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예술감독 논란에 부쳐/ 우상전

                    예술감독, 저주인가 축복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연극계가 시끄럽다. 국립극단의 예술감독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국립극단은 이 때문에 항시 소란스러웠다.

그럼 ‘국립극단에서는 왜 예술감독이 늘 풍파를 일으키는 것 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소란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왜 반복되는 것일까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선책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감독을 할 탁월한 연출가가 부재해서 그렇다. 한마디로 연출가의 좋은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렇다.

김윤철감독이 임명되자 각 협회는 “지금까지 예술감독은 계속 현장의 예술가였다. 이런 상식을 변경하려면 변경할만한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는 질책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예술감독의 직책을 수행해 온 게 연출가(현장인)였는데 어째서 비현장인인 평론가를 임명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 수렴과 논의의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노력이나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 평론가는 이에 대해 “국립오페라단의 예술감독은 현장예술가가 아닌 ‘예술경영인’ 출신이지만 단체를 잘 이끌어 가고 있지 않느냐” 고 반박했다. (한겨레신문)

또 중앙일보는 이번 임명이 ‘무난하다’는 게 연극계의 중론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럼 이런 상반된 의견들 중에서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가부터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왜 이런 상반된 의견이 표출되는 것일까? 또 그 배경은 무엇일까? 도대체 연극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길래. 이걸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에 관한 ‘소란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립극단에서 예술감독이 어떤 기능을 하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동시에 이를 통해 연극세상의 ‘사회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란의 핵심은 연극계가 아직도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의 역할(미션)과 기능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이게 한국연극계의 ‘사회적 현상’과 서로 접촉하면서 부조리 연극에서나 등장함직한 ‘마찰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나다.

그래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지루해지 말고 한국연극의 부조리적(?) 현상을 한번 즐겨보시기 바란다. 아무리 길어도 ‘부조리연극’ 한편 보는 것보다는 짧을 것이다.

 

국립극단의 ‘소란의 역사’

 

1. ‘소란의 역사’는 극단에 예술감독제가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벌써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첫 소란의 막이 올랐다.

앞으로 국립극단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예술감독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막 취임한 김명곤 극장장에게 내가 이를 건의하고, 그가 이를 받아들여 첫 예술감독으로 연출가 김철리가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단장과 예술감독의 지위와 역할분담으로 인한 기득권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극장장이 합리적으로 이들의 미션과 위상을 명확하게 나누지 못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기존 단원들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핀 탓이 컸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국립극단원들의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2. 이런 소란은 오태석감독으로 이어졌다.

왜? 연출가 오태석선생이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각되자, 나는 “그분이 예술가로서는 훌륭한 분이지만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을 수행하기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그것도 공개적으로 해서다.

국립단원들과 연극계 인사들이 모두 ‘적합’ 하다고 절대 찬성하는 처지에서, 나만 홀로 반대 입장을 견지했으니 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근본적인 원인은 예술감독의 역할과 기능에 있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실명을 거론하며 솔직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의 소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니 절대 오해 없기 바란다.

결과는 3년 내내 (물론 본인은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국립무대를 극작가와 연출가를 겸하는 자신의 ‘신작발표회장’으로 끝을 맺고 감독직을 마감했다. 예상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연출가’보다는 ‘극작가’로서 더 만족하고 끝을 맺었다.

한마디로 극단 ‘목화’ 대표와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의 미션을 차별화하지 못한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국립극단에서의 미션은 극단의 예술성을 제고하는 것이어야 했다. 왜? 당시 국립극단의 과제는 국립이라는 ‘이름값’에 맞는 예술성을 살려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걸 ‘최상의 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신작들은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이어서) 예술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목화에서 하기 힘든 자신의 ‘대작공연’을 국립의 예산을 빌려 ‘자기 만족성’ 공연을 하다가 그만 둔 셈이 되었다.

그 후유증은 컸다. 옛 국립극단이 해체되는 수순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누가 예술감독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예술감독직을 수행해 ‘국립의 격에 맞는‘ 예술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까지도) 우리의 논란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왜? 그 이후로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은 비록 연출가 일지라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연출을 하면 (독식을 하면) 안 된다는 묵언의 불문율(?)을 남긴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소란은 유인촌 장관에 의해 국립극단이 새로운 체제로 변모하면서 일어났다. 여기서 소란의 핵심은 ‘외국인 예술감독’의 영입이었다. 유장관이 이를 추진하자 당연히 국내 연출가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과가 되어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소란은 결국 유장관이 이를 철회하고, 손진책 예술감독이 취임하게 되므로 해서 일단락되었다. 여기서도 내가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4. 네 번째의 소란은 (지금)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없는 평론가를 임명하자 그의 자격에 대한 논란이 인 것이다. 왜 현장예술가를 배척하고 비 현장예술가가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제기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국립극단은 ‘예술감독의 소란’으로 10여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결과가 되었다. 즉 압축하면 ‘배우와 연출가’, ‘외국인과 내국인’, ‘연출가와 평론가’의 대결장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술감독제의 정착에 따른, (우리 연극현실에서) 예술감독을 ‘누가’ 수행해야 하는 자격에 대한 견해차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예술감독의 미션이나 기능은 뒷전으로 밀린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게 먼저 확립되고 그에 따른 ‘인선’이 뒤따라야 게 순서인데, 이게 되질 않으니 결국 몰이해로 인한 ‘자격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따라서 예술감독제를 주장해 이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인식과 합의가 ‘자격’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에 합당한 인물을 인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은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에 관한 정확한 기능과 미션이고, 이를 수행할 ‘상식을 변경할 필요가 없는’ 한국연출가의 적격여부다.

 

예술감독 시스템의 두 가지 패턴

 

예술감독 시스템은 (우리의 현실에서) 두 가지 패턴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해를 위해 명칭을 붙인다면 하나는 ‘예술가형’이고 또 하나는 ‘제작자형’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가형’이란 오태석감독처럼 자신이 직접 자기의 연출역량을 발휘해 모든 공연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면서 극단의 경영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작자형’으로 손진책감독처럼 자신이 직접 연출을 하지 않고 단지 레퍼토리 선정이나 연출가를 선정하는 기획자, 또는 행정가로서 기능을 수행하면서 극단을 운영을 하는 경우일 것이다.

전자는 (임기동안 다른 연출가의 도움 없이) 예술감독 자신이 직접 연출을 하면서 예술적 성과를 책임지고 공연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이다. 이 경우에는 오태석감독처럼 (자신이 극작가일 경우에는) 국립무대를 자기의 ‘신작발표회장’으로 만들어 전횡(?)을 휘둘러도 할 말이 없다. 단지 자신이 예술적 성과에 관한 모든 책임을 나중에지면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예술감독은 레퍼토리와 연출가 선정이나 관객동원 등 운영과 경영에만 국한해 책임을 질 뿐, 예술적 책임은 예술감독의 몫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대공연의 성과는 그가 선정한 예술가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연출가를 선정한 책임을 추궁할 수는 있겠지만.

