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스타니슬라브스키여/ 우상전

아! 스타니슬라브스키여

 

우상전(연극배우)

 

올해가 스타니슬랍스키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란다. 그래서 ‘한국연극’ 8월호가 그 분에 대한 특집을 실었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유학파인 연출가 강량원의 ‘메소드를 찾아서’에는 배우 김소희와의 대담도 실려 있었다. 9월호에는 배우 이대연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랜만에 연기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평생을 그 분을 알기 위한 노력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나의 연극 인생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몇 사람의 러시아 유학파들이 그에 관한 글을 실었다. 간단히 그의 인생과 시스템을 소개하기도 하고, 나상만교수는 “러시아 교육계에서 인정하듯이 한국은 그의 시스템이 가장 단기간에 정확하게 수용된 유일한 나라다.”라는 자긍심을 보이고 있었다.

또 여러 의견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세종대 김태훈교수의 “연기예술에는 정도가 없다. 하지만 ‘연기교육’에는 정도(正道)가 있다. 예술을 위한 기초교육에 정도가 없으면 예술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감동적인 논지의 글도 실려 있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기초교육으로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다.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요사이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연기, 연출을 배우러 외국으로 유학을 갈 것인가? 최근까지도 우리는 선진국의 예술문법을 배우러 국외로 떠난다. 하지만 ‘한류’가 세계무대에서 판을 치는 이제는 그들이 우리에게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곧 세계 유수의 배우들과 연출가들이 우리의 연기, 연출 훈련법을 배우러 국내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여기에다 연출가 강량원은 또 다른 지면에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나는 자신의 연극형식을 가진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를 찾았다. 극단의 개성적인 스타일 속에서 오랫동안 작업을 해 온 배우에게는 분명한 개성적인 메소드가 있을 테니까. 메소드라는 게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스텝이 만나 협업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고유한 방법론이 아닌가. 이미 정해진 서구의 연기메소드를 잣대로 삼는 것은 경계했다. 정리가 미진해도 우리의 공연환경에서 나온 연기방법들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김소희에게) 연희단거리패의 연기 메소드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들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 과연 한국이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단기간에 가장 확실하게 수용해서 정착시킨 유일한 나라인가?

2. 과연 우리가 연기의 기초교육에서 정도(正道)를 지키고 있는가?

3. 과연 외국인이 한국어를 못해도 한국에서 연기교육이 가능한가?

4. 과연 우리에게 개성적이고 체계적인 ‘메소드 연기’를 내세울 게 있는가?

5. 과연 이 시대에 연기에 ‘메소드’라는 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개성적인 연출에 따른 배우의 연기를 ‘메소드 연기’라고 칭할 수 있는가?

 

‘메소드 연기’라고?

 

먼저 연출가 강량원이 왜 이 시기에 ‘메소드 연기’를 갑자기 꺼내들고 나왔을까가 나로서는 너무도 궁금하다.

왜 그는 스타니슬라브스키 탄생 150주년에 러시아 유학은커녕 시골 밀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출가 이윤택과 전혀 해외유학 경험이 없는 연출가 이상우에게서 ‘메소드’를 찾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의 말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스타니슬라브스키를 포함한 서구의 방법론은 다 ‘꽝’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의 방식이다. 나는 그들의 시스템을 모른다. 혹 알지라도 이제는 버리겠다.” 이렇게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상만교수는 그의 글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이 한국에 잘 수용된 모범사례로 연출가 강량원과 그의 극단 ‘동’을 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동아연극상’을 수상한 것을 성과로 내세웠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동아연극상’을 믿어도 되는가? 심사위원들을 말이다. 나는 여기서 엄청난 괴리와 부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왜냐면 이제는 이미 세계연극에서 고정된 ‘이즘과 사조’가 사라졌다. 장르의 경계마저 사라져 영화나 비디오와의 차별화도 어려운 시점이고, 이른바 ‘크로즈 오버’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시대에 ‘메소드 연기’를 운운하는 게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는 이런 모든 게 너무나 황당하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좌우간 이런 헷갈리게(?) 하는 풍경이 지속적으로 ‘한국연극’에 전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건 우리 연극계가 연기에 관한 한 아직도 미궁과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우리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의 모범국가라고?

 

물론 나상만교수의 말대로 많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고, 또 그들이 한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는 예로만 치면 충분히 시스템의 ‘모범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러시아 유학파들에 의해서 그의 시스템이 가장 왜곡되게 받아들여진 나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왜곡? 아니 그보다는 연극인들에게 ‘별로 쓸모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나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선 러시아의 교육계가 단시간에 가장 ‘정확하게’ 수용된 나라라는 말에 역설이 숨어있다. 다시 말해 지금 세계가 연기의 기초교육으로 그의 시스템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를 실행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각자의 방법론으로 이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한국만 유일하게 교조주의와 원리주의(?)에 빠져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정확히 그의 시스템을 실행하고 있다는 말이 역설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이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그의 시스템을 ‘성경을 글자 그대로 신봉하는’ 종교의 사이비 세상처럼 말이다.

