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국립극단은 왜 해체되었는가?/ 우상전

옛 ‘국립극단’은 왜 해체되었는가?

                                  우 상전 (전 국립극장 초대 노조위원장)

 

 

뮤지컬 공연장에서 흔치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커튼콜 때 앞자리를 차지한 팬클럽 회원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뒤 관객들이 어차피 일어나 퇴장할 걸 상정해 일어나 박수를 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모두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게 되어, 엉터리 공연이 겉으로는 모두에게 기립박수를 받는 공연이 되는 꼴을 연출하게 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 연극 세상에서는 이런 광경이 흔치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어떤 평론가나 기자가 글이나 기사로 ‘박수’를 치면 자연스럽게 뒤따라가는 광경이 연출되는 게 연극판의 풍경이다. 특히 배우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연기를 하는데도 특정인이 앞에서 ‘박수’를 치는 바람에 너도나도 뒤따라 ‘박수’를 치게 되어 스타로 부각되는 풍경을 흔치 않게 보게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국립극단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몇 사람이 단원제를 외치면 이의 제기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매사를 이런 풍경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우리 연극계는 돌아오기 힘든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극장을 나갈 생각만 하고 기립해 맹목주의자들의 뒤를 쫒아 ‘박수’를 친 게 결국 스스로를 자승자박으로 이끈 결과를 흔치 않게  보게 되는 게 연극세상이다.

국립극단의 단원제만 해도 배우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 누구도 나서서 솔직히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고, 또 자신이 수혜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누구도 진실을 말하기 힘들어 어불쩡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기립박수’를 받는 꼴이 연출될 공산이 크다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그곳에서 생활해 보았던 내 자신이 그곳에서 보고 느낀 점을 솔직히 이야기를 해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내 경험에 의한 개인적인 견해다.

사실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국립극단의 단원제가 미치는 영향은 (내가 보기에)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그냥 몇 배우들의 취업을 목적으로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따라서 과거를 비추어보고 앞으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솔직히 사람들이 국립극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옛 국립극단에서 생활을 해본 적도, 운영에 관여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세밀한 건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늘 연극계의 ‘이해의 당사자’가 된 국립극단

지난 시절에 국립극단이 느닷없이 연극계의 관심의 초점이 될 때가 있는데, 그건 새로운 극장장을 임명할 시기다. 어떤 극작가는 이때만 되면 언론에 글을 올려 국립극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문화부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국립극단이 연극계에 관심이 집중될 때는 항상 ‘극장장’이나 예술감독 등의 자리가 비었을 때다. 즉 자신들이 ‘이해의 당사자’가 될 때만 확실하게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연극인도 국립극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실제로 유인촌장관이 상당 기간에 걸쳐 법인화를 추진했지만 법인화가 결정될 때까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게 법인화가 끝나고 나자, 다름 아닌 법인화된 국립극단에 ‘예술감독’과 ‘이사장’이 누가 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자, 갑자기 너나 할 것 없이 이에 대한 발언과 모임이 만들어지는 – 항상 ‘떡밥’(?)이 생겨야 관심을 끄는 전통이 살아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솔직히 연극인들은 옛 국립극단에 대해 발언하기를 극히 꺼렸다. 왜? 장민호, 백성희선생이 계셨기 때문이다. 주인 격인 그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배짱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국립극단이 법인화된 후에도 유장관이 눈치를 살펴(?) 두 분만을 ‘종신단원’으로 추대해, 매달 일정의 보수를 들였던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옛 국립단원들에게도 생존에 대한 ‘믿음’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단원들이 해체에 방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감히 유인촌이 두 분이 계신 국립극단을 설마 없애기야 하겠서!’ 하는 배짱이 작용한 게 컸을 것이다.

좌우간 국립극단은 (전통적으로) 새 주인이 결정되면 이때부터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랬다가 ‘자리’가 비면 다시금 북새통을 이룬다. 그러니까 새 주인이 부임하면 건의나 장래의 운영 등에 관한 충고의 발언이나 미래의 비전 등에 대해서는 일체의 발언을 삼간다. 그 대신에 안으로는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깊이 느끼는 듯하다.

 

    ‘사회적 인식’의 필요성

‘한국연극’지를 보면 김의경선생이 ‘세종시에 국립극단을’이란 글을 쓰신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종시는 2030년에 인구 50만 명을 목표로 하는 행정도시다. 현재 인구 1,500만의 수도권에서도 국립극단이 관객을 유치하기 벅찬데, 어떻게 16년 후에 서울의 일개 구(區)에 지나지 않을 인구를 목표로 하는 행정도시에서 국립극단이 문을 열기를 희망하시는지 모르겠다.

