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인가?/ 우상전

과연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인가?

 

우 상 전(연극배우)

 

 

어느 날 카카오톡이 울렸다. 읽어보니 “00야! 반갑다. 오는 9일 강태기와 연극계 현황이 sbs 8시 55분에 현장 21에 방송될 거다.” 문자가 떴다. 연극 동료가 자신이 받은 문자를 나에게 보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엿볼 수 있다.

1. 매스컴이 연극인의 처지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반갑다는 심정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 문자를 나에게 전송한 것에서 ‘너도 늙었으니 관심을 가져봐’하는 동료의식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00야!’ 한 것으로 봐 처음 문자를 보낸 사람도 분명 60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스컴이 연극인에 관심을 갖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연극계 내에서조차 무관심한 사항을 ‘남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반가움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관심은 관심일 뿐이다.

둘째는 매스컴은 항상 부정확한 상황 판단을 할 뿐만 아니라 늘 연극인들을 ‘불쌍한 사람들’로, 감상적으로 다루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셋째는 설령 사회적 관심으로 인해 지자체나 정부의 도움을 받게 된다고 해도 자신들의 개선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한국배우협회’처럼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고 결국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배신감만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매스컴이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떠들어대도 결국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가 나서서 지하철역사에 자신들의 몸을 쇠줄로 묶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그들의 ‘교통 자유권’을 얻어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 매스컴은 연극계의 사안들을 항상 동정적이고 불쌍하게 고정된 수입도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로 다루기를 즐겨해 방송이 나가봐야 비참한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킬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음을 그동안의 ‘학습효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스타일만 구길 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다. 이제는 시청자들도 식상해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남는 게’ 미덕인 연극

 

젊은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다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배우는 오래 버티기만 하면 된다면서요?”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연극배우로 성공하는 비결이 바로 재능이나 실력보다도 오직 세월로 ‘버텨서’ – 경력만 쌓으면 된다는 말인데… 자조인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인지 모를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간간히 듣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윗선배’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나름 굳게 믿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웃어버리고 말기에는 너무나 솔직하고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무서운 믿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예술에서 ‘재능’은 필요 없고 그저 오래 살아남아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또 해석에 따라서는 ‘살아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연극판에서 ‘생존’이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연기교육의 부실이 불러오는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를 제공한 것은 바로 나와 같은 선배들의 무언의 가르침(?)일 것이다. 무능하게 그저 비비적거리다 연극배우로 남게 되는 선배들을 보면서 후배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 거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래 무엇을 익혀 나의 재능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나 의지는 없고 그저 술 마시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배우가 되어 나름 ‘선배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는 곳이 바로 연극판이라는 것을 많은 젊은 배우들이 간파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전업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는 나라

 

그럼 어째서 이토록 ‘살아남는 게’ 중요한 일이 된 것일까?

단적으로 한국에서는 전업예술가가 자리를 잡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나 시인도 화가도, 그리고 모든 예술 장르에 걸쳐 전업으로 예술 활동을 해 생존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나라여서 그렇다. 가령 예술평론만 해서 그 ‘원고료’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전업예술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는 감히 전업을 꿈꾸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연극인들만은 특히 배우들은 다르다. 예술 활동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구도로 짜여 있는 데도 거침없이 대드는 것이다. 선진국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를 무시하고 전업예술가가 되겠다고 또 ‘순수예술’을 하겠다고 들이댈 뿐만 아니라, 이 와중에도 엘리트주의와 아마추어리즘, 아카데미즘을 고수하려 드니 정말 별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게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것도 아니면 운명이 자기 자신만은 비껴갈 거라는 확신 때문일까? 좌우간 이 문제는 – 이런 배짱과 용기가 생기는 심리적 배후를 중점적으로 다뤄보기로 하자!

하여튼 전업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님(유산)의 ‘평생 장학금’에 의지 하든가, 아니면 배우자가 이재를 잘해 뒷받침을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대학교수 등의 안정적인 ‘투잡’이 있든가 해야 생존이 가능한 동네다.