 

영국유학을 꿈꾸며

 

내가 영국에 유학을 가 볼까하고 우리나라에 공연을 온 영국배우들을 접촉한 적이 있었다. 민중극단 시절이었는데, 그때 영국에서 공연을 온 두 친구들이 있었다. 나름 옥스퍼드대학에서 석사를 했다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을 돕던 중에 그들과 유학을 상담한 적이 있었다.

“영국에 가서 연기를 공부하고 싶은데”

“영어를 잘하는가?”

“아니다.”

“그럼 갈 필요가 없다.”

“왜?”

“런던에 배우를 가르치는 곳이 1000여 곳은 될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하려면 영어가 유창해야 한다. 그런데 당신의 영어실력으로는 입학이 힘들 것이다. 그 정도의 영어능력으로는 좋은 선생을 만나기도 힘들고, 당신 같은 사람을 가르치려는 교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학을 가 봐야 소용없다. 한국에서 스스로 공부를 해보아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유학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비지니스도 아니고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해야 하는’ 연기에서 어떻게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도 못하는 한국 유학생들에 의해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시스템이 한국에 정확히 수용되고 정착하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화자찬’을 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거둘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시실리 베리의 워크숍의 체험

 

그 후에 나는 영국 RSC의 보이스디렉터인 영어권의 거물 시실리 베리 할머니의 워크숍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두해에 걸쳐 우리나라에 온 할머니의 워크숍은 매우 흥미로웠다. 보이스훈련과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장면들을 통해서 배우가 어떻게 상황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를 아주 새로운 방법론-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액션을 통해서 창조해내는 방법론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시실리 할머니의 수업 한 장면을 소개해 보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 밤에 밀회를 하는 장면이다. 시실리 할머니는 이때 제 3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래서 그가 두 사람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침묵하도록 했다.

그랬다가 그가 사라지면 다시금 대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구사하니까 자연히 두 배우 사이에 비밀스럽게 ‘밀회’를 하는 말하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이다. 제 3자를 의식하는 사이에 배우들의 입에서는 비밀스럽고 몰래 밀회를 할 때의 음밀한 목소리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를 배우 자신들이 감각적으로 익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런 방법론으로 현실이 아닌 극적 가상의 세계에서도 배우들이 현실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음 해 두 번째 워크숍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보이스훈련이나 방법론의 개념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내가 한국어를 못해서 여러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한계”라며 자기의 수업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한국에 오지 않았다.

 

중국 학생에게 연기수업을 한 경험

 

예전에 한국어에 서투른 중국 학생을 학교에서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 이때 실감한 게 연기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언어의 장벽’으로 그들이 (언어적) 표현력을 가질 수 없어서였다. 그러니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방법론은 익힐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 자신들이 자신들의 표현력을 숙달하기는 힘들었다.

달리 말하면 중국 학생들이 한국에서 연기수업을 받을 수는 있어도 한국 학생들과 어울려하는 워크숍 수업에서 제대로 된 ‘배역’을 받을 수 없어, 즉 언어의 표현력 부족으로 한국 학생들과 섞여서 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연기교육은 배우가 가장 잘 구사할 수 있는 모국어를 통해서만 표현력 확보가 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중국에 돌아가서 연기교육자가 된다면? 어떻게 가르칠까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한국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정확히 익혔다 하더라도 (한국어로 배운 연기로) 중국어를 사용하는 모국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어떻게 할까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서투른 한국어로 연기 수업을 했다 해도 중국어에 의한 표현력이 없으니 중국에서 배우생활을 하기도 힘들 것이다. 따라서 그가 중국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어를 통한 별도의 표현력을 위한 연기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들

1. 연기의 방법론이 풍부한 시실리 베리가 왜 한국어를 못해서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 연기를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지? 어째서 그는 자신의 방법론이나 접근법으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2. 우리는 연기의 방법론을 연기교육의 전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3. 연기의 기초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국어로 표현력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유학파들은 자신들이 모국어를 통한 표현력을 얻고 있는 것인지?

