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대가

 

예술은 성공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낮다. 물론 어느 수준을 성공으로 보느냐 하는 데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예술의 속성상 지향하는 완벽성에 끝이란 없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어떤 식으로 추정할 수 있을까?

우선 예술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술은 인류와 함께 탄생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란 말은 바로 예술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임을 강변하고 있다.

 

 

사실 예술은 인간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필수 요소에 해당한다. 그래서 예술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존재하고 패망한 국가조차 부흥을 위해 가장 먼저 예인(藝人)과 장인(匠人), 즉 예술가와 기술자를 보호했던 것이다.

 

앞에서 예술의 성공 확률이 낮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를 그 실패에 대한 부담을 근거로 산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무수한 실패를 무릅쓰면서 얻고자 하는 그 완벽함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편이 맞다.

가치와 가격은 분명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그래도 관련은 있다고 보고 인용하자면 이런 예가 있다. 보통 기성품 구두가 한 켤레에 20만원 짜리면 신을 만하다 할 때 그 만족도를 90 정도로 보자. 그럼 완성도를 더 높여, 물론 이 경우 기계로는 한계가 있고 수공으로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족도가 95가 되면 그 값은 얼마일까? 아마 100만원 쯤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완성도와 값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즉 97이 되면 5백만원, 98이면 5천만원, 99면 5억원 하는 식으로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 값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등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과 함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완벽성에 대한 집념으로 인간과 사회를 견인하는 지향점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즉 보통 몇 번 시도하다 안 되면 포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몇 백, 몇 천 번이라도 다시 덤벼드는 게 예술가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을 듯한 초월적 경지의 일도 예술은 성공시킬 때가 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을 비롯한 인간 삶의 모든 분야가 예술에 빚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가 예술가를 보호하고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실상은 예술가의 속성인 집념에 편승하여 국가와 사회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 희생의 과실만을 취하고 있다.

 

 

성공하는 예술인은 극소수이다. 또 성공한 예술인도 숱한 실패를 겪었을 것이고 또 앞으로 겪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성공한 예술인에 대해서만 갈채를 보내고 성공한 작품에만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극소수 최고 자리를 차지한 경우만을 성공으로 보고 그 외 수많은 보통 예술인들과 보통 작품들을 거의 실패로 간주하면서 무시와 모욕을 가하기도 한다. 완벽에 집착하며 티끌만한 결함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 예술인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그러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각종 복지제도는 그런 생각을 근거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예술계는 철저하게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한 회 출연에 수천만원을 받는 스타가 있는가 하면 회당 5만원의 출연료조차 체불되어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 나오는 게 스타는 소수이므로 경쟁해서 데려와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냥 출연만 시켜준대도 감지덕지할 배우들이 차고 넘친다는 주장과 스타는 비록 한 명이지만 매출에 절대적 영향력이 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이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싸구려 취급을 받는 배우들도 무대에 서기에 충분한 기량과 경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도공이 굽다가 실패한 것으로 여겨 깨버리는 사기 조각이 아니라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 하는 완성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완성품에 대해 앞서 구두에 적용했던 기성품 수준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스타에게는 그러지 않으면서 일반 예술인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재능 기부를 요구한다. 그냥 빈 몸으로 와서 대사 몇 마디, 노래 몇 곡 불러주면 된다는 것이다. 빈 몸으로 오는 거니까 쉽지 않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예술인들끼리도 나무나 못은 돈을 주고 사도, 극장 대관료나 팸플릿 인쇄비는 꼬박꼬박 지불해도, 희곡에 대한 저작권료는 지불하기를 꺼려한다. 아니, 지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마치 배우의 빈 몸이 그렇듯이 희곡도 공연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수준 낮은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공이 깨버린 사기조각에도 재료비가 들었을 것이다. 실패하는 예술을 위한 공적 지불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커다란 희망이고 적어도 완성품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대가 지불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마침 미술과 문학에서 그와 관련한 계획이 나오고 있다. 그 내용과 수준의 합리성과 적절성은 차치하고 일단 그런 시도가 이루어진다는 게 반갑고, 공연에 대해서도 하루빨리 출연자 등급 완화, 출연료 상·하한제 등을 비롯한 합리적인 실제 대책이 나와 주길 기대한다.

나아가 모름지기 올바른 국가라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예술과 예술인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도록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동시에 아직 그런 인식이 자리 잡기 이전이라도 예술인들에게 최소한의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여 창작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19년 6월 1일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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