이런 이유로 연극인으로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뒤집어 보면 연극인들이 어쨌든 한국의 평균적인 생활인들- 흔히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어찌 보면 한국의 현실에서 경제적으로 ‘행운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남에게 의지해서 산다는 게 오로지 ‘불편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자꾸만 ‘경제적으로’ 어려움 속에서 예술 활동을 해 온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 것은 매스컴의 현실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전업예술가’가 존재하기 힘든 현실을 모르고 들이대다 생기는 비극을 매스컴이 오판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불행한 사람들인가?

 

따라서 개인적으로 각자가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행운’이 따라주지 못하면 누구나 중도에 탈락하게 되어 있는 게 연극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극단 <민중>의 전성기에는 연수단원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지망자가 한해 200여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전업이 불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힘들어 중도에 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연극판에 살아남은 우리가 행운아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개인에 따라서는 빈부의 차이, 이에 따른 고통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런 빈부의 차이는 일반사회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단지 우리는 남에게 의지해서 예술 활동을 하는 삶이 답답하고 불편할 뿐이다.

이런 고통도 없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다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그만두고 모두 연극인이 되려고 대들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남양유업 대리점주’처럼 TV화면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 – 결혼이나 육아와 같은 일반적인 삶을 포기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연극을 위해 독신으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나름 엄청난 ‘행운’이자 한편으로는 자기의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철저히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연극의 미래에서 가장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게 바로 지원과 복지다. 많은 연극인들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나 복지에 불만을 나타내지만 정책의 수혜자의 자세나 태도에 대해서는 항상 아무런 언급도 표출하지 않는 게 연극판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저 공평하게 그것도 많은 지원이 연극판에 마냥 뿌려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버티기’가 횡행하는 이 판에서 지원책만 횡행하면 지원과 복지가 오히려 연극판을 더욱 더 골병들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방송의 허황된 구성

 

방송은 배우 강태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연극인들, 특히 노년에 들어선 연극배우들의 현실을 상당히 세세한 부분까지 인터뷰를 통해 방송했다. 많은 연극배우들이 등장해 노년의 아픔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매스컴의 잘못된 정보와 감상적 접근으로 인해 오히려 연극 발전이 크게 장애받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송이야말로 연극인들에게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심어주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배우 강태기는 바로 ‘한국배우협회’에 대한 정부의 지원, 그 중심에 부회장과 협회장을 지냈던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자신을 냉혹한 눈으로 성찰하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다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데도 매스컴이 이런 동정적인 방송을 내보내면 오히려 연극인들의 ‘사회적 인식’을 더욱 어둡게 하는데 일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매스컴은 항상 연극인들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를 언제나 ‘예술가의 비극적 삶’으로 조명하기를 즐기지만, 우선 배우 강태기만 해도 그는 한국의 연극배우로는 최고의 ‘행운아’였다. 그는 실험극장의 ‘에쿠우스’로 화려하게 등장한 배우다. 물론 본인이 연기를 잘하기도 했지만 어디 연기를 잘한다고 모든 배우가 다 행운을 누리는 것도 아닌 게 현실인 점에서 그는 분명 행운아다.

서양 번역극이 한국연극의 대세이던 시절, 그나마 저작권료도 로열티도 없던 시절에 서양의 화제작이라고 하면 무조건 대본을 구해 ‘먼저 하는 사람’이 우선권을 갖던 그런 시대에 그는 연극배우로서는 최고의 행운을 누린 사람이었다.

실험극장이 작품을 번역해 연습을 시작했는데, 말들이 무대에서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포기상태에 있을 때 – 당시에는 ‘자료용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 네덜란드 배우가 관광차 한국에 들렸다가 실험극장 소극장 앞을 지나던 중 포스터를 보고 들어와 ‘자신이 말로 출연했던 배우’라면서 그 장면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어렵사리 올라간 무대는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여배우가 수영복차림으로 등장하는 (강태기는 웃통을 벗고 나오고) 횡재(?)까지 겹쳐 장안에 화제작이 되기에 충분했었다.

