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장윤정

연극의 현장성과 영상의 공간 확장

<골렘>

 

 

장윤정(연극평론가)

작 · 연출: Suzanne Andrade

영상 디자인 : Paul Barritt

드라마투르그 : Ben Francombe

기획 · 제작: 극단 1972

공연일시: 2017. 11. 16 ~ 11. 19

공연장소: LG아트센터

관극일시: 2017. 11. 17, 금요일, pm8:00

 

 

영국 극단 1927이 한국을 방문했다. 아주 독특한 작품을 들고서. 이들은 2007년 창단작품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5관왕과 5Star Review를 거머쥐며 혜성과 같이 등장하였다. 연이은 작품들로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극단의 입지를 굳히고 최근 <골렘>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관객을 찾고 있다. 그런데 왜 1927인 걸까? 특정한 해를 지정한 것이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특별한 극단 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골렘> 브로셔에 소개되어 있다. ‘1927’은 최초로 유성 영화가 발표된 해에서 따온 숫자이며, 영상과 동시에 음성대사, 음악 등의 사운드가 함께 나오는 유성영화 ‘talkie’가 발명된 해다. 극단 1927의 창단자들은 그들이 무성 영화와 만화책을 좋아한다는 것에 영감을 받아 애니메이션과 퍼포먼스가 결합된 형태의 공연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국 극단 1927은 애니메이션과 퍼포먼스의 결합으로 상징 가능하다.

 

골렘(Golem)신화는 유대교의 진흙으로 만든 인형에 대한 전설을 지칭한다. 골렘이라 불리는 이 점토인형은 본래 말을 할 수 없는 대신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충실한 하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점차 성장해가기 때문에 주인이 통제하지 못할 시점에는 부서트리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이 골렘의 전설을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 바로 영국 극단 1927의 <골렘>이다. 이 <골렘>의 서사는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의 통제 하에 놓여있어야 할 골렘이 점차 인간을 능가하게 되고, 골렘 또한 스스로 자신을 능가해가며 새로운 골렘의 형태를 발생시킨다. 주인과 하인의 역학관계는 변화되어 어느새 주인을 앞서가는 하인으로서 골렘은 활동한다. 이 지점에서 소심한 ‘로버트’는 어느날 우연히 충실한 하인기계 골렘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관객은 그것이 ‘로버트’의 선택이 아닌 골렘의 선택으로서 가능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로버트만이 통제할 수 있는 골렘이지만 로버트의 통제가 불가능한 시간동안에 골렘은 미지의 가능성을 지닌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만다. 결국 TV를 통해 자본의 논리와 상품의 가치, 소외되는 노동 등을 습득한 골렘은 더욱 비대해진 채 과도한 정보입력으로 망가진다. 이후 등장하는 골렘 버전 2는 버전 1보다 더욱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 좋아진 동시에 탁월한 의사소통능력으로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로버트와 그의 할머니는 골렘이 제안하는 것들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짓고 소비하며 그것은 어느새 인간관계에서의 소외와 노동에서의 소외를 안겨준다. 특히 로버트는 전보다 더욱 다이나믹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느새 강요된 선택에 따른 삶의 결과였다. 이 인물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인물은 ‘애니’다. 애니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골렘을 믿지 않는다. 애니는 록 스피릿으로 가득하며 첨단 기술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인물이다. 애니가 극 중 내내 록 밴드를 결성하여 노래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록이야말로 결코 제도권에 통제될 수 없는 저항정신으로 가득한 음악장르기 때문이다. 그런 애니가 결국 버전 2 골렘의 지나친 행태들에 참지 못하여 부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애니가 부순 기계 골렘은 마치 세상 모든 정보가 다 튀어나온 듯 한 형상으로 엄청나게 거대한 기계장치로 변화되어 애니를 집어삼키고 만다. 그리고 버전 3로 재탄생된다. 버전 3 골렘은 이제 인간의 신체와 일체화된다. 귀속으로 이식되어 존재하는 골렘은 이제 더 이상 인간 스스로가 선택을 하는 것인지 첨단기술이 선택을 행하는 것인지 구분이 불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애니는 더 이상 록 밴드를 하지 않는다. 공연 마지막의 “We believe in New.” “Times on our hands.” “Say Yes to progress.” “High definition.” 문구들은 그래서 더욱 씁쓸한 동시에 언캐니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현대기술의 맹신에 대하여 경고한다. 첨단기술이 발전하고 점점 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변화될수록 사용자는 기술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현재의 스마트폰 세상만 돌아보아도 예측 가능한 현상 아니던가. 더불어 자유로운 소비란 제공되는 정보 범위 하에서만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며, 그와 더불어 끊임없이 무분별하게 제공되는 광고에 노출되어 있는 예비소비자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 강요된 광고로 인해 강제된 소비를 행하는 것임을 이 작품에서 보여준다. <골렘>은 이렇게 첨단기술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경고 이외에도 미디어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문화의 폐해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더불어 지나친 물신화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소외현상까지 확인하게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골렘>은 혁신적인 기술발전의 시대는 필수불가결한 현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골렘이 소멸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면, 고정적인 주인과 하인의 위치는 주인의 역할에 대한 책임과 능력에 기인한다는 점일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스마트폰은 사용자가 스마트해야 스마트폰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첨단기술을 향유함에 있어서 사용자가 능동적인 위치에 있을 때에 그 기술의 가치가 발현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와 같이 <골렘>은 현재의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노정을 보여주고 있다.

 

<골렘>의 미덕은 단연코 애니메이션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배우의 연기에 있다. 우선 무대의 배경을 장식하는 애니메이션의 수준은 가히 웬만한 무대기술을 능가한다. 각 사물들의 입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미세한 음영까지 모두 이미지화한 덕분에 스크린 앞에 선 배우들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과장된 의상과 분장을 한 배우들은 마치 스크린 속 애니메이션의 일부인 듯 느껴지도록 하였으며,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한 편의 재미난 만화를 보는 것같이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영국 극단 1927만의 특징이며 가장 큰 힘이라고 하겠다. 무대에는 생생한 라이브 음악이 실연되고 배우들은 리듬에 맞춰 대사를 구술한다. 전체적으로 음악과 재미난 영상, 과장된 분장과 몸짓, 억양 등으로 구성된 <골렘>은 여러 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연극적 형식을 발현해냈다. 사실 무대 위에 영상을 배경으로 사용하는 점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착시효과를 통해 시각적 효과를 노린 지점이나 음악과 영상에 맞춰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술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연극과 영상 사이를 오가며 연극만이 주는 현장성과 애니메이션이 제공하는 무한한 공간의 확장을 즐기게 되었다. 덕분에 연극이라는 장르의 외연 또한 확장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영국 극단 1927의 미덕이 아닐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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