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정치/ 우상전

                 연극인들의 ‘정치성향’에는 문제가 없나?

 

                                           우 상전(연극배우)

 

“수백만의 사람이 각자 제 영역에서 작은 행동을 하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그 작은 행동들이 하나로 뭉쳐서 거대한 사회운동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복종하기를 거부하면 권력을 쥔 자들도 힘을 잃습니다. 따라서 민중에게는 힘이 있어. 조직하고, 강력한 운동을 형성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제도정치란 투표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제도가 아닙니다. 정부나 정치가들이 먼저 나서서 정의가 실현되고 불의가 바로잡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사회운동의 힘에 반응할 뿐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자기의 연설에서 한 말의 일부라고 한다. 문화비평가인 진중권이 이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이 그러할 진데 한국은 오죽하리라! 그래서 나는 정치를 맹신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성 집단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그들의 노선을 쫒지도 않는다.

 

신뢰할 수 없는 한국정치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제로 운영되는 유럽 정치에서는 좌파정권이 집권을 하면 예술인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공연예술가들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왜? 어디서나 지원금 때문일 거다. 예산도 늘려주고 대우도 우파정권에 비해 훨씬 더 좋아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금까지 좌파인 박원순시장이 등극했지만 여전히 서울연극협회는 가난(?)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이렇게 많은 원고를 써도 협회로부터 단돈 10원 한 장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연극협회가 발행하는 ‘한국연극’지에는 A10용지 한 장을 쓰면 4만원을 준다는데, 나는 한 번에 평균 10장 이상을 써도 단돈 10원도 받지 못하고 구설수(ㅋㅋ)에만 오르고 있다.

왜 그럴까? 이건 단적으로 한국의 문화예술판이 좌파와 우파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예총’과 ‘민예총’으로 분리되어 ‘따로따로’ 놀기 때문일 거다.

내가 장충동 국립극단에 있을 때의 일이다. 노무현정부 시절, 공모로 국립극장장을 모집했는데, 공모에 추천되고도 두 달이 지나도 추천자가 부임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소문만 들려오는 것이다.

추천자가 ‘민예총’출신이 아니어서 공모에 당첨됐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사표를 종용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예총’ 출신을 심으려고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 추천인도 당시에 집권여당의 고위인사와 친인척인데도 말이다. 그때 청와대가 민다는 인사는 지금 서울에서 공공극장의 책임을 맡고 있다.

왜 노무현 정부는 국립극장장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국립’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파인사의 ‘취직자리’를 구해주는 게 더 긴요했던 것일까.

그 때문인지 전임인 김명곤극장장이 당시 문광부 장관으로 영전을 했음에도 한번도 자신이 머물렀던 국립극장을 찾지 않는 기록을 세우고 임기를 마쳤다. 사실 그는 극장장시절 극장장의 직급을 공무원 2급에서 1급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맞은편 자유센터를 구입해 국립극장의 별관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포부를 밝히는 등 굉장한 계획을 제시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자신이 재임했던 국립극장을 단 한 번도 찾지 않고 그만 두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정권에서 보았듯이) 우리 문화계의 지형은 진보냐 보수냐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예총’ ‘민예총’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출신성분에 따라 ‘따로따로’ 논다는 것이다. 한국정치가 연극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연출가 박근형이 ‘노무현은 잘못이 없다. 그래서 나는 편향성이다’는 요지의 신문인터뷰를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사팔뜨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보지 못하고, 보아도 영상이 비뚤어져 보이는 것 말이다.

얼마 전까지 ‘이념연극’으로 난리를 치던 세종문화회관이 이제는 단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부 인기인들을 불러다 가장 상업적인 뮤지컬을 하면서 그나마 졸작이라고 흉을 잡히는 걸 보면서 정말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적으로 서협이 ‘민예총’ 계열이었으면 박원순시장도 지금껏 우리를 이렇게 홀대했을까를 싶어 하는 말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국처럼 3류정치로 정쟁이 심한 나라에서 지원금에 목을 매는 예술가나 단체가 특정 정치세력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극히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지금 우리의 정치판도는 ‘민주당’과 ‘친노그룹’은 선거를 위해 당적만 일치한 정치연대일 뿐, 성격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울연극협회가 문재인후보를 지지하고 난 후에 지금처럼 민주당이 당권을 차지하면 ‘친노’라고 구박받을 것이고, 친노가 정권을 잡으면 ‘민예총’이 아니라고 따돌림을 당할 게 뻔하다.

그러니 새누리당의 집권 하에서는 문재인후보를 지지했다고 당연히 괄시를 받을 것이고, 고개 한 번 쳐들어 말하기도 힘들 게 생겼다.

