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즈] 헤다가블러/ 박연숙

삶을 예술로 연출한 나르시스트: <헤다 가블러>

 

박연숙(숭실대학교)

 

작: 헨리크 입센
연출: 박정희
번역: 김미혜
출연: 이혜영 김수현 호산 강애심 김성미 김정호 임성미
공연일시 2012.5.2- 5.28 명동예술극장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30여 년 전 <인형의 집>(1879, 3막극)으로 유럽의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입센 작품의 특성은 무엇보다 대범하다. <페르 귄트>(1867, 극시)의 경우, 작가 스스로 공연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입센은 관객의 호응이나 공연 자체보다 작가적 진실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헤다 가블러>(1890, 4막극)도 예외는 아니다. 결혼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임신한 여자가 특별한 동기 없이 자살하는 결말은 스스로를 교육시키겠다며 집을 나서는 <인형의 집>의 ‘로라’ 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로라는 초연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여성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동시대인들의 공감을 받으며 각성한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헤다는 아직 아니다. 혹자는 헤다를 정신적 어려움을 겪다 자살한 작가 사라 케인(1971-1999)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헤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비록 공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일말의 예감으로 헤다의 내면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헤다, 악녀 그 이상
<헤다 가블러>는 가블러 장군의 딸 헤다(이혜영 분)가 중세 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테스만(김수현 분)과 결혼한 후 6개월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남편이 어렵사리 마련한 저택에서 보내는 이틀간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부모님을 일찍이 여읜 남편은 자신의 고모 율리안네(강애심 분)의 아이처럼 행동하고, 집안의 친구 브라크(김정호 분) 판사는 이들 신혼부부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지만 헤다를 향한 욕망을 은밀히 드러내 이들의 불안정한 출발을 예고한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헤다의 동창이자 테스만의 옛 연인인 테아(김성미 분)가 찾아오는데서 시작한다. 테아는 데스만의 동창 뢰브보르그(호산 분)를 찾아내기 위해 남편의 집을 떠나 이 도시로 왔다고 전한다. 그 동안 테아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20살이나 많은 군수의 후처로 들어갔고, 군수의 집에서 의붓 아이들의 가정교사인 뢰브보르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그를 도와 책을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헤다는 테아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태워버리겠다고 약올리며 비웃었지만 뢰브보르그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테아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둘 사이를 탐문한다. 사실 헤다는 결혼 전 자유롭고 열정적인 뢰브보르그와 은밀한 동지 사이였으나 그의 통제불능의 태도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것인데, 테아가 그를 변화시켰다는 것에서 질투를 느끼게 된다. 헤다는 결국 남편이 주워온 뢰브보르그의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불태우고 뢰브보르그에게 권총을 건네며 자살하도록 권유한다. 뢰브보르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브라크가 전해들은 바를 알려준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헤다가 기대했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소지한 총이 헤다의 것임을 알고 있는 브라크에 의해 헤다는 스캔들을 빌미로 브라크의 정부가 되어야 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헤다는 그 자신이 아름다운 죽음을 감행함으로써 임신 중인 몸으로 삶을 끝맺는다.
헤다는 이상적인 여성은 아니다. 오히려 악녀에 가깝다. 입센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코-트는 입센의 본질을 ‘악령’으로 보았다. 입센을 “절대 멈추지 않고 끝없이 인간의 심성에 대해 질문하는 탐구자이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층까지 가는 길을 찾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는 징벌자이자, 몽상가, 시인”(김미혜,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 연극과 인간, 2011, 119쪽)이라고 했듯이, 헤다는 우리 내면에 가두어 둔 악령의 한 단면일 것이다. 헤다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가 내면의 심연 끝까지 닿아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헤다가 문제 많은 여성이라는 것은 몇 가지 사실로 분명하다. 자신을 숭배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결혼을 끔찍하게 지루한 것이라고 불평할 뿐 결혼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게다가 헤다는 남편의 유일한 혈육인 고모를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의 옛 연인에게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자 총을 건네며 자살하도록 부추기고, 옛 연인을 질투하여 그의 소중한 원고를 불태우고, 자신 역시 뚜렷한 동기 없이 임신한 몸으로 자살을 감행한다. 오만과 질투, 파괴적 성향은 분명 헤다를 악녀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녀의 특성과 내면세계를 살펴보면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헤다는 무엇보다 삶에 대해 지독한 권태를 느꼈다. 그런데 헤다가 느끼는 권태에 대해 브라크는 그녀에게 삶을 흔들 만큼의 목표가 없고, 행복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사실 권태는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주요 관심사였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료한 시골 농가 역시 권태가 어울리는 장소이다. 그곳에 도착한 젊고 아름다운 엘레나는 ‘따분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수를 써야 하지?’라고 말한다. 그녀는 결국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권태를 벗어나려 한다. 헤다 역시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다. 그녀의 권태는 일견 납득할 수 있다. 6개월간의 신혼여행 중에 남편은 종일 도서관에 있었고, 박사학위라는 성과를 얻어 냈지만 헤다는 홀로 남겨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했다. 신혼집에 와서도 사교 모임을 열 수 없는 경제적 형편이니 더욱 암담했다. 