따라서 후자를 선택할 경우에는 부득불 현장예술가인 연출가로 하여금 예술감독직을 수행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경우는 외려 제작자나 기획자, 또는 배우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예술적 감각(소양)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든 예술감독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문화부가 김윤철 감독을 임명한 배경에는, 앞으로 후자처럼 (제작자형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윤철감독의 임명에 연출가(현장인)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왜 ‘예술가형’이 아닌 ‘제작자형’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하려고 하는가? 명동예술극장도 그러한데. 그럼 연출가(현장인)들이 설자리가 없지 않는가?” 라는 ‘불만’이 전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상식을 변경할 만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생긴 소동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 상식을 거론하는 것은 ‘제작자형’에서도 예술감독직은 반드시 ‘연출가(현장인)’가 맡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이는 한마디로 부자연스러운(?) 해석이다.

명동예술극장은 구자흥 극장장이 (명칭만 극장장이지) 실제로는 ‘제작자형’ 예술감독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적 평가는 오히려 작품을 연출한 연출가들에게 있으며, 구극장장에 대한 평가는 흥행수입이나 관객동원 등 제반 극장운영에 관한 게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비교를 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따라서 (논리를 비약하면) ‘제작자형’으로 운영하려면 차라리 연극인보다는 ‘기업가’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지원금과 후원금을 풍성하게 얻어내는 게 우리의 형편에서는 더 실속을 차릴 수 있다고 주장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연출가들에게 ‘반성’이 있어야

 

따라서 ‘불만’에 앞서 연출가협회가 해야 할 일은 “어째서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제작자형’으로 운영하려고 할까?”에 따른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면 ‘제작자형’을 취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연출가가 예술감독의 미션을 수행하는데 따른 신뢰를 주지 못한데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술가형’으로 이끌어 갈 인재가 없어서 이런 사태가 유발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나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연출가들의 ‘반성’이 앞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3대 방송사에서 메인뉴스의 앵커가 한명인 것은, 이쯤 되려면 혼자서도 TV화면을 꽉 채울 수 있는 외모와 지성, 뚜렷한 개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은 이게 불가능해 불가피하게 남녀 2인이 함께 앵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쯤 되려면 ‘연출가 혼자서도’ 무대 (TV로 치면 화면)를 꽉 채울 수 있는 기량과 경영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경영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대기법이나 독창성, 창의력을 무대에서 뽐낼 수 있는 연출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하니 당연히 비현장인인 평론가에게 감독 자리를 뺏기는 것이다. 그래서 평론가의 임명에 ‘무난하다’는 연극계의 평이 나오고,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에 비현장예술가인 평론가가 취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서 운영할 경우에 오태석감독처럼 ‘독식’한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크다. 다시 말해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현실적으로 이런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는 부담감을 피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면 그런 능력- ‘예술가형’에 대한 믿음을, 연출가로서의 자신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비가 없어 대극장 공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를 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명동예술극장에서조차) 이런 만족감을 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 비교적 가까이 가는 연출가라면 이상우와 임형택교수 정도일 것이다. 너무나 야박한 평가일까?

하지만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예술감독이 단체의 예술성을 자신의 ‘연출력’으로 책임지고 있는 게 일반적이어서, 연출가협회가 이에 대한 이의제기 – ‘상식을 변경할만한 이유’ 운운하는 게 조금은 쑥스러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국 연출가들의 ‘이미지’

 

전에 서울연극협회가 낸 성명서의 타이틀을 보면 이렇다. “국립극단은 시대의 표상이 될 예술감독 인선을 투명한 절차와 검증을 통해 선임해야 한다.” 이 글을 본 많은 배우들은 (내심으로) 연출가가 아닌 다른 직종의 예술감독 후보를 (외국인 연출가포함) 더 많이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표상? “솔직히 한국의 연출가들 중에 여기에 가까이 갈 인물이 있기나 해?” 하면서 말이다.

현장예술가의 또 다른 파트인 배우들에게 비친 한국 연출가의 이미지는 (연출력은 차치하고라도) ‘빙상연맹’ 정도는 아니어도 솔직히 배우를 ‘폭행’하는 자들, ‘임금 갈취자’로 비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일부의 사례가 전체의 이미지를 더럽히고 있는 점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오래 전부터 선거 때만 되면 특정 후보 지지를 선동해 연극판을 싸구려 정치판으로 오염시키고도 ‘지원금’은 한 푼도 얻어 오지를 못하지 않나. 선배랍시고 나서서 후배들을 제키고 지원금을 독점하려고 들지를 않나.

좌우간 좋지 않은 내용의 글들로 SNS가 장식되고 있는 게 우리 연극판의 연출가들의 초상인 게 사실이다.

사실 20세기 들어 연극예술은 ‘연출가의 예술’이 된 게 세계적인 현상이다. 말로만 ‘배우의 예술’이지, 왜? 무대에서 보이는 게 배우여서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실상에서는 현대공연예술에서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마스터’ – 지휘자. 안무가, 연출가가 지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에서의 연출가는 연극예술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외국연출가들과 비교해도) 다음의 문제들에서 신뢰를 가질 수 없는 게 사실이다.

 

1. 독창성, 창의력, 분석력에서 처진다.

 

2. 연기에 대한 무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는 ‘연출과’가 없다고 한다. 모두가 (우리식으로 말하면) ‘연기과’에서 수업을 받는다. 그러니까 외국에서는 배우를 하다가 연출가가 되는 게 관례다.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연출을 시작한다. 그러니 연기에 경험이 없어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3. 대극장 공연의 연출에 너무나 서툴다.

 

4. 교수를 겸하고 있거나 극단 대표를 겸해 당연히 제자(단원)들에 의한 비판이 불가능해 ‘동네골목대장’이 되어버린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나이든 배우들과 작업을 하지 않아 배우를 폭행하고 추행할 우려가 커지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5. 제작의 주체가 되므로 해서 당연히 지원금에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어,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갖지 못해, 리더십이 상실되는 것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연출가협회가 내놓고 성명서에서 거론 할 수 있는 것은 “장관은 예술감독이 전수 연출권을 취하도록 해서 반드시 연출가가 예술감독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과 다른 하나는 “어째서 장관은 연출가들의 리더십에 믿음을 갖지 못하는가!”에 대해 따지는 게 전부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불편해도) “어째서 한국의 연출가들이 자신들의 실력과 리더십에 의심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일 거다.

옛 국립극단에서 ‘예술가형’으로 운영되던 모습을 지켜보던 러시아에서 수학한 한 평론가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모스크바에 배우가 예술감독을 하는 극장이 있는데, 이 사람은 연출가가 작품을 잘못 만들면 아예 공연을 취소하는 강경책을 써서 지금 모스크바 관객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고 있어요. 국립극단도 그렇게 운영해 보세요. 연출가한테 맡기지 마시고.”

그가 얼마나 연출가에 의한 예술감독의 운영이 미더워 보이지 않았으면 그런 조언을 나에게 했을까?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논의가 필요한 것은 한국연출가들의 재능과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연출가의 몰락

 

한국연극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연출가가 부재한 나라’일 것이다. 왜? 한국연극에는 연출가가 없고 극작가만 존재하는 나라여서 그렇다.