그 후 그는 TV에 진출하게 된다. 그런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지만 뛰어난 ‘집중력의 배우’라는 말은 들었어도 흥행성이 강한 대극장에서 일찍부터 목이 쉬어 제대로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에 거액의 지원금(한해 최고 15억을 지원받는)으로 운영되던 전성기의 ‘한국배우협회’에서 허현호회장의 고교후배로서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또 그 후임으로 회장이 되는 관운을 누리는 배우로서 노년에 영광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올랐다.

불행히도 그는 회장직을 끝으로 ‘배우협회’는 문광부에서 인가가 취소되는 불행을 겪게 되고 – ‘배우협회’는 당장 지원금이 끊겼으니 거의 와해된 ‘간판’만 있는 상태다 – 그는 아마 이 과정에서 많이 상심하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죽음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추락은 연극계의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방송은 마치 이를 한국연극계 전반적인 배우들의 ‘노후의 문제’로, 즉 ‘복지의 시선’으로 다루고 있으니… 물론 고맙기 그지없지만 이런 방송을 배우협회의 후원자였던 정치인들과 정부 관계자가 시청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내막을 모르는 시청자들이야 연극배우들은 그저 ‘불쌍한 사람들’로 마치 ‘구제받아야 하는 업종의 사람들’로 인식하겠지만… 하여튼 자존심과 엘리트의식으로 충만 되어 있는 연극인들이 이럴 때에는 ‘근천을 떨어’ 한없이 무너지는 이중성(?)을 보이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좌우간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평균적인 ‘사회적 인식’으로 조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솔직히 우리의 현실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게 싫고 부담스럽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무엇이 문제이고 이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깊게 따져볼 때라는 말을 하고 싶다. 최소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는 연극세상에서 사안의 해결은 ‘사회적 인식’없이 항상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으로만 접근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짜증난다.

 

나이든 배우들의 현실

 

방송에서 소개된 ‘노령층 배우들의 현실’만 해도 그렇다. 사실 노년의 문제는 연극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한국사회전반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소싯적에 행복했던 다른 직종의 사람들도 자식하나 둘 결혼시키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어 불행해지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게 작금의 우리의 노령화된 사회현실이다.

그런데 이미 가난했던 연극인들이 노년에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평론가들의 평가에 고취되어 가난을 ‘순수예술’로 맞바꾸고 살아온 연극인들이 이런 사회현실에서 행복한 노년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노년의 불행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연극인들 스스로가 자신과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부족함의 소치일 것이다.

물론 TV화면속의 연극인들의 발언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거짓’으로 연출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 연극배우가 노년이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할 일이 없어질 거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그것은 한때 브로드웨이의 최고의 흥행작가인 ‘닐 사이먼’의 모든 작품에서 ‘노령의 연령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공연을 보러오는 브로드웨이 관객들이 ‘노년층’이어서 그가 흥행을 위해서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용도 알 수 없는 ‘실험극’(?)이나 하면서 어떻게 노년층이 구경을 오리라는 것을 예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이론가들의 심사와 평가를 위해서 난해한 연극에 몰두해온 우리가 어떻게 노년층을 극장으로 모실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한국연극에서 노년에 할 일이 없을 것은 너무나 확연하다.

