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건담기/ 정윤희

접속! 20세기 건담가들의 아지트로!

– 연극 < 20세기 건담기健啖記>

 

정윤희

 

 

작, 연출: 성기웅

출연: 이윤재, 이명행, 안병식, 백종승, 김범진

드라마터그: 김슬기

음악감독: 이자람

공연일시: 2017.9.5. ~ 9.30.

공연장소: 두산아트 SPACE 111

관극일시: 2017.9.27.

 

 

세상이 이리 춥고 각박한데, 예술이 제대로 연명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예술이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고, 무거운 넋두리가 우리의 일상을 누를 법도 하다. 허나 환각과 요술로 둘러 진 아지트 같은 공간이 선물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접속! 20세기 건담가들의 아지트로, 모던 뽀이를 자처했던 예술가들이 사부작대던 그곳으로. 비록 남들에게는 사부작거림에 불과했던 그 재잘거림은 세기의 전환과도 맞먹는 부푼 꿈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아지트에는 클래식과 재즈 레코드판, 피카소와 고흐의 그림이 실린 외국 잡지들, 국내외 소식을 가쁘게 퍼 나르는 일간지, 그리고 외국 과학소설의 번역본이 쌓여있었다. 그들은 이 몇 가지들을 재료삼아 멀고 먼 미래를 꿈꾼다. 라디오 방송을 다리 삼아 21세기 관객들을 향해 수다 쇼를 펼친다.

본명이 김혜경이라는 시인 이상은 <20세기 건담기>에서, 다른 매체에서 흔히 다루어지듯 병약하고 염세적인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재간둥이이었으며, 극중 인물이 앓고 있다는 폐병도 무색할 정도로 팔팔했다. 심지어 폐병과 치질로 고통 받는 이 생을 끝내겠다며 독약을 꺼내 들었을 때에도 그랬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마냥 기죽어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작은 어느 산문집에서, 제비 다방에서의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이야기를 그린 한 영화가 아무리 수많은 투자자들의 손을 거쳤다지만, 이리도 실존 인물을 망가뜨려놓을 수 있는 것인지 분개를 금치 못했다. 만약 실제 시인 이상이 영화 속 주인공보다는 <20세기 건담기>의 등장인물에 보다 가까웠다면 나 역시 분개에 동참하겠다. 한낱 연애 에피소드쯤이야 무대 위에서 박태원이 그러했든 재미나게 잘근잘근 몇 번 씹고 나면 그만인 것을…

각본은 많은 고증을 거쳐 세심하게 작성되었다고 한다. 각 인물들이 지닌 말버릇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작가는 토박이 서울말도 훈련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품은 소중한 실존 인물들의 실제 육성을 담게 되었다. 생경한 어휘들과 높낮이를 지닌 언어였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곧 몰입할 수 있었다. 구수함도 느껴졌다. 아예 이해 불가한 어휘들은 자막으로 접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가 박태원을 일컬어 세태소설이나 일삼는 한량이라 비아냥거렸다지. 하지만 일상의 디테일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 역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칼바람과 피 부림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야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언어와 예술이 정치에 매몰되는 현실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만두자. 이 문제는 늘 자기 분열만을 낳을 뿐이다. 나약한 예술가로서는 그저 소설가 구보 씨의 찬찬한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주변 풍경이나 그려보는 보는 것밖에, 별 수라고는 없다. 하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다. 비록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쓸데없는 독백일지라도 다른 차원의 세계에선 큰 울림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시절의 예술가나, 오늘날의 예술가나 처지가 다르지 않더라. 비싼 밥 먹고 비싼 돈 들여 공부했건만 예술가들이 지닌 유일한 선택지가 고작 한량이었다. 이들이 낙랑팔가와 제비다방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 했던 건 결코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혹한의 일제강점기였다지만, 그중 어느 시절은 그 뒤에 찾아온 전시와 비교하면 감히 풍요롭다고도 할 만 했다. 매체의 벽을 뛰어 넘고자, 이들은 자비를 들여 <시와 소설>이라는 문집을 편찬하며 나름의 원대한 꿈을 키운다. 언어유희, 그것은 곧 각박해지고 낡아버려서 곧 붕괴할 운명에 놓여있던 언어를 구출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깊어가는 폐병과 치질, 깊어가는 육체의 고통만큼 짙어져 가는 전쟁의 잔혹함 속에서 예술가들은 결국 스러져 간다. 김유정은 누이의 집 방 한 칸에 갇혀 마지막 기력을 다 쏟아 부으며 친구들이 알선해준 번역 일에 매달리고 있지만, 육체의 고통과 가난의 설움이 찾아 올 때면 몸서리를 친다. 시인 이상은 조금 더 먼 미래를 찾아 맹목적으로 동경을 향해 갔으나, 그곳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상범으로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일본 경찰의 전향하라는 요구에 어디서 어디로 전향하란 말이냐며 절규한다. 무대는 두 사람의 고통어린 몸서리조차 쉼 없는 수다로 표출한다. 절규 섞인 넋두리, 친한 동무들끼리의 희희낙락하는 소리가 타임캡슐에 담겨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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