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정명문

다름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 뮤지컬 <앤ANNE>

 

정명문(뮤지컬 평론가)

 

원작 : 루시 모드 몽고메리

각색· 연출: 최현미

작곡 : 박기태

제작 : 극단 걸판

공연일시 : 2017. 8. 17 ~ 31.

공연장소 : CJ아지트 대학로

출연진 : 차준호, 최현미, 송영미, 신정은, 임찬민, 서대흥, 조혜령, 이빛나, 우현용, 유원경, 조흠

관극일시: 2017. 8. 24. pm 8:00

 

 

 

 

창작 뮤지컬에서 고전을 각색한 작품의 점유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글로컬라이제이션의 추세에 맞게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컨텐츠 개발을 목표로 했던 <프랑겐슈타인>, <페스트>, <도리안 그레이>, <벤허>의 경우 한국의 제작 수준을 어느 정도 증명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화려한 무대와 유명 배우 등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자본이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작품성을 언급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 초연인지라 누적 공연회차가 라이센스 뮤지컬에 비해 적고 수정 보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건 이들의 노래, 무대 구성, 연출이 서구 뮤지컬 방식을 잘 따라간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극단 걸판의 뮤지컬<앤ANNE>은 똑같이 고전을 각색했지만 위와 다르다. 이 작품은 2015년 구로에서 공연된 이래로 2016년 안산과 구리에서 명랑음악극 버전으로, 2017년엔 창작 한다 플랫폼에서 쇼 케이스로 진행한 후 안산, 홍천, 밀양, 김천의 각종 축제에 초청 공연하면서 내실을 다졌다. 그리고 CJ문화재단의 스테이지업 공간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대학로에 드디어 공연을 올렸다. <앤ANNE>은 유명 배우나 화려한 무대를 보여주지 않는 소극장 뮤지컬이다. 그러나 공연 내내 매진이었고 참신함에 주목받았다. 이 작품은 대형 뮤지컬에 결코 밀리지 않았으며 기존 뮤지컬과 다르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뮤지컬 시장에 나름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힘, 영리한 각색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은 애니메이션, TV드라마로 각색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만화 영화 세대들에게 11살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기쁨의 하얀 길을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 초록 지붕의 다락방에 턱을 괴고 공상하는 모습, 다이애나와 손잡고 기뻐하는 모습들로 각인되어 있다. 앤은 사춘기 소녀를 지나온 이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앤은 지금으로 보자면 철저히 흙수저였지만 명랑하고 즐겁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부정적인 시선과 사건들에 낙담하지 않고, 좋고 싫음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말이 결혼으로 끝나는 명작동화의 여자 주인공과 확실히 다르다. 이러한 원작의 명랑한 정서를 뮤지컬은 철저히 따라간다.

 

앤은 원작이 10권짜리이다. 원작의 길이가 길수록 장면을 효율적으로 각색해서 무대화 하는 것은 큰 고민거리이다. 구조가 밋밋해지거나 작품을 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두 가지 설정으로 뛰어넘는다. 여고 연극반이 <앤ANNE>을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은 극중극이고, 주인공을 세 명이 돌아가며 맡는다. 그래서 초록지붕 집에 살게 되는 어린 앤, 학교를 다니며 다이애나와 우정을 쌓아가는 앤, 학교 졸업 후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앤이 확실히 표현된다. 각각의 앤을 맡았던 여고생은 자기가 쓰고 있던 모자를 다음 배역에게 씌워준다. 배우마다 표현이 다른 것은 앤의 여러 모습과 성장으로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주인공을 돌아가면서 한다는 발상은 뮤지컬에서는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것이다. 위험부담이 컸음에도 이런 각색과 연출은 앤의 사랑스러움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또한 한 명의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극이 아니라는 의도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다.    

 

사실 무대화된 작품 중에서 여성이 오롯이 주인공인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남자 주인공의 관계 속에 여성이 부수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앤ANNE>에서는 이 상황이 역전된다. 남자 주인공인 길버트 브라이스가 극의 2/3 부분이 지나서야 나온다. 또한 남자로 인해 희생하는 신파적인 내용도 없고 신데렐라 스토리도 아니다. 분명 원작에 있는 내용이지만 관객들은 이런 역전된 상황에 상당히 통쾌해한다. 2017년의 관객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앤이 자기 힘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노래가 만들어내는 따스함

 

이 뮤지컬에 수록된 곡은 총 18곡이다. 재미난 건 1곡을 뺀 나머지 곡 제목에 음가 ‘앤’이 붙어있다. 앤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많을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앤의 독창에서 시작되더라도 그녀와 마주치는 매슈, 마릴라, 린드부인, 블루엣, 다이애나, 마을 사람들이 함께 부른다. 이는 마을 공동체와 함께 하는 앤을 반영한 센스라고 하겠다.