 

여무영교수의 ‘에쮸드 워크숍’의 체험

 

여선배가 러시아에서 배움을 끝내고 귀국한 후에 그의 ‘에쮸드’ 워크숍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자그마치 40여 일 동안 아침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한국에 아무런 체계화된 교육도 훈련도 없던 그 시절, 그의 시스템에 의한 체계적인 훈련은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30여 일이 지나자 ‘감격’은 사라지고 점점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좋은 방법론을 배우면 뭐하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그러니까 우리의 무지한(?)현실에서 이런 방법론을 어떻게 적용시켜 나의 역량으로 키워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걱정,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대본을 받으면 책상에 앉자마자 읽어대기 시작하는 우리의 무자비한(?) 창조의 접근 관행에서 어떻게 이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방식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료식을 하는 날 나는 이런 우려를 직접 표현하기도 했다. 내일 당장 극단에 가면 “야, 거기 올려!” “거기서 띄어야지!” “그래가지고 들리겠니!” 하는 꾸지람을 들어야 하는데 ‘즉흥극’에 의한 과학적 접근법이 우리 처지에 가당치나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즉흥극’을 현장에서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정말 그 때의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는 게 도리어 죄’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워크숍을 통해서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접근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이 워크숍이전과 이후에 작품을 대하는 감각이 달라졌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수업이었다.

하지만 배우가 실질적인 표현력을 높이는 데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배우가 표현력을 높이는데 필요한 파트의 수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배우들에게 표현력의 잣대를 결정짓는 목소리를 내는 음성훈련과 화술훈련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인 훈련이 아닌 배우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소리를 내서 연기력을 발휘할 텍스트(대본)가 한국어라면 당연히 배우가 연기력을 발휘하려면 한국어에 의한 표현력을 가져야 하는 화술훈련이 ‘에쮸드’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유학파들이 러시아어를 잘하지 못해 그곳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력을 관장하는 러시아어에 의한 화술훈련을 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한국에서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영국의 시실리 베리 할머니처럼 단지 목소리를 잘 내도록 하는 음성훈련이나 시스템을 소개하고 방법론을 전수하는 ‘에쮸드’와 같은 수업이 전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러시아 유학파도 시실리 베리 할머니가 겪은 딜레마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든 생각은 이런 ‘에쮸드’ 훈련은 극작가나 연출가들이 받으면 더 유용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배우보다 그들을 위한 훈련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그 워크숍 이후에 작품을 보는 눈이 분명해짐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주 뛰어난 훈련과정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을 어떻게 배우들이 자신들의 표현력을 높이는 데까지 접목시킬 수 있느냐 하는 ‘업그레이드’를 숙제로 남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고려인(高麗人) 교수한테 배웠다고?

 

나는 지난번 글에서 아프리카의 우간다 연극인들이 보여준 청소년극에 감탄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므로 해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므로 해서 영국의 좋은 연기방법론을 훈련하고 터득한데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배우가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곳에서 연기를 배우고 훈련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 유학파들은 전혀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연기술을 익혔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설령 서투르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고려인들에게 연기를 배웠다 해도 이게 완벽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왜냐면 대학에서 나에게 연기를 가르친 스승은 바로 일본이 아닌 미국유학의 1기생인 교수였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보기에) 한국어로 표현되는 연기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거기다 경상도사투리를 사용해서 더욱 연기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나는 그 분을 통해서 연기력을 확보하기는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미국에서 배우로 오랫동안 활약하신 한국어 표현에 서툴러 한국에서 배우활동을 하지 못하는 원로배우를 여기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례들은 모국어를 통한 표현력을 갖지 못하면 실제로 제자들에게 연기력을 전달하기 힘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나라다. 따라서 우리의 연기교육은 잘 배워야 방법론이나 시스템만을 익히는 게 고작일 뿐이다.

이렇게 기초교육이 정도(正道)를 걸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니 (김태훈교수의 말대로) 당연히 ‘연극예술’이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런 형편에서 ‘동아연극상’을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의아한 것은 한국연극계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김태훈교수의 희망대로)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연기교육을 배우러 오는 시대가 도래 할 거라는 자신감의 표출은 터무니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세계에서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장대한 꿈을 꾸는 것일까? 혹 자신들이 러시아에서 수업하듯이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게 연기교육인데, 이를 무시하고 어떻게 정도(正道)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를 묻고 싶은 게 사실이다.