또 유민영선생이 포럼에서 국립단원을 110명 정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월급만을 계산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하지만 경영의 이치로 보면, 즉 110명이 ‘놀고먹지’ 않게 보이려면 일 년에 공연할 작품의 수와 그를 통한 배우들의 무대(연기) 활동이 상호 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놀고먹는’ 집단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얼마의 예산을 필요로 할까? 월급으로 지급할 예산이 40억 원 정도 들면 제작비는 최소한 70억 원 정도가 되어야 110명이 ‘활동하는 국립극단원’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일인당 평균 1억 원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정도가 되려면 국립극단은 자체극장 말고도 다른 극장까지도 대관을 해서 공연을 해야 될 것이다.

매 공연을 전 단원으로 다 채울 수 없으니 – 중첩되는 배역이 생기므로 – 외부배우까지도 초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한해 200명 정도가 국립극단의 공연에 매이게 되고, 거기다 흥행이 잘 돼 앙코르라도 하게 되면 연극계 전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1. ‘민간극단’들이 배우를 구하기 힘들어 아우성을 칠 것이다.

2. 거기다 국립극단에서 나름 두툼한 개런티를 받던 배우들이 급여를 제대로 제공     하지 못하는 민간극단에 출연을 꺼리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3. 그러면 ‘창작신작’의 소극장 공연을 선호하는 평론가들이 못마땅해 할 것이다.

이럴 경우에 ‘국립극단, 민간극단을 다 죽이다!’ 이런 기사가 인터넷의 ‘메인창’에 뜨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론의 향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원제에서 소외된 배우들과 대다수의 연출가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여론 악화’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어느 극단 배우’들만 출연을 한다든지, ‘누구누구만 연출을 하게’ 한다든지 하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인데. 그때는 얼마나 말이 많아지겠는가?

그러면 예산권을 가진 공무원들이 우선 ‘여론’에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의 최대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옛 국립극단은 왜 해체되었는가?

일반적으로 옛 국립극단의 해체를 이야기할 때 ‘유인촌장관’이 없앴다고들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국립단체의 법인화(민영화)는 ‘노무현정권’에서부터 예고된 사업이었다.

그때도 국립의료원과 함께 민영화가 논의되어 을지로 6가의 국립의료원 정문에는 이미 ‘법인화’ 반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도 연극인들은 유인촌장관이 국립극단을 해체 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지난 노무현정권이 세워놓은 ‘개혁안’을 유장관이 실천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역대정권마다 국립극단이 정치권의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게 국립극단의 단원제 부활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안인 것이다.

옛 국립극단의 예산 편성은 단원(배우)들의 인건비로 년 10억 원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니까 일인당 연봉을 평균 4천만 원 정도로 잡으면 (퇴직금의 정립까지) 26명에 대한 보수가 그 정도 된다.

그런데 정작 일 년 공연제작 예산은 3억 원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체 극장을 사용하므로 해서 대관료 등이 아껴진다 해도 대극장 공연으로 인해서 공연제작비가 꽤 많아 들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밖에 쓸 수 없으니 일 년에 겨우 4작품 정도를 제작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배타적인 시선으로 보면) 단원들이 ‘놀고먹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26명의 단원이 평균 4작품 정도를, 그것도 공연일수를 총합하면 일 년에 채 3개월도 안되니 결국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단원들이 ‘놀고먹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게 국립극단과 단원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결정적인 사안이다. 그러니까 국립극단의 운영이 파행으로 치닫는 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와 같은 ‘불균등한 예산편성’에서 기인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은 문화부가 져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화부가 국립극단의 운영에 손을 떼야 하는데, 이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자리’를 잃는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게 불문율이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단원들이라도 나서 이런 부조리를 거론하면서 개선하도록 촉구했어야 했는데 이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극장장에서부터 말단 단원까지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외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른 짓은 꿈도 꿀 수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안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니까 옛 국립극단은 이런 외부의 부조리와 다음에 거론될 자체 모순이 중첩되면서 한없이 추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예산 증액이 불가능한 근본 원인은?

왜 예산이 증액될 수 없었는가? 물론 국가가 재정적 예산을 줄이는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동숭동 연극인들의 국립극단에 대한 적대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내 견해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국립극단에 대한 소외감이 해소되지 못한 채 점점 확대되면서 ‘적대감’이 생기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적대감’이 생기게 된 요인은

1. 국립극단이 명실상부한 연극계의 ‘대표성’을 갖지 못한데 있다.

