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글_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
‘괴테’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작곡가는 베토벤과 슈베르트다. 하지만 ‘파우스트’로 범위를 좁혀 보면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가장 많은 음악을 남겼다. (긴 연재가 될 ‘음악으로 듣는 연극 – 파우스트’에서 리스트의 음악이 가장 빈번히 언급될 것이다)
리스트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를 동경했다. 어린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고 기어코 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당시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회(리사이틀)에서 그의 신들린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는 여성들이 속출했다고 전해진다.
‘악마적인 매력’, ‘매력적인 악마’는 19세기의 아이돌 스타 리스트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초절(超絶)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음악의 소재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선택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1856년 리스트는 야심 차게 메피스토 왈츠(Mephisto Waltz) 작곡에 착수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곡들은 괴테의 파우스트가 아닌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서사시 파우스트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글의 형식이 서사시일 뿐, 전체적인 내용과 주제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동일하다. 레나우가 대문호의 대작 파우스트에 영향을 받은 점, 그리고 작가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부각했다는 점이 리스트의 음악적 영감을 끓게 했을 것이다.
4개의 메피스토 왈츠는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곡된 연작이 아니다. 1번은 1862년에, 2번은 1881년에, 3번은 1883년에, 4번은 1885년에 완성되었다. 1번과 2번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이 있고, 2번과 3번, 3번과 4번 사이에는 각각 2년의 터울이 있다. 리스트가 얼마나 오랫동안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곡은 또 다른 의미로 악마성을 갖는데, 다름 아닌 연주자에게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곡이기 때문이다. 피아노 전공자들이 뽑은 ‘피아노 연주를 어렵게 만든 작곡가’ 순위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리스트다. (여담으로 필자의 친한 피아니스트는 어린 시절 리스트를 연습하면서 난생처음으로 욕을 배웠다고 한다)
‘악마에게 피아니스트의 영혼을 팔아야 연주할 수 있다.’라는 말은 당시 팽배했던 낭만주의적 과장이 한껏 들어간 말이겠지만, 악보를 한번 둘러보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4곡 중 가장 유명한 메피스토 왈츠 1번(S.514)은 ‘선술집에서의 춤’이라는 부제가 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순진한 인간을 꼬여내는 장면을 신랄한 리듬으로 묘사한다. 빠른 부분에서 메피스토의 고약한 춤이 연상되고, 비교적 느린 부분에서는 악마의 영험한 면이 부각된다.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리스트 특유의 몰아치기가 절정에 이르며 결국 곡은 건반에 있는 모든 음을 쏟아내면서 파국을 맞는다.
이 작품이 인간의 손가락 10개로 치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걸 깨달은 악마 리스트는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피아노 연탄용으로 편곡한 악보(S. 599/2)도 출판했다. 피아노 연탄이란 한 대의 피아노에 연주자 둘이 나란히 앉아서 연주하는 형식으로 즉 피아노 1대에 손가락 20개가 얹힌다. 리스트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연탄용 메피스토 왈츠 1번’은 두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엉키는 등 여전히 연주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1885년에 아예 두 명의 연주자가 두 대의 피아노에 각각 앉아 연주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메피스토 왈츠 1번’을 내놓는다. 악보를 편곡하면서 리스트가 지었을 비웃음을 상상해 보자. 왠지 메피스토펠레스 같지 않은가?
1번 이후 20년이 지나 작곡한 메피스토 왈츠 2번(S.515)은 인간에게 간계를 꾸미러 접근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발걸음을 묘사했다. 리스트는 불협화음을 이용하여 악마의 잰걸음에 기묘함과 불길함을 불어넣었다. 불협화음은 곡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은 전체적으로 불안하고 어두운 느낌이 지배적이다. 연주 난이도는 1번 못지않게 악마적인 테크닉을 요한다. 이에 작곡가는 알아서 피아노 연탄곡 버전(S. 600)도 출판했다. 리스트는 이 곡을 친구이자 경쟁자인 프랑스의 작곡가 까미유 생상에게 뽐내듯이 헌정했다.
메피스토 왈츠 3번(S.216)은 1883년에 작곡된 곡으로 1번 다음으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1, 2번과는 달리 3번에는 ‘악마’와 ‘조롱’이 없다. ‘춤곡’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뚜렷하지 않거나 갑자기 중단되어 버리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운 느낌을 준다. 아마도 리스트는 1, 2번에서 시도한 ‘음악 묘사적’ 방식을 버리고 ‘음악 형식적’ 기괴함을 통해 메피스토펠레스를 표현하려 한 듯하다.
메피스토 왈츠 4번(S.216b)은 1885년 작곡을 시작했으나 이내 중단되었다. 이후 Bagatelle sans tonalite(S.216a; 조성이 없는 바가텔)를 덧붙여 마무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총 4곡의 메피스토 왈츠 중에서 연주 시간이 약 3분으로 가장 짧고, 거의 연주되지 않는 비인기 곡이다. 초고는 바이마르 국립 박물관의 괴테-실러 기록 보관소에 남겨져 있다.
‘괴테 파우스트의 음악 – 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의 첫 번째 연재로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4곡을 소개했다. 모두 듣기 버거운 독자를 위해 단 한 곡만 추천한다면 단연코 제1번이다. 기왕이면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연탄 버전이나, 2대의 피아노 버전이 아닌 오리지날 버전을 추천한다. 음(音)만으로 그 악마 같은 난이도를 감지하기 힘들다면, 유튜브 영상으로 감상하는 방법도 추천한다. 영상에서 손가락에 쥐가 날 듯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입을 주목해보자. 분명 영혼 또는 욕이 빠져나오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다음 호에 ‘음악으로 듣는 연극
-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2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