젊어서 연극을 즐겨보던 관객들도 나이가 들면 골 아픈 연극을 자연히 멀리하게 되는데, 그들을 붙잡을 재미도 없는 연극을 하면서 늙어서 일자리(배역)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한국배우들의 현실 무감각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연출가들이 나이든 배우들을 싫어한다고 ‘나이든 배우’들은 말하고 있다. 사실 연기야말로 ‘시대적 감각’이 크게 작용하는 예술 파트다. 그런데 아무래도 감각이 떨어지는 구시대적 연기를 하면서 그저 ‘잔소리’만 해대는 늙은 배우들을 새로운 감각의 젊은 연출가들이 좋아할 리 있겠는가? 따라서 나이든 배우들도 젊은 배우 못지않게 새로운 감각을 익히려고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데도 오히려 ‘경력만 내세우고’ 있으니 어느 연출가가 좋아할 리가 있을까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인터뷰에서는 제작자들이 경력자인 배우들을 멀리하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뮤지컬을 보면 상당수의 공연들이 출연자들의 팬클럽으로 그나마 제작비를 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팬 한사람이 무려 10회 이상 같은 공연을 계속해서 봐주기도 한다.

이처럼 출연 배우를 보고 관객들이 찾아온다면 제작자들은 개런티의 액수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평생 팬도 확보 못했으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면 어느 제작자가 이를 반기겠는가? 물론 몇 분의 나이든 여배우들은 예외지만 말이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젊은 배우들은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들에게 해줄 말은 그저 ‘버틸수록’ 더욱 어려워질 뿐이라는 말밖에 없다. 대책 없이 버티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힘들어지는 연극판의 구도를 그들 자신들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배우 최원석과 ‘여승무원 폭행사건’

 

나는 배우 최원석과 국립극단에서 한동안 한솥밥을 먹었었다. 그런 그가 중국에 가서 영화를 한편 찍고 오더니 극단을 그만 두어버리는 바람에 ‘사회적 인식’이 없을 수밖에 없는 배우들의 국립극장에서의 노조활동은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술자리에서 그에게 “너 때문에 국립극단이 망한 거야! 너만 계속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하면서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는 작년에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재활훈련을 하면서 힘들게 견뎌내고 있다.

그의 첫 작품 ‘변태’를 보고 이 친구가 ‘자신의 배우인생을 예리하게 조망하는 눈이 있구나!’하면서 감탄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 연극제 참가작 ‘불멸의 여자’를 보고는 자신만이 아닌 사회와 타인까지도 통찰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이 시대에 왜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공연이 비일비재한 우리의 연극현실에서 그의 작품은 대단히 현실성이 뛰어났다. 사실 연극은 문학이 아니라 극장에 손님을 모으는 ‘공연예술’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연극을 문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 연극에는 항상 시대정신이 결핍되어 있었다. 연극이 현실의 반사판이 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가 ‘감정노동자’를 소재로 한 게 놀라웠다. ‘사회적 인식’이 전무하다싶은 연극계에서 그것도 배우로서 신기할 정도였다. 어느 날 신문 기사를 통해 ‘감정노동자들’의 고통을 알게 되고 그들에 관한 강한 호기심이 발동해 직접 취재를 해서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2년 동안 아무도 자기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힘들어 했다고도 했다. 그러던 차에 간신히 서울 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이 동네는 ‘사회적 인식’이 없으니 분명 그런 작품을 접하고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공연이 끝난 다음날 (4월22일) LA로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라면’ 때문에 여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뒤늦게 기사화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대기업 임원이 서비스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여승무원을 폭행해 ‘감정노동자’가 사회 문제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종의 ‘감정노동자’에 대한 여러 사연들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게 되었다.

연이어 제빵회사 회장님이 롯데호텔 도어맨을 지갑으로 폭행한 사건이 인터넷을 달구었다. 이런 것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의 ‘불멸의 여자’는 먼저 연극제를 달구었다. 분명 우리의 연극동네에서 보기 힘든 ‘사회적 인식’을 갖춘 예지력을 뽐낸 수작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연극계의 쾌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가 인생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인식이 얼마나 빈약한 조직인가를, 아니 자신의 문제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조직체인가를 한탄하게 하고 있을 때, 배우 최원석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미리 무대화하는 비상한(?) 재능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공연은 우리가 왜 사회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저 난해성에만 몰두해 관객을 극장에서 내쫒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동네의 엘리트주의자들에게 극장에서 관객들이 무엇으로 극에 몰입하고 공감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절대로 자신의 역사인식의 부족이나 사회적 몰인식을 예술성을 가장한 난해함으로 덮으려 하지 말라! 그는 ‘모든 연극이 정치극’이라는 동서고금의 명언을 명심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우리 연극인들도 특히 배우들은 이제는 자신과 사회를 향한 인식을 명확히 하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배우로서의 최원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아주 크다. 그가 국립극장의 노조활동에 유익했던 것도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동네에서 절실히 요망되는 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

