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연우회의 <라 쁘띠뜨 위뜨>
오세곤
작품: 앙드래 루생 작, 심상필 번역, 이대영 연출 <라 쁘띠뜨 위뜨>
관람일시: 2013년 12월 29일 오후 8시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매년 국내 초연의 신작만을 선보이는 화동연우회가 2013년 선택한 작품은 프랑스 앙드레 루생의 1947년 작 <라 쁘띠뜨 위뜨>였다. ‘라 쁘띠뜨 위뜨’는 ‘작은 오두막’이란 뜻이다. 아마 주인공들이 난파를 당해 머물게 된 무인도의 작은 오두막 때문에 붙인 제목일 것이다. 파리 초연 당시 1500회 매진을 기록했고 1950년부터 3년 동안 런던 웨스트 앤드에서 인기리에 공연된 대히트작이라고 한다.
<라 쁘띠뜨 위뜨>는 전형적인 불르바르 연극(Boulevard Theatre)이다. 불르바르 연극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통속극 정도가 된다. ‘통속’이나 ‘대중’, ‘멜로’, ‘웰 메이드’ 등의 표현은 왠지 예술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연극에 관한 한 그것은 편견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연극의 필수 구성 요소에 관객이 포함되는 한 그렇다. 왜냐 하면 이때의 관객은 단순히 ‘보고 듣는 객’이 아니라 ‘보고 듣고 이해하고 나아가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연극 작품을 문제 삼는 건 적절치 않다. 물론 그 즐거움이 말초만 자극하는 것인지 속을 후련하게 하는 것인지는 가려야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인간에게 유익한 예술적 즐거움에 틀림없다. 앞서 ‘통속’을 필두로 열거한 단어들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어찌 보면 관객다운 관객을 양산하는 좋은 연극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연극은 인간을 위로해 준다. 늘 고단한 삶 속에 연극은 한 가닥 쉼터가 될 수 있다. 연극은 가상의 세계를 다룬다. 가상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 그렇게 상상의 힘으로 허구의 세계를 여행하고 나면 일상의 고된 짐을 버텨낼 새로운 힘이 생기는 법이다.
<라 쁘띠뜨 위뜨>는 한 여자와 여러 남자의 이야기다. 보통 일부다처(一夫多妻)제는 있지만 일처다부(一妻多夫)제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유쾌한 상상력의 발동이다. 물론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일은 대부분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뿐 현실에서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내용이 전개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극 성향의 심오한 극이 될 것이다.
한 공간 안에서 정식 부부와 불륜의 상대들이 뒤섞여 소동을 벌이는 것은 서양 코미디의 전형적 상황이다. 그런데 <라 쁘띠뜨 위뜨>는 그런 소동이 없이 한 여자를 두 남자가 공유해야 하는 상황을 차분히 논리적으로 설득한다. 오랫동안 불륜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고백을 하면서 이제부터는 공개적으로 정식 부부 관계와 불륜의 관계를 병행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말려 결국 자기 부인을 친구와 공유하게 되는 필립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황에 길들여지고 심지어 즐기게까지 된다. 반면에 온갖 궤변으로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앙리는 시간이 갈수록 불편해진다. 아마도 숨어서 하는 나쁜 짓의 쾌감이 사라지니 왠지 싱거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엉뚱한 발상 속에서도 인간의 묘한 본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코미디는 호흡과 템포가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도입부의 공유 제안으로부터 절묘한 논리의 전개, 그리고 두 남자의 태도 역전 등까지는 상당히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문제는 원주민의 등장 이후이다. 그것은 원주민이 사용하는 몸짓 언어가 그 이전까지 논리를 받쳐준 구술 언어만큼 즉각적인 전달력을 지니지 못 하는 데서 비롯된다. 적어도 쉬잔느와 원주민 사이 소통이 되었을 때 관객들도 같은 순간 깨달으며 웃음이 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이 전개되고 한 호흡 뒤에 “아, 소통이 됐다는 뜻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나오는 웃음뿐이었다.
필립 역의 이근희와 앙리 역의 이현우는 절묘하게 역전되는 두 캐릭터를 적절하게 소화해 냈다. 둘의 연기는 마치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듀엣 그룹 같았다. 여기에 쉬잔느 역의 서정연은 두 남자를 거느리다 나중에 원주민까지 마다 않고 받아들이는 부러운(?) 여성의 역할을 천연덕스레 해내고 있었다. 이에 비해 역시 원주민은 템포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다소 맞지 않았으며, 사실은 원주민이 아니라 역시 난파당한 주방장이라는 사실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번역 과정에서든 연출 과정에서든 해결이 되었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라 쁘띠뜨 위뜨>는 화동연우회의 23회 정기공연이었다. 매년 한 작품을 공연했으니 창립 23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그렇게 연륜도 있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량도 상당하다. 무엇보다도 관계되는 우수 인력이 많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그러나 연극계 입장에서 볼 때 그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분명 약점이다. 매년 이어지는 화동연우회의 공연이 동문 애호가들만의 잔치가 아닌 연극계 전체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려면 어떤 변화와 보완이 필요할지 깊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