이건 우리연극이 극작가가 연출까지 겸하는 ‘작, 연출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연출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연극은 ‘극작가의 시대’였다. 가령 ‘비극’이니 ‘희극’이니 또 ‘독백’이나 ‘방백’이니 하는 것도 다 극작기법에서 유래한 용어들이다. 연극의 ‘리얼리즘’. ‘브레히트의 서사극’, ‘부조리 연극’도 다 극작술에서 연유하고 있다.

그러던 연극이 20세기 들어 연출가가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서양연극은 극작술보다 연출기법을 발전시키는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스타니슬랍스키나 메이어 홀드 등에 관한 서적을 읽어보아도 그들이 연출기법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때부터 극작가가 뒤로 밀린 게 사실이다.

그럼 동양은 어떠한가,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극의 역사도 역시 오랫동안 무대에서의 연출기법, 연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게 사실이다. 일본의 인형극은 막대기를 ‘움직이는 인형’으로 발전시키는데 200년이 걸렸다고 그들이 자랑하는 것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학에서는 ‘연극과’ 교육이 별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그들은 ‘도제수업’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극작술과 연기술, 연출기법을 익히기 위한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 3국 중에서도 유일하게 이런 시스템이 전무한 나라가 한국이다. 탈춤은 마당에서 춤만 추고, 판소리 역시 무대장치도 없고 움직임도 없이 연희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극작술은 고사하고 연기술과 무대(연출)기법이라는 개념마저도 없었던 게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극을 통해서도 극작술이나 연기술은 물론이고, 무대에서 표현방법의 핵심인 연출술도 익힐 수 없는 유일한 나라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대책 없이 ‘연극대학’만 양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처지에서도 ‘창작극을 육성’한다고 연기술도 연출술도 다 내팽개치고 ‘글쓰기’에만 전념해 왔다. 그것도 동양 3국에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나 없는 문학계 풍토에서 희곡으로 ‘바벨탑을 쌓겠다’고 나선 것이다.

따라서 ‘창작극을 육성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제대로 된 여건을 (작품료도 변변치 못한 처지) 배제한 채 외려 ‘양적팽창’을 시도해 결과적으로 ‘질적 저하’를 가져온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따라서 좋은 희곡은 고사하고 스타배우도, 뛰어난 연출가도 배출시키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창작극 육성’이다.

이런 사연(?)으로 실질적으로 한국연극에서 연출가의 역할은, 특히 ‘전업 연출가’로서의 기능은 유덕형 서울예대 이사장이 연극계를 은퇴함(80년대 초반?)과 동시에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나마 이게 서양의 연출기법 도입의 마지막이 된 셈이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전업연출가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곧장 한국은 ‘작, 연출’로 극작가 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아마 ‘몸이 불편한’ 작가 이강백선생을 제외하고 연출을 겸하지 않은 극작가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한국연극에서 ‘번역극의 몰락’과 ‘연출가의 몰락’이 괘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번역극이 몰락하면서 한국연극에 서양 연출기법의 도입을 끝냄과 동시에 그 자리를 창작 극작가들의 ‘연출겸업’에 내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연출기법의 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1. 아무래도 창작 작가들로서는 자신들의 작품을 쓰기에도 벅찬 현실에서, 그들이 공연을 위한 연출기법을 우리의 전통극에서 가져올 수 없게 되자 일본에 의존하게 된 것일 거다.

그래서 조금 ‘감각이 있는’ 극작가들은 일본의 전통연극에 기반을 둔 전위극의 연출기법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일본연극의 무대기법이 서양의 연출기법보다 활용도 면에서 더 편리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평론가 김방옥교수와 내가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마 90년대 초반?) 바탕골 소극장 앞에 서있는 나에게 평론가 김방옥교수가 다가 와 하는 말

“사람들이 오태석 연극이 ‘왜색’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럼 000연극은 ‘미국색’이라고 해야겠네요”

“그렇죠”

그 후 연극판에서 더 이상 ‘왜색논쟁’은 번지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의 ‘신 연극’이 한국에서 출발되지 않은 이상, 우리 연극의 연출기법이나 무대문법을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번역극이 사라진 우리 무대에서 자연히 서양의 기법보다는 동양적인 일본연출의 기법이 도입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2. 거기다 60년대부터 서양의 히피문화가 오리엔탈리즘에 중점을 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 의해 문화적 관심사가 티베트나 인도 등의 동양적 신비주의에 빠진 점, 그리고 세계연극이 언어보다는 ‘몸의 연극’에 의한 양식화에 기울어진 점, 또 제3국은 자국의 전통연극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연극의 민족주의’가 번성하게 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3. 더욱이 한국에서의 민주화의 물결이 ‘민족주의’에 기울어 자연히 번역극을 멀리하고 창작극의 활성화로 이어진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통극에 대한 관심이 광풍처럼 밀려온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도 서양의 연출기법보다는 우리의 탈춤과 같은 전통연희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런 사이에 한국의 연출테크닉은 서양의 흐름을 등한시하게 된 게 사실이다.

거기다 한국은 연극대학이 많아지면서 연출가들이 현장을 포기하고 교수로 전업을 하게 되어 ‘전업연출가’로서의 활동이 현격히 줄어든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복합적 분위가가 한국연극에서의 서양연출기법과 ‘전업 연출가의 쇠퇴’를 부채질한 게 사실이다.

 

실패한 ‘연출가 육성’

 

이런 와중에도 문예진흥원은 (현 문화예술위원회) 80년대에 그 당시로는 귀한 외화를 구해 연출가를 위한 ‘해외연수’를 마련한다. – 한사람의 연출가를 양성하는 게 많은 배우를 양성하는 것 보다 더 이롭다는 논리를 전개해 해외연수(주로 미국)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게 되레 연출가들에게 ‘해외이민’을 장려한 꼴이 되어 연출가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이다.

문예진흥원은 ‘한 사람의 연출가를 육성하면 만인(연극인)을 먹여 살릴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밥 잘 먹으려고 고기 국 끓이다가 솥 채 쏟아버리고 허벅지만 데여 병원비만 쳐 들인’ 꼴이 된 게 연출가의 ‘해외연수’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인가?

해외에 연수 간 많은 연출가들이 현지에서 학위를 받아 나중에 한국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으려고 그곳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오랜 기간 한국의 연극현장을 내버린 꼴이 되었다.

또 일부는 좌절을 안고 돌아왔다. 그들과 너무나 기량에서 차이가 나자, 오히려 한국에서 작업을 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예술관광(?)을 마치고 곧장 돌아와 버리기도 했다.

배우들은 더 심했다. 그들은 연수를 마치고 귀국도 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불법체류자’로 남아버린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모든 연수 프로그램마저 대학로에서 사라져 버린 역사가 동숭동 연극촌에서 숨 쉬고 있다.

여기다 ‘안 되는 집안’은 불행이 겹으로 온다고, 대학에 연극과가 우후죽순으로 대량 생겨나면서 연출가들이 대학교수로 전업하면서 연극에서의 연출가는 거의 퇴락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들이 안정된 상태에서 더 좋은 연출력을 보였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들을 상대하면서 ‘동네골목대장’으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으로 한국연극에서의 연출의 위상은 ‘전멸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한국의 현대연극에서 연출가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한국연극이 공연예술로서 무대에서 진화를 멈췄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결과가 한국연극의 퇴락을 부추기고, 결국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이 될 연출가 한명을 구하기조차 힘든 현실로 만들어버린 게 사실이다.

