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위원회의 본분 /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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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과 2004년 예술계는 문예진흥법 개정을 놓고 큰 홍역을 치렀다. 개정의 핵심은 문예진흥원의 독임 원장제를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처음 예술계의 반응은 정작 예술 현장을 배제한 채 충분한 논의 없이 추진되었다는 생각에 반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애초 법 개정을 주도하던 문학계와 이미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전환된 것을 보며 공연예술위원회 설립 등 유사한 방향의 변화를 촉구하던 연극계가 결합하면서 이내 예술계의 분위기는 찬성의 흐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대표적인 예술지원기구의 운영을 예술인들이 직접 맡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또한 예술계를 대표하는 여러 위원들의 민주적 의사 결정과 상명하달식이 아닌 예술 현장의 의견이 상향식으로 모아지는 방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위원의 선임 또한 각 예술계의 인사들로 위원추천위원회를 꾸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추천하게 될 것이라 하였고 위원장은 위원들의 호선으로 결정되는 것이었으니 여러 모로 획기적 변화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예술계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위원들의 임기는 슬며시 3년에서 2년으로 바뀌었고 위원장 호선제도 사라졌으며 위원은 위원추천위원회에서 복수로 추천하는 자 중 문화부 장관이 임명하고 위원장은 별도 임원추천위원회에서 역시 복수로 추천하는 자 중에서 문화부 장관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실 애당초 위원추천위원회 도 문화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미에 맞는 대로 구성할 수 있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 바뀐 법에서는 관 주도가 훨씬 용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슬금슬금 법이 바뀌며 원래의 취지가 바래갔지만 예술계는 조용하였다. 한 번 억지로 힘을 짜내서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힘든 환경에서 간신히 예술 활동을 유지하는 예술인들에게 번번이 행동에 나설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잘 되려니 믿었고 조금 의심이 가는 상황이 벌어져도 설마 아니겠지 하며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사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고, 그러니 그런 일이 없기 바라는 건 당연하다.

그러는 사이 예술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만한 커다란 결정들이 마구 이루어졌다. 예술계 지형도를 무시한 문예진흥기금의 급작스러운 지역 이관이 이루어졌고, 대학로 예술극장의 독립, 이어 문예회관과 앞서 독립한 대학로 예술극장을 통합한 한국공연예술센터의 설립, 예술자료원의 독립, 그리고 다시 예술자료원과 한국공연예술센터의 문화예술위원회 복귀 등등. 특별한 이유도 철학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때마다 고통스럽게 간신히 뱉어내던 지적의 목소리는 사건의 횟수가 늘어나고 주기가 짧아지면서 점점 잦아들게 되었고 결국 예술계는 완전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작년 한 해 나라 전체가 소위 “땅콩회황사건”으로 촉발된 갑을 논쟁을 벌였다. 그 상황에서 대부분의 “갑”은 적어도 약자인 “을”의 눈치를 보는 시늉이라도 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새 예술을 지배하는 “갑”으로 둔갑한 문화예술위원회는 그런 전국적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슈퍼갑”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 같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작년 말에 터진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 사태일 것이다. 아무리 공정한 심사를 거쳤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행사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 명확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옳다. 그런데 원칙만 내세우며 과감하게 탈락시켰고, 그래 시끄러워지니까 일부 양보하는 모습으로 문제를 대충 봉합하였다.

그러나 그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된 서울연극제는 다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의 1개월 휴관이라는 정말 엄청난 난관을 만나게 된다. 하필이면 서울연극제 개막식 하루 전 날 전달된 문화예술위원회의 공문은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의 구동장치 이상으로 1개월 간 휴관 예정이라는 간단한 통보였다. 그것은 사형 선고를 간단한 종이 한 장에 몇 글자 써서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인들에게 공연이란 목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전 문제 또한 갑을 논쟁 이상으로 국가적 이슈가 된 터에 구동장치 이상이 발견되면 당연히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됐던 공연장을 사용 못 하게 되는 일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것도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발생하리라 예상하기는 더욱 어렵다. 극단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 공연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관리 부실 책임은 있을지언정 구동장치 이상에 다른 의도가 개입됐을 리 없다. 그러나 다들 쉽게 “오비이락(烏飛梨落)”을 생각했다간 이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뭔가 개운치 않다. 작년 대관 탈락과 이번 휴관 사태는 결코 같은 맥락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진정성의 문제일 것이다. 구동장치 이상을 발견했으면 즉시 위원장이 책임지고 나서서 서울연극제 측과 비상대책회의를 열었어야 한다. 공연장 교체가 불가피하다면 그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의 파격적 대안을 강구했어야 마땅하다. 서울연극제나 해당 극단의 입장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라 여길 만큼 정성껏 지원을 해서 연극제와 공연이 성공하도록 했어야 옳다. 마치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른 것과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듯이 공연에 미칠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예술지원기관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이자 도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있어 적법한 절차를 거쳐 통보했고 나름대로 고심하여 대안도 제시했지만 서울연극제 측이 거부해 유감이라는 식의 보도자료는 적절치 않다. 작년 대관 탈락 사태와 연결시켜 곱지 않게 볼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그렇게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슈퍼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건강한 문화예술위원회라면 결코 예술 위에 군림하는 “수퍼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위의 본분은 예술을 섬기는 것이다.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정신이 병든다. 정작 주인을 밑에 깔고 억압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 병증의 대표적 예이다. 문화예술위원회 직원들과 위원들과 위원장은 진정 예술을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느껴야 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예술지원기관인 문화예술위원회가 그렇게 시범을 보여야 한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능력을 쌓은 이들이 전국 지자체 지원기관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제 문화예술위원회는 중요한 기로에 섰다. 지금이라도 분위기를 일신하여 진정 예술을 섬기는 기관으로 거듭날 것인지 아니면 비록 약하지만 한 번 일어서면 결코 굽히지 않는 예술인들의 엄청난 저항을 초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아울러 예술인들은 우리 자신의 일조차 방치하는 무기력 상태를 벗어버리고 이미 누더기가 되어버린 문화예술진흥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침으로써 문화예술위원회의 본분 찾기가 한층 수월해지도록 최대한 힘을 더해야 할 것이다.

부디 예술은 인간 모두를 살리는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이며, 따라서 예술을 지원하는 건 세상을 지키는 숭고한 일임을 다 함께 명심하기 바란다.

2015년 5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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