2. 동숭동 연극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준데 있다.

3. 옛 국립극단의 폐쇄성을 들 수 있다.

‘물갈이’도 없이 영구적으로 단원지위를 유지하는데 따른 것이다.

4. 국립극단의 공연이 질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데 있다.

5. 장민호, 백성희선생이 계셔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지 못해 안으로 반작용이     크게 유발된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문화부의 태도가 중요

사실 국립극단의 주인은 공무원들이었다. 문화부가 운영의 주체였다. 그런데 공무원들은 생리적으로 절대로 나서서 ‘주인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에 위선적(?) 태도를 취한다. 오죽하면 스스로 ‘영혼이 없다‘고 자조를 할까?

그러니까 그들의 위선의 핵심은 비록 주인일지라도 여론이 나쁜 곳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는데 있다. 건드려 책임이 돌아오는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의 생리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할 경우에는 항상 ‘전문가들’을 앞세운다. 그래서 결정에 하자가 생기거나 혹시라도 여론이 악화되면 ‘발뺌’을 하기 좋게 처신한다.

우리는 직접 관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내세우는 ‘철저한 생존전략’을 구사한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 줄 – 장관이나 정치권이 나서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도 국회의원들과 언론에 ‘뭇매’를 당해 철저히 ‘깨달은’ 결과인 듯하다.

그래도 (아무리 나서지 않는다 해도) 운영의 실질적 주인은 ‘돈 = 예산’을 가진 자의 것인데도, 항상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은 국립극단의 단원들이었다.

그러니 하찮은 운영이나 관리까지도 주인인 문화부는 늘 동숭동 연극인들을 앞세우거나 눈치를 살피는 게 관행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단원들에게 가장 예민한 사안인 오디션을 늘 동숭동 인사들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영자로서 마땅히 자신들이 만든 자료를 중심으로 단원들을 평가해야 하는데도 – 마땅히 주인이 해야 할 일을 – 장민호, 백성희원로의 눈치나 살피거나 연극계 인사들에게 떠넘기고 구경만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마다 국립극단은 ‘무주공산’이다. 즉 주인이 없는 단체라고 외치곤 했다. 항상 ‘너희끼리 싸우다 죽어라!’는 제국시대의 식민지통치 이론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떠벌리곤 했다.

이런 식이니 국립극단의 예산을 올려주는 것도 연극인들의 ‘자문위원’ 등의 기구(회의)를 만들어 그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눈치를 살핀다. 만에 하나 어떤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자기들이 벌린 일이 아니라고 발뺌할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의 온갖 심사에서도 이런 방식은 일상화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마디로 관료집단의 특징이자 오래된 지혜다.

따라서 연극인들도 이런 기구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는 ‘독립투사’와 같은 맑은 정신을 갖지 않으면 자칫 본의 아니게 ‘매국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적대감을 품고 있는 연극계가 국립극단의 예산을 증액시켜줄 턱이 없을 것은 너무나 명확한 일이다. 이유는 역설적으로 ‘놀고먹는 집단’에 예산을 증액시켜줄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예산이 없어 ‘놀고먹는’ 집단에 예산을 주지 않아 더욱 ‘놀고먹는’ 집단으로 보이게 해, 더욱 여론을 악화시키는 ‘고도의 책략’을 문화부가 연극인 자문기구(회의)를 시켜 구사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옛 국립극단을 몰락시킨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국립극단의 운영에서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산권을 휘두르는 문화부다.

 

             항상 문화부를 주시해야

이제는 국립극단이 연극인에 의해 운영되는 법인체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언뜻 보기에는 국립극단이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 = 주인’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에만 변화가 생긴 것이지 솔직히 예산권(지원금)을 쥐고 있는 문화부가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애초부터 국립극단의 법인화의 목적이 ‘운영예산’을 대폭 증액해서 극단의 운영역량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단원제를 없앤 것은 이 과정에서 조직구성원에 대한 불만이 연극계 전반에 고조되어 있으므로, 법인화로 인한 ‘예산의 확충’과 여론에 호응하는 기존단원의 ‘인적청산’을 맞교환(?)한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게 바로 국립극단의 법인화라고 할 수 있다.