 

<앤ANNE>의 곡들은 대부분의 노래와 대사가 함께 구성된다. 그러다보니 대사를 통한 감정의 변화가 노래로 표현되기에 대사를 할 때는 배경음으로 멜로디가 깔리기도 하고, 한 곡 안에 다른 멜로디가 함께 구성되면서 길이가 길어지기도 한다. 배우들의 역량을 발휘하는 스페셜 머티어리나 라임이 맞아 떨어지는 곡은 없다. 하지만 동요, 행진곡, 락, 랩, 발라드 등의 방식을 중간 중간에 삽입하여 멜로디를 재미있게 구성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 작품의 주 정서인 명랑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게다가 멜로디가 어렵지 않아서 관객들은 금방 따라 부를 수 있는 매력까지 있다.

 

‘저 길모퉁이ANNE’이란 곡의 경우 “저는 누군가에게 멸시당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빛나는 보석도 좋지만 저의 이 진주목걸이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의 애정이 진실이 담겨있다면 충분히 빛나니까요”라는 앤의 발표로 시작된다. 이 곡은 앤의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보여주는 핵심곡이다. 앤이 이 노래를 부를 때 긍정의 에너지가 가장 빛을 발한다. 그리고 고조되는 음과 함께 마을사람들의 합창이 겹치며 이 작품의 따스한 정서가 확실히 드러난다. 연극과 뮤지컬의 차이점이 노래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곡만으로도 이 작품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관계를 맺는 앤, 마당과 공동체의 정서    

 

2~3인이 주로 나오는 소극장 뮤지컬이 대학로를 점령하고 있는 지금, 관객들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배경무대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앤ANNE>의 무대는 흔히 볼 수 있는 배경이 아니다. 무대는 기본적으로 학교 운동장이기에 거의 비워져 있다. 정면엔 나무처럼 보이는 초록색 종이 커튼과 왼쪽 편엔 스탠드, 오른쪽은 칠판으로 고정되어 있다. 앤의 초록 지붕 공간은 스탠드에서 이루어지고, 학교 교실 장면과 매슈의 무덤은 칠판 주변에서 움직인다. 그 외는 가변적이다. 배우들은 의자, 옷, 가발, 석판 등의 소품을 통해 마차, 거실, 강당을 표현하고 다양한 인물들의 분위기와 감정도 도출해낸다.

 관객들은 기존에 보았던 무대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자’ 라는 표현에 금방 몰입해간다. 이는 마당극의 열린 공간 활용과 유사하다. 극단 걸판이 대학 풍물패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무대구성과 정서이기도 하다. 무언가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관객들은 과장된 동작으로 마차의 말을 표현하고, 옷으로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내는 등 배우로 꽉 찬 빈 무대를 보며 자연스레 웃음을 터트리며 공감한다. 극에 몰입하게 하는 요소가 화려한 무대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원작의 명랑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명의 정서를 가진 ‘마당’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앤ANNE을 연기하는 연극부 학생들의 후일담이다. 마당극의 기본 구성과 대입해보자면 여고 연극반의 이야기는 길놀이(앞풀이)에 해당하고, 극중극으로 앤을 공연하는 것은 마당놀이가 된다. 이 과정 이후 뒷놀이(뒷풀이)를 거쳐 갈등해결과 신명도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앤의 이야기로 끝나기에 관객들은 100년이 지난 앤을 왜 호출했는지  추측은 하지만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마당’의 특성이 절묘히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분명 커다란 성취라 하겠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은 공동체가 사람의 일생에 중요한 요소임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 마을 공동체가 가능했던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앤은 고아여서 걱정스런 아이였지만 관계를 맺으면서 마을 공동체를 따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너무나 각박한 이 시대에 공동체와 그 안의 개인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인 셈이다. 한편 2017년 뮤지컬 <앤ANNE>은 뮤지컬 시장에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꼭 전형적인 방식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충분히 즐겁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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