 

외국인 예술감독을 영입했다면?

 

이런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은 외국연출가을 통한 그들의 연출기법을 수입하는 것일 거다. 현시점에서 이 방법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이건 오랜 기간 SPAF축제나 LG아트센터의 해외공연들을 통해서 누구나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엄청난 기량에 모두가 ‘악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새로 임명된 김윤철감독의 최고의 미션이 될 거라는 것을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해도 학위를 따려는 – 돌아와 교수가 되려는 욕구로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오기 보다는 ‘이론’에 더 정진하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학위를 따면 그 다음날 곧장 귀국해 대학을 기웃거리는 게 관례로 정착한 나라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우리가 취할 최선의 대책은 ‘외국인 연출가’의 영입이다.

지금 박근혜정부가 마땅한 한국은행 총재를 구하기 힘들어 하자, 외국처럼 외국인을 한은총재로 영입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면서 금융 강국인 영국과 인도도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를 영입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요사이 현장예술가에 의한 예술감독의 문제로 시끄러운 이때에, 지난번 유인촌장관의 의도대로 그 당시 외국인을 영입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때 우리 연극에도 (축구처럼) 유장관의 ‘히딩크론’이 성사되었더라면, 어쩌면 현 시점에서 평론가출신의 예술감독을 ‘무난하다’고 하는 평가 정도는 연극계에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의 국립극단에도 ‘예술가형’ 예술감독 시스템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왜 유인촌과 우상전이 똑같이 외국연출가의 영입을 희망했던 것일까? 우선 두 사람이 ‘중대 동문’보다는 배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옛 국립극단에서 경험한 외국연출가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연출가는 배우를 위한 서비스업’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한국연출가들처럼 ‘윽박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이 민주화가 정착한 나라에서 성장해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연출가의 미션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배우를 위한 서비스업’, 그러니까 우리 연출가들에게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배우를 위한 봉사와 열정’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 연출가들에게 이런 걸 찾기 힘든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잘못 받아들인 관행이 오래 전부터 정착한 까닭일 것이다. 이건 일본 연출가 ‘스즈끼 다다시’마저도 한국공연에서 자기 배우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우리 연극인들이 목격한 적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거기다 해외유학을 해도 현장경험이 없어 연출가의 ‘서양의 관행’을 정착시키지 못한 게 원인일 거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외국연출가를 경험한 한국 배우들에게는 당연히 한국연출가들에 대한 불만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뭐도 없는 것들이 어디서 연출가 곤조(?)만 배웠네’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건 외국연출가들을 겪어 본 한국배우들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상일 것이다.

 

그래도 ‘예술가형’ 예술감독이 필요한 이유 1

 

여기서 우리는 김윤철감독의 취임 후 첫 기자회견 내용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국립극단에 어떤 시스템이 더 적합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단원제의 부활을 거론하면서 김윤철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간 단원이 없다보니 연출자가 자기와 같이 일했던 배우들을 주로 캐스팅했고, 결국 국립극단은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채 예산과 장소만을 제공한 셈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기사)

 

1. 정말 국립극단이 제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게 단원제를 취하지 않아서였을까?  단적으로 ‘예술가형’ 예술감독 시스템이 아니어서다. 즉 ‘제작자형’인데다 한사람의 연출가에 의해 –  또 ‘상임연출가’ 제도의 실패로 인해 일관되게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 색깔을 내지 못한데 있다.

그러니까 ‘예술가형’일지라도 자신이 연출가로서 ‘색깔’을 내지 못하면 이 또한 이런 결과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제작자형’ 시스템에서 고정된 (상임)연출가도 없고, 섭외된 연출가가 제각각일 때 당연히 극단에 일관된 ‘색깔’을 내기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이건 평론가인 김윤철감독의 오판이다. 그리고 이건 김감독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과제다.

그러니까 ‘색깔과 개성’은 단원제보다도 예술감독이 일관성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도 앞으로 ‘예술가형’ 감독제도가 더 유용한 게 사실이다.

 

2. 그렇다면 ‘제작자형’ 예술감독제에서는 이게 불가능한가?

한마디로 쉽지 않다. 우리처럼 연출가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열악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손진책감독이 어려움을 겪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개구리 공연’의 파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색깔’을 내기 위해서는 예술감독의 의도와 레퍼토리, 연출가의 선택이 잘 조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게 용이치 않거나 리더십이 방향을 잃으면 일관된 ‘색깔’을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3. 그렇다면 ‘단원제’로 이를 보완하면 ‘색깔’을 내기가 더 수월해지는가?

한마디로 더 복잡해지고 힘들어질 뿐이다. 왜?

 

(1) 단원의 구성을 잘해야 하는 부담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예술감독이 내고자 하는 ‘색깔’에 맞는 단원을 선발해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이를 뒷받침할 연출가의 선정도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2) 단원이 있으면 항상 캐스팅의 우선권이 단원에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연출가가 자기 ‘색깔’을 내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거기다 지금처럼 ‘석좌배우’ ‘중추배우’ ‘기반배우’로 구성하면, 이건 ‘색깔’이 주안점이 되지 못하고 ‘나이’에 따른 선발이 되기 쉽다.

그래서 예술감독 자신이 연출을 하지 않으면서, 즉 외부인에게 연출을 의뢰하면서 단원을 구성하는 것은 단적으로 ‘난센스’다.

여기서 기존단원이 있는 곳에서 (‘예술가형’으로 운영했던) 오태석 예술감독의 사례를 한번 들여다보자.

이 경우에, 오태석감독이 자기의 색깔을 내면서 극단의 개성을 살려 내려면 기존의 국립배우들 보다는 자기와 생활을 같이 해온 자신의 연출문법에 적응해 표현이 가능한 ‘목화’ 배우를 선택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몸도 움직이기 힘든 나이든 배우들로 구성된 국립극단원들과 작업을 할 경우에는 당연히 ‘극단 목화’에서의 공연만큼 예술적 성과를 낼 수 없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이건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실제로 옛 국립극단에서 극단 목화만큼 ‘색깔’을 내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된 게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원구성과 연출가에 의한 ‘색깔’과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기존단원이 ‘색깔내기’를 방해할 공산이 커진다는 것이다.

 

하나, 기존단원에게 ‘주역’을 주면 외부배우 영입이 어려워지고. 외부인에게 ‘주역’을 주면 기존단원이 반발하는 ‘생리’ 때문이다. 더구나 기존단원들의 숫자(30명)가 많지 않을 경우에는, 원활한 작업을 위해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 색깔을 맞추기 이전에 캐스팅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아질 것이다.

왜? 기존단원들이 우선권을 갖고 있는데 외부의 실력(색깔) 있는 배우들이 거기에 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단원들을 배척하면 더욱 분란만 커질 것이다.