그러니까 이제 서협은 어느 정권이 장악을 해도 ‘버림받는 단체’가 되는 불운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간직하게 된 셈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옆에 놓여진 신문의 일요신문의 광고가 눈에 띈다. 새누리에서 ‘김황식 전총리가 나서면 박원순 위험, 정몽준과 붙어도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보인다. 감사패까지 주었는데 내년 선거에 박원순시장이 떨어지면 서협은 어떻게 되나? 정말 걱정이 앞선다.

나는 서울연극협회가 만들어질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찬동을 한 사람이다. 앞으로는 ‘지방자치제’가 중요한 정치풍토로 부각될 것인데, 이때를 대비해 한국연극협회와 같은 방대한 전국 조직으로는 실속을 차리기 힘드니, 이런 풍토에서는 지자체의 성격에 부합하는 서협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원금과 후원에 의존해 협회를 운영해야 하는 서협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해 단체원이 (실제로는 연극인들이) 불이익을 받는다면 지방자치제에 따른 ‘서울연극협회’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금언만을 되새겨야 한다면 지금 우리는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연극인들이 왜 정치에 믿음을 갖는 걸까?

 

TV뉴스를 보고 있으면 진보단체의 시위현장에서, 종종 연극인들이 나서서 ‘발성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투쟁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앞바다에 미,중,일 삼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바다에 선을 긋고 매일 항공기, 항공모함을 띠어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대공원에서 쇼하던 제돌이만 제주 앞바다에 풀어놓으면 ‘평화’가 찾아오는가! 요새는 섣불리 나서다가 ‘망신’하기 딱 좋은 세상이다. 너무나 세상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지금 연극계의 문제는 산적해 있다. 예술인복지만 해도 (‘고용보험’은 아예 기대조차 접었다)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해도 시위모임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치에는 무슨 희망이 있다고 그토록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한번 생각해 보자. 연극인에게 ‘미군철수’가 급박한 일인가 아니면 대학로에서 ‘삐끼’를 철수시키는 게 더 긴요한 일인가를. 지금 대학로는 ‘삐끼’로 인해 ‘품위를 잃은’ 연극촌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래도 모두가 수수방관이다. 연극인들 눈에는 ‘미군’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삐끼’는 안 보인단 말인가?

이런 현상을 나는 ‘강아지DNA’라고 칭한다. 민주화를 외치던 시대에도 자기 앞 감당도 못하면서 각종 집회나 민주인사들을 따라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던 습성 말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강자가 나타날 듯싶으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젊은 연극인들이여! 연극으로 얼마든지 사회를 변혁시키고 우리의 문제로 충분히 사회를 개혁시킬 수 있다. 그건 연극의 DNA에 ‘정치성’이 강해서 그렇다. 따라서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고도 충분히 사회를 변화시킬 막강한 힘을 가진 훌륭한 매체가 연극임을 젊은 연극인들은 알아야 한다.

 

예술가가 ‘인간’에게 믿음을 갖는다고?

 

어느 기자가 TV드라마 사극을 비평하면서 한국 사극이 주인공을 늘 정의롭고 순정파에다 민족주의적 인물로 설정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처럼 부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흥미롭고 어두운 매력의 인물을 중립적으로 묘사해 권력과 인간의 속성을 냉정하게 고찰하는 사극을 만들 수는 없는가.”하고 말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어보면 (내가 항상 예로 드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샤일록만 해도 자기의 주장을 펴는 대목에서는 그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심리가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단순히 ‘권선징악’이라든가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 인물을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김포의 제1공수단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의 직속상관이 전두환 여단장이었다. 그가 머물던 관사가 우리 막사 부근에 있어서 나는 밤에 그의 관사 앞에서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때 겪어본 육군준장 전두환은 매력적인 군인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감동을 받곤 했다. 그리고 그의 무사적 기질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 부대의 고참 중, 상사들이 그가 멀리서 나타나면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느니 또는 ‘베레모만 벗으면 왕창 대머리’라고 조롱하곤 했다.

그런 그가 권력을 장악하자 동족을 집단으로 살해하고 많은 비자금을 축적한 비리의 원흉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절대로 인간을 숭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절대로 위대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인간도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예술가라는 사람이 특정인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고? 자기들의 권력과 출세를 위해 수시로 거짓말을 일삼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인 정치가를 말이다.

나는 예술가는 종교적으로도 편향되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함몰되어도 안 된다. 일단 예술가가 무엇에든지 ‘도그마’에 빠지면 예술가로서의 인생은 끝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그래야 자기들의 예술이 영원히 살아남는다.

따라서 예술가는 아이돌을 따라다니며 소리치는 ‘왕팬’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가도 인간이어서 누구나 이런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비판하고 이에 이의를 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런 ‘도그마’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이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 때문이다.

