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가 또 연극상(賞)을 만든다고?/ 우상전

협회가 또 연극상(賞)을 만든다고?

우상전(연극배우)

지난 호에서 오세곤 편집장의 ‘서울연극인상’의 제정을 향한 강렬한 희망의 글을 읽었다. 이쯤에서 ‘연극상’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밟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재작년 ‘서울연극협회‘가 ’서울연극제‘의 발전을 위한 박장렬회장과 연극인, 평론가들이 모인 세미나 자리에서 “지난해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시상에 실망하고 전반적으로 낮아진 공연수준으로 인해 올해는 관람을 포기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데 또 서울연극인상을 만들고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시상제도의 문제점

첫째, 대극장 공연의 불이익

현재 한국연극의 시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극장 공연물의 경우, 연출이나 연기에서 아직도 현장인들의 적응 수준이 낮아 불이익을 받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먼저 대극장공연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연극에서 시급한 과제는 연출력을 향상시켜 대극장 공연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상이란 원칙적으로 공정성을 가질 수 없다.

해마다 빠지지 않고 가십거리가 되는 게 영화계의 대종상이다. 지난해에도 ‘광해’가 모든 상을 휩쓸어가자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 조금 전에 김기덕영화가 베니스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음에도 1000만 관객을 앞세운 ‘광해’가 상을 몰아가자 설왕설래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이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상례다. 한마디로 상은 하느님이 내리셔도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셋째. 심사위원들의 미학과 가치가 서로 다른 게 문제다.

차만 운전하면 교통방송을 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운전을 하면서 직접 들은 내용이다. 패티김이 이 방송의 오전 프로인 ‘임국희예요’에 나와서 막 데뷔 한 ‘서태지 노래’를 개탄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래가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더욱 한심해 한 것은 그런 노래를 해도 그들을 나무라고 꾸짖는 선배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선배인 패티로서는 그의 노래가 생경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MC인 임국희도 이에 맞장구를 치면서 패티야말로 후배들에게 하기 힘든 충고를 서슴없이 하시는 훌륭한 선배라면서 감격해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요계는 ‘서태지 시대’로 돌입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가요계를 뒤흔든 대 폭풍이었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가수 전영록은 TV 신인가수 선발프로에서 서태지에게 100점 만점에 75점을 주었다고 해서 나중에 이게 전설이 되기도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패티 김이 심사 위원이었으면 서태지는 예심도 통과를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상이 공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예술세계에서는 공정성을 담보하려고 드는 게 더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대의 천재적 창의성을 되레 배타시키고 몰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극계에도 이런 전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작가 오태석만 해도 이해랑선생이 생전에 심사를 전담할 때만 해도 전혀 빛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해랑선생은 늘 “이봐, 오태석은 아니야”했다고 한다. 이해랑선생의 말씀이라면 북한의 김일성주석만큼의 권위를 갖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런 권위자가 심사위원장을 맡고 계셨는데 갑자기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에 김정옥선생이 오태석에게 상을 주었다나, 아니 ‘서울연극제’에 선발되는 영광을 처음으로 맛보게 해 주었다나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세대차에 의한 감각의 차이와 개인 간의 취향이 다름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이를 부추기는 게 바로 심사제도이며 이를 확대하는 게 바로 ‘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넷째, 시상이 예술가들의 ‘줄 세우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해 ‘서울연극제’가 시상의 불공정성과 편파성으로 하도 말이 많아지자, 시상을 하는 경연(競演)제도를 포기하고 축제형태로 치러진 적이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시상제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협회 실무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상을 안 하니 출품 단체들이 경쟁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지원금이 적으니 단체가 더 투자를 해서 연극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경연이 없어지자 ‘빚만 질일’ 없다고 투자를 하지 않아 무대가 초라해지고 열정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심사를 담당하던 원로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은 상을 받으면 후배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듣고 또 신년에 젊은 연극인들이 (심사를 겨냥해) 세배도 오곤 하는데, 심사할 일이 없어지자 심심할 뿐만 아니라,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불쾌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다시금 시상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들의 호응이 미약한 처지에 있는 연극의 경우에는 자칫 시상이 시혜가 되어 연극인들의 존재가치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당연히 ‘줄 세우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세곤 편집인의 고뇌

지난 호에 실린 오세곤 편집인의 ‘서울연극인상’에 관한 글을 읽으면 이런 고뇌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의 요점을 정리하면

1. 상을 제정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혼을 불태우는 연극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축잔치의 성격임을 밝히고 있다.

