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정석
– 뮤지컬 <캣츠>
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T.S.엘리어트
연출 : 트레버 넌
작곡 : 앤드루 로이드 웨버
단체 : 캣츠문화산업전문회사
공연일시 : 2017/07/11~2017/09/10 pm3:00
공연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극일시 2017/07/26 pm8:00
사진: 캣츠 홈페이지
<캣츠> 내한공연이 1,300회에 이른다지만
뮤지컬 <캣츠>가 공연되고 있다. 내한공연으로 누적상연횟수가 1,3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캣츠>를 좋아한다는 것이 특별한 취향일 수 없음을 입증할 만한 숫자다. 필자 개인으로 보아도 가수 옥주현이 주연으로 등장했던 라이선스 공연에 2차례 내한공연을 보았으며 DVD 영상은 각종 수업에 교재로 활용하면서 수년 동안 수십 차례는 감상했으니 자막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국작품이다.
그럼에도 이번 작품을 설렘으로 기다린 것은 아니다. 사실 소위 ‘오리지날 캐스트’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내한한 대규모 공연을 보면서 실망하고 아무런 비평적 안목도 없이 칭찬 일색의 언론이나 소위 평론이 불편하고 분노스럽기는 한두 번이 아니다. 2014년이었다. 블루스퀘어에서 있었던 <캣츠> 공연은 그 안이한 연기에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기립박수를 치던 다른 관객들이 미울 지경이었다. 하여 새로 꾸렸다는 내한팀은 기대가 된다기보다는 벼르는 기분이었고 또다시 한국관객을 기만하는 공연이라면 이번에는 불평을 혼자 삭이지 않으리라 앙앙한 다짐까지 하였다.
최소한 2014년처럼 엉망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DVD의 감동만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DVD의 오리지널 팀이야 고르고 고른 캐스트이니 비교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무대에서 보는 공연이 영상으로 보는 공연만 못하다면 자랑스러울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으로 그리자벨라의 의상과 헤어스타일 등을 꼽는 모양인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으로 매혹적이던 시절을 연상케한다는 전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은 고양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연출이다. 고양이가 무리에서 따돌려져 다치고 병들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추레함 그 자체가 된다. 깔끔함은 고양이의 본능이지만 그루밍할 사이도 없어 더러워지고 털은 뭉쳐서 아무리 예쁜 어린이라도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식사를 하고 난 다음처럼 미모를 따질 수 없게 된다. 2002년의 일레인 페이지의 광휘를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몇몇 무대연출과 고양이들의 의상, 그리자벨라의 헤어스타일로 새로움을 따지기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가창은 완급 조절이 충분하지 않았고 연기도 디테일을 살리지 못했으니 그 유명한 <Memory>로도 감동은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대의 주변을 계속 배회하면서 젤리클 사회로 재진입하고픈 갈망을 감추지 않는 그리자벨라라니 과거의 화려함, 현재의 자존심, 고양이들의 따돌림 등 그 성격을 감안했을 때, 설득력 떨어지는 설정이다.
손님에게 후한 것이 한국인 인심이지만 베스트 관람비용에도 베스트 공연을 보지 못한 느낌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사진: 캣츠 홈페이지
우리가 젤리클 고양이라면
어떤 이들은 <캣츠>가 줄거리 중심의 공연이 아니고 주로 등장하는 고양이들을 열거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뿐이며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무대장치가 단순히 볼거리에 그치지 않고 무엇이 일어날까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는 다양한 고양이 분장과 의상, 뛰어난 안무를 지적하기도 한다. 혹은 ‘Memory’가 갖고 있는 뛰어난 음악성과 매혹적인 그리자벨라가 환기하는 인간애에서 감동의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부터 ‘감상’이란 관객에 마음에 남은 인상을 중심으로 발화되는 것이므로 틀린 감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캣츠>의 무대는 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단히 뛰어난 것이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발랄한 고양이들과 그들의 춤과 노래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도대체 지루할 새가 있을 수가 없다. 누구나 사랑하는 그리자벨라의 넘버 ‘Memory’와 그리자벨라라는 늙은 고양이에게 갖는 동정심, 그리고 그녀의 처량하고 비참한 모습이 나의 늙은 모습일 수도 있다는 공감 또는 그녀가 내가 외면했던 나의 불행한 이웃일지도 모른다는 반성 그 모두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뛰어난 작품에서 비롯되는 감동이란 놀랍게도 그 수많은 관객의 각기 다른 취향, 각기 다른 미감에도 불구하고 공통으로 분출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가 우리 이웃의 삶에 관심과 동정심을 갖고 포용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는 어떤 때인가. 늘 그럴 수 있다면 물론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너무나 여유없고 불안하고 슬프고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자신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무관심해지고 냉정해진다. 게다가 동정심이란 보통 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절대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작품의 결말에 이르면서 예외없이 그리자벨라가 선택되어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축복할 수 있게 되는가? <캣츠>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을 더 깊이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 질문의 방향이 좀더 적극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젤리클 고양이라면 언제 그리자벨라와 같은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답은 <캣츠>가 취하는 축제의 형식에 있다.