 

연극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먼저 내 경험담을 꺼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젊은 연극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80년 후반 전두환 군부독재시절 이른바 ‘매춘사건’을 일으켜 연극의 ‘사전검열’을 폐지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한국영화는 배우 문성근이 나서서 김대중 정부에서 사전검열을 폐지했다 –

이전에는 공연윤리위원회라는 기관 (배후에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가 조정하는)이 있어 이 기관의 ‘대본에 의한 사전검열’(그들은 이를 사전심의라고 했다)을 통과하지 못하면 공연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사전검열’은 형식상으로는 연극계와 문화계 인사들을 내세워 자행되었다. 그러니까 고명하신 연극계 원로들이 일당 몇 푼을 받고 아무 생각 없이 이 짓에 동참한 게 사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본의 문장이나 문구의 삭제를 요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대상은 물론 정권보전이나 안보, 미풍양속에 관한 것이 주였다. 그런데 내가 그런 독재시대에 ‘매춘’ 공연을 불허하자 공연 기획자로서 덤벼든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김의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시절이었다. 협회가 지금의 ‘예술가의 집’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이때 패널로 나온 서울법대학장이 ‘사전검열’을 뒷받침하는 근거인 공연법이 얼마나 ‘엉터리 법’ 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유는 그 법이 규정한 ‘불법성’이라는 게 애매모호하고 행사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자행될 수 있게끔 되어있어서라고 알려 주었다.

가령 ‘미풍양속’만 해도, 이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너무나 애매하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만 또 다른 판단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게 해당되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사람에 따라 자의적 판단이 가능한 법은 이미 존재적 가치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편의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법인 셈이다.

그동안 법을 모르고 당하기만 한 우리가 너무나 한심하고 억울해, 속으로 “그래 나에게 이 법이 적용되기만 하면 내가 이의 적법성을 들어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내가 관여한 ‘매춘’이 공륜으로부터 ‘미풍양속’을 이유로 공연불가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공연을 불허한 것은 북한에 우리의 부정적 사회현실을 내보이면 안 된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적행위가 된다고 여긴 셈이다.)   이게 1987년 겨울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싸울 각오를 하고, 제작자인 바탕골 박의순대표에게 요지를 설명하고 공연불가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해 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표가 “좋다, 그래 한번 붙어봐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육두문자를 써서 여성 특유의 독설을 즐기는 대표가 “지놈들은 사창가에 가서 X대가리를 휘두르고 다니면서 연극은 못하게 지랄이야. 확 밟아버려!” 이러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정권으로부터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재산가가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 기사(동아일보)를 통해 공연불가판정을 해도 우리는 이에 맞서 공연을 강행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법률로 대항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항상 ‘검열’이라는 동병상린에 시달리고 있던 신문과 방송이 긴장과 함께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연 첫날 오전 9시, 15분간의 KBS-TV의 인터뷰를 통해 공연허가기관인 서울시가 공연을 불허해도, 우리들은 오늘 공연을 강행하겠다는 것을 발표했다. 그러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설마, 설마 하던 정부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다.

기나긴 독재정권에서 지속되어 오던 ‘사전검열’을 거부하고 이 땅에 처음으로 ‘표현의 자유’를 외쳤으니 당연히 세상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항상 우리처럼 검열에 시달리던 매스컴이 흥분하기 시작하고 저녁 9시 TV뉴스의 톱을 3일간이나 장식하자 대대적인 ‘나라의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가 세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당연히 서울시(시장이 임명제였던 시절)가 공연과 공연장을 폐쇄하게 된다. 극장은 경찰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밖에서는 안기부가 주도한 학부모를 가장한 ‘관제시위자’들이 청소년에게 위해한 공연을 중단하라고 외치게 되었다.

 

대자보를 붙이다.

 

이때 ‘무식한 놈이 일낸다고’ 나는 극장 입구에 커다란 대자보를 붙여 이런 주장을 폈다. 세미나에서 주워들은 법률상식으로 대자보를 쓴 것이다.

“우리 공연이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쳐 공연을 중지당해야 한다면, 일제로부터 내려온 형편없는 반민주적인 ‘공연(윤리)법’으로 처벌받는 것은 부당하다. 정식재판을 통해 정당한 법률로 처벌받게 해 달라!

먼저 당국은 우리의 공연을 허가하고 이에 잘못이 있으면 공연법으로 공연을 중지시킬 게 아니라, 정식재판을 통해서 단죄해라! 재판에서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판결이 나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고 당당히 형무소라도 가겠다.