옛 국립극단은 이런 염려로, 즉 기득권을 행사하고 갈등을 없애려는 방편으로 자체 단원들만으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이게 외부의 비난의 타깃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는 외부의 반발이 더욱 커질 것이다.

 

둘, 지금처럼 ‘석좌. 중추, 기반’식으로 구성하면 옛 국립단원들처럼 ‘종신화'(?)되기 십상이다. 왜? 현실적으로 계약이 끝난 후 새로운 예술감독에게 “우리를 내몰려고 한다”는 주장을 하면 우리의 현실에서 계약을 이행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옛 국립극단의 폐습을 반복하는 결과가 되기 쉬운 게 현실이다. (이건 다음의 ‘연극의 사회학’ 편에서 설명되어 질 것이다)

이럴 경우, 누가 운영을 해도 리더십을 갖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임기가 3년인 예술감독이 임기가 영구적인 단원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옛 국립극단에서 예술감독제가 실패한 것도 예술감독의 임기는 한정되고 단원은 무한대니 단기 임명의 예술감독이 단원들을 리더해갈 동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예술감독 시스템은 무력화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단장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금 ‘장민호, 백성희시대’가 부활되는 것이다. 옛 국립극단에서 예술감독제를 도입해도 ‘단장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주역’은 외부인에게 맡긴다는 단서조항을 승낙해야 입단이 가능해지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단체에 있으면 주역을 하기 힘들어 외부로 다시 나가는 배우들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단원제를 시행하려면 우선 연극계가 이에 대한 합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합의’나 ‘인식’이 부족한 미성숙사회(?)에서 ‘제작자형’을 취하면서 단원제를 운영하는 것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김감독이 원하는 것처럼 ‘색깔’을 내기도 힘들들 뿐 아니라, 자칫하면 옛 국립극단의 갈등을 재차 반복할 여지를 남기게 되기 십상이다.

 

4. 그럼 합리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가?

한마디로 이런 복잡성으로 인해, 그나마 더 나은 시스템이 바로 ‘예술가형’ 예술감독제인 것이다. 왜? 외국에서는 기존단원이 있더라도 새롭게 임명된 예술감독에게 배우를 선발할 30%의 권한을 부여한다고 한다. 그래야 자기의 ‘색깔’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작자형’에서는 자신이 연출을 하지 않아 이런 제도를 도입하기도 힘들어지므로, 이런 경우에는 공연에 선정된 연출자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선발하도록 해 ‘색깔’을 내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단지 예술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레퍼토리의 선정과 연출가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렇게 극단을 운영할 경우에는 단원제보다 공연마다 배우의 선택권을 해당 연출가에게 맡기는 게 정석이다.

그래야 성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용이하다. 그렇지 않으면 연출가가 항상 책임을 단원들에게 미룬다.

따라서 ‘제작자형’에서 좋은 개성과 색깔을 내려면 상임연출가 시스템을 도입하든가 아니면 예술감독이 레퍼토리의 선정에 신중을 기하고, 이에 맞는 연출가와 배우를 매 공연마다 선발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이래서 극단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또 단원제의 도입을 위해서도, 나는 궁극적으로 (리더십을 얻기도 용이하고 불합리한 제도의 보완도 가능한) ‘예술가형’ 예술감독 시스템 = 연출가가 예술감독직을 수행하도록 하는 게 정석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연출가가 와서 그저 한 번 연출을 하고 사라지는, 그것도 책임감도 없이 사라져 가도 ‘닭 쫒던 개 지붕 올려다보는’ 격인 ‘제작자형’으로는 뛰어난 연출가를 배출하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이래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발전된 연출가를 통한 예술적 성과를 얻기 힘든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게 나다.

비록 처음에는 서툴지라도 한사람에게 책임을 맡겨 그의 ‘도전정신’을 살려 ‘역량을 확대해’ 나가는 게 앞으로의 한국연극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자형’에서는 (이런 제도의 보완을 위해) ‘외국인 연출가’의 도입이나, 지난번의 상임연출가제도의 실패를 보완해 새롭게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필요한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을 타개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좌우를 살피지 않고, 문제점을 공유해서 이를 분석해 개선하려는 태도를 갖는 게 한국연극의 장래를 위해 절실하다.

 

‘예술가형’이 좋은 이유 2

 

이번의 소동을 거울삼아 다음번에는 분명히 연출가를 예술감독으로 임명하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연출가를 통해 ‘제작자형’으로 운영하려고 하면 연출가를 임명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왜? 한마디로 한국연출가의 ‘패러독스’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연출가란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연출가에 대한 배려를 베풀 수 없는 직업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외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없어서 국제적인 현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적으로 이렇게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는 영원히 국립극단은 개성도 없고 색깔도 없는 배우들이 ‘알바’ 뛰는 곳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극단에 연출가가 2명 이상 공존하는 단체를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도 연출가의 ‘패러독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모든 극단은 연출가 1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즉 ‘1극단 1연출’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다른 연출가와의 공존이 불가능한, 즉 감각이나 개성에서 타인을 존중할 수 없는 ‘생태적’인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이런 연출가들에게 또 다른 연출가의 영입은 ‘갈등’을 제공하는 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연출가가 예술감독직을 수행할 경우에, 그것도 ‘제작자형’ 예술감독직을 수행할 때 배제할 수 없는 게 타인의 작업에 심하게 개입하거나 간섭하려 드는 태도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연출가에 의한 ‘제작자형’은 좋지 않은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연출가들이 손진책감독이 있는 서계동에서 연출하기보다는 기획자인 구자흥 극장장이 운영하는 명동에서 연출 작업을 하는 게 더 여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다.

이건 정책분위가 전에 발표한 성명서에서도 문화부에 대한 불만보다 손진책감독에 대한 불만이 더 많은 것에서도 이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연출’이 존재하기 힘든 연극계의 속성 때문에 자연히 손감독인 연출가에 대한 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연출가에 의한 연출가의 패러독스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연출가 김철리가 예술감독으로서 여유를 보이는 ‘제작자형’ 예술감독 체질인 것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도 연출가가 예술감독직을 수행한다면 ‘제작자형’ 보다는 ‘예술가형’의 예술감독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

 

그럼 이 과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3년마다 ‘건망증’을 무기삼아 무방비상태에서 이런 홍역을 계속 치러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인 모두가 깊이 숙고해 볼 과제 아닐까?

거기다 명동예술극장과 통합을 하면 자그마치 100억 규모의 예산이 집행되는 곳이 ‘국립극단’이다.

현재의 국립극단의 예산이 50억 이상, 명동예술극장이 30억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입장 수입까지 합치면 거의 100억 원의 예산이 집행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 서울연극제 예산이 고작 3억인 현실에 비춰 보면 어마어마한 예산이다. 그런데도 한국연극이 ‘연출력의 빈곤’으로 자꾸만 ‘구석’으로 몰려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리 정부가 지원과 후원을 해도 한국연극은 상당기간 다시금 부흥을 이루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왜?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연출력의 결핍’에서 탈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무대배우들의 ‘연기력의 빈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연극의 중흥은 요원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문화부(정책과 예산)가 뒷받침하는 ‘국립극단’과 ‘한예종 연극원’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연극중흥을 도모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을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연극계에 ‘가난’과 ‘부실한 교육’이 만들어놓은 패배주의의 소산인 연극인들의 무감각과 무책임, 안이함, 만성건망증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1000억을 투자해도 성과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돌아볼 성찰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되레 지원이 늘어날수록 배불러진 연극인들의 ‘나태’가 더 문제시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하느님이 예술감독직을 맡아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 한 국립극단은 현실적으로 부흥을 이루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이런 것에 대한 개선이 없으면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은 누가 맡아도 ‘축복’보다는 ‘저주’가 될 게 분명하다.

