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영낭자전을 읽다/ 김영은

 

작: 김정숙
연출: 권호성
출연: 정연심, 문상희, 박지아, 박옥출, 송효주, 이재민, 서늘볕
공연일시: 2013.01.24-02.01
공연장소: 설치극장 정미소
관람일시: 2013.01.24.20:00

 

 

<숙영낭자전을 읽다>

김영은 (불문학박사, 인천대강사)

 

 

<숙영낭자전>는 작가와 창작연대 미상의 한국 고전소설이다. 이 소설은 여느 고전문학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에 의해 눈으로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소리 내어 읽혀졌고, 또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창’이나 ‘판소리’ 형태로 회자되었다. <숙영낭자전을 읽다>는 이 같은 한국 전래의 고전소설이나 그 내용을 기축으로 하여 발달한 ‘창’과 ‘판소리’가 어떻게 회자되었는지, 또 얼마나 민중 생활 속에 깊이 있게 관여하고 있었는지를, 조선 여성들의 주요 생활무대인 ‘규방’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단면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연극에서 맛볼 수 있는 무엇보다 재미있는 요소는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다시 엮어가는지를 보는 것, 즉, 판소리의 관객이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연극에서도 ‘이야기하는 방식 즐기기’를 맛보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야기하는 방식 즐기기’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구경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러한 무대재현을 위해 사용된 표현방식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칠맛나는 스토리 전개방식
‘이야기하는 방식 즐기기’는 작품 형태이면서 동시에 이 작품의 중요한 극작술로 사용되었다. 연극 이야기 속에 읽고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에 감정 이입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으며, 이야기 속 내용과 실제 현실 이야기의 섞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환상의 이야기가 있다.
때는 ‘향금아씨’의 혼례를 앞두고 분주한 일과를 마감하고 있는 어느 하루 저녁이다. 다른 보통 날과 다르지 않은 이 날도 아씨와 그녀의 어머니인 ‘마님’, 그리고 아씨를 곁에서 보좌하는 ‘어멈’과 다른 하인들, ‘과수댁’, ‘막순이’, ‘섭이네’는 규방에 모두 모여 앉아 손 바쁜 일과를 하나, 둘 마무리하고 있다. 다듬이질부터 시작하여 빨래 밟기, 이불보 접기, 인두질하기 등, 규방 일은 첩첩 산중 쌓여있는 듯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일과 속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인물이기라도 하다는 듯 습관처럼 일을 척척 잘 해내고 있는 중이다.
특히, 아씨가 앞으로 입을 혼례복을 완성하며 그것을 아씨에게 입혀보는 일은 극내용을 아씨의 혼례에 대한 이야기로 집중시키며 서사전개에 발단을 제공하였다. 한편, 하나의 여가처럼 여겨지는 ‘소설읽기’ 활동은 규방일과 함께 이들에게 중요한  하루 일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씨의 입을 통해 읽혀지는 이 소설의 내용은 ‘아씨의 혼례 이야기’와 병행하여 전개되면서 이야기의 서정적 꽃을 피워나갔다.
이날 저녁도 과수댁은 아씨에게 소설(‘숙영낭자전’)을 읽어달라고 보채었고(?), 다른 하인들도 아씨를 함께 종용하며 뒤이어질 이야기를 설렘으로 기다렸다. 이야기인즉슨, 지상에 다시 태어난 천상의 한 선관 (백선군)과 선녀(숙영낭자)가 서로의 운명적 연분에 이끌려 열렬한 사랑에 빠지지만, 서로 다른 신분적 차별을 극복해야 하는 사회적 상황과 부딪치면서, 또 사랑과 효도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난관에 다다르면서, 결국 비극적 결말(죽음)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소설 내용은 혼례를 앞두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내고 있는 아씨와 아씨 주변인물들의 감성과 결합되면서, 한편으로는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넘어야 할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자아내었다.
아씨는 소설을 한 단락 한 단락 읽어나가고, 듣는 이들은 하나씩 둘 씩 감탄하거나 응수하며, 무대 뒷 배경에 내려진 투명막은 소설 내용과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하나, 둘씩 그려간다. 그러면서 아씨 이하 모든 인물들은 각각 ‘이야기’에 감정이입하거나, 꿈을 꾸거나, 환상 속에 빠지거나 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매우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야기 듣는 것을 즐기는 것도 매우 맛깔스럽고 흥미로운 일임을 이 연극은 이러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첫째, ‘미리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말하며 듣는 즐거움을, 둘째, 그 이야기를 인물들로 하여금 자기와 연관시키게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보게 하는 즐거움을, 셋째, 그 이야기를 연극실제 속에 넣음으로써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즐거움을, 넷째, 등장인물들이 ‘이야기’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이야기 즐기기’하는 모습과 무대 뒤 편의 투명막에 투사되는 이미지를 서로 결합하여보게 하는 즐거움 등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이 연극에는 우선, 이야기하는 사람 (또는 화자, conteur) 과 이야기 속의 배역 인물들이 엮어내는 스토리가 있었고,  다음으로,  그러한 ‘이야기 즐기기’를 하는 인물들과 무대의 장치적 이미지가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겹겹으로 된 이야기방식을 즐기며 맛보는 배우와 관객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규방생활 엿보기
공연의 재미가 극내용의 전개방식을 보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연극은 우리나라 옛 선조 여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도 해주었는데, 특히 조선 여인들의 ‘규방생활상’과 ‘문화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바느질을 하고, 옷을 만들고, 옷감을 고르는 등의 가뿐한 손놀림들, 그리고 화롯대를 둘러싸고 펄럭이는 고운 색감들, 호롱불을 맴돌며 덩실거리는 춤사위와 구성지고 멋들어진 노랫가락 등은 규중을 다채롭게 장식하면서도 그 시대적 생활풍속을 화폭처럼 담아냈다. 더욱이, 쉴 줄 모르고 이어지는 아씨의 경 읽는 소리, 거기에 장단 맞추는 하녀들의 추임새와 몸짓들, 또 이에 곁들여지는 ‘백선군’의 아리따운 춤과 이미지들은 이들의 문화생활상을 시적으로 묘사해냈다. 이들의 몸짓과 가락을 함께 하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규중 속을 넘나드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 옛 선조들의 규방문화생활상을 음미해보는 것 같았다.