1년에 한 번, 젤리클 고양이들은 젤리클 달이 뜨는 밤에 모여 축제를 한다. 이들이 하는 것은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가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고양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젤리클 사회의 유력한 고양이들이 하나하나 소개된다. 책임감 강하고 반듯한 멍커스트랩이나 현명한 양육자 고양이 제니애니닷츠, 부유한 고양이 버스토퍼 존스와 같이 현실적 위상이 확고한 고양이는 물론이요 럼텀터거와 같은 반항적이고 매력적인 고양이, 미스터 미스토펄리즈 같은 마법사 고양이처럼 마성적인 고양이도 소개된다. 물론 매캐버티 같은 젤리클 사회를 위협하는 파괴적인 고양이도 있다. 늙은 극장 고양이 거스는 젤리클 사회에 전해오는 작품과 역사를 짚어준다. 이 다양한 존재들은 인간사회의 축도이다. 아울러 생성과 유지와 소멸의 영역을 담당하는 신화적 세계의 압축판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세상은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좋은 존재, 편안한 존재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물론 올드 듀터로노미 같이 모든 고양이가 존경하는 고양이 같은 존재를 바로 들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말하자면 이 다양한 고양이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들의 집합체인가라는 질문에 한 답변인 셈이다.
또한 이 축제에서는 피크와 폴리클 개들의 싸움을 중단시켰던 위대한 럼퍼스 캣의 전설과 불촛대 악마의 퇴치와 그라울타이거의 최후를 보여주는 종족 신화를 재확인한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양이들은 젤리클 사회의 공동의 적을 퇴치해 왔던 자랑스러운 그들의 역사를 회고하고 이로부터 현실의 적을 물리치는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길어내어 자신들의 세계를 수호한다.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던 매캐버티에게 정면으로 대항하여 끝내 물리치는 젤리클 고양이의 감동적인 단결은 그 결과이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이렇게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부심을 되찾은 이들이 스스로 부정했던 그리자벨라의 세계를 승인하면서 이를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가는 고양이로 그리자벨라를 선택한 것은 이들 모두의 선택이며 이들 모두를 위한 것이 된다.
한국에는 1년 내내 축제가 있다. 전래의 명절이나 세시풍속에 새로운 기념일이 더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지역별로 시기별로 벚꽃이나 해변이다 단풍이다 눈꽃이다 얼음이다 전국 어디인가에서는 언제나 축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래 축제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당면한 문제를 적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명절은 고단하고 싫증나는 노동의 시간으로 재정의되고 대부분 축제는 주인공의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최측과 관람객으로 이분되어 꾸려지니 우리 자신을 위한 진짜 축제를 꿈꾼다면 젤리클 축제를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얻은 그리자벨라는
한 가지만 덧붙이자. 그리자벨라는 ‘무엇’이던가? 공연의 등장인물이 내포하는 원형을 질문하는 것은 언제나 유용하다. 매캐버티가 외적(外敵)이라면 그리자벨라는 내부의 적이다. 한때는 매력적이고 모두가 사랑하고 선망하는 존재였으나 지금은 타락하고 더럽고 초라해진 존재이다. 사실 현실에서 이런 존재는 외부의 적보다 더 골치 아프고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후속세대가 보고 배울까 무섭고 고단하고 힘겨워도 성실하게 살아온 자들에게는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적 존재의 수용은 일상의 고통,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삶을 주도하는 인간으로서 역사와 문화를 전유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현재를 수호할 수 있는 관용의 힘이야말로 삶을 궁극적으로 빛나게 한다. 그리자벨라는 ‘관용’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과가 재미있다. 크게 보면 위대한 역사를 재확인하고 위협적인 매캐버티를 물리친 데서 한 사회의 관용의 능력을 회복한 것이지만 미적으로는 그리자벨라의 매력을 발견하는 청년 세대의 순수한 호기심이 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리자벨라의 출현에 무대에서 제일 순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리고 하얀 고양이 빅토리아이고 그리자벨라의 노래를 기억하고 문득 이 노래를 재발견하는 것은 제마이마이며 그리자벨라가 기진하여 쓰러졌을 때,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의 테마를 함께해주는 것도 제마미마이다.
이 어여쁘고 순진하고 애정 깊은 두 어린 고양이가 발견해낸 선배 세대의 가치, 이렇게 발견한 문화를 다시금 자신의 것으로 재구축하는 문화의 위대한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를 진정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축제라면 응당 그러할 것이다.
<캣츠>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다. 고전이란 언어나 국적을 넘어 인류공통의 문화유산이다. 그냥도 좋은 것이지만 알고 보면 더 좋은 것이다. <캣츠>가 노래 한 곡, 화려한 쇼 한 판과 등치하는 좁은 소견을 넘어 널리 우리 사회와 인간을 위한 사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