 

연기교육이 정도(正道)로 가려면

 

1. 배우들이 책임을 져야

 

이런 형편에서는 연기교육이 ‘워크숍 공연’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왜? 이를 통해서만 표현력을 얻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연출가들에 의해서 오로지 공연을 통해서만 연기를 습득할 수밖에 없는 게 엄연한 현실임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상적인 연기교육을 지향하려면 만만치 않는 모국어 표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확고한 자기 방식의 방법론을 갖고 있는 배우들에 의한 기초교육을 희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시실리 베리처럼 교육 전문가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우선적으로 표현력을 가진 현장인과 방법론을 터득한 이론가의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이를 실현하려면 이론가와 현장에서 직접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모임체를 구성하는 게 급선무다. 그리고 이를 정례화해서 ‘우리 방식의 교육 방법론’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쉬쉬하면서 자신의 약점이 들어날까 봐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연기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언어의 장벽’을 보완할 대책을 마련해야, 내가 말하는 ‘죄짓지 않는’(?) 연기교육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연출가 강량원처럼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메소드 찾기’에 나선 거라는 연극인들의 오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서서 연기에 대해 이해하기도 힘든 이론화만을 시도하는 것은 한국연극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게 될 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육가나 전문가를 자칭하는(?) 연극인들은 연극인들 앞에서 입시처럼 ‘자유곡, 지정곡’의 연기실현을 직접 선보이고, 그에 따른 자기 방식의 방법론을 전개시키는 공개 시연회를 ‘예술가의 집’에서 열어 이를 검증받도록 하는 게 옳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한국연기(연극)는 영원히 혼돈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연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를 빠르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부족함을 간직한 모든 배우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우선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 등의 공공기관이 나서야 하며, 이를 통해 이에 대한 기초를 가진 배우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우선 해외파로 현재 한국에서 열심히 배우활동을 하고 있는 김태훈교수, 국민대 김혜리교수, 배우 정경순, 이항나, 우현주, 김용준 등을 모아서 한국현실에 맞는 방법론과 표현력을 정리해야 한다.

그 외에도 유학파로 맹렬히 배우로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이 가능한 배우들을 찾아 참가시키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제는 선배들이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이들이 한국연극에 공헌할 수 있는 열정을 갖도록 해주어 할 것이다. 정말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거야 말로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한국식의 연기교육 방법론을 정착시키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조기에 정착시키는 진정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즉 대학이 연기교육에서 신뢰를 얻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의 출발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없으면 대사 한 줄도 할 줄 모르는 교사나 연출가가 배우가 지껄인 대사를 현장에서 듣고 “이렇게 하란 말이야!”로 연기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영원히 착각하게 될 것이며, 전혀 방법론도 못 갖춘 배우가 역시 현장에서 “이렇게 하란 말이야!”나 ‘따라 하기’로 연기교육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실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나의 의문

 

내가 국립극장에서 생활을 할 때 생긴 의문은 ‘왜 우리만 연기를 연출가가 가르치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무용도, 발레도, 오페라도, 판소리도 직접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가르친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들은 여긴다.

그런데 왜 우리만 연기를 배우가 가르치지 않고 연출가들이 가르칠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왜 (특히 배우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장민호나 백성희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어째서 연출가인 이해랑선생이 연기를 가르쳤으며, 이로 인해 국립극단 연기가 망가졌다고 선배배우들이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옛 국립극단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왜 이를 개선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일까? 이는 분명 배우들이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여겨 연출가 스승들(?)한테 저절로 기가 눌려버린 결과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돌아가신 차범석선생은 배우들에게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과 같은 접속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시곤 했다. 하지만 배우들이 이에 숙달되지 못한 것은 사실 일상의 소리 말에서는 이런 ‘접속사’를 사용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어를 이렇게 구사하면 ‘선생님 강의하듯’ 말한다고 ‘또라이’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접속사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건 글말(대사)의 특성이다. 따라서 연출가나 극작가들이 배우의 화술을 듣고 짜증을 낼 게 아니고 ‘하지만’ 다음에 다음 말을 잇는 게 좋은지, 띄는 게 좋은지를 판별해 (강조의 정도에 따라) 배우들의 ‘말하기’를 도와주거나 아니면 이런 ‘말하기’를 최대한 줄여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사실 ‘소리 말’과 ‘글말’의 특성을 잘 몰라서다. 따라서 이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막상 ‘선생’인데도, 배우들만이 이런 억울함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처럼 연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상호간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기를 해보지 않은 자들이 외려 연극판에서 더 득세를 하니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연출가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니가 한번 해보라! 그렇게 쉬운지… 나도 (듣기만 하면) 너에게 엄청난 ‘지적’을 할 수 있다! 아마 너 정도 경험 없는(?) 배우는 떨려서 입도 제대로 못 벌린 것이다!”