 

             단원제의 부활이 가져올 ‘소외감’

따라서 국립극단이 단원제를 취하려고 할 때 언제나 가장 유념해야 할 게 바로 연극인들의 소외감과 적대감이다. 단원제를 취하려고 하면 국립극단이 연극인들에게 새로운 ‘이해 당사자’로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이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어 연극인들에게 ‘슈퍼 갑’으로 군림할 수 없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관계에 놓여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많은 배우들이 단원에서 배제될 경우 자신의 생존이 무너지는 절망(?)과 분노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단원제의 부활은 이에 따른 제반 현상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채용 단원을 100명으로 해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많은 배우들의 욕구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지금의 연극판이 생존에서 너무나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그렇다.

날이 갈수록 생존은 점점 힘들어지고 거기다 대학에서 많은 인력을 배출하는 처지에서 자칫하면 단원제를 도입하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공산(적대감)도 없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많은 배우들이 국립의 단원이 되지 못해 ‘고정급’을 받지 못하므로 해서 야기되는 경제적 ‘소외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기존 단원이 일단 자리를 잡으면 차세대의 좋은 신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힘들어지는 현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단체의 다른 파트들도 이 과제를 해결하기 가장 힘든 것으로 꼽고 있다. 무용단이나 관현악단처럼 ‘국립’이 아니면 생존을 얻기 힘든 장르일수록 이런 어려움은 더욱 과중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우리사회의 전반이 갈등의 증폭을 막기 힘든 사회 환경에 놓여있어서 변화가 되레 연극판에 긴장을 유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극인들의 존재감

따라서 다수의 소외감을 이해해야, 앞으로 국립극단의 장래나 단원제도의 운영에 적합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인들이 갈등을 일으키기 쉬운 것은 ‘존재감’에 의한 소외감이다. 생태적으로 배우와 정치가만큼 존재감에 민감한 직업도 없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직업은 직업상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최상으로 여긴다. 솔직히 그런 생리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종사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은 자신의 ‘지위상승’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상당부분 만족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진급에 목을 매고 이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연극에는 이런 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연극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으며, 누가 주도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연극인 사회’를 구성하는 판도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한 예로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선거가 간접선기인 것에도 많은 연극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론가들이 ‘창작극’을 선호하는 것도 창작극을 평해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번역극은 이미 해외에서 평가가 내려져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힘들다.

또 연출가들이 연습장에서 배우들을 지나치게 학대(?)하는 것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발로인 것이다.

배우들이 연극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TV나 영화배우로 진출을 꾀하는 것도 사실은 오히려 존재감을 얻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으로 존재감을 얻으면 그 쪽을 넘보지 않기도 한다.

하긴 우리 연극이 지나치게 예술성에 목을 매는 것도 ‘흥행’으로 존재감을 찾을 수 없으니 이를 예술성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비슷한 처지에서 전혀 ‘흥행’을 고려할 수 없는 무용계를 보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이처럼 ‘존재감’과 ‘소외감’은 ‘동전 양면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항상 ‘붙어 다니는’ 관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연극계 전반에 많은 갈등을 파생케 하고 있다는 게 나의 견해다.

따라서 연극판에서 많은 문제들은 야기하는 것은 소외감에 의해서 파생되는 게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단원제의 부활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단원에 대한 ‘기대치’와 이에 이르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벌이질 연극판의 갈등이다.

이제는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국립극단의 운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연극계 내부의 갈등이다. 극단 자체에서 스스로 운영비를 건지지 못하는 한 문화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럴 경우에 당연히 공무원으로서 연극계 내부의 갈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태도도 이를 거들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한국형 국립극단’

따라서 이러한 현실에서 새로운 국립극단의 단원제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한국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나는 지난번에 한국의 ‘예술환경’에서는 국공립극단이 좋은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복권당첨’으로 배우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현실에서 국공립극단은 우리에게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라고 했지만, 여러 압력에 부딪치면 단원제를 ‘모르쇠’만으로 일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반(半) 국가단체’가 많은 연극배우들의 생존(취업)을 모르쇠로 일관하기에는 여론의 향배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권이 이를 분명 이용하려 들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공무원들도 이를 종용하는 사태에 이르지 않는다고 보장을 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회에서까지 인정받던 가장 좋은 인기정책이던 ‘사랑티켓’이 안으로는 연극계를 초토화시킨 현실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남에게 잘 보이려다 우리가 초토화되는 현상은 최소한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홍명복감독처럼 우리도 미리 이에 대비한 ‘한국형 국립극단’의 시스템을 궁리하고 논의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국축구의 특징은 공을 상대에게 ‘너무 잘 빼앗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축구가 지향할 점은 ‘빼앗아서 오래 갖고 있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연극도 국립극단의 단원제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는지를 아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설령 단원제가 다시금 부활하지 않는다 해도, 지난 시절의 국립극단 시스템의 문제점을 점검해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의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내 논리의 핵심은 ‘한국형의 국립극단’의 운영을 위한 합리적인 지혜를 미리 논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 국립극단이 어떻게 운영되다가 해체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한국형 국립극단’과 이에 따른 시스템을 정립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상주단원을 두어 연극계의 불만과 적대감의 온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그 대신에 배우 개개인들에게는 균등한 기회를 제공할 공간을 확보하고 비록 많은 보수를 지급하지 못해도 명예가(경력이) 되게 하는 길을 열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이다.