*환상적 요소
원작인 고전소설은 기본적으로 환상적 분위기를 기저에 깔고 있다. 이러한 원작의 환상 모드를 되살리기 위해 이 개작극 역시 환상적 기법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소설 이야기 속의 환상은 투영막에 비춰지는 음영을 통하면서 이야기를 이미지화 하는 것으로써 나타나졌고,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 속 환상은 음영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던 백선군이 투영막의 바깥 세계로 나오고, 잠들어 있는 ‘섭이네’한테 다가가면서 멋진 춤을 뽐내는 것으로써 이미지화하여 만들어졌다. 이렇게 환상적 모드로 처리된 이미지들은 ‘이야기’ 속에서는 시적인 서정을 덧입히고, ‘이야기’ 밖에서는 무대 미술을 그려내며, 극의 안과 밖에서 추구하는 환상의 의미를 부가시켜나갔다.

*맛깔나는 역할놀이
이 연극의 마지막 묘미는 역할 놀이를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하는 것이다. 이야기 속을 넘나들면서, 그리고, 계속해서 바뀌는 다양한 인물들의 배역들을 맡아가면서, 배우들은 역할을 뒤섞어 연기하였는데, 이들의 연기 하나하나는 지칠 줄 모르는 아이디어와 톡톡 튀는 유머들을 연발시키는 것이었고, 또한,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무대를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성실한 연기력으로 물들여진 무대는 어느새 쉽사리 웃음과 울음의 도가니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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