배우 연기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광(?)을 하는 어떤 연출자가 공연 중에 무대도 아니고 그저 객석에서 겨우 두어마디 내뱉으면서 자기 차례가 되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무대에서 연기도 해보지 않은 자들이 연기를 가르치고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겠다고 나서니, 이런 현상은 연기의 후진국인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슬슬 연극계의 실세(?)로 등장하는 연출가 강량원은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연극판의 이런 부정적인 현상들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연기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나, 이로 인해 연기가 지나치게 ‘이론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통촉하기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실에서도 배우들이 대들기는커녕 되레 그들의 평가에 ‘기가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3. 초대 KBO(프로야구) 사무국장의 증언

 

오래 전에 프로야구의 초대사무국장을 지낸 분의 일행을 동숭동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일행들이 일제강점기 장안의 부호였던 ‘경성고무’의 사주의 아들이었다고 그를 소개했다. 그래서 본인도 일찍부터 야구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한국 연극배우의 수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돈암동에서 부잣집 아들로 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그가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사는 가난한 조연급 연극배우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가난한 그 배우의 집에 가보고 그가 엄청난 ‘지성인’으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에 너무나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분에 반해 그를 따라 배우생활을 조금 해본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배우는 월북을 했는데, 나중에 6.25가 터지자 인민군 장교복을 입은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같이 월북하자고 권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사이는 그 분처럼 그렇게 지적 수준이 높은 배우는 없을 거라면서 무척 아쉬워했다.

이른바 문,사,철에 밝았으며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박학다식한 배우였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배우의 지성에 탄복했던 걸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분을 통해 민족의 비극이 바로 연극의 불행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남자배우의 대명사였던 황철선생 같은 분이 월북한 후에 북한에서 연기에 관한 저서를 남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배우들이 남북분단으로 월북하지 않았으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연기교육의 판도는 물론이고, 지금 연극판의 형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정말 그 당시의 연극배우들의 수준은 엄청나게 높았던 게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으로 갈리면서 이런 인재들이 사라져버린 게 되어, 즉 이론과 표현력을 동시에 가진 경험 많은 ‘지성파배우’들이 월북해버림으로 해서, 결국 당시에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은 일본 유학파들이 모든 걸 장악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연기도 ‘이론가’가 가르쳐도 된다는 인식이 ‘고정관념’으로 정착해 버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연기수업도 그들이 사라진 후 배우가 아닌 연출가들의 몫이 되고, 이로 인해 연기교육이 ‘이론화’ 되어버린 비극이 이 땅에 정착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남북의 대치상황이 극에 달았고, 반공법에다 유정회 국회의원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이를 누구도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한국은 ‘노래를 못하는’ 작곡가가 ‘노래를 하는 성악가를 가르치는’ 세계 최초의 나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많은 ‘미신’이 연극계에 만연하도록 만들었는데

 

1. 배우는 무식해도 가능하다며, 조금만 유식하면 연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배우가 유식하면 연기력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2. 외국어를 못해도 자신들이 연기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인해, 한국어를 더듬거리는 외국유학생을 입학시켜 연기를 지도(?)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3. ‘메소드’만으로 연기예술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4. 누구나 스스로 연기에 관한 한은 감식안이 있다고 자부하게 되어 ‘동아연극상’의 심사위원을 해도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며

5. 해외유학을 해 ‘학위’를 따면 연기는 ‘덤’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

 

4. 한 가지 ‘대표적’ 사례

 