하지만 이런 비민주적인 ‘공연법’으로 처벌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공연을 계속하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으면 정부가 우리를 고발해 정식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사법사상 처음으로 비민주적인 하위법에 의한 처벌이 아닌 상급법에 의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어차피 현행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엉터리 법’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니 차라리 상위법에도 처벌조항이 있을 것이니 정식재판으로 공연의 시시비비를 가려 이에 따른 처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시로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법을 아는 법조계는 술렁거렸다. 이때 대두된 게 ‘헌법재판소’의 필요성이었다.

 

소송으로 대결하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낸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변호사의 아이디어로 ‘극장폐쇄무효’를 위한 가처분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차피 ‘악법도 법’이라고 공연법으로는 싸울 수 없으니, ‘극장폐쇄’라는 행정소송을 통해서 대항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고등법원 수석판사의 주제로 가처분신청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의도대로 ‘민주화 투쟁’ 성격의 재판이 되었다. 그때 정부 측은 “공연단체가 처음과 달리 대본을 수정해 공연하므로 해서 위법을 벗어나는 꼼수를 부렸다”고 나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공연중단과 극장폐쇄’가 당연하다고 우겼다.

연극을 본 관객들이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정부가 과잉대응을 했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그들이 재판에서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건 ‘연극공연의 생리’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연극이 공연을 위해 여러 날 연습을 하는 것은 대사를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운 대사를 배우 상호 간에 서로 맞추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연극공연이다.

따라서 여론의 추이에 따라 수시로 내용을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공박했다. 그러자 판사가 내말을 인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인공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낮에 ‘어린이극’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서울시의 ‘극장폐쇄’를 무효화하는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극장이 문을 열게 되었다.

판사의 승소의 눈치를 알아차린 정부 측이 판결 결과에 따른 여론의 향방과 후속조치로 엄청난 고심을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언뜻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 판결 같지만, 당시로서는 이는 정말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었다. 요약하면 이 판결은 사법부가 정부의 판단을 거역(?)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독재 권력에 대한 ‘사법부의 항명’인 꼴이 된 것이다.

지금이야 판사가 대통령을 ‘가카새키 짬뽕’이라고 조롱하는 시대지만, 그때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판결이었다.

그 후에 본안 소송이 역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다. 판사 셋이서 교대로 질문을 하는데, 혹여 말을 잘못해 책잡힐까봐 무척 떨렸던 기억이 난다. 이때 우리를 지원하던 법조인들은 최상위법인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가 일개 대통령 시행령 장도의 최하위법에 의해 짓밟히는 것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한국에 ‘헌법재판소’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독재 하에서 만들어진 각종 규제법의 불법성과 법률의 부당성만을 주장하고 거부했지, 법 자체를 거부하고 상위법으로 재판을 청구하는 주장을 하고, 이로 인해 불법으로 판결을 받으면 당당히 형무소로 가겠다는 배짱을 부린 사람은 아직껏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알려진 민주인사도 아니고, 민주화 조직을 가진 단체도 아닌, 일개 연극인들과 공연단체가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에 법조계와 보도기관은 엄청 놀라했다.

 

검열이 폐지되다

결과적으로 본안 소송의 판결은 ‘홀딩’되었다. 변호사가 우리의 위법은 인정되지만, 앞으로 공연법은 ‘없어질 법’이므로 판결을 보류하는 게 합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오던 연극공연에서의 ‘사전검열’은 해방 후 근 45년 만에 폐지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연극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정부가 그때 얼마나 크나큰 충격 받았으면 그 후로는 무대에서 여배우가 벗고 알몸으로 날쳐도 간섭조차 하지 않아, 나중에 ‘저질연극시비’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허무함도 동시에 맛보게 되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88서울올림픽’이 아니면 안기부에 가서 두들겨 맞아 ‘표현의 자유’를 얻기는커녕 지금쯤 침이나 질질 흘리며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한국이 올림픽 개최를 눈앞에 두고 있어 국제여론이 두려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는 못한 것 같다.