2. 동시에 시상에 따른 불공정이나 편파성에 대한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글의 많은 내용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평가나 심사는 평론가들의 몫이지만 말이 많으니 현장예술가를 참여시키겠다. 관객평가단을 운영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으나 말이 많아서 힘들다. 다시 말해 비전문가라 할 수 있는 관객들이 어떻게 감히 전문가들이 하는 예술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느냐하는 불쾌감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현장연극인들과 평론가들의 견해가 다른 게 현실이지만 몇 년을 반복하다 보면 ‘공통된 기준’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평론가들에게 전적으로 심사를 맡기겠다. 그러니 심사가 본업(?)인 평론가들은 잠시 불쾌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달라는 요지다.

3. 상의 권위는 상금 액수에 있지 않다. 상금이 없어도 연극인들이 그 상을 받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기면 자연히 권위가 생길 것이니, 어떻게든 권위를 찾겠으니 협회는 상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현장연극인들도 상금은 포기하고 명예를 얻을 생각을 하라!

결론적으로 상금은 없지만 현장연극인들에게는 창작의 노고를 위로하는 기쁨을 주고, 평론가들에게는 일감과 권위를 주고자 함을 천명하고 있다. 거기다 협회장은 돈도 들이지 않고 시상하므로 해서 업적을 남길 수 있으니, 이른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보다 더 좋은 윈윈전략이 어디 있겠는가! 나름 ‘손 안대고 코 푸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시상이 왜 연극발전에 저해가 되고 있는가?

평가의 3색(色)

1. 연극인(현장인과 평론가)들의 평가

2. 매스컴에 의한 평가 – 화제작에 주안점

3. 관객들의 평가 – 흥행성적

영화계의 대종상이 해마다 혼란을 겪고 있는 배후에는 평가의 이런 3중적인 성격이 서로 충돌하는데 있다. 어느 해는 1번에 의해서 평가를 했더니 3번이 격하게 반발을 하기도 하고, 3번에 주안점을 두었더니 이번에는 1번과 2번이 질적 저하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다.

특히 요사이는 SNS의 발달로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댓글로 저항도 할 수 있어서 시끄러움이 배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수백만에서 일천만 이상이 관람하는 영화에 누가(평론가들마저도) 시비를 걸기만 해도 소란은 엄청나게 확대되는 게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심형래의 ‘괴물영화’였을 것이다. 진중권을 위시한 소위 평론그룹과 관객들이 심한 격론을 벌였다. 알고 보면 예술론에 입각한 게 아닌 항상 ‘잘난척하는’ 평론그룹(1번)에 대한 일종의 감정싸움이자, 관객들의(3번) ‘애국심’을 앞세운 자신들의 조금은 억지스런 평론그룹에 대한 주도권(?)투쟁이었다고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완강한 저항 때문인지 이 사건 이후에 평론가들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비평을 삼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들의 위상마저도 거의 유명무실해져버린 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평론가들은 그저 매스컴의 논리(2번)에 맞장구를 치는 인터뷰를 하는 게 고작일 뿐이다.