얼마 전 할리우드에서 ‘설국열차’를 찍고 돌아온 배우 송강호는 인터뷰를 통해 미국배우들과의 작업에서 놀란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건 다름 아닌 연습 첫날 자신은 대본을 보면서 읽는데, 미국 배우들은 이미 다 암기된 상태로 리딩에 임하더라는 것이다. 너무 창피해 대본을 어떻게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극작가 이만희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들었다. 미국에서 자기 작품의 리딩(물론 영역된 대본)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첫날 독해에 이미 배우들이 대사를 거의 암기한 상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암기는 고사하고 50여일 연습기간 중에 대본만을 들여야 보면서 리딩만 하는 기간이 자그마치 30여일이나 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런 연출가들은 대사를 잘하는 게 중요해서 오랫동안 리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렇게 리딩을 오래 하면 ‘우리말’을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연출들이 ‘우리말을 못하는 배우는 짐싸!’라고 외치지만 되레 리딩을 너무 오래시켜서 우리말을 더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한국의 연출가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글말인 대사를 소리 말의 리듬으로 살려내려면, 처음에는 배우가 자기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직접 들으면서 목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대사가 갖는 의미와 그에 맞는 강조, ‘끊어 말하기’가 가능해져 정확한 ‘우리말’ 리듬(억양)을 살려 낼 수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연출가들이 자신의 눈과 귀로 얼마든지 ‘우리말’의 리듬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만 실제로는 ‘모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연출가의 오만이 배우들을 곤궁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교사들의 직접적인 연기 체험에 의한 교육과 선진교육의 방법론의 도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배우들이 첫날부터 대사를 암기한 상태에서 연습이 임하는 관행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이미 그들이 집에서 대본을 다 외운 후에 연습장에 나와서 정확한 ‘소리 말의 리듬’과 상대배우들과의 교류를 통한 정확한 ‘리듬 만들기’에 온 신경을 쓰는 이유를 알 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양 배우들이 자연스러운 자기나라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으면 배우 송강호는 그 이후에 자기도 대본을 다 외운 후에 연습장에 나가게 됐다고 했다. 역시 우리 배우들이 너무 놀라더라는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해외파들이 현지에서 전혀 현장 경험은 제쳐주고 마냥 학교에서 학위만 따가지고 귀국하는 속성에 대해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러니 이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연기의 접근관행마저도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저 학위를 따는 데만 정신을 팔아 현장작업이 주는 귀한 체험을 놓쳐 연극대학이 5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혀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훈교수는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올 거라는 희망을 내세우지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배우도 한국으로 연기를 배우러 오기 위해 일부러 한국어를 습득하지도 않을 것이며, 설령 그들이 한국어를 유창히 구사한다 해도 한국만큼 연기술이 후진 나라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오자마자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연습의 3분의 2를 리딩으로 보내는 나라는 없으며, 이런 연습관행을 지속하는 연출가를 우대하고 존경하는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대극장에서 공연할 작품을 좁은 연습장에서 연습해서 배우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발성력을 조절하지 못해 공연 첫날부터 쩔쩔매게 하는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자기가 설 극장무대에서 연습을 하는 게 일반화되어 있다. 이런 자그마한 관행마저도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는 나라에 외국인들이 연기를 배우러 오는 시절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잠꼬대’에 불과할 뿐이다.

대본만 나오면 ‘말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읽기’ 시작하는 나라에서, 아직도 보이스훈련의 개념도 없는 나라에서, (우리처럼) 언어를 제키고 오로지 시스템만을 배우러 해외로 유학을 가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해외에 유학을 가서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은 하지 않은 채, 단지 학위를 따는 데만 전력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중요한 실천하나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이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1. 과연 해외유학이 진정으로 한국연극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2. 왜 우리는 해외유학에서 ‘학위 강박증’에 시달려야 하는가?

3. 세계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메소드 연기’를 칭찬하는 한국의 평론가나 기자들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작곡가와 가수

 

이 두 직업의 사람들은 ‘음감’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작곡가가 음감에서는 더 탁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음감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리 내지 못하면 (목소리로 표현할 재능이 없으면) 절대로 ‘가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수라는 직업은 음감을 자기의 입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배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대사를 자기의 목소리로 표현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배우질’이 가능하다. 즉 대사인 글말을 보고 소리 말(흔히 우리말이라고 함)의 억양과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발성력)을 가진 사람만이 배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잠재적 재능이 좋은 사람을 우리는 ‘천재적 배우’라고 한다.

따라서 배우(연기)교육은 좋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며, 즉 우리말을 잘하는 것이며 시스템이나 메소드도 이를 잘하기 위한 ‘보조수단’인 게 확실하다.

그러니까 작곡가가 화성학이나 기타 표현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나 교육, 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교육은 가능하지만, 직접적인 신체적 표현력을 위한 핵심적인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연기교육은 ‘작곡가가 성악가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세계 유일한 나라가 되는 셈이다.

 

한국연기의 현주소

 

1. 오태석의 연기 ‘메소드’

 

한국에서 ‘메소드 연기’를 거론하려고 들면 먼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선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른바 ‘논두렁 화법’과 ‘맨발로’ 무대에 서는 그의 연기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국립극단 예술감독 시절, 극단 ‘목화’의 공연을 가지고 런던에 공연을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 국립단원들과의 좌담에서 제일 먼저 꺼낸 일성이 “영국에서 나의 ‘논두렁 화법’이 인정받았다‘고 하면서 무척 흡족해 했다. 그의 첫마디에서 본인도 ‘논두렁 화법’이 무척 신경 쓰였던 것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아마 ‘동양연극’의 연기방식으로 여겼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논두렁 화법’을 제일 먼저 구사한 분은 연출가 김정옥선생일 거다. 그의 ‘도적들의 무도회’를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 연출가와 함께 관람을 했었는데, 그 친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배우들이 상호 간에 교류를 하지 않고 객석을 보면서 대사를 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면서 우리에게는 상호교류를 위한 ‘배우 둘이서 막대기를 가지고 하는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었다.