중국의 ‘베이징올림픽’을 통해서 통감한 거지만, 올림픽을 기화로 세계가 ‘올림픽 보이콧’을 내세워 중국 정부의 예술가와 인권운동가에 대한 탄압과 정치적 사안에 대한 내정간섭 수준의 압력을 가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마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국제적 파워도 미약한 군부독재시절이라 국제적 압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 때 나도 일본 후지TV가 적극적인 관심을 표해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우리야 연극인을 너무나 우습게 알지만 외국에서는 연극인과 공연행위를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반문명적 반지성적 행위’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 국제여론이 무서워서 정부가 공연중단 이외의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정부가 국제적 압력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료를 보면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데, 보름 전인 9월1일 ‘헌법재판소’가 부랴부랴 문을 연 것을 보면, 자유로운 예술행위와 민주화에 관한 ‘가시적 조치’를 내건 국제적 압력이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올림픽 덕에 이제는 모든 법률이 헌법이 명시한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현법재판소의 판정을 받으면 법률로서의 효력이 정지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표현의 자유’ 등 헌법이 규정한 많은 국민의 기본권리가 서서히 헌법재판을 통해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전까지는 매춘이라고 해서 ‘몸을 파는’ 사람만을 죄인으로 취급했는데, 그 때부터는 ‘몸을 사는’ 성매수도 범죄행위라는 인식의 변화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반정부적 발언을 하고 자기의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게 상식에 속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리 반골적(?) 발언을 해도 정당한 재판의 절차를 통해서만 처벌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독재시절에는 감히 어느 누구도 ‘표현의 자유’라는 말조차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었다.

시작할 때는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사건을 벌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그랬다. 그런데 각처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여론이 폭발하고, 같은 처지에 놓여있던 매스컴이 이를 기화로 ‘표현의 자유’를 찾고자 나서고, 국제여론이 올림픽을 이유로 압력을 행사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게 내가 37살이었던 때의 일이었다.

물론 나의 이런 사연에 어리둥절할 젊은 연극인들이 많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이 얼마든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시위나 집회만으로 절대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독재시대에도 법과 제도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했는데, 민주화된 시대에 이는 더욱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연극인들은 이런 시위모임에 집착하지 말고 연극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에 상처만 입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또, 이런 좋은 표현매체를 가진 연극과 연극인들이 (내가 보기에) 싸구려 현실정치를 뒤쫓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젊은 연극인들은 요사이 정치현실에 뛰어들어 만신창이가 된 선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연극으로 참여하면 ‘위대한 예술가’로 남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도 ‘세대갈등?’

 

국립극단에 대한 서협의 정책분과위의 성명을 읽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시작은 어느 신문이 국립극단의 예술감독 후보자를 발표하는 바람에 생긴 현실이다.

먼저 이런 일이 3년마다 반복할거라는 생각이 드니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이런 현실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예술감독을 임명해야 할 건가가 더욱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선 국립극단의 손진책 예술감독의 임기가 다 된 것은 누구나 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불시에 생긴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기에 맞춰 정책분과위가 미리 기준을 제시하든가! 원님행차 뒤에 나팔을 불어도 유분수지! 이미 후보자가 신문을 통해 발표된 상황에서 문화부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니 추천된 당사자들은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소문에 의하면 연출가포럼에서도 선배급들이 나름 흥분을 했다고 들린다. 정치판처럼 ‘불복’을 연상시킨다.

정책분위의 성명서는 인선의 기준과 가치에 시비를 걸고 있다. 솔직히 새로운 국립극단체제 -경영과 예술을 동시에 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를 경험한 사람은 오로지 연극판에서 손진책감독 뿐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다 무경험자들 아닌가? 한마디로 ‘전문성’을 인정, 불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말이 된다.

혹여 왜 연출가만 예술감독이 되어야 하는가? 배우나 제작자는 불가능한가라든가 하는 주장이면 몰라도, 예측이 불가능한 능력을 아무런 잣대도 없이 미리 예단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모독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번도 직책을 수행한 적이 없는 박장렬회장이 예술감독직을 잘 할 수 있다는 보장을 정책분과위는 무엇으로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추천된 두 사람은 외부인도 아니다. 우리의 동료이자 협회원이다.

그런데 협회원들의 인권을 – 서협이라는 친목단체가- 성명을 발표해 부적절한 인선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이미 이들은 임명 전에 연극판에서 ‘인격살인’을 당한 꼴이 되었다.

정치권이 장관후보의 자격을 놓고 싸우는 것은 야당이 여당을 견제하는 미션과 정쟁을 업으로 하는 직업이어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우리는 동료가 아닌가! 그런데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선배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소문이 나지를 않나! 어쨌든 좋아 보이지 않는 정치판 풍경의 재연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성명서는 또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럼 정책분위는 (나처럼) 어떤 절차로 임명이 되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협회라면 전임자의 임기가 다 돼갈 때 투명한 임명절차를 주문해야지, 이미 후보자가 얼굴을 내민 상태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다니.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원해 공모를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할 때는 협회도 투명하게 ‘사유’를 밝혀야 한다. 밝힐 수 없으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슬쩍 떠보는 술수(?)를 보여서는 안 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를 뻔하지 않은가!