집과 가구들은 마련되었지만 저당 잡힌 살림이니 위태롭다. 유일한 방문객은 원하지 않는 삼각관계를 종용한다. 남편을 정치가로 만들어 볼까도 생각해 보지만 그 역시 돈이 매우 많이 드는 일이라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암담해 한다.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 뢰브보르그에게조차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는 이미 테아에 의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헤다가 느끼는 무기력함은 한 때 아버지 가블러 장군과 함께 검은 승마복을 입고 말 타던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에 비하면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충동적으로 한 결혼, 원하지 않은 임신, 아무 영향력 없이 쓸모없는 인간이 된 느낌이 그녀를 권태에 빠지게 한 것이다. 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게서는 권태의 기미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율리안네 고모는 조카와 자매를 돌보고 희생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장차 태어날 헤다의 아기를 돌볼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느끼고 있다. 테아는 뢰브보르그에게 영감을 주고 그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뢰브보르그를 찾아 가출할 정도로 용감하며 열정을 지지고 있다. 심지어 뢰브보르그의 새 책을 둘 사이의 아이라고 여길 만큼 자부심에 가득 차 있다. 뢰브보르그가 사망 소식에도 태아는 절망하지 않는다. 뢰브보르그의 사라진 원고를 옛 연인 테스만과 함께 복원해 내는 것으로 또 다른 희망을 안고 있다. 테스만은 모두가 선망하는 여자 헤다를 부인으로 얻은 성취감과 신혼여행 중에 얻은 박사학위, 그리고 조만간 얻어낼 교수직에 들떠 있다. 더구나 막강한 경쟁상대 뢰브보르그가 사라졌으니 그에게는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셈이다. 모두가 희망을 품고 있는데 유독 헤다만이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생각이다. 아기에 대한 희망, 남편이 교수가 되리라는 희망은 보통 여자에게는 더 없이 큰 기대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녀의 자살도 이해할 수 없다.
헤다가 행복하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숭배하지만 사랑한다고 볼 수는 없다. 테스만은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데는 헤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좋은 조건을 내건 남자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결혼을 결정하는데 있어 신중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끈적거리는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는 헤다는 뢰브보르그에게조차 사랑 대신 ‘은밀한 동지’였다고 말한다. 헤다는 분명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짐작된다. 대신 헤다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열정과 사랑이 있다. 그녀는 스캔들에 휩싸이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명예를 중시하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강인하다. 이 점으로 미루어 헤다의 자살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그녀의 나르시스트적 성향 때문이다. 모든 나르시스트들이 그렇듯이 헤다 역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 맺기에 서툴다. 모든 관심을 자기 안으로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신을 향한 방아쇠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거부하는 저항의 절규이다.
헤다의 자살에 있어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자살의 방식이다. 브라크로부터 뢰브보르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을 때 헤다는 뢰브보르그가 머리에 포도넝쿨 왕관을 쓰고 있었는지 묻는다. 그 이전에 뢰브보르그가 많이 취했다고 전한 테스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 바 있다. 헤다의 여러 차례의 질문은 적어도 한 사람, 뢰브보르그에게 그 자신이 실현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뢰브보르그는 아름다움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의 취기는 경찰과의 난동으로 이어졌고, 자살마저도 그녀가 꿈꾸던 방식이 아니라 여가수의 술집에서 아랫도리를 관통해 더 이상 추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헤다는 아름다움을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는 여성이다. 사랑이나 모성마저도 권태롭고 현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냉담하지만, 아름다움은 그녀의 생과 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가치이다. 헤다는 나르시스트의 전형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자살한 것이다. 헤다는 한 마디로 미의 세계를 탐닉하는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여성이다. 이 점에서 나르시스트와 예술가의 연관성을 확인하게 된다. 예술가는 나르시시즘을 자양분으로 작품을 꽃피운다. 예술가는 자신이 창조하는 상상의 드라마 속에서 자기 자신의 확신을 마음껏 발산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소망과 환상을 실현한다. 헤다의 비극적 결말은 그 자신의 삶을 유일한 작품으로 완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대와 연출, 미의 순교,
박정희 연출은 여신동의 무대를 즐겨 사용한다. 대리석 느낌의 차가운 벽과 유선의 철제 계단, 천정 가까이에 세워진 가블러 장군의 석고 동상,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가 걸린 저택의 거실은 미래적이면서 차갑고 위압적이다. 헤다의 피아노의 다리는 가늘고 위태롭고 곳곳에 놓인 화분 역시 안정적인 모양이 아니다. 벽면의 큰 거울은 공연 내내 활용되지 않다가 마지막 헤다의 자살 장면에서 거울이 있던 자리에 9개의 거울이 걸려 있어 헤다의 자살 행위를 여러 각도에서 비춰준다.
이번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울이다. 헤다를 나르시스트로 해석하자면 거울은 필수 요소이다. 특히나 총성과 테스만의 죽음 확인 장면에 이어 희곡에 없는 부가적 장면으로 헤다의 자살 행위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박정희의 독창적인 연출이다. 이 장면에서 헤다는 그리스의 여신인양 하얀 드레스에 포도넝쿨 왕관을 쓰고 있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가 바라던 아름다움의 달성이며 자신의 운명을 지배한 힘의 확인이다. 이로써 헤다의 자살은 이해불능의 여성이 저지른 왜곡된 욕망의 파멸이 아닌 아름다움의 완성이자 미의 순교로 승화된다.

이번 공연에서 이혜영의 헤다 연기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표정에서 풍기는 권태는 그 자신의 것 인양 친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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