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U. R./ 하형주

  지나치게 단순화된 인간의 과욕 : <R. U. R.>

                                                                  하 형주(연극평론가)

서울연극협회에 의해 2011년에 시작된 젊은 연출가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인 “요람을 흔들다”는 어느새 3회를 맞이한다. 지난 2년동안 쇼케이스를 통해 세 작품이 선정되어 공연되었던 것에 반해 올해는 선발된 다섯 작품, 홍영은 연출의 <기억의 체온>, 윤혜진 연출의 <어느 여름날>, 김정근 연출의 <마술도시> 이준희 연출의 <바냐와그녀> 그리고 카렐 차페크(Karel Čapek, 1890-1938)의 원작인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1920)은 김제민 연출에 의해 원제목의 약자를 사용한 <알유알 >이라는 제목으로 “요람을 흔들다”의 마지막 작품으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013년 1월 19일에서 20일 올라갔다.

차페크의 작품 줄거리는, 극의 초반부에서 도민이 이 섬을 찾은 헬레나에게 이 알유알의 역사를 말하면서 나이든 로숨의 꿈, 즉 인간과 똑같은 기계인간(humanoïde)을 만들겠다는 꿈이 로숨의 아들에 의해 단순화되어진 후, 도민과 그의 동료들, 갈박사, 할레마이어박사, 파브리, 그리고 부스만과 알뀌스트는 영혼없는 안드로이드(androïde)를 만들어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노동자 로봇을 만들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인생을 즐기게 할 것이라는 그들의 꿈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 꿈은 골렘의 신화, 즉 유대인 랍비 로우가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히브리적 삶과 죽음(Emeth/Meth)을 준 골렘을 창작하지만, 이 골렘은 오히려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랍비가 골렘의 행동을 중단시키고자 다시 흙으로 되돌릴때, 골렘은 랍비를 밟아죽인다는 전설처럼, 극의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결국, 골렘의 신화처럼, 도민과 그의 동료들의 과욕, 노동에 찌든 인간을 구제하고 로봇을 통한 저렴한 인권비 덕분에 비싼 물가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일차원적인 인간의 과욕은, 오히려 인간을 삶에서 배제시켜버리고 더 이상 생명조차 잉태되지 않는 세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극은 인간을 위한 것을 추구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무덤을 파듯, 로봇들의 반란으로 이어져 인류의 멸망으로 끝이 난다.

차페크의 이 과학픽션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산업화되어가는 삶속에서 인간들이 노동에 찌들려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직관한 작가가 과학화와 산업화되어가는 사회가 인간을 과연 해방시킬 수 있을지를 반문한다. 그래서 작가는 희곡 속에 마지막 인간인 알퀴스트의 입을 통해 “생명은 사라지지 않을거요! 생명은 사랑과 함께 다시 시작될거요. 사막에 뿌리를 내리겠지! […] 오직 사랑만은 이 폐허 속에서도 꽃을 피우리라!”라고 말하며, 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과학과 산업화된 기계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인 ‘사랑’임을 강조하였다.

 

 

이 과학픽션의 작품은 김제민 연출에 의해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기계화, 즉 “가장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과욕이 인간에게 오히려 엄청난 해를 가져오는 사실을 전쟁을 통해 그려내면서 단순화되어진다. 먼저, 김제민 연출은 극의 시작과 함께 배우들이 등장해 과학으로 인한 기계화가 가져오는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지를 말한다. 특히 처음 극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 발발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화자가 되어 마치 이기기 위한 스포츠 경기종목처럼 국가의 이름과 알 수 없는 숫자를 전달한다. 이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관객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무척 성공적이었다. 이후 무대는 삼면의 패널에 전쟁의 이미지와 효과음이 같이 전개되며, 이들이 앞다투어 전달하던 숫자가 1차 세계대전 국가별 사망자 수임을 드러낸다. 게다가 연출은 무대위에 설치된 삼면의 흰색 패널에 전쟁에 사용된 무기들이 화자의 대사에 맞춰 “폭탄(AP, 네이팜, 리튬), 독가스(크롤린-염소가스, 썰퍼머스타드-겨자가스), 기관총(chaychat, Hotchkiss, 라이플), 대공포(스코다305mm, Krupp), 전투기(SE-5, Handley-page), 전함(퀸 엘리자베스 호, L-1, Pommern, UC-5, U-9), 잠수함(B-11, E-14, K-1, K-8, UB-133, UB-24)전차, 탱크(Mark 1, Americana, A7V)”들을 투영한다. 연출은 인간이 좀 더 편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했던 모든 발명품들은 전쟁에 사용되면서 전쟁이 마치 과학의 전시장이 되어지고 과학의 발명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했음을 이미지와 함께 그려낸다.

 

 

하지만, 이렇게 극 초반에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공연은 이후 더 이상 심화되지 못한다. 게다가, 차페크의 극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중요한 ‘인간적 사랑’은 사라진다. 물론 연출은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를 자문하는 5장에서 술라와 쁘리무스의 사랑의 감정을 지니는 장면을 첨가했지만, 그리고 비록 연출이 술라를 화자로 객관화시켜 관객에게 주는 대사로 처리했을지라도, 이 두 로봇의 대사는, 공연에서 마치 사족처럼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지나간다. 또한 이미지 작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출의 작업에서 무대 위 삼면의 패널에 투영되었던 이미지는 관객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는 대사의 설명을 보충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극에서 로봇박물관, 로봇설계도, 바닥, 무대영상 등의 미디어적 작업(?)은 그 효과를 지니지 못하였다.

만약 차페크의 작품이 오늘 다시 의미를 지니고자 한다면, 이는 과학적 발명품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혹은 원전의 사고 등으로 오히려 인간에게 해악을 가져온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식상한 논리로 극을 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과욕, 자본적 논리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같이 다루어져야 하진 않았을까 ? 극의 초반에 가졌던 공연에 대한 기대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사라지는 것은 왜인지 아쉬움을 남긴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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