추천자들이 이미 다른 곳에서 예술감독직을 수행해 능력에 하자가 있었다면 또 모를까, “걔들은 너무 어려. 그것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도대체 걔들이 어떻게 후보자에 오를 수 있어!” 하면서 연극인들의 분위기에 편승해 정책분과위가 성명을 통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정책분위부터 먼저 적격자의 기준과 가치를 제시하는 게 옳다! 무조건 무슨 기준이냐고 묻지 말고. 정책분위는 연극인이 아닌가? 그럼 자신들이 적격자의 기준을 먼저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가령 나이는 60세 이상으로, 연출경험은 없어도 상관없고, 학위는 박사여야 하고 현직교수여야 하며, 가치는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경력의 진보성향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전에 국립극단에서 ‘여관집 여주인’을 연출한 이탈리아 연출가는 자국의 전통 있는 예술도시(볼로냐)에서 시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을 24살의 젊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이사회의 결정으로 4년 임기의 감독직을 3회 연속 연임하고 있다고 으스대기도 해서 그의 나이가 35살쯤임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한국의 연극세상은 무섭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저 후보자로 이름이 오르자마자 여론재판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연극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타의로 예술감독 후보가 되는 것도 내가 참여되지 않았으니 악(惡)이란 말인가!

 

한심한 문화부와 이사회 그리고 연극인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국립극단 이사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국립극단 독립(?)의 핵심이 ‘이사회’ 아니었던가?

그런데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이사회의 기능과 역할을 모르고 있다. 이사회의 구성원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한마디로 두 명의 추천자가 어떻게 해서 신문에 발표되었는가? 문화부가 일방적으로 흘린 것인지 아니면 이사회가 추천을 한 것인지, 그리고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이사회는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가 오리무중이다.

그리고 정책분위도 투명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이를 따져야지 두루뭉술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게 어떻게 되어 가는 연극판인가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소문과 관심은 물밑에서 눈사람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사회와 국립극단, 문화부와의 삼각관계에 따른 운영, 지휘체계 등 구조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앞으로 이런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회가 문화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면, 연극계가 나서서 문화부에 개선점을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정책분위의 성명서를 보라! 임명권을 가진 문화부에 대한 주문은 너무나 간단하고, 국립극단의 운영에 대한 불만은 길게 논하고 있다. 그러니 강자에게는 마냥 ‘꼬리’를 흔드는 조직처럼 보이는 것이다.

매번 이사회는 ‘용각산 작전’-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 으로 일관한다. 지난번에도 임명을 앞두고 그렇게 시끄러웠는데도 (이사회나 추천자들은)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연극인들은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발언을 삼가고 가만히 눈치를 살핀다. 일단 자신이 수혜자가 되기를 기다려 잠자코 있다가, 결과적으로 자기 차례가 되지 않으면 그때는 ‘기준과 투명성’ 등을 내세워 여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통박’을 즐긴다.

그러니 여론화되는 것은 너무나 용이하다. 항상 수혜자는 소수인데다, 밀리는 다수는 당연히 많아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끼리 티격태격 거리다 상처를 안고 끝을 맺는다.

오히려 문화부를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언제나 우리끼리만 티격 거리니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발레단은 벌써 예술감독이 임명이 되었다. 그러니 연극계는 더욱 추측과 루머만을 양산하게 될 뿐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서명을 하지 않은 자 중에서 선발을 하려니, 적격자를 고르기 더욱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그러니 이제는 누가 임명이 되어도 서로 간에 상처만 남기는 꼴이 될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런 사태를 유발시킨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가? 단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서협이다.

한심한 문화부! 그리고 눈치만 살피는 이사회! 대책 없이 떠들기만 하는 연극계!

좌우간 임명절차가 끝나면 연극계는 대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로 다시는 서로가 상처받지 않는 조직체를 모색해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토론회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채승훈교수는 내가 항상 글을 길게 써서 토론하기도 힘들다고 불만이지만 그럴까?) 왜? 자칫 새로 임명된 예술감독에게 찍혀 연출도 배역도 얻지 못할지 모르니 절대로 이런 위험성이 높은 일에는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는 게 지혜(?)라는 걸 연극판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투명성을 갖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 리끼리 매사에, 상호 간에 상처만 입게 된다.

이사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얼마나 예술감독을 통제하고 있는지, 문화부가 운영에 어느 정도 개입하는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이사회가 문화부의 눈치를 살피며 거수기 노릇만 하고 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부(청와대)가 국립극단과 이사회의 후견자로서 손을 떼고, 사회저명인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해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사회단체의 후견을 받는 체제로 바꿔, 모든 지원과 운영, 임명을 책임 짓토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을 상대하는 요령

 

내가 국립극장에서 노조를 만든 후, 노조 상급단체 모임에서 공무원을 상대하는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일단 공무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시끄러워’지는 것이란다. 공무원사회는 시끄러워져 자신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최고의 금기로 여긴다고 했다. 왜?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소란스러워!” 상급자로부터의 이런 힐책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단다. 그래서 뭐든지 조용히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허를 찔려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심재찬 사건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시끄러워지니까 과장의 목이 달아나지 않은가! 지금 나라가 공기업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이런 명령만 내리면 다 해결된다. “시끄럽게 하지 않는 공기업의 장은 목을 치겠다.”

