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죽어줘/ 장윤정

이해의 단계를 넘어선 관계에 대하여

<이제 그만 죽어줘>

 

 

장윤정(연극평론가)

작: 김민중

연출: 유수미

기획: 문화나눔공존

제작: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

공연일시: 2017. 6.21~2017. 6.25

공연장소: 소극장 혜화당

관극일시: 2017. 6. 25, 일요일, pm4:00

 

요즘은 뭐랄까, 생각할 시간도 없이 행동부터 해야 하는 시기는 아닌지 자문한다. 뜨겁고 거센 시류를 벗어나 변방을 서성인다는 것은 아마 진실로 고독하고 위험한 일일 것이다. 결국 언제나 행동이 앞서게 되고 사유는 이후에 뒤따라온다. 생각하는 존재인 이상 이 패턴은 어쩔 수가 없다. 사유란 것이 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을 대상으로 하므로. 뜨거웠던 지난겨울의 광화문을 지나 이제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얻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중심에서 잠시 변방으로 벗어나 뒤돌아본다. 태극기와 함께 타국의 국기를 흔들고 있는 이들에 대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과거 속의 나 자신에 대하여, 지금도 여전히 국기를 흔들고 있는 그들에 대하여, 그들의 시선 속에 비칠 또 다른 이들에 대하여. 이 갈등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본다. 무엇이 이들을 거리로 이끌었는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벗겨내는 순간 우린 다 그저 한 가족의 구성원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것을 단순히 표현하자면 세대갈등이라 하겠으나, 그렇게 한 단어로 간단명료하게 표현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기반되어야 할 것인데 아직 범인의 수준으로서는 감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필자의 자기고백이 지리멸렬하게 늘어지는 이유는 덮어두었던 문제의식을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의 <이제 그만 죽어줘>였다.

 

<이제 그만 죽어줘>의 내용은 한 가족의 서사를 비순행적 시간 구성으로 엮은 작품으로서 크게 어렵지 않다. 충청도의 한 펜션에서 일을 하고 먹고 사는 가족이 있고, 오래도록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엄마와 그 엄마를 도우며 사는 딸, 물론 딸 또한 팍팍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엄마 곁에 있는 상황이다. 그 딸과 딸의 남편,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가 살고 있다. 막내아들은 서울에서 배우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며 가끔 집에 들르는 형태다. 아버지는 이 가족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서 일은 하지 않고 색소폰을 불거나 주변 사람들과 술을 마시거나 윤락행위 등을 하며 자신 위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해 대신 엄마가 끊임없이 일을 하는 구조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딸과 막내아들은 분개하지만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참는다. 모두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을 스스로 학대할 정도로 참아낸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여러 몰지각한 행위는 막내아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막내아들은 이제 제발 죽으라고 소리치고 만다. 아버지라는 인물은 막내아들에게 자위행위를 들키고,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딸을 때리고 엄마의 목을 졸랐던 인물로서 이제 그만 ‘죽으라’는 막내아들의 절규와 한 맺힌 울음을 일면 이해하게 된다. 가족에게, 그것도 아버지라는 가족 속 상징적인 존재에게 아들이 이제 그만 ‘죽으라’고 외치는 것은 위계의 파괴가 아니라 금기의 파괴에 가깝다. 관객은 아들의 감정에 깊이 이입되려하지만 작품은 도리어 그 이입을 방해한다. 아들의 절규장면이 곧 오디션 장면으로 변화되고 이제 그만 죽어달라던 흐느낌은 연기의 일부로 나타난다. 과도한 감상에 젖을 위험을 영리하게 처리한 구성이다. 작품은 여기서 끝맺지 않고 두 번의 굴곡을 더 거친다. 이후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고 가족들은 폭력적인 행태의 과거는 잊고서 아버지의 병환에 다시 ‘살아나’라고 흐느낀다. 그 다음의 굴곡은 건강해진 아버지와 가족들의 만남이다. 아버지와 엄마와 막내아들은 일식집에서 근사한 점심 한 끼를 하는데, 이때 여전히 이기적인 아버지의 모습 속에 감춰졌던 애정이 드러난다. 평소 잘 먹고 다니지 못할 아들을 생각하여 일부러 회초밥을 남겨두고 자리를 뜬다. 아들은 남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공연은 끝난다.