 

남한 사회에 정착한 탈북 여성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북한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 사회가 자신들의 제반 문제에 있어서 ‘사회적 인식’을 가질 수 없음에 있다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가 유지되려면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인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지만 여러 의사가 모이게 되면 ‘의사 사회’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곳에 서열에 대한 싸움이 있고 인간사의 희비극이 존재해서 드라마로 꾸며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연극판에서는 이게 실종되어 버렸다. 예술을 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회적 인식’에 담을 쌓아버리고 사는 것 같다.

솔직히 우리 연극판을 보면 마치 북한사회를 연상케 한다. 북한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실책을 마치 미국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인양 주민들을 호도시켜 ‘미제국주의 투쟁’으로 주민들을 몰아넣고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 연극계도 우리의 문제를 타인에게 미루고 있을 뿐이다.

항상 세미나의 토론은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시비거나 아니면 지원정책의 부재나 ‘복지혜택’이 없음만을 논하면서 우리 자신의 문제점은 숨기고 있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꽤 잘하고 있다. 하지만 멀쩡하던 ‘배우협회’가 어째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자신들의 문제에는 눈을 감고 있다. 우리의 오피니언그룹이 북한처럼 자꾸만 외부로 연극인들의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정부나 지자체가 내색만 안 하고 있을 뿐이지 ‘배우협회’로 인해 연극계에 대한 믿음이 이미 많이 상실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치권의 여야가 힘을 합쳐 두둑하게 지원을 한 ‘배우협회’의 결말을 보고 어느 누가 우리에게 지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구 이런 동네에 지원과 성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북한은 표현의 자유조차도 없는 독재치하여서 그렇다 치자. 연극판의 ‘현실 무감각’은 지능의 결핍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이번 한국연극협회장 선거에서 지방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참담해하는 서울 연극인들을 목격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지루할 만큼 ‘투표지’를 반복적으로 세고 또 세면서 낙선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허탈감에 빠져있는 서울 연극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버리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회적 인식’을 가지려면

 

1. ‘남의 지식’에만 몰두해 학위만 딸 생각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갖는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2. 연극과 무용이나 미술 등 다른 장르와 차별성을 구분할 줄 아는 노력이 필요 하 다.

3. 관객이 무엇에 몰두하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성연출가와 평론가들이 많아지면서 또 ‘극장주의 연극’의 득세해지면서 점점 연극인들의 ‘사회적 인식’이 엷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연극인들의 편중된 정치의식이 외려 자신들의 ‘사회적 인식’을 놓치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해서 오히려 ‘인식’이 갇혀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급속한 경제적 발전과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인식’이 급변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양유업사태’를 보면서 이제는 정치도 한물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아무런 인식의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이래서야 오락극인 뮤지컬이 판치는 현실에서 연극이 살아날 길은 영원히 요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무엇으로 몰입하나?

 

극장에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은 바로 공연이 ‘사회적 인식’을 가질 때라는 것을 오랜 관극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시절에 연극이 관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언제나 연극이 ‘사회적 인식’을 강하게 표출할 때 관객들이 가장 흡족해했다.

요사이 공연된 ‘불멸의 여자’나 명동예술극장이 제작한 ‘러브 러브 러브’에서 놀라운 점은 관객들의 깊은 몰입도이다. 나는 요사이 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이토록 객석이 강한 집중력을 보인 공연은 없었다.