싸움만 잘 했으면 옛 국립극단도 절대로 분해되지 않았다. 국립무용단 여자단원들이 싸우는 것 보지 못했나? 어설픈 연극쟁이들!

따라서 박장렬회장처럼 재임을 위해 선거에 나서는 박원순시장한테 ‘감사패’를 주어서는 내가 10년을 원고 써도 한 푼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맹렬히 달려들어야 하는데? 선거에 불리하다고 여겨야 지원금을 확 준다. 속된 말로 ‘잡은 고기 떡밥 주는 것 보았니?’다.

서협의 정책분위처럼 꼬리치는 시늉(?)을 하는 ‘성명서’를 내서는 문화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 떠들어라! 반정부 매체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야 해결이 난다. 그런데 ‘이사회’처럼 ‘용각산 작전’으로 일관하니 개선이 되겠는가!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서협도 매사에 말을 할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서협이 자행한 문재인후보 지지서명만 해도 그렇다. 박장렬회장이 주변에서 많은 회원들이 문재인후보를 찬동을 하는 걸 목격해서 특정후보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이건 투표를 통한 단체원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해서, 이는 엄격하게 말하면 절차상의 불찰이고 위법이다.

아마 노조에서 이런 행동을 했으면 즉각 사퇴를 해야 한다. 거기다 지지후보가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노조는 이런 위원장의 독단적 행태를 엄격히 노조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라면 최소한 대의원총회를 열어서라도 이를 인준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이로 미루어 협회가 정관(?)도 개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엉터리 단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이미 예술가로서의 품격을 잃은 단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협회가 나름 공동체로 인정을 받으려면 반드시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법행위들을 저지르면서 협회를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비민주적’ 행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들은 비민주적 행위를 하면서, 국가가 법을 지켜 바로 서기를 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건 민주시민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

매사를 ‘남(정부)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협회) 하면 로맨스인가’ 라고 협회원들이 따져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솔직히 제일 바보(?) 같은 짓이 한국에서 정치가를 존경하는 것일 거다. 나는 한국의 정치가들처럼 3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을 따라다니게 되면 저절로 3류 예술가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마치 국가를 걱정하는 게 애국자나 지성인으로 착각하는 것은 금물인 시대가 되었다. 왜?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열정이 있으면 산적한 연극세상의 일을 걱정하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고 보람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그마한 집단을 변혁시키는 게 더 힘들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우주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사리사욕이 판을 치는 정치판을 따라다니면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이제는 연극을 통해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게 더 지혜롭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민주시민이고 남의 부러움을 사는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외려 정치노선에 관계없이 우리를 도우려고 달려들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연극인들도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정치권에 관심을 거두자, 그 대신에 우리의 생존과 예술 활동에 대한 청사진과 비전을 가지고 정치권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려는 자세를 갖자. 공연히 지지 성명 따위를 내어 일만 꼬이게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참신한 연극의 리더십을 간직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지금 한국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어느 대학생의 대자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허튼 수나 쓰고 있던 진보는 마치 자기들이 한 냥 흥분하고, 이 대자보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다.

이런 물음은 진즉에 연극계에서 나왔어야 하는 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보다 ‘안녕’하지 못한 조직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뮤지컬이 자리를 잡으면서 ‘안녕’과는 거리가 먼 조직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아니 딴소리만 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아지 DNA’를 제거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만족’을 걷어내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냉철히 들여다보는 통찰과 자성이 필요하다. 명색이 ‘예술가집단’이 대학생의 생각만도 못해서야 어떻게 세상과 소통이 가능할까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thoughts on “연극과 정치/ 우상전

  1. 우상전님. 한가지만은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지난 서협회장 선거과정에서 다 밝혀졌듯이 서협이름으로 문재인후보 지지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서협홈페이지에 서협아고라가 있습니다.
    아고라에 어느 회원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지지 서명할 사람을 일정 기간까지 모은 다음, 서명한 사람들 명단을 가지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연극인 이름으로 선언 한겁니다.
    만약 누군가 박근혜지지 선언할 사람 서명하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동조서명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똑 같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연극인 이름으로 지지 선언을 할 수 있었겠지요.
    서협회원 중에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을테고 그 누군가가 서협아고라에 지지서명 청원을 했다면 서명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게 몇명이 되든 말이죠.
    우상전님의 글 곳곳에 마치 서협이 문재인후보를 지지해서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고 앞으로도 처할 것이다라는 논조가 무수한데요 전재자체가 틀렸으니 논조는 자연스레 틀렸다고 생각 됩니다.
    여러글을 올리시고 잘 읽고 있습니다만 아주 가끔은 농담처럼 말하던 이런 말이 생각나더군요.
    ‘주관적 착각이 객관적 오류를 범한다’