 

작품은 주로 아버지 주변의 인물들 시선에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한 번도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낸 적이 없기에 관객은 아버지가 진정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 덕분에 시선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모습과 그 인물의 이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여지가 남는다. 작품 속 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 맞다. 그런데 또 외로운 사람인 것도 맞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이 가족 외부의 인물인 경찰이 등장하는데 경찰은 이 가족 구성원에서 요즘 아버지가 좀 많이 힘드신가보더라고 전한다. 거기서 우리는 가족에겐 차마 털어놓지 못하는 내면을 외부에 털어놓고 위로받았을 아버지를 상상하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이 극 중의 아버지를 통해 한국의 아버지를 사유하게 된다. 지금까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수많은 아버지들은 늘 외로웠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가족 속 완벽하고 거대해야하는 역할로 인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짓눌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기에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외로운 인물이기도 하리라 짐작된다. 극 중의 아버지는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자기 위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막내아들이 가족의 선물을 사오는 장면이 초반과 후반에 나타나는데 초반에서는 아버지의 선물만 없다. 아버지는 적잖이 실망한 눈치다. 아이같이 질투하는 마음은 폭력적인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에서 자신의 선물을 받고 기쁘지 않은 척 하지만 내심 좋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영락없이 아이 같음을 발견한다.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무거운 상징에서 벗어난 그저 한 사람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과할 정도로 폭력적인 인물로 등장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성품이 또 가족과 멀어지게 만들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악순환의 굴레 중심에 외로움이 쌓여갈 한 인간을 발견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가족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죽었으면 하다가도 살았으면 싶은 설명이 될 수 없는 감정으로 서로 얽혀 있으리라. 관객은 그 폭력적인 아버지를 다시 받아들이고 함께 웃으며 밥을 먹고 그의 위태로운 생명 앞에서 눈물 흘리는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가족인데. 가족은 이해의 단계를 넘어서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은 이제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것이 애정과 애증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 아닐까. 그래서 이 작품은 어디에나 있을법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로 인한 가족의 갈등을 현실감 있게 구성하여 관객과 만나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의 지점을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창작스튜디오 자전거날다> 동인페스티벌의 일부로서 공연되었다. <창작스튜디오 자전거날다>는 간단히 하자면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창작모임이라고 설명될 것 같다. 정치적 견해를 넘어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고 창작하여 관객과 만나고 그 만남의 접점에서 또 다른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모임으로 이해된다. 이번 <이제 그만 죽어줘> 또한 그러한 축제의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관객과 만났다. 뜨거운 정치적 이슈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 인식을 소리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고민해볼 우리네 삶에 대하여 마주보게 만들었다. 가부장적 사회에 지친 우리 모두의 모습이 있었고 나아가 이 분열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가 서로 왜 헤매고 경멸하며 창을 겨누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자신의 진심을 직접적으로 털어놓지 않거나 털어놓지 못하는 아버지, 그렇기에 더욱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아버지, 그 갈등의 근본이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결국 근원적인 화해는 불가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안고 살아가고 차마 미워할 수만은 없는 관계, 그 지점에서 분열되어 가고 있는 사회현상에 대하여 접근하게 한다. 관객들은 개인의 문제로서 작품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며 동시에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공룡 같은 공연들 속에서 만난 작은 반가움이었다.

 

국내에 여러 연극축제가 형성되고 있는 추세다. 각 축제는 그들만의 색깔과 취지를 가지고 세상에 이색적인 사고의 장을 펼치고 있다. 특히 사회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축제가 많은 현실 속에서 이 창작스튜디오 자전거날다 동인페스티벌의 취지는 일면 반가움이 있었다. 여러 축제는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사회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축제는 분명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축제 또한 그 나름의 의미가 분명한 활동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창작스튜디오 자전거날다 동인페스티벌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응원하며 그 행보를 기대해본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