 

             옛 국립극단이 왜 ‘대표성’을 갖지 못했을까?

국립극단이 이른바 ‘내셔널’로써 대표성을 갖지 못한 것은 국립극단의 창조력 결핍과 폐쇄성을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 국립극단은 실질적으로 오랫동안 젊은 나이에 입단해 평생을 단원으로 지내고 있는 일부단원들과 원로단원으로 구성된 단체였다.

형식적으로 오디션이 있을 뿐, 이른바 ‘물갈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간 이런 단원체제로 구성,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운영주체인 문화부는 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모든 것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 대신에 단원들은 그들에 대항하지 않고 ‘신분을 고수’하는 비책으로 응수하면서 유지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서류상(복무규정)으로는 매년 재임용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 ‘비정규직’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단원들이 ‘정규직’으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원들은 이런 공무원들의 취약성을 파악하고 이에 대체해 왔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국립극단은 원로들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질적 향상은 고사하고 구성에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었고, 그 대신에 연극계는 국립극단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되받아치고 있었다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1. 연극인들의 ‘박탈감’

동숭동 연극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실력도 없이’ 단원들이 정규직으로 일정한 보수를 다달이 꼬박꼬박 받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연극동네 배우들은 당연히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심정적으로 시기심에서, 적대감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물갈이’를 하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왜? 아무런 사회적 안정망도 없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입단하기 위해서 동료 배우들을 몰아내겠다고 공개적으로 나설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물갈이’를 외치면 이는 두 분 원로선생님에 대한 불경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연극의 퇴조로 경제적 박탈감은 점점 커져만 가는 현실에서 어느 누구도 마음속으로 국립에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연의 수준이 탁월한 것도 아니니 당연히 박탈감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대표성을 인정받기는 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은 너무나 확연하다.

      2. 왜 국립단원들은 ‘폐쇄성’을 고수했는가?

내가 처음 국립극단에 입단했을 때 놀란 것은 기존단원들의 ‘텃세’다. 그럼 이런 텃세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1. 공연 횟수가 적다보니 항상 주인공(중요배역)에 목말라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소속단원들조차도 자기들의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2. ‘텃세’는 인간의 자기 방어본능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표출이다. 따라서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어느 곳도 ‘텃새’는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같은

연령대의 경쟁자에게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자신들의 신분상의 보장이 허약했다. 해마다 오디션으로 직위가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불안감이 상존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노조가 생긴

것이다. 만약에 폭군(?)처럼 구는 단장이나 예술감독에게 ‘괘씸죄’라도 받으면       당연히 신분보장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동숭동에 나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므로 해서 항상 경제상의 불안이 상존한       다. 이건 일정한 보수를 받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단원들에게 폐쇄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직위나 신분을 보호하려는 본능과 자기의 ‘밥그릇’(배역)을 확보하려는 본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사회보장제도가 허술한 나라에서, 대책 없이 단체를 개방하는 것은 아예 단원제가 없애는 것만도 못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무원을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다’고 힐난하지만 이건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립극단 공연의 ‘질적 수준’에 대한 논란

국립단원 자신들은 외부인들의 평가와 달리 스스로는 대단한 긍지에 차있었다. 항상 ‘그래도 한국에 국립극단 공연만한 게 없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동숭동의 평판은 달랐다. ‘고정급을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그 정도도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식으로 대응했다.

또 국제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질책하기 일쑤다. 하지만 국립단원들도 할 말은 있다. “국립의 공연들이 ‘국립자체’의 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다.

극작가는 물론이고 연출가나 무대미술 등 모든 스텝도 동숭동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의 질적 책임을 국립극단원들이 단독적으로 져야 하는가하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왜? 국립의 질적 실패는 결국 동숭동의 ‘실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틀린 말도 아닌 게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엄격하게 말하면 국립극단의 공연수준은 동숭동 연출가들의 ‘대극장 연출력의 부족’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동숭동에서 활동하는 연출가들이 대극장 공연의 경험이 적은데다, 설령 있다고 해도 아직 커다란 무대에서의 연출 능력이 미진한 게 사실이다.