사실 영화상은 영화인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꼼수’가 개입하거나 제작사, 투자사 등의 영업이익(?)이 상호 충돌하기라도 하면 싸움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런 시상제도가 운영되는 것은 사기진작과 자축을 빌미로 상호간에 많은 이권이 오고갈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가에는 3번 ‘흥행성적’이 개입해야

어쩌면 연극계로서는 영화계의 시상에 따른 이런 잡음을 되레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왜냐면 연극계는 유로관객이 없어서 이른바 평론그룹(1번)과 관객들(3번)과의 충돌은 전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유로관객이란 개인예매나 학생단체관람객이 아닌 예매나 현장매표를 하는 순수관객(마니아)을 이르는 말이다. 솔직히 연극이나 무용공연은 마니아라 할 수 있는 관객(3번)이 없다. 그래서 관객평가단을 꾸미는 것도, 그들의 평가 수준도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따라서 연극에서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것도 당연히 1번이나 2번이 고작이다. 그러니 항상 시상이 ‘집안잔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집안잔치’가 공연의 관객을 향한 감동과 호응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3번에 의한 평가(흥행)가 없으니 자연히 1번과 2번이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게 되고, 항상 연극공연은 3번을 위한 감동과 재미는 뒤꼍으로 밀리고 1번의 ‘자기만족’이 앞서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미 영화나 뮤지컬에서는 1번에 의한 평가는 전혀 힘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연극처럼 3번이 부재하면 당연히 모든 심사와 평가는 1번과 2번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창작자들의 감각과 취향도 그들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것은 심사와 평가에서 3번(흥행)이 제외되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예술의 다양성이 파괴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패티 김의 감각만 존재했다면 서태지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태지가 연극인이었다면 1번에 의해 힘도 써보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3번의 힘인 것이다. 그러니까 1번과 2번이 너무 힘을 발휘하면 ‘다양성’과 그에 따른 ‘창의성’에 의한 새로운 시도는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흥행’은 ‘저질’을 떠올리거나 ‘비(非) 예술성’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면 심사자들이 자신들의 지적만족이나 과시로 연극을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연극이 재미와 감동이 없는 아카데미즘과 완성도가 미약한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1번과 2번이 시상과 평가를 주도하는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연극을 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가면 ‘성적’과 ‘논문’ 등의 심사로 평가를 강요당하는 게 현실이고, 또 현장에 나오면 시상은 물론이고 지원이나 대관까지도 1번의 소수자들에 의한 심사와 평가가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는 게 연극계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3번을 위한 연극은 존재하기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골수적 생태계에서는 연극은 영원히 새로운 변화를 찾지 못한 채, 장래에도 순수예술이라는 ‘화려한 이름’의 화석(化石)으로 영원히 남게 될 뿐이다.

지금 영화나 뮤지컬은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객들 앞에서 1번과 2번이 뭐라고 지껄여봤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흥행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끝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콘텐츠를 개발하며 관객에 침투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영화나 뮤지컬과 오로지 평가그룹과 현장그룹이 시상을 목적으로 ‘공통된 기준’을 창출하는데 전념하는 연극판을 상호 비교해보면 어떤 결과가 지속될지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평론가들이 추구하는 연극의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할 것이며 흥행을 도모하고자 하는 연극인의 노력은 ‘상업주의’로 몰려 연극의 체질개선은 더욱 더 멀어질 게 확실하다.

결혼식 하나에도 축하객 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우리의 현실인데, 어떻게 관객을 모으겠다고 ‘관람료’를 책정하는 공연예술이 ‘순수예술’을 내세워 3번의 평가(흥행)를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제로 1번과 2번에 의해 형성된 연극의 ‘엘리트주의’의 위력은 연극인들이 가난 속에서도 ‘흥행’을 도외시한 채 묵묵히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으로 발휘되고 있다.