아마 영국 평론가들도 일본 ‘가부키’의 영향쯤으로 받아들이고 넘겼을 것이다. 더구나 한복을 입고하는 공연이어서 그나마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동양연극의 ‘독특함’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맨발연기’는 문제가 좀 더 심각하다. 그의 ‘태’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출연자 중에 유독 원로인 장민호선생만 신발을 신고 있다. 그 분의 논리는 “일본놈들이 다다미에서 연기할 때나 신발을 벗는 거지!” 일제시대를 살았던 노인의 확고한 주장이셨다. 그래서 그 분 혼자만 신발을 신고 무대에 등장했다. 이건 한국배우가 할 짓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후 오선생이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자 계속 버티기 힘들었던지 처음으로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등장하셔서 한동안 나 혼자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맨발’도 자신의 작품을 공연할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문제는 소튼 와일드의 ‘우리 읍네 ’와 같은 번역극을 공연할 때다. 여기서도 역시 ‘맨발’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유장수로 나오는 배우 김종구가 춥다고 귀에 ‘털 귀마개’를 하고 등장하면서도 발은 (추운데도) ‘맨발’로 등장하는 ‘코미디’(?)가 무대에서 연출되는 것이다. 너무나 억지스러워 공연 후에 ‘합평회’에서 나는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무대 위 배우가 귀가 시립다고 귀마개를 하면서, 발은 시립치 않다고 맨발로 나오는가”하고 말이다. 내가 이런 일화를 끄집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강량원이 시도하는 ‘메소드 연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일대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작품에 따라 자신의 메소드를 적용시키기 힘들어 고민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문제로 같이 작업을 하던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합치기도 하는 ‘반복’을 엿볼 수 있다.

솔직히 연기에서의 메소드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이게 힘든 것은 단적으로 희곡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 때마다 연기의 패턴을 달리해야 하는데 있다. 더구나 우리처럼 연기의 최후진국에서는 ‘메소드의 연기’가 자칫 연기를 왜곡시킬 수 있어 더욱 그렇다.

 

2.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8월호에서 연출가 강량원과 배우 김소희의 대담을 읽고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희단거리패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러갔다. 이 공연을 보고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우선 연희단의 김소희대표는 강량원의 칭송에 홀려 말려들어 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연희단이 자기들의 연기가 자신들의 연극을 위해 ‘개성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가지고 있을지라도 ‘메소드 연기’로 이를 표방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 이를 강량원 식의 ‘메소드 연기’로 지칭한다면, 가령 늙은 내가 이 작품에서 젊은 ‘스탠리’를 연기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머리를 염색하고 약간 젊고 육감적인 가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조금의 ‘양아치’ 냄새를 풍기면서 연기를 하면 될 것이다. 팔뚝에 문신을 하면 더욱 ‘스탠리’로 보일 것이다. 무식하고 동물적인 냄새를 우선 몸에서부터 풍겨내는 것이다.

명동극장 같은 대극장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거리가 멀어 더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긴 영국에서도 그 옛날에 환갑을 넘긴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젊은 ‘햄릿’을 연기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면 많은 기자들과 평론가이신 박정기선생은 분명 ‘우상전의 스탠리, 그가 천재적 연기를 보이다’ 등의 극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만들어진 연기’와 진정한 인물을 창조하는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한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메소드 연기’가 창궐하면 ‘적역’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고, 이른바 배우의 ‘심리적’ 연기는 다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알맞은 ‘목소리’와 ‘액션’을 개발해 적절히 구사하면 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어 배우들이 인물창조와 캐릭터를 표출해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량원은 스타니슬라브스키 이론이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이나리 스트라스버그에 의해서 ‘메소드 연기’로 둔갑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영화 ‘자이안트’에 출연한 전설의 배우 ‘제임스 딘’이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유만으로 입을 벌리지 않고 대사를 오물거려 실제로는 전혀 전달이 되지 않는 배우였다고 후세대가 ‘메소드 연기’의 맹점을 지적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메소드 연기’가 ‘폼만 잡는’ 연기를 하는데 공언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한마디로 (미국의 예를 들지 않아도) 러시아에 유학한 경험을 가진 연출가 강량원이 개인들의 연기방법론을 어떻게 ‘메소드 연기’로 이해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2. 좌우간 ‘메소드 연기’로 인정하기로 하고 그 공연을 한번 들여다보자. 사실 그곳에서 ‘메소드 연기’를 하는 사람은 김소희와 스탠리로 분한 이승헌 두 사람 뿐이다. 나머지 출연자들은 평범한 ‘비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동생인 스텔라의 연기가 블랑쉬보다는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렇다면 이는 아주 모순된 이론이 되는 것이다. 왜? ‘메소드 연기’의 생명은 그룹이 메소드에 의한 ‘통일된 연기’를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로지 주인공만이 ‘메소드 연기’를 한다?

