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아홉소녀들/ 김영은

*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우리 일상을 투영하다

 

김영은(연극평론가)

 

 

 

<아홉소녀들>은 9명의 소녀들이 ‘상상놀이’와 ‘역할놀이’를 하는 연극이다. 소녀들의 배역은 각각 6명의 여자 배우와 3명의 남자 배우가 맡았는데, 연출은 그 이유에 대해 “젠더 개념을 깨트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까티 라뺑, 「연출의 글」, 프로그램 중에서)라고 <연출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는 “페미니스트 텍스트”가 아니라 “‘여성존재’를 통해서 한 사회의 상태를 진단해보는 하나의 텍스트”(상드린 로쉬, 「한국의 독자에게」, in 상드린 로쉬 작, 아홉소녀들, 임혜경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Ⅸ.)라고 말한 것을 무대에 충분히 반영하고자 착안해낸 것이라 생각된다. 텍스트는 총 3부로 되어있고 여러 개의 단편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있다. 

 

상상놀이와 역할놀이, 우연발생적 전개

 

각 장면의 ‘놀이’는 몇 명이서 하는 건지 그리고 어떤 테마에 관한 건지, 어느 정도 일종의 규약을 정하고 시작된다. 그러나 그뿐! 이야기는 정해져있지 않다. 한 사람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래’라고 하면, 이어서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대’라며 되받아치고, 또 이어서, 다른 사람이 전 사람의 말한 내용이나 단어를 이어가며 또는 상황을 만들어나가며 ‘이야기 짓기’를 연결해간다. 그러면서 각각 역할놀이를 진행해간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놀이다. 놀이는 동심의 세계이고 상상의 세계다. 마음대로 상상하며 자유자재로 자기세계를 구축해놓았다가도 수틀리면 금방 무너뜨리고, 애써 그렸다가도 마구 지워버리며, 공들여 만들어놓고도 순간 무자비하게 부숴버린다. 아이들에겐 에너지가 많아서 그런지, 상상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며, 그 상상 놀이는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어 지속된다. 이들에게 놀이는 전부이며 인생 그 자체이다. 재미없으면 금방 싫증내고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미리 짜인 각본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닿는대로, 발 가는대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대로, 순간순간 놀이 가능한 영역이 만들어지면 만들어지는대로 우연발생적으로 전개된다. 

 

즉흥성과 긴장감

 

소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각자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야 하며 그럴듯하게 지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집단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놀이에 늘 신중하다. 룰을 정해놓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놀면서 만들어지고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된다. 각자 내뱉은 말 때문에 그 상황을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며, 또 그 내뱉은 말 때문에 갑자기 외톨이가 되거나 또는 주목받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는 긴장감까지 맴돈다. 주도적으로 하던 역할이 순식간에 피동적 역할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다.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이 상상놀이에서는 아주 쉽게 일어난다. 어떤 때는 그런 일들이 단순하게 생겨났다가 단순하게 처리되면서 쉽게 진행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상상이 잘 이어지지 않거나 말문이 막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순조롭지 못하게 진행되어 순간순간 멈칫하며 ‘휴지’의 시간을 만들어내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집단적으로 합심하여 어느 하나를 상대로 대항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그 구심점을 잃고 쉽게 분산되어 흐트러져버리기도 한다. 우연발생적으로 진행되는 놀이에는 이토록 즉흥성과 긴장감이 끊이지 않고 생성된다. 

 

놀이의 잔혹성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들의 놀이가 마냥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는 금방 경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믿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잔혹하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고아이며 팔도 없는 어느 소녀를 어떤 남자가 데려가 다리를 잘라버리고 서커스에 판다는 둥, 치마가 짧아서 강간당했다는 둥, 엄마 애인 때문에 아빠가 때려 교통사고를 내고 죽었고 나는 시체이며 엄마, 아빠의 시체 옆에 누워있다는 둥, 그 잔혹스러움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지로 프랑스 동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어가 아이의 팔과 다리를 조금씩 먹어치운다거나, 종달새의 눈을, 귀를… 파먹는다거나 하는 등, 섬뜩섬뜩한 내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런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며 깔깔거리고 노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잔혹성이 우리 인간의 내면에 원초부터 내재해 있었던가? 현실 사회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범죄나 전쟁 등은 우리 속에 있던 이러한 잔혹성이 어느 순간 어떤 상황을 만나면서 배출되어 폭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아이들의 놀이를 바라보며 새삼 우리 속에 잠재해있던 내밀한 부분들을 들추어 끄집어내면서 갑작스런 사유에 빠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제스처와 대사의 직조

 

연극은 몸동작놀이와 대사놀이의 교차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아이들은 혼자서 또 어떤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으며 놀기도 하고, 한편, 또 어떤 아이들은 말을 이어나가며 ‘이야기짓기’ 놀이를 하고, 어떤 아이들은 몸동작으로 연결시키며 무언가를 구축해가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 연극에서 제스처는 대사를 보조하는 동작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대사와 동등한 자격으로 표현되며, 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즉, 제스처와 대사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서로 다른 놀이를 만들어내듯, 서로 병행하여 진행되며 각각 독립적으로 서로 다른 놀이를 재현해보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텍스트를 “여러 목소리가 섞이는 오선지의 악보처럼 생각한다”(상드린 로쉬, 「작가노트」 아홉소녀들, 임혜경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5쪽.)고 하였다. 제스처와 대사는 서로 다른 음표와 쉼표의 교차로 직조되듯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결합하여 연극을 구성한다. 악보는 매뉴얼이다. 매뉴얼은 사용자가 참고하는 지침이며 그 지침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순전히 사용자의 몫이다. 그녀의 텍스트는 연출의 특성에 따라 색다른 맛과 색깔을 낼 수 있게 하는 텍스트이다. 까피 라뺑의 연출은 도회적이고 시적이며 리듬감 있게 표현되었다. 특히 의식과도 같은 놀이의 특성을 살려 반복적 제스처와 대사에 리듬을 주었고, 아이들 놀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다양한 모티프들을 매끄럽게 연결해주었다. 

 

현실문제의 반영

 

소녀들의 놀이에는 어른들의 실제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른들의 언어나 말투들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고, 동심의 세계는 현존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느끼고 감각할 수는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모방은 파편적 언어로 되어 무대 위에 여기저기 툭툭 묻어있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실제 세계를 파편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게 인생이야(C’est la vie)’, ‘이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 등. 

 

간접적 사회비판  

 

소녀들의 놀이는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지만, 사실 거기에는 실재가 반영되어있다. 소외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차별, 사실을 말하여 친구들로 받는 왕따, 알코올에 취해 트럭에 치이는 사고, 콜라 장사로 자본을 만들어 맥주 시장까지 장악하는 자본주의경제의 극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든지, 엄마가 애인이 있어 아빠가 때렸다든지 하는 불륜 현장 등, “약자와 비만 아동에 대한 차별, 왕따”, “가족 문제, 성폭력, 알코올 중독, 죽음, 이주민 문제 등 어른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근원적인 문제들”(임혜경, 「해설」, 아홉소녀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100쪽.)이 드러나 있다. 아이들의 무의식적 놀이를 연극으로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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