어느 판사가 MB를 ‘뼛속까지 친미주의자’라고 해서 웃었는데, 연극인들이야말로 ‘뼛속까지 엘리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판치는 현실에서도 ‘돈’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술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용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연극인들의 ‘순수주의’는 어느 정치 이데올로기보다도 더 확고한 이념임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시상제도를 제정하기에 앞서 모든 연극공연에서의 개인예매나 단체관람이 아닌 ‘진정한 유료관객’의 수를 공개하는 용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축(自祝)의 공허한 논리

연극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축’ 성격으로 시상을 하고자 한다. 언뜻 들으면 참 그럴싸한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쁨을 주고자 한다면 먼저 수입이 없는 연극인들을 위해서 상금이 많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나마 ‘빚으로 남는’ 제작비를 탕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상이란 받는 사람보다는 못 받는 사람이 더 많아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럼 못 받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말인가? 괜히 시상제도를 만들어 외려 많은 연극인들의 기를 죽이는 결과를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협회가… 어떻게 협회장과 편집인은 상을 받고 웃음 짓는 얼굴만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공연예술은 관객들과 소통을 통해서 진정한 생명력을 갖는 장르다. 미술품은 관객과 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냥 관객들이 보고 즐길 뿐이다. 하지만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은 관객들의 박수를 먹고 산다. 또 호응의 박수를 유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장르들은 중간에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기도 하고 ‘브라보’를 연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협회는 연극상을 거론하며 ‘자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관객과의 소통은 이미 포기했다는 말로 들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존의 확립’이니 ‘존재가치를 정립’하기 위해서 상을 제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끼리끼리 모여서 자축을 하고 연극인들끼리 스스로 자존과 존재가치를 찾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현실적인 논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또 상이 귀하고 없다면 이런 시상제도를 갖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서울연극제’에서 상을 주고 ‘동아 연극상’으로 또 상을 주고, 연말이면 ‘베스트’라고 해서 줄줄이 상을 주면서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존재가치를 내세워 시상을 하겠다니? 그것도 ‘서울연극제를 주도하는 서울연극협회가 나서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남발하면 가치가 추락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협회가 재정이 풍부해 돈이 남아돌아 그냥 나눠주기도 뭣하고 해서 시상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상금도 없는 상을 남발하겠다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상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상금이 없어도 권위 있는 상은 분명히 있다. 그러려면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몇 해 전에 러시아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은 공연이 SPAF 축제에 참가한 적이 있다. 뛰어난 집중력을 요하는 엄청난 작품이었다. 작고하신 평론가 한상철선생이 “내 평생에 이렇게 좋은 연극은 처음”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다. 상이 권위 있으려면 공연작품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연극공연이 전반적으로 뛰어나야 하고 그 중에서 더욱 뛰어난 작품이 상을 받아야 상에 권위가 생긴다.

왜? 권위는 스스로 세우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을 받으면 흥행에 엄청 도움을 받는다. 안 봤던 관객들도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번에 작품상을 탄 ‘아르고’만 해도 지난해 한국에서 ‘광해’에 밀려 제대로 감상을 못했다는데, 이번에 상을 받은 후 한국 관객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금 보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상이 권위가 있으려면 재공연을 할 때 지난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뽑은 베스트3에 들은 공연이라고 홍보를 하면 관객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은 어떤가? 오래전에 ‘대종상’을 받아도 전혀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던 시절이 연상될 정도로 아무도, 연극인들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상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시상이 고작 연극인의 개인 이력을 높이는 데만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건 동아연극상도 마찬가지다. 10년 만에 대상이 나왔다고 해서 앙코르 공연에 구경을 가면 내용도 모른 채 ‘머리에 쥐만 나서’ 집에 오기 일쑤다. 관객의 호응이 없는 연극상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거기에 어떻게 권위가 서겠는가? 한마디로 상에 권위가 서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료관객의 확보가 급선무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현재 한국연극이 당면한 과제는 유료관객을 확보하고 확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5천원, 만원자리 관객이 아니고 또 학생단체동원이 아닌 예매하고 현장매표를 하는 진정한 관객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또 이렇게 관객들과의 소통을 가지면서 시상이 이루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상제도는 ‘줄 세우기’같은 다른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더 크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관객을 호객하지 않고 현대무용처럼 극장을 대관해 하루나 이틀 ‘개인발표회’를 하고 우리끼리 모여 스스로 자축을 하고, 평론가들의 조언을 기다리며 ‘존재가치’를 그들의 글로 정립하는 게 바른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솔직히 연극계의 1번들은 연극이 흥행을 도모하기 시작하면 저질화를 면치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현재의 종사인력이나 능력으로는 저질화를 면치 못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초창기 뮤지컬이, 또 지난 시절의 한국영화가 저질화를 면치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그렇게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지금의 그들이 웅변으로 대변하고 있다.