몇몇 난해한 번역극들이 세계연극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지는 몰라도 관객의 ‘몰입도’는 물론이고 출연자들마저도 난해성 때문에 엄청나게 짜증을 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공연들은 극장보다는 워크숍으로 대학극에서 작업을 하는 게 이론가들을 위해서도 더 유용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연극과 연극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와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다. 무조건 공연에서 국적불명의 미장센만 취할 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대한 통찰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를 모면하려고 또 작가의 인식 부족을 감추려고 난해함과 애매함으로 공연물을 도색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도 현실의 애매함을 거두고 자신과 주변을 인식하는 바른 눈을 가진 극작가와 제작자들이 늘어나야 우리의 연극계도 그리고 연극인들의 인생도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멸의 여자’와 ‘러브 러브 러브’같은 공연들이 극장에서 장기간 롱런을 해주어 연극인들의 ‘사회적 인식’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비록 돈벌이는 못해도 우리 연극인들이 ‘불행한 사람들’이 아닌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사람들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의 연극공연은 고전은 물론이고 역사극을 봐도 ‘시대적 정신’이 실종되어 있다. 지나치게 미학만을 추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러브 러브 러브’를 보면서 벌써 우리도 영국처럼 후기 자본주의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작금의 우리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을 빙자한 ‘연극주의’가 아닌 현실을 꿰뚫는 통찰력과 인생을 관통하는 성찰력이 무대에서 살아 숨 쉬어야 극장으로 관객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셰익스피어 연극도 이 시대에 무대에 올릴 당위성이 있어야 관객들이 공감하고 몰입하게 되는 게 연극공연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화려한 미장센과 그럴듯한 배우의 연기로 멋있게 포장만 할 수 없는 게 연극이다.

더구나 뮤지컬이 오락성으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현실에서 연극공연이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려면 연극인들이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어떻게 관객들을 극장에 모을 수 있겠는가?

 

 

3 thoughts on “과연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인가?/ 우상전

  1. 우선 우상전씨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하며 몇가지 말하겠다 배우 강태기의 죽음과 방송의 문제인데 좀 오해를 할수있는 내용일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방송 인터뷰를 요구해와 고인의 죽음에 마지막 길에 애도하는 마음을 전했을 뿐이다 또한 사실 강태기 배우가 어떠한 실수와 과오가 있는것을 세세하게 알수없는 처지이고 그 인터뷰에 그러한 말을 할수 있는 입장역시 아니기에 고인의 마지막 생애의 안스러움을 유추해 말을 한것이다 방송이 사실 세상사의 문제를 일일이 보도하고 비판적 견지기능을 다 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조리 하겠는가? 단 우상전씨가 과도하게 그 프로에 나간 사람들의 의미를 곡해 할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몇자 적어보는것이다 그리고 사실 인터뷰한 내용이 그대로 실린것은 더욱 아니기도하고 필자가 말햇듯이 그래도 한때 좋은 배우였고 그 배우를 지켜내지 못한 연극계 현실이 안타가운 동시에 물론 본인의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 자신의 생을 맞을수도 잇다는 것을 간과 하는 것이지만 같이 연극계에서 늙어가는 배우의 입장에서 개혁의 주체가 누구이고 무엇이 원인인가를 놓고 말하기 전에 오직 배우의 길을 긴긴세월 묵묵히 걸어온 그 사실을 외면하고 그리고 뭣하러 배우의 길을 갈려면 똑바로 가지 하는 비하적 발언은 모욕적으로 들릴수 있기 때문에 몇자 적는다 우리 동시대의 배우 강태기를 배우의 입장 그이상 그이하로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2. 존경하는 우선생님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을 주문하신 탁월한 고견에 박수를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3. “여성연출가와 평론가들이 많아지면서 또 ‘극장주의 연극’이 득세해지면서 점점 연극인들의 ‘사회적 인식’이 엷어진게 아닌가” 생각하신다는 말씀이 아주 인상적이군요. 필자분께서는 다른 이들의 사회적 인식을 비판하기 전에 우선 ‘여성’에 대한 본인의 사회적 인식을 올바로 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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