외국연출들과 비교하면 솔직히 한국연출가들의 대극장에서의 연출 수준은 너무나 미약하다. 하긴 미약한 것은 극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창작극 육성을 내세우는 국립극단은 항상 ‘졸작’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건 ‘창작뮤지컬’의 현실로도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다.

외국연출, 특히 유럽의 연출들이 와서 공연을 할 경우와 비교해서 너무나 실력차이가 확연한 것으로, 이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차가운 평가에는 동숭동이 인색했던 게 사실이다. 이마저도 책임을 국립극단에 떠넘긴 것은 온당치 못했다. 동숭동도 이런 현실에 많은 반성이 있어야 했다.

        1. 단원들의 훈련시스템의 부재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자체의 훈련시스템이라도 개발해서 자신들의 ‘연기력’이라도 끌어올려야 했던 게 국립극단이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겨우 한다는 짓거리가 교육훈련을 실시한다고 – 마냥 호흡을 늘린다고 매번 창극단 단원에게 ‘시조창’이나 ‘판소리’를 배우는 게 고작이고- 또 무용단에게 무용기본이나 익히면서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는 게 현실이다.

원로에서 중견단원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연기력을 스스로가 개척할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커다란 과오’였다. 이게 국립으로서는 치욕에 가까운 가장 부끄러웠던 현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과제를 해결할 길을 찾고자 해서 나 같은 사람이 그곳에서 ‘연기책’을 만들기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국립은 이에 대한 인식조차 없이, 맹목적으로 원로들에게 기대기만 할 뿐인 부끄러운 현실이었던 게 사실이다.

이는 새로운 국립극단을 만들기 전에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고자 의도한 유인촌장관의 계획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2. 평가 오디션제도의 문제점

사실 옛 국립극단의 실질적인 모든 문제점의 출발은 매년 연말에 실시하는 단원 평가(오디션)에 있었다.

첫째는 논리의 불합리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미 입단 오디션에서 판정을 받으면 (입단자격을 인정받는 것이어서) 더 이상의 오디션은 없어야 하는 게 맞다. 회사로 치면 입사시험은 한번으로 족해야 한다.

그 다음엔 진급을 위한 평가만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도 일정한 주기를 두고 시행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매년 시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유발했다.

1. 단원들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로감을 준다. 따라서 매년 연말에 실시하는 평가 오디션으로 인해서 8월만 되면 리더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보신주의’가 만연했다.

2. 이게 리더의 통제와 압박수단이 되는데 있다. 내가 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압박을 가하는 수단이 된 게 사실이다. 그래서 ‘괘씸죄’를 배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게 단원들을 비굴하게 만든 요인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도 공무원들에 의한 국립극장은 이를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그러니 이로 인해 갖가지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왜 매년 오디션을 실시 한 것일까? 우선 국립단원에 대한 질적 신뢰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연극계 전반에 걸쳐서 ‘연기에 대한 신뢰도’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대극장 공연장에서는 말이다.

따라서 자연히 질적 향상을 도모할 시스템은 마련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이를 단원들 개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즉 ‘물갈이’로 이용되니 자연히 단원들에게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리더가 단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자 하는 의도로 실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단체를 통솔해 온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연말에 보자”는 협박성 발언이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부조리를 탈피하고자 ‘노조’를 만들게 되면 그때는 ‘철밥통’을 차려고 한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단원들이 ‘예술적 평가’를 거부할 수 있느냐고 질책을 하기 일쑤다.

그럼 단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성을 고양시킬 프로그램이라도 마련해 주고 그런 소리를 하라!” 이 역시도 틀림 말이 아니다.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경우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래 전부터 ‘보이스디렉터’제도를 두어 단원들을 관리한다. 대단한 재능으로 항상 칭송을 받는 배우들도 작품(배역)에 따라 연출의 의도에 따라 배우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태가 발생해 이를 개선하고자 ‘피터 홀’이라는 예술감독이 부임하면서 도입한 제도다.