연극도 흥행이 되어 점점 관객과의 소통이 강화되면 당연히 가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좋은 인재들이 몰릴 것이며, 이러한 새로운 인재들에 의해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이 모색될 것이고, 따라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 1번에 의한 평가와 심사가 지속될 경우에는 영원히 이런 가능성을 찾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왜냐면 1번들은 ‘엘리트주의’를 고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해랑 연극상’과 ‘차범석 희곡상’의 교훈

구태여 상을 주고 싶으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박장렬회장이나 오세곤편집인이 ‘이해랑연극상’이나 ‘차범석희곡상’처럼 개인의 사재를 털어 또는 후원을 받아 많은 상금을 걸고 시상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고 겨우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유지하면서 회원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고자 해서 만든 협회를 이용해 상금도 없는 시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먼저 선배들의 이름을 딴 두개의 상이 과연 연극계에 어떻게 공헌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주관사인 ‘조선일보’만 생색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상들이 연극의 체질개선이나 공연의 기술개발은 물론이고 연극의 흥행에도 전혀 공헌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동안 많은 제작 지원금까지 제공하며 위세를 떨치던 ‘삼성희곡상’이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 이유를 아는가? 좋은 희곡을 선정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지속적으로 현장에서 공급되지도 않자 제일 먼저 스스로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이해랑 상’이나 ‘차범석 상’도 고민이 엄청 많을 것이다. 선배들 상이라 없앨 수도 없고 지속하자니 선정의 애로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현실에서 제대로 된 연극상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인들의 각성

연극과 흡사한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예술장르가 있다면 아마 한국미술의 ‘서예’일 것이다. 지난 시절에는 웬만한 집이면 최소한 서예작품 한 점은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현대미술이 호황을 지속하고 있는데도 서예는 참혹한 상태에 있는 게 현실이다.

연극인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꼭 상을 받고 평가를 받아야만 만족할 수 있는가? 그리고 수상 경력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 상을 받은 후 자기 연극생존에 만족도가 높아졌는가? 명예를 얻어 삶이 풍족해졌는가? 지금 연극상은 일회용 마약주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지는 않는가?

또 연극인 중에는 지원금을 받고 대관을 할 때 심사가 없으면 안 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가령 지원금은 35세까지의 신인에게만 지급한다든지, 또는 데뷔한 이후 5작품에 한해서만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고(대신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는) 남은 인생의 작업은 본인 스스로 꾸려가도록 할 수도 있다.

대관은 추첨을 통해서 하면 되고, 아니면 한 극장에 2회 연속 대관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든가. 그것도 아니면 일정한 유료관객의 퍼센트를 정해 이를 채우지 못하면 다음에 자격을 박탈하는 규약을 만들어 우선권을 주어도 좋다.

1번이 꼭 심사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아이디어를 내면 가능하다. 외려 몇 사람에 의한 주관적 판단보다는 심사나 평가를 계량화하는 게 더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연극인들의 개인적 주관이 연극에 미치는 영향을 줄여가고 대신에 관객들의 평가를 넓혀주는 게 현재 연극이 나아갈 길이라고 여겨진다.

