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을수록 멀어지는 것들

연극 <이퀄>

글_김민지

원작 스에미츠 켄이치

번역 이홍이

연출 이은영

제작 스탠바이컴퍼니

장소 예스24스테이지 2관

일시 2020.09.08 ~ 2020.10.25.

이퀄. 두 식이나 수가 같음을 나타내는 수학 기호다. 이퀄을 중심에 두고 둘러싼 양옆의 두 무엇, 정답은 어느 쪽일까? 가령, 2+3=5라는 등식이 있다면 보통 2+3의 정답이 5라고 하지, 5의 정답이 2+3라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같음과 정답은 별개의 문제인 듯하다. 서로 같을 수는 있어도 전부 정답일 수는 없는 법. 같음과 정답,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이퀄의 이야기. 5는 정답일 수 있어도 2+3은 정답일 수 없는 이유. 이것이 바로 연극 <이퀄>이 던지는 물음이다.

<이퀄>은 폐병 환자 니콜라와 의사 테오가 전반을 이끄는 2인극이다. 둘은 막역지간이면서도 어딘가 미심쩍은 관계를 이룬다. 니콜라는 매일 테오에게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아드리엔느 부인 잘 계시지?” “넌 정말 완벽해.” 친분도 없는 테오의 직장 동료 안부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하물며 그것이 테오의 완벽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전말은 이러하다. 니콜라와 테오는 사이에 이퀄을 두었다. 둘은 같다. 모두 테오다. 이는 니콜라와 테오 각자의 주장으로 말미암는다. 우선 니콜라가 말하길 본인은 테오고, 테오는 복제 테오다. 영생을 얻고자 자기 자신을 복제하였고 그렇게 복제한 테오 앞에서 니콜라인 체 연기했다는 것이다. “아드리엔느 부인 잘 계시지?”라는 말은 “아드리엔느 부인이 너를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계시지?”였으며, “넌 정말 완벽해.”라는 말은 “넌 정말 완벽한 나의 복제야.”였다. 하지만 테오는 이와 상반된 주장을 내놓는다. 본인이 실제 테오며, 복제 테오는 자기가 진짜 테오라는 착각에 몰입한 나머지 니콜라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혼란스럽다. 누가 가짜고 누가 진짠가? 실은 둘 다 복제 테오이진 않은가? 두 사람은 분명 이퀄인데 그중 정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복 그리고 또 전복, 어쩌면 무수한 전복. 이것이 <이퀄>을 이퀄답게 하는 장치다. 그러나 등호를 가운데 놓고 양옆만 뒤섞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따라서 니콜라와 테오는 단순하고도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에 맞선다. 칼을 들고 무작정 싸우는 것이다. 사투에서 살아남는 쪽이 정답이다. 결국, 연극 <이퀄>의 결말은 매번 다르다. 어느 날은 니콜라가 죽지만 어떤 날은 테오가 죽는다. 둘 중 누가 남아도 누가 떠나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앞서 정답이 어느 쪽인지 물었으나 그전에 정답이 있는지부터 물어야 했다. ‘니콜라=테오’라는 등식은 2+3=5가 아닌 2+3=1+4에 더 가까워 보인다. 2+3이 정답인지 1+4가 정답인지 단언할 수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들에게 정답을 판가름하는 것 즉, 진짜 테오를 찾는 일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는가? 니콜라와 테오의 세계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연금술이니 흑마술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자신을 복제하여 탄생한 복제가 또 자신을 복제하는 일련의 체계가 인간의 불로장생을 실현한다니, 허무맹랑하다. 그러나 극 중 세계와 현실은 모호함이라는 지점에서 분명 맞닿아있다. 무대 우측에 놓인 거울을 자세히 보면 흐릿하고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울은 모호함을 설명하는 도구로써 작용한다. 결국, <이퀄>은 세상의 혼란함을 마주한 나약한 인간상이 더 나아가 존재를 고찰하는 여정 전반을 그린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작품 속에서 던지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 우릴 존재하게 만든 건 누굴까?” “무슨 목적으로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줬을까?” 18세기 유럽 당시 활발히 태동하던 근대철학과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질문이기도 하다. 니콜라와 테오는 존재를 의심하였으나 증명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답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따라서 이는 곧 관객의 체험으로도 이어진다. 