그런데 아무런 연기력 향상을 위한 제도는 마련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재훈련 시스템도 없으면서 (가르칠 사람도 없는 주제에) 오디션이라는 ‘칼’을 뽑아 단원들을 목줄을 협박하는 오디션제도는 단원제의 ‘아킬레스건’이 아닐 수 없다. 이건 (우리의 현실에서는) 새로운 국립극단의 단원제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킬 난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단원들이 리더인 단장이나 예술감독의 운영능력이나 연출적 평가는 왜 없느냐고 대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발레단처럼 단원의 승급을 위한 ‘등급’을 위한 평가를 하든가, 아니면 다른 단체처럼 처음부터 수석자리를 노리고 입단시험을 봐서 지위를 얻게 하는 게 합리적인 오디션제도인 것이다. 아니면 프로야구처럼 2군 제도를 두어 갱생의 기회를 주고 재평가를 하든가, 하여튼 새로운 개선점을 찾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입단 후의 평가는 공연에 임하는 태도나 공헌도, 그리고 발전성 등을 따져서 평가에 반영되어야 하는 이른바 ‘상시평가제도’를 활성화하는 게 옳은데, 그것도 일정한 기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연기교육과 훈련이 부재하고 예술성마저 후진 나라에서 실력을 향상시킬 방법론은 (아예 개념마저도) 없으면서 리더의 횡포로 둔갑하는 평가 제도를 시행하니 이게 배우들에게는 ‘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게 단원들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게 마련이며, 단원들도 이의 모순을 제거할 의욕도, 의지도, 지혜도 갖지 못한 채 – 또 갖는 순간 퇴출을 염두에 두어야 하니, 그저 갈등과 불만으로 일관하는 저급한 구성체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노조를 만들어 이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결국 여론을 더욱 악화시켜 단원들이 ’철밥통‘을 차려고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실제로도 단원들이 이를 통해 개선점을 찾기 보다는 금전적 보수를 높이는 데만 진력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걸 해결할 지혜를 갖지 못하는 한 단원제가 되어도 단원들은 영원히 이런 갈등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게 단원제의 가장 커다란 암초로 작용할 것이고, 이게 또다시 해체의 빌미를 제공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

1. 연기력의 ‘질적 향상’이 최대과제

따라서 새로운 단원제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단원들의 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그렇지 않으면 소외자들로부터 이에 대한 ‘불만의 꼬투리’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연극계 전반의 숙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우에 제도개선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존심으로만 뭉쳐진 나이든 배우들에게, 더구나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여배우 연기’(?)가 별도로 존재하는 나라에서 ‘쪼’로 얼룩진 선배 급의 배우들이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도 현실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려면 철저한 리더십이 필요한데, 과연 우리의 능력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앞선다. 그래서 ‘히딩크’처럼 우리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유럽의 유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지 못하면 이를 빌미삼아 ‘단원에 끼이지 못한’ 배우들과 ‘연출로 부름을 받지 못한’ 연출가의 불만과 적개심에 가까운 비난을 견디어 내기가 만만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옛 국립극단도 자신들의 지위와 권익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훈련시스템을 갖추어 질적 향상에 매진했어야 해체와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인식도 없고 개념도 없으니 호사가들의 입에서 항상 질적인 문제가 거론되어 이로 인해 ‘대표성’이 훼손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맞게 된 게 사실이다.

자료에 의하면 스타니스랍스키 할아버지조차도 생전에 배우들에게 이런 말씀을 늘 하셨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잘 배워라, 때가 지나면 자존심이 쎄져 배우기가 힘들어진다.” 이미 자존심이 쎄진 상태에서 벌어지는 단원들에 대한 연기력의 평가는 국공립 단체의 영원한 난제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오디션 때만 되면 그나마 연기 전문가인 배우들이 비전문가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코미디(?)가 연출되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불상사가 그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2. 단원이 없으면 ‘레퍼토리 시스템’이 불가능할까?

단원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단원이 되는 게 ‘취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단원이 없으면 ‘레퍼토리 시스템’의 정착이 불가능해, 국립극단 공연의 질적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항상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럼 옛 국립극단은 왜 ‘레퍼토리 시스템’을 정착시키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국립극단의 공연이 ‘고정관객을 확보’하지 못한데 있었다. 그러니까 관객을 모을 레퍼토리가 부재했던 것이다.

옛 국립의 경우, 공연 때마다 극장의 스텝들 모두가 관객을 동원(?)하기 힘들어 역설적으로 자주 공연하는 걸 꺼렸던 게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창작극을 육성한다고 ‘재미없는’ 공연을 남발하니, 고정관객을 확보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연극계의 미션에 대한 부담과 외부의 기대치를 외면하지 못한 채 어설픈 ‘창작극’만 남발하다가 관객의 외면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거기다 대극장 공연에서 연출의 재능과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만족도가 낮으니 고정관객을 확보하기가 더욱 힘들어진 게 현실이었다.