어찌되었던 현재 한국연극은 위기에 처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에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선배 연극인들이 자꾸만 평가나 심사에 개입한다는 것은 위기를 지속시키자고 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 평가가 젊은 연극인들에게 결과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나쁜 습관에 익숙해지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관객의 평가(흥행)야말로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작품이 재미가 없나? 아니면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것은 아닐까? 또는 관객들이 내용을 모르고 집에 가나?’를 먼저 떠올리는 게 아니라 기획자가 무능해서라거나, 지원금이 적어서라거나, 더 나아가서는 관객들이 무식하다느니, 아니면 매스컴이 다뤄주지 않아서라거나, 극장이 구석진 곳에 있어서라거나 날씨까지 핑계를 대기 일쑤다. 또는 어떤 선배가 보고 좋은 공연이라고 말했다든가. 또는 어느 평론가가 칭찬을 했다는 식으로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곤 한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의 심리여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연극은 전반적으로 완성도면에서 너무나 허술해 어느 공연도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재능이 부족함을 고민해 본 연극인이 몇이나 될까싶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외려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수록 ‘예술성’이 높다는 터무니없는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병폐가 우리 연극을 더욱 더 관객들과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앞서 나가거나 새로운 콘텐츠로 예술성을 시도할 경우에 ‘서태지 노래’처럼 잠시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십 년 동안을 지속하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주관적 평가의 개입을 지양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평가를 배제한 채 관객들이 자기 자신의 예술에 얼마나 만족해하고 있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정히 연극인이라도 자기 자신이 만족하는 공연이 있으면 나처럼 ‘배봉기’연극의 좋은 점을 글로 남기거나 최원석의 ‘변태’를 글로 칭찬해 서로 격려를 해주면 되지 않겠는가! 칭찬하다가 ‘망신’ 당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배우 윤석화가 스타가 된 것은 연극상도 아니고 연극인들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조선일보의 기사(2번)를 통해 얻어진 영예임을 아는가? 현실적으로 현재의 연극인들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상을 수상하므로 해서 한동안 ‘위로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가난과 인생의 불안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수상자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영화만 해도 연기상을 받으면 ‘출연개런티’의 액수가 달라진다. 다른 예술장르에서는 ‘레슨비’라도 오른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무슨 소득이 있는가? ‘노고에 대한 위로’가 밥 먹여 주는가?

결국 연극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살아나지 못하면 또 관심을 살려내지 못하면 연극상은 영원히 실속 없는 ‘집안잔치’이자 마약주사일 뿐이다. 또 연극의 체질개선에 대한 무관심과 기술습득의 게으름만을 조장하게 될 뿐이다.

지금 연극계는 지원금 심사에서부터 대관 심사에 이르기까지 ‘심사천국’이다. 모든 게 관객들의 참여가 없는 그것도 실패한 연극인들의 반성 없는(?) 평가로 이루어지고 있는 ‘평가만능’이다. 그러니 체질개선에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발전을 위한 교육제도나 훈련방법의 새로운 접근은 없고, 관람객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어렵다고 포기한 채 그저 일회용 ‘아편’에만 취할 생각을 하고 있다. 고작 아이디어라고는 지원금과 복지혜택을 늘리고 자축으로 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존재가치를 찾을 궁리만 하고 있다. 그래서는 서예처럼 존립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변화무쌍한 현대에서는 전문가라 해서, 또 선배라고 해서 혜안을 갖기도 힘들어, 자칫하면 연극상이 창의성이 뛰어난 후배들의 길을 막는 ‘방패’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에 ‘공통된 기준’을 추구하는 시상제도야말로 발전의 암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차라리 그런 열정이 있다면 협회는 교육제도의 개선, 콘텐츠의 개발, 관객들과의 소통 등에 골몰해야 할 것이다.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미술계를 보라! 홍익대는 ‘그리기’에 의한 학생선발도 중지해서 대학 주변의 학원들이 떠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공통된 기준’으로 예술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위험한 게 없다.

그러니까 진정한 평가야말로 1번과 3번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데서 나온다. 지금처럼 평가가 전적으로 1번에 의존해서는 연극의 발전은 난망한 게 사실이다.

One thought on “협회가 또 연극상(賞)을 만든다고?/ 우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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