니콜라와 테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관객이 자연스레 현실 세계로 옮겨가 시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관객은 연극을 관람하고 나와 거대한 깨달음에 사로잡힌다. 제목을 곱씹는 순간 이만큼 직접적인 제목이 또 있을까 싶을 테고, 포스터를 바라보는 순간 그것이 극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관람 도중에도 마찬가지다. <이퀄>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총 7막으로 이루어지는데, 요일이 지날 때마다 배우가 뒤바뀐다. 1막 월요일에는 니콜라였던 배우가 2막 화요일에는 테오고, 다시 3막 수요일에는 니콜라고, 이런 식이다. 이는 관객을 흥미롭게도 혹은 혼란하게도 만들지만, 어떻든 무언의 자극과 반응을 끌어낸다는 점은 틀림없다. 극 중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관객은 배우의 전환이 이퀄을 암시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이러한 배우의 전환은 또 다른 의도를 지닐 가능성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니콜라와 테오가 이퀄이라는 단서를 제공하지만, 이차적으로는 니콜라와 테오의 외형적 경계를 허문다. 누가 진짜건 가짜건 두 등장인물은 모두 테오다. 그러니 자연스레 겉모습도 같아야만 한다. 여기서는 배우의 외형을 비슷하게 구현하는 대신 배우를 전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다면 내용상 허점이 생긴다. 생김새가 같다는 설정인데 어째서 테오는 자신이 복제라고 의심하지 못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또다시 거울이라는 소품을 끌고 올 수 있다. 무대 우측의 거울은 뿌옇고 희미하다. 따라서 형체만 간신히 보일 뿐 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다. 작품 안 세계에서 복제 테오는 거울을 보지 못하니 상대의 얼굴이 자신과 같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품도 그렇지만 음악과 조명도 극을 조성하는 데 한몫한다. 막이 오르기 전 극장에 들어서면 단조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둡게 깔린 현악기 소리 위에 통통 튀는 피아노 소리가 얹어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음악은 막이 내린 후 다시 울려 퍼지면서 수미상관의 구조로 연극에 여운을 더한다. 또한, 극 중에서도 적절한 음악과 조명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테오의 정신착란을 묘사하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이명을 연상시키는 불쾌한 잡음과 차갑고 푸르죽죽한 조명, 그리고 고통스럽게 무대 바닥을 뒹구는 배우의 연기까지 삼박자가 들어맞아 한 장면을 완성한다. 이 밖에도 조명기를 이용하여 요일을 뜻하는 연금술 기호를 무대 우측 상단에 띄움으로써 작품 내 시간을 구분하는 동시에 연금술 소재를 암시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같음과 정답, 이퀄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다. 같음과 정답은 별개의 문제가 맞다. 심지어 극 중 인물도 이에 친절한 설명을 보탠다. “똑같아질수록 정답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결국, 같음에 골몰하여 정답을 찾지 못한 니콜라와 테오는 둘 중 한 사람이 사라져야만 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일은 현실 세계에서도 만연하다. 자기 손으로 정답을 가리는 사람들. 표면과 이면, 숲과 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 숨 쉬고 말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사람들. 이처럼 <이퀄>은 주객전도가 팽배해진 현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전반적으로 연극 <이퀄>은 2인극이라는 제약 안에서 완성도 높은 짜임새를 갖추었다. 극 중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니콜라와 테오 두 명에 그친다. 그러나 이외에도 니콜라의 동생 오데트, 수간호사 아드리엔느 부인, 빵집 직원 마리에타 등 주변 인물이 녹아 들어있다. 이들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음에도 존재감을 톡톡히 차지한다. 관객은 니콜라와 테오의 표정, 몸짓, 대사만으로 상황을 짐작해야 한다. 따라서 <이퀄>은 대사나 장면 반복이 짙을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단조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이는 작품의 이해와 몰입을 돕는 요소지만 관객의 수용 정도에 따라 따분함과 흥미로움이 한 끗 차이로 갈릴 수 있다. 이를 처음 접한 관객은 의아함, 지루함, 깨달음이 혼재된 상태로 연극을 관람할 것이다. 이것이 작품의 매력을 떨어뜨리는지 이끄는지는 오로지 <이퀄>을 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