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오세곤(순천향대 연극무용학과 교수)
국립극단이 중국국가희극원 감독 티엔친신의 연출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렸다.무대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된 옛 터전에서 하는 공연이니 감회가 특별할 터이다. 온실 속의 화초가 큰 뜻을 품고 광야로 나갔으니 풍파에 단련된 강인한 면모를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야성미도, 애초 국립에 어울리는 원숙미나 세련미도 찾을 수 없다. 마치 잘 맞지 않는 부속품을 모아 조립한 기계처럼 모든 것이 어정쩡하다. 극장은 너무 크고 장면은 허술하다. 무선마이크는 그 넓은 무대에서 도대체 누가 대사를 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크게 소리치거나 여럿이 하는 대사는 영락없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청년들의 격투기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마디로 감당이 어려운 무리한 기획이다. 연극은 가장 예민한 현장 예술이다. 조금만 흠이 있어도 관객은 바로 고개를 돌린다. 우선은 각색의 문제이다. 원래 각색의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확실한 거리감으로 모든 논리로부터 자유롭든지, 아니면 치밀한 논리로 완벽한 실감을 확보하든지 하여야 한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우리에게 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중국의 이야기이고, 잘 안다고 하기에는 실제 경험이 없어 막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완전한 중성화를 이룰 수도 없고 확실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없다. 그래서 관객들은 따지지 말아야 할 논리를 따지고 알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 한다. 중국에서는 괜찮을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두 집안의 극단적 반목의 기운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것이 억지가 된다. 더구나 번역도 부적절한 것이 많다. ‘공련파’가 뭐고 ‘전사파’가 뭔지 영어 자막을 봐야 알 수 있다. 워낙 대사가 안 들리는 데다 익숙하지도 않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한국 관객에게 하는 대사를 왜 그렇게 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마치 서양 같은 무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걸 영안실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문화혁명을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뤄선생에 대한 로미오의 반말도 불필요한 요소이다. 장소 이동을 제자리 뛰기로 한다든가, 급한 마음에 로미오를 업고 뛰는 유모의 설정은 재미있다. 그러나 제자리 뛰기는 너무 잦아서 곧 가치를 잃는다. 더 거리감을 느끼게 우화적으로 처리하든지 더 개연성이 드러나게 사실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우화도 사실도 현재의 각색으로는 이루기 힘들다는 것은 앞서 지적했다. 와이어 액션을 사용해서라도 더 화려한 무술로 그 큰 무대를 채워야 했다. 또 무대가 크더라도 노래 말고는 무선마이크를 쓰지 말아야 했다. 정밀도는 더 높이고 스케일은 더 키우고 배우들의 에너지 분출은 더 직접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 관객들이 긴 역사와 새로움이 결합한 국립극단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분명 그런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