따라서 연출가협회를 위시한 연극계 모두가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어쩌면 애초에 추천된 젊은 연출가들이 (이런 현실을 자각해) 소스라치게 놀라 ‘손 사레’를 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지금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은 누가 해도 ‘축복’보다는 ‘저주’를 받기에 더 용이하게 되어있는 게 우리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이건 한국연극이 앞에서 말한 현대연극이 갖추어야 할 ‘기본’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의 사회학’

 

국립극단원이 ’종신화‘되는 ’시나리오‘를 쓰면 이렇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누군가가 장민호와 백성희 선생의 사례를 들고 나설 것이다. 그러면 자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아무도 내놓고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 누가 나서서 선배들이 하는 일을 반대할 ’강심장‘을 갖고 있겠는가!

그러면 몇 사람이 이에 동조발언을 할 것이다. 그러면 문화부는 당연히 여론을 살피겠지만, 반대의견이 없으니 당연히 찬성 쪽에 설 것이다. 내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구태여 대세(?)를 거슬려 시끄럽게 할 공무원들이 아니다. 그러면 반대의견도 없이 ‘종신제’는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그럼 예술원처럼 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 이게 기득권으로 정착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원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여서 예술원회원을 10배수로 늘려도 부족한 처지인데도 절대로 개방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다.

따라서 국립극단 단원도 줄면 줄었지 절대로 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가 감히 어르신들 하는 일에 ‘토’를 달겠는가? 이게 ‘연극의 사회학’이다. 그리고 이게 ‘현실’의 부조리극이 ‘연극’의 부조리극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게 연극계 전체의 갈등으로 번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국립극단이 이런 갈등을 안고 어떻게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옛 국립극단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게 지금까지의 모든 사안에서의 ‘연극의 사회학’의 과정이요, 결말이었다.

결국 이런 과정으로 연극계의 ‘이기주의’가 양산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연극계는 이런 ‘룰’에 따라 모든 게 ‘정상이 아닌 비정상’인 굴절된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계는 누가. 또는 정부가 혜택을 베풀지라도 이게 한국연극계를 위해서 기여를 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변환되어 버리는 특성을 보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병폐가 누적돼 모든 것이 ‘이기주의화’ 한 연극판으로 만들어버린 꼴이 되었다.

전장에서 열거한 여러 사례 외에도 이런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록펠러재단’이 한국연극을 위해 ‘드라마센터’를 지어주었다. 그랬는데 이게 결국에는 사유재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은 명문대학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겠지만.

또 연극인들의 재교육이 극단에서 불가능하다고 해서 문화부가 부랴부랴 ‘연극원’을 만들어주었으면 이게 최소한의 ‘공익의 정신’만이라도 살려내야 한다. 왜? 연극은 다른 장르와 달리 제대로 된 교육 없이 무대에 나서는 유일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대학’이 되어버려 신입생을 뽑는데 진력하고 있다. 즉 ‘창학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건국초기 겨우 GDP 50불에 지나지 않던 탈식민지 최빈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져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게 ‘국립극단’이었다. 이런 국립극단을 결국 몇 사람이 ‘사유화’해 버리고 이를 주도한 원로연극인들은 되레 ‘서계동 명예에 전당’(?)에 이름을 남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연극계다.

사전검열이 풀리니 ‘벗는 연극’이 나서서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데 열을 올리지를 않나. ‘차 없는 거리’가 취소되자 무너져가기 시작하는 대학로를 김의경선생을 도와 열심히 살려놓았더니 ‘삐끼’들이 나서서, 동네야 어떻게 되든 지네들 수입을 올리는데 열을 올리는 곳으로 만들어버리지를 않나.

연극대학이 많아지면 더 연극이 번성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도, 이게 결과적으로 연극발전의 발목을 잡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연극계는 정부가 지원을 해도, 누가 혜택을 베풀어도, 정책적인 배려를 해도 결과적으로 이게 연극계를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고, 결국에는 연극계의 발목을 잡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합하는 역발상이 이루어지는, 정말 희한하고 특이한 곳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금을 많이 주어도 먼저 걱정이 앞서는 동네가 연극판이다.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축복’보다는 ‘저주’만이 남는 곳이 연극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무지와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연극의 사회학’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방끈이 길고 짧고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기주의가 무서운 것은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희생하고 양보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데 있다.

따지고 보면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고, 그들은 이를 통해 희생하고 봉사를 한다. 조선이 6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통치철학이었다. 이게 없으면 어떻게 사육신 같은 선비들이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겠는가!

결론적으로 어째서 인간에게 종교, 철학, 사상, 이념, 전통(역사)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우리의 연극판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부정적 사고의 정착은 지원책에서도 ‘평준화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관객을 통한 선의의 경쟁이 없이, 또 예술성에 의한 우열의 경쟁 없이 그저 평론가(개인)에 의한 개인적 평가나 심사로 모두가 공평성(?)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니, 자연히 ‘자유경쟁이 부재’하고 ‘우열이 없는’ 평등개념만 존재해, 마치 몰락한 정치체제인 ‘공산주의 사회’를 연상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진정한 우열마저도 정착시키지 못한 권위(?)로 어떻게 비평과 심사가 이루어지는지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결과로 오로지 경쟁보다는 공평한 분배만을 선호하다 보니, 모든 연극인들이 안이함과 이기주의에 점점 더 빠져들 게 된 것이다. 이러다 우리에게 ‘공동의 선’을 추구할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게 아닌지? 그래서 윤리의식이 부재하고, 공공 개념이 결핍된 ‘비성숙사회’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공연에 관객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예술성’을 확보하려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지원금이 적은 정부나 지자체만을 원망할 뿐이다. 우리 동네는 모든 게 ‘남의 탓’인 불문율이 존재한다.

더 커다란 문제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아주 우월한 지식인(또는 예술가)이라고 스스로를 자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가까스로 새롭게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의 출발을 이뤘다. 이제는 이런 과거를 잊고 이들 단체들이 우리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는 곳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개인의 ‘사욕의 광장’이 되지 않고, 항상 ‘무지’가 연극발전을 저해하는 곳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극계의 주류를 이루는 (안정적 지위에 있는) 리더 격인 대학교수와 평론가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집단사회에서의 ‘공공의 책임’을 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도덕성과 ‘공익의 개념’을 인식해야 한다. 또 ‘비판정신’이 살아나고 ‘양심세력’이 존재하도록 분위기를 바꿔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남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먼저 통찰하는 각성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뻔뻔함, 욕심, 무감각, 이기주의, 판단의 오류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좋은 ‘가르침’을 얻는 것이고, 스스로의 ‘깨달음’일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당장 성찰해야 할 것은,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우리에게는 혜택이 우리를 위해 보탬이 되지 못할까를 깊이 숙고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게 ‘무지의 소산’이 아닌가를 모두가 각성해 보는 일일 것이다.