그리고 이건 각자의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이 다르다고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모든 배우가 메소드연기를 할 경우에 우선 극의 전반적인 템포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다른 배우들이 자연스러운 연기로 공연의 템포를 받쳐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템포가 쳐져 어쩌면 정말 답답해서 관람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메소드 연기’로 일관했다면 ‘리얼리티’가 살아져 ‘상징주의’나 ‘표현주의’로 비쳐질 공상이 커질 것이다. 연출도 이 점을 걱정해 두 주인공만에게만 ‘메소드 연기’를 주문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생 스텔라는 그저 주인공 블랑쉬와 동등한 배우로서 출발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받쳐주는 배우’로 머물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일단 ‘메소드 연기’가 되려면 당사자가 이를 표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어떤 개인이 임의로 ‘메소드 연기’로 간주해버리면, 이로 인한 논란을 ‘연희단거리패’가 감수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연희단이 이런 방식의 연기를 펼치는 것은 한정된 배우들로(거기다 밀양에서 생활해야 해서) 많은 공연(역할)을 소화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육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걸 갑자기 강량원이 ‘메소드 연기’라고 하니 황당해지는 게 사실이다.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도 이에 공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당사자인 대표 김소희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호의적인 반응으로만 이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9월호의 배우 이대연도 마찬가지다.

 

1. 작품의 풍이나 연출의 의도에 따라 (너무나 당연히) 꼭 ‘메소드’가 아니라도 연기의 표현이 존재할 수 있으며

2. 시대의 요구와 자신들의 바람이 존재하기도 하며

3. 한국처럼 ‘좋은 연기’를 구경하기 힘든 곳에서는 ‘상대적 평가’가 불가해서 당연히 관객들이 안목을 갖기도 힘들어, 자칫하면 해서는 안 될 연기가 ‘메소드 연기’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3. 연출가 이상우(차이무)의 연기론

 

연출가 이상우와의 경험은 국립극단에서의 공연 ‘마르고 닳도록’였다. 그의 연기철학(?)은 왜 배우가 일상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가였다. 그래서 나에게도 어떻게 일상에서처럼 (자기 말을 하듯) 대사를 치지 못하는가를 항상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는 말을 잘하는 배우들이 어째서 대사만 치면 달리 목소리를 내고 다른 리듬으로 말을 하는가에 항상 답답해 한 게 연출가 이상우였다.

 

그럼 왜 그럴까? 간단히 설명하면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1. 대사가 글말이어서 그렇다. 일상처럼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여서 그렇게 된다.

2. 내 말이 아닌 인물의 말이어서 그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려다가 그렇게 된다.

3. 자기 말이 아니어서 말의 ‘내용’에 집착하지 못하고 ‘리듬’에 더욱 신경을 써서 그렇게 된다.

4. 일상어와 달리 ‘호흡과 발성’이 달라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없어서 그렇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단 여기서 그치겠다.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않으면 배우가 글말을 소리 말처럼 말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출가들이 배우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소리를 내면 일상처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배우가 정확한 일상의 리듬(억양)으로 대사를 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문어체가 심하면 일상과 다른 리듬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배우가 대사로 ‘소리 말’처럼 말하기가 절대로 쉽지 않다. 더구나 문어체가 강한 번역극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그의 명동극장에서의 ‘광부화가들’을 보면 구어체를 위한 번역자의 노력과 배우들의 강조를 위한 자연스러운 ‘제스처’로 훌륭한 대극장 공연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우리 배우들이 손을 통한 제스처를 쓰지 않는데 반하여 ‘차이무’ 배우들의 제스처는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달리 말하면 배우가 ‘생각하고’ 말하기 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말하기를 차이무가 무대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연출가들은 답답해만 하지 말고, 어째서 배우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지를 살피고, 이를 위한 개선점은 없는가를, 또는 리허설에서 접근법을 달리할 궁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리듬’이 아니라고 배우들에게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를 어렵게 설명하려는 ‘이론화’로 꾸미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특히 작가와 연출을 겸하는 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작가들은 마땅히 자기가 선호하는 리듬으로 대사를 쓰기 때문에 이들은 연출에서도 당연히 배우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리듬대로 목소리를 내줄 거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딩 첫날부터 아예 배우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의 요구대로 강요하는 작가 겸임 연출가들도 많다.

2 thoughts on “아! 스타니슬라브스키여/ 우상전

  1. 우상전 선생님 너무나 속이 시원합니다 제가하는 고민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큰 힘됩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좋은 글, 좋은활동 많이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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