  2. 일개 연예인도 공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협회 회장이 공인으로서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서협이 아니라고 하지만 서헙의 회장이 문자를 보내 특정인을 지지할 것인가를 물으면 이건 공인으로서의 의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공인은 처신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장이 아닌 제 삼자를 내세워야죠. 바로 이런 사회의 룰도 모르는 성인들의 모임체가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박근혜 정부가 이를 개인을 일로 치부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셔야죠. 의도와 다르게 결과가 나타났다고 하면 생각을 해야지요. 세상에 나만 아니라고 하면 다닙까? 깊이 생각을 하십시요. 그리고 글을 쓰려면 실명을 밝혀야지. 당신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실명이 아니면 꽝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3. 존경하는 우상전 선생님께

    서울연극 39호에 게재된 선생님의 글에서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의 지난 논평이 “우리의 연극동료에게 ‘인격살인’을 저지르고, 강자에게는 마냥 ‘꼬리’를 흔드는 조직처럼 보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의 논평이 전혀 그러한 의도가 아님을 먼저 밝히면서 말씀드립니다.

    먼저,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는 국립극단 예술감독 선임에 대해서 어느 특정인의 지명을 반대하거나 추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립극단이라는 연극계에 상징성에 걸맞게 투명한 절차를 통해 선임되기를 바랍니다.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는 선생님께서 주장하신“이사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얼마나 예술감독을 통제하고 있는지, 문화부가 운영에 어느 정도 개입하는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이사회가 문화부의 눈치를 살피며 거수기 노릇만 하고 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부(청와대)가 국립극단과 이사회의 후견자로서 손을 떼고, 사회저명인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해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사회단체의 후견을 받는 체제로 바꿔, 모든 지원과 운영, 임명을 책임 짓토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선생님을 비롯한 연극인 여러분께서는 지난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의 논평에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선생님께서는 “연극인들의 분위기에 편승해 정책분과위가 성명을 통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라 하셨습니다.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는 그동안 연극계가 선생님의 “연극인들은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발언을 삼가고 가만히 눈치를 살핀다. 일단 자신이 수혜자가 되기를 기다려 잠자코 있다가, 결과적으로 자기 차례가 되지 않으면 그때는 ‘기준과 투명성’ 등을 내세워 여론을 시도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함께 협회원들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연극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마음가짐을 가지고 절대로 싸구려 현실정치를 뒤쫓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협회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고자 함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부디 선생님의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바꾸시어 믿음으로 격려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그러니까 이제 서협은 어느 정권이 장악을 해도 ‘버림받는 단체’가 되는 불운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간직하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서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 염려하시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공무원이 아닌 이상 정치적인 표현을 하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헌법에 보장하고 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을 해야 한다고 하시는 지요. 서울연극협회는 공무원 조직이 아닌 연극인들의 비영리민간단체임-선생님은 “서협이라는 친목단체가”라 표현 하셨지만-에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지 않음은 너무도 상식적인 것 아닌가요? 물론 선생님은 협회의 집행부가 정치적인 표현을 하여 협회원들이 불이익을 받는 것을 우려하신 것이리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젊은 시절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항에서 지켰던 표현의 자유처럼, 어떤 정권, 어떤 지방권력이 예술가들의 정치표현을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는 선생님이 표현하신 좌파정권이든 우파정권이든 끝가지 싸워서 헌법에 보장한 기본 권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연극의 리더십”을 지닌 “’강아지DNA’를 제거한” 집행부로서, 예술술가로서, 연극정신을 지키는 일이리라 말씀드립니다.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는 우상전 선생님과 연극인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매월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에서 내고자 하는 논평은 그동안 연극계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비롯한 지금의 안타까운 연극계 현실을 진심으로 극복해 보고자 하는 진정어린 연극인을 위한 논평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책분과의 논평은 지난 세월 연극과 연극인을 위한 정책이 아닌, 예술정책의 단편적 수단으로만 여긴 정치권과 지원기관에 연극인의 목소리를 사심 없이 전달하고자 합니다. 과정에서 다소 부족함이 있더라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우상전 선생님의 애정 어린 질타를 겸허히 받아들여 연극인 여러분의 기대에 부흥한 정책분과가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4. 1. 2.

    서울연극협회 정책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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