 

김윤철 예술감독에 대한 바람

 

김윤철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세부계획으로 앞으로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드라마터그실’을 운영할거라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근현대 한국연극 베스트 10’ 선정 등을 발표한다고 했다.

먼저 ‘드라마터그’실 운영이나 ‘베스트 10’ 등은 평론가에 의한 평론가를 위한 프랜임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평론가들이 자신들이 ‘드라마터그’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내가 보기에는 신기하다. 글쎄 배우 최원석만큼이라도 드라마의 기교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베스트’는 좋아하는지?

연극에 베스트는 없다. 연극은 공연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이른바 정치처럼 ‘살아있는 생물’이다. 설령 ‘베스트’가 있다고 해도 이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 시대에는 명작이라는 칭송을 들었을지 몰라도) 고정된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산불’이 어떻게 지금 이 시대에 베스트가 될 수 있는가? 장애자를 존대(?)하는 게 이 시대의 트렌드인데 어떻게 ‘맹진사댁 경사’가 이 시대에 베스트가 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옛 작품 중 그나마 ‘오장군의 발톱’만큼 그래도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반전)를 갖는 작품을 아직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고정된 관념으로) 시대를 읽지 못하는 평론가들이 ‘시대를 밝히는’ 공연예술에서 어떻게 ‘드라마터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나서는가?

지금 한국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 ‘예술적 영감’이 떠오른다고 생각하는 후진적 사고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실은 정 반대다.

이런 점에서 나는 평론가들이 현장에 나서는데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김윤철감독에 대한 ‘자격’에 대한 우려보다는, (그거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충분하지만) ‘개인’에 대한 불만이 더 크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고 싶다.

한마디로 평론가에 대한 현장연극인들의 불신이다. 왜 불신하는 걸까? 우선 현장인들은 평론가가 연극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장인들 입장에서 보면) 별도의 ‘화성인’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우선 비평가라는 사람들이 사회나 예술에 대한 진정한 비판정신이 없다. 다른 예술잡지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저 공연 참여자가 아니면 관심도 갖지 않을 ‘공연평’이나 쓰고, 심사나 다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전망 하나 내놓는 법도 없다.

이런 현실이니 존재감이 없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니 평론가를 “그들은 제작비를 탕진해 절망해본 적이 없는 껍데기만 연극인이다. 그러면서 심사나 시상에서 항상 권력을 누린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지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이러니 연극인들이 평론가를 비현장인으로 분류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평론가들 행사에 가장 많이 참가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내가 느끼는 소감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평론작업도 대학에서 ‘전임’을 얻으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존재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 심사할 때나 나타나는. 이렇게 보여서는 평론가가 현장인들에게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김윤철감독은 연극계에서 이런 인상을 주는 한국 평론가들의 왕초다.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처지다. 그래서 더욱 우리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이건 김윤철 감독 개인에 관한 우려 때문이다.

솔직히 평론가들이 이번 기회에 김감독을 앞세워 한국연극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망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물론 그렇게 되기만 하면 너무나 좋은 일이 아닐까 만은, (까놓고 말하면) 지금 한국연극은 기술부재와 인재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어 단기간에 좋은 성과를 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무작정 수준을 높이겠다고 덤비면 어떻게 될까? 난해함과 비소통의 공연만이 ‘예술성을 빙자해’ 관객을 극장에서 내쫒는 일이 남발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는 사람이 나다.

세계 평론가협회장.이 “무대에 올리는 게 겨우 이 정도 작품이어서는 안 돼요! 무조건 어려워야 돼요.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예요”하는 후배들의 독촉에 밀려 한국연극이 관객과의 소통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왜? 그들에게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공개적으로 지랄(?)을 하면 하는 말, “내 제자들이 보는데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가 전부다.

지금 인접장르인 뮤지컬은 현대적 무대기법을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들여와 한국의 관객들을 홀리고 있는데, 연극은 아직도 고리타분한 무대문법(기법)으로 대응하고 있으니 어떤 매체와도 경쟁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김감독이 해야 할 미션은 (그나마 예산확보가 가능한) 국립극단에서 이런 연극계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연극계는 영원히 ‘구닥다리’ ‘촌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김윤철감독이 해야 할 미션은 분명해진다.

미국 국립공원에서는 산불이 나도 인명피해만 없으면 절대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외려 ‘축복’으로 여긴다고 한다. 왜냐면 ‘산불’이 낡은 낙엽찌꺼기 등을 제거해 (구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싹을 키워 자연의 새로운 복원(축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새싹을 키우기’ 위해서는 (앞으로 최소 5년 동안) 평론가는 각종 ‘심사와 평가’ 각종 ‘연극상 시상’이나 ‘정책 수행’에 간여 내지는 개입하지 말 것을 공개적으로 나는 주장해 온 사람이다.

그래야 다시금 우리 연극계가 대자연의 질서처럼 새롭게 복원되는 기쁨을 만끽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려 이런 복원이 감감독을 앞세운 평론가들의 간섭(?)으로 무산될까봐 걱정이다.

왜? 김감독은 솔직히 ‘연극의 사회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방’에서만 지내시던 분이라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 평론가들의 대선배로서 평론가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 또 평론가들은 이 기회에 분명 한국연극을 관객이 볼 수 없는, 난해한 ‘엘리트주의 연극’을 확산시키려고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따라서 냉철히 한국연극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혜안이 김윤철감독에게 요구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거기다 명동예술극장을 운영하고 국립극장 달오름극장까지 무대가 확장될 현실에서 ‘엘리트주의’만을 고집하다가 한국연극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앞선다.

먼저 ‘엘리트주의’를 살리기를 원한다면 뛰어난 재능의 연극인을 육성하는 게 더 우선되어야 한다.

 

2. 연극원원장의 무능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 는 말이 있는데, 김감독의 경우는 실제로 연극원장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연극원장을 한 사실조차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보냈다. 이런 현실이 반복될까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이래서 (연극인들이 우려하는) 연극제작조차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연극인들이 예술감독으로서의 자격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비상근이야 어차피 ‘교수 말년’이라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지만, 연극원장으로 대학의 운영을 혁신시키지 못한 경험(?)은 우리에게 근심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3. 국립극단의 제작시스템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일수록 서계동에서 일단 먼저 ‘선을 보여’ 관객을 모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내놓지 않아야 하는 게 정석인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창작극 육성’을 이유로 완성도도 부족한 국립극단 공연을 일반에게 내놓는 것은 연극계 전반의 흥행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왜? 아무래도 국립의 공연은 일반 재야 연극에 비해 홍보도 많이 해 관객들이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인데, 흥미도 끌지 못하는 공연을 ‘예술성이라는 명분’으로 남발하면 연극의 대중화는 점점 더 멀어질 게 뻔하다.

