국적에 있어서는 안 된다. 차별의 근거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차별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나와 다름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해주는 이런 지표들은 인간 심성의 가장 약한 부위를 자극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차별에 노출되고 만다. 피부색보다 더 예민한 영역이 바로 언어이다. 일상적이고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서툰 말투를 양식화하는 것은 차별을 무화시키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언어의 ‘표준화’는 중앙권력이 지방을 식민지하고 위계 하부로 추방하기 위한 폭력이다. 언어는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경계나 구역이 있을 수 없다. 언어는 자생자활하기 때문에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의 포용력을 키웠을 때 우리는 평등해질 수 있다. 이질적 발화현상을 언어 내부로 흡수했을 때 한국어의 위상과 가치는 커지는 것이다. come do it을 ‘컴퉁잇’으로, fuck, damn it을 ‘폭동’으로 오인하는 소극적 장면은 웃고 넘어가는 쉼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구인 모두가 그리스인임을 암시하는 의미요충지이다.

한글을 거꾸로 읽는 IS 인질범 장면은 생사를 오가는 비장함만큼이나 의미적 위세가 강렬하다. 유럽인이 이이제이 전략으로 무어인과 터키인을 다루는 방식을 상기하라. 인종적 타자로 종교적 타자를 제압하는 영악한 전법. 미국이 서부 황무지에서 인디언 내쫓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 것처럼 서구제국은 중동 황무지를 지배하며 석유를 착취해왔다. 피지배자인 오델로가 터키인을 참수하듯 제국주의 피해자인 IS는 엉뚱하게 국외자인 동양인을 참수한다. 이 무슨 뒤집힌 관계인가? 제국의 충실한 용병 오델로나 제국이 훈련시켰던 IS 인질범은 언제 눈을 뜰 것인가? 그들은 자신의 뒤집혀진 옷을 언제 바로잡을 것인가? 우리는 그들의 방언을 언제 이해할 것인가?

 

7. 여담s

 

7.1. 공연이 한창이던 6월 24일 영국은 브렉시트를 선언했다. 전 세계적인 불황의 음영이 영국을 배신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인간은 불안과 불편을 견딜 수 없을 때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한다. 연대와 공존의 구호는 힘을 잃고 이기주의와 탐욕의 목소리가 득세한다. 곳곳에서 펄럭이는 보수화의 깃발은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주도한 이익 분배에서 소외된 대다수 사람들의 분노와 탄식이다. 브렉시트는 소외된 자가 더 소외된 자를 손가락질 하는 희대의 코미디이다. 부의 재분배에 실패했을 때 불행이 덩굴을 이루기 시작한다. 저항과 연대만이 이 불행의 덩굴을 절단할 칼이다.

외국인 혐오증을 다루는 <오델로>는 반이민자 정서에 기댄 브렉시트를 정확히 예언했다. <오델로> 속에 내장된 또 다른 예언은 우리에게도 외국인 혐오증이 중요도가 떨어지는 문제도,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하철 장면을 보라. 유색 외국인에게 호통치는 황인종-남성의 모습은 더 이상 드물지 않다.

교황은 6월 26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소수자 문제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반드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 교회가 공격한 동성애자들뿐만 아니라 빈곤층, 착취당한 여성, 강제노동을 한 어린이들에게도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빼먹은 게 있다. 십자군이 학살한 ‘터키놈들’에게도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

 

7.2.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전작 <자전거>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입체적 해석의 결과로 풍성한 상징과 패러디가 양산된바, <오델로>의 양식화는 그 의미적 두께가 <자전거>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텍스트의 형태를 너무 많이 지운 나머지 <오델로>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겸연쩍다. 이아고의 (음모)활약과 오델로의 광분(분노·복수·살인)이 서사라인에서 사라지니 연지 하나 찍고 혼례식 나서는 색시 꼴이다. 물론 원작의 인종차별 모티프만 떼내어오는 ‘창안’이 무모한 것은 아니다. 허나 이 뼈대를 뒤덮을 충분한 살점이 보충되지 않는다면 완결성 부족 혐의를 피할 수 없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공연시간이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예술적 완성도가 시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만 선별적으로 빼내는 발췌 각색이 전체에 대한 풍만한 사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정당성이 약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오델로>는 프렉탈 구조처럼 부분이 자기복제를 통해 전체를 반영하고 전체가 부분을 떠받드는 유기적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 개별 양식이 스스로를 증명하면서 전체를 옹호하는 양상, 즉 원텍스트의 양식을 전체를 위해 내주면서도 인종차별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구도를 유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Rocky III>의 권투 양식을 <오델로> 대사를 위해 헌납하면서도 그 속에 내장된 인종차별적 메시지를 굳건히 고수하는 것. 훌륭한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바로 이때 내용이 형식을 포유하고 형식이 내용을 표현하는 예술적 만다라가 구현된다. 양식화가 이질적인 것과의 공존, 타자와의 상생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양식의 모자이크는 결국 타자와의 차별 없는 공생이라는 작품의 이념적 목표와 행복한 랑데부를 이루는 것이다.

fractal

 

7.3. 세간의 풍문 중에는 지원심사시 실험성이 강한 작품 하나쯤은 눈감고 뽑아준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실험극 프리미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정말 평론가 사이에 일방적 옹호나 무조건적 찬양이 존재할까? 실험극은 정말 인정과 배려의 대상인가? ‘국내 유일’의 전위인 김현탁 연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을 대하는 안쓰러움인가, 아니면 롸잇나우 해피쑈타임인가? 우리는 TV와 영화에 길들여진 채 “어려워요”를 남발하는 학생들처럼 그의 불친절함에 투덜대는 건 아닐까? 대학로의 10%가 전위가 되어야 나머지 90%가 먹고 살 수 있다. 그 10%가 퇴화하는 우리의 시력을 지속적으로 정화시켜줄 때 나머지 90%를 제대로 볼 안목이 열린다. ‘국내 유일’의 전위 김현탁 연출은 우리에게 절실한 그 10%의 필요성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바이탈 사인(vital sign)과도 같다. 행여 여기에 프리미엄이란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김현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프랑스인은 몰리에르에게서 그것을 볼 줄 알았다.

Rien ne manque à sa gloire, il manquait à la nôtre.
그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우리의 영광을 위해 그가 필요할 따름이다.

 

 

otheyellow김현탁 연출 <오셀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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