국립극단에서 작품의뢰를 받으면 갑자기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예술성’을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재미있고 좋은 공연을 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레퍼토리 시스템’을 성공시키려면 ‘흥행성’있는 레퍼토리로 연출력과 단원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이게 어려우니 자연히 이를 시행하기 힘든 게 당연했다. 거기다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한국 연극계의 ‘엘리트주의자’들과 ‘엄숙주의자’들이 그런 공연을 보고 가만있겠는가?

그들 입에서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국립극단이 일부 엘리트들을 위한 연극을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대중성 있는 공연을 해야 한다.” 이런 말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단원제가 될지라도 이런 터부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레퍼토리 시스템’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형’에 대한 제안

그럼 새 국립극단이 ‘한국형’으로 운영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좋은 공연에 대한 기대보다는, 당분간 배우와 연출가들의 훈련장으로서의 기능에 더 충실해야 한다. (연출도, 배우도, 극작도) 아직은 대극장을 끌고 갈 인재난을 극복하는 게 급선무다.

아트(기술)가 없는데 어떻게 아트(예술)가 가능하겠는가? 하는 이론을 새겨두어야 한다.

2. 한국적 ‘레퍼토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즉 단원제를 고수하기 보다는 ‘계약제 단원제’나 ‘시즌제 단원제도’ 등을 도입해 그나마 적역을 확보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려야 한다. 우선은 많은 배우들에게 기회(교육훈련도 마찬가지)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불만을 소화하기도 용이할 것이다.

한국에 사회보장제도가 정착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연극인들의 ‘적대감’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연극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굳이 따진다면 단연 ‘내가 참여하지 않은 어떤 것도 악(惡)이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40년 동안 지켜 본 연극세상은 연령이나 경력고하를 막론하고 내가 참여하지 않는 모든 단체나 구성원은 모두가 다 적이거나 아니면 악이라고 단정하는데 있다. 그래서 내가 참여하지 않는 어떤 것에도 적대감을 갖는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나려면 공공기금을 쓰지 않는 삼성이나 두산그룹 등의 사기업이나 언론매체 등에서 극단을 운영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면 국립극단도 철저히 ‘흥행’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관객들이 환호하면 누구도 이를 물리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가도, 공무원도, 연극인들의 적대감을 물리칠 최고의 무기는 ‘흥행’이다. 그래야 예산권을 쥐고 있는 관료주의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즉 국립극단이 잘되고 있다는 평판을 연극인이 아닌 관객들로부터 들어야 한다.

요사이 신문에 ‘국립창극단이 전회매진 행진을 하고 있다’는 식의 기사가 뜨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데 국립극단도 그래야 한다.

창극단은 좋은 판소리의 기능을 선배들로부터 전수받는 게 가능해 기획력만 출중하면 얼마든지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연극은 이것마저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당분간 ‘좋은 연극’을 하는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기기 쉽지 않으므로 흥행을 도모해서라도 일반 관객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론가들이 나서지 않게 해야 한다. 이들과 ‘교수집단’을 앞세우기 좋아하는 관료조직이 서로 짝을 이루게 되면 연극은 영원히 좁고 옹색한 ‘혜화동 1번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3. 연극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 중에 하나는 리더의 육성이다. 연극계는 ‘자리’가 생기면 ‘취업’을 하겠다고 소동이 난다. 하지만 단체의 미래나 운영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자기가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펴는 게 고작이다.

김명곤극장장이 부임하길래 극단에 예술감독제도를 두도록 건의해 이를 관철시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커지는 것은 갈등이고 ‘밥그릇’싸움 뿐이었다.

그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공무원에다 ‘엉터리’인 리더와 ‘아무 생각 없는’ 원로와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중견배우, 제 밥도 못 챙기는 젊은 단원들, 해체는 이 모든 것의 결합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어떤 것도 악이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연극계에서 단원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단원제가 정착하려면

첫째  단원들의 연기술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둘째  좋은 연출가들을 선발해 (외국인이라도) 공연의 질을 높여야 하며

셋째  관객몰이(흥행)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단적으로 연극인이 아닌 평범한 국민(관객)과 싸워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국립극단이 연극인들의 적대감과 부정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영생(?)을 찾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One thought on “옛 국립극단은 왜 해체되었는가?/ 우상전

  1. 상전형님!!
    뜨거운 가슴을 사랑합니다!
    가끔 형님의 견해에 반대에 서기도 하지만
    형님이 사심없이 던지는 말씀이기에
    생각이 달라도 형님을 응원합니다.

    저는 작은 연극들이
    연극성을 갖춘 연극들이
    배우들이 돋보이며 약간의 예술적 사치도 누리는 연극들이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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