이걸로 관객들이 연극전반에 대한 기피증, 즉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유럽연극의 방식을 우리에게 이식 시키려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밤에 무대공연을 기피할까봐 TV드라마도 방영하지 않는 유럽나라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4. 지금 연극계는 ‘연극원의 시스템’을 진정으로 연극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학교 운영의 경험과 류진룡장관과의 오랜 신뢰를 통해, 이번 기회에 연극원이 단순히 일반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버리고 국립극단과 연계되는, 문화부 소속으로 진정한 연극계에 공헌하는 아카데미인 ‘재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신입생 뽑는 교육부 소속의 일반대학과 달라야 한다. 연극원은 연극인들 ‘밥벌이’하라고 만든 곳이 아니다.

따라서 김감독을 통해 이를 위한 작업이 가능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5. 김윤철예술감독이 국립극단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미션은 한국에 외국의 연출기법을 이식시키는 것이다. 국제적인 식견과 안목, 많은 관람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해외의 새로운 연출기법과 연출가들의 뛰어난 기량이 국립의 무대에서 한국의 젊은 연출가들에게 전수되는 곳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국연극이 조속히 ‘일본 때’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연출기법을 익혀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을 접근법을 터득하는 게 현재의 국립극단의 미션이 되어야 한다.

외국연출가들에게 한국 희곡을 직접 연출해 보도록 해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도 지금 우리에게는 긴요한 일(체험)이 될 것이다. 분명 ‘색깔’ 내겠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색깔’ 낼 연극판이 아직 아니다. 기량이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결론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해본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하긴 제대로 이야기할 사람도 없어서 듣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자세로 임해야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이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협회가 합동으로 낸 성명서가 임명 전에 나왔어야 했는데, 이게 ‘실기(失機)’ 한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거론해 보겠다.

 

*** TTIS의 ‘논단’ 지면은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 투고로 채워집니다. 게재 원고의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5 thoughts on “국립극단 예술감독 논란에 부쳐/ 우상전

  1. 제 실명을 거론하시다니 영광입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는데 역시 유머러스하게 정리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최원석

  2. 실기(失機)요? 임명이 언론에 알려지기전까지는 연극계 내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비밀에 붙여졌는데, 잃든 얻든 기회라는게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큰 문제로 생각되는 건 비상임1년 상임2년체제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을 모시기 위해 바꾼 직책 체제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형태의 위인설관이라고나 할까? 전 이게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리수지요. 왠지 한국의 대표적 연극예술단체의장의 임명에 연극예술적가치가 어떻게 잘 발현될 수 있을까가 선택의 제1요건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냄새를 저만 맡고있는 건 아니겠지요.

  3. 남부회장님과 연극인들은 이걸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회에 임영웅선생님 정진수 선생님도 계십니다. 구자흥 이사장, 손진책 전 감독, 이런 분들도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어느 선배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한테도 상의를 했는데, 내가 알기로 연극인들과 상의한 것으로 아는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 매국노(?)로 몰릴까봐.”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연합뉴스로 한번 알려졌었죠, 그래서 나도 글을 쓰다가 문화부 과장이 확정된 게 아니라고 올린 글을 읽고 그만 두었었습니다. 그리고 과장이 자기 연락처도 글 말미에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비상임’이 법에 걸려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각 협회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연극계에서는 나한테 묻지 않았으면 ‘몰래’한 걸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이번 기회에 투명한 임명절차를 확실히 주문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장관이 일차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협회가 아니라 국립극단 이사인 연극인들이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다음부터는 각 협회에도 의견을 묻도록 건의합시다. 그래서 각협회가 ‘직무유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4. 형님! 그런데 말이죠. 그 상의라는 게 당신들 입맛에 맛는 사람들과 ‘만’ 한다는 것이죠.
    마치 점쟁이를 찾아간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과 같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할 사람만 찾아가서 얘기를 듣고 자신의 결정이 무리가 없고, 옳다! 라는 생각을 심화한다는 겁니다.-이 말이 인사를 하는 것이 점쟁이를 찾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이냐? 하고 오해마시길~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니까요-
    정말 미래를 생각하고, 불편부당한 인사를 하겠다한다면 반대할지도 모르는 사람의 의견을 묻고 그 이유를 들어보고 그런다음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들어 봤지만 그래도 자신의 결정이 옳다하고 임명을 한다면 혹여 맘에 안들어도 어쩔 수 없겠지요. 임명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그들일테니까요. 문제는, 입맛에 맞는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사담(私談)하듯이 묻고 마치 연극인 전체, 혹은 상당 부분의 의견을 물은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거론하신 선배, 선생님들의 지금까지의 사신 여정과 발언들을 조금이라도 되뇌어 본다면, 어쩐지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확연히 예상된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요? 비상임 문제도 그래요. 임명할 때 비상임1년 상임2년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현재 연극원 교수 이신데 예술감독이 겸직이 가능한 직책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고, 그래서 문의하니 어쩔수 없이 비상임1년 상임2년이라는 답변이 돌아 온거지요. 비상임 문제는 임명이 발표난 후에 불거진 문제입니다. 협회에서 반응하지 않은 게 아니고 반응할 시간을 문체관광부에서 주지 않은 겁니다. 형님말이 맞습니다. 이사회의 의견을 연극인의 의견이라고 문체부에서는 생각하겠죠. 그것이 좁은 의미의 절차는 다 거쳤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이사회의 추인이 있었다면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겠구요. 허나 법적 요식을 다 갖추었다하더라도 심정적으로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케 하는 결정이라면 진심으로 그 결정을 수긍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또한 제가 생각하는 문제는 연극계 결정의 헤게모니를 쥔 세력에 너무 노쇠해 있다는 것입니다. 몇백년전 살았던 세익스피어나 체홉도 예술, 예술가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의심하고 지루해해야한다고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지요. 예술가는 나이에 관계없이 천진난만하고 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부분 결정을 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작금의 한국 연극계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 연극은 50대도 어린 연극인인 시대 입니다. 행시 패스한 약관 20대가 사무관으로 군림하는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말이죠.

  5. 남부회장님과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려니 답답합니다. 먼저 용훈, 광보, 정웅 등 50대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예술감독 하겠냐고? 거절당했답니다. 남부회장님 이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왜 거절했느냐고? 요사이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백성희선생님이 나서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백선생님이 연극계 서태후십니까? 도대체 이런 말이 왜 나옵니까? 젊은 것들이 선배라면 슬슬 기기때문입니다. 창피한 줄 아세요. 50대들.
    우리도 끝장 토론합시다. 왜 선배들한테 슬슬기는지, 그리고 윤봉구이사장님이 왜 저렇게 나서시는지? 모든 사람들이 의문을 갖습니다. 소통과 화합이라는 말을 말든지, 아니면 사퇴하라고 하지를 말든지. 사퇴를 시킬려면,안되면 아르코극장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버티든지,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정말 답답합니다.
    싸움은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대는 지원금, 보조금을 주는 문화부입니다. 이렇게 싸워서 무엇을 얻겠습니까? 이기겠습니까? 상처뿐인 싸움보다는 실리와 명분이 있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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