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예술감독 임명을 둘러싼 현시국에 대한
(사단법인) 한국희곡작가협회의 입장
최근 들어 국립극단 예술감독 임명을 둘러싸고 연극계에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내외적인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듯하다. 이 임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연극계의 여러 협회들은 예술감독 임명 철회를 요구하면서, 그를 임명한 문체부의 정책을 불통이라 단정하고 집회와 1인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문체부는 예술감독 인사와 ‘불통 정책’의 비판을 수긍하기 어려워하면서도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또한 문체부 정책에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연극인들은 이 사안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제각각 다양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작금의 사태는 연극계가 단순히 예술감독의 임명만을 문제 삼지 않고, 과거 유인촌 장관 시절의 국립극단 해체와 법인화 문제, 나아가 최근에 불거진 한팩의 문화예술위원회로의 통합 등 문체부의 과거와 현재의 정책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못 장기화될 조짐도 보인다.
문제가 되는 현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본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미래의 공동 발전과 가치라는 목표를 염두에 두고 바라봐야 한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재 연극계가 비판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을 일일이 거론하고, 정책이 결정된 역사와 배경을 검토하고 시비를 따져봐야겠지만, 사태가 작금처럼 복잡하고 장기화될수록 논의의 생산적 효율을 위해 일단 예술감독 임명 건으로 국한해서 다룰 필요가 있다.
모든 쟁점은 사실에서 출발한다. 김윤철 씨는 2013년 제2대 국립예술자료원장에 취임한 지 7개월 만인 2월 3일 문체부에 의해 국립극단 비상근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실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 되었는가?
첫째, 문체부의 고유인사권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권한의 남용을 우려한다.
어떤 정부 기관이든지 자체의 고유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문체부가 자료원장 직무 7개월 만에 인사 이동 시킨 것은 적절한 결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연극계에 얼마나 인물이 없길래 원장직 수행자를 예술감독으로 앉힌단 말인가. 연극계가 술렁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문체부가 고유 인사권을 갖고 있다 해도 재직중인 기관장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신중한 인사가 아니다. 또한 국립예술자료원이라는 기관이 아무나 원장으로 들렀다 아무 때나 떠나가도 되는 허술한 기관이 아니지 않은가. 김윤철 씨가 자료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예술계, 특히 연극계의 많은 자료들을 기증 받아 공헌한 것은 익히 아는 일이다. 반대로, 국립예술자료원이 견고한 시스템을 갖춘 기관이라 해도 수장은 필요하다. 기관장은 기관 고유의 비전과 목표에 맞춰 올바른 정책을 제시할 줄 알고 실행에 옮겨 그 기관의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공인으로서 투철한 책임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윤철 씨가 원장직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국립극단 예술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문체부의 이번 인사이동은 권한을 남용한 것이며, 국립예술자료원의 입장에서 봐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문체부가 스스로 산하 기관인 국립예술자료원의 품격을 낮춘 것이다. 문체부는 김윤철 씨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적임자이고 비상근직으로 배려 해줄만한 참신한 실력자라 판단했어도, 단행해서는 안될 인사였다고 본다.
둘째, 문체부의 인사 추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연극계의 여러 협회가 성명서와 집단행동을 통하여 예술감독 임명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는 이면에는 예술감독 후보 추천과 관련하여 문체부의 인사추천시스템에 대한 강한 회의와 불신이 깔려 있다고 본다. 김윤철 씨가 평론가라서 안 된다는 논리는 표면적으로 내세운 가짜 주장이어서 논의할 가치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를 추천한 소위 문체부 라인 연극계 인사들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을 수 있다. 현장 예술에 몸 담고 있지 않은 공무원이야 당연히 문체부 쪽에 가까운 연극계 인사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고, 후보 역시 그런 관계망을 통해 추천받았을 것이다. 기존의 이러한 인사추천시스템을 활용했을 테고, 시스템을 더 이상 확대해서 운영해나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문체부 라인 연극계 인사들에 대한 불만을 유독 강조하게 되면, 연극계와 언론계 일부에서 지적하듯이 ‘밥그릇 싸움’, ‘정치게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문체부 라인에 서서 실권을 누리는 자(또는 세력)과 그렇지 못한 자(또는 세력)의 대립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투쟁 관계로만 해석한 것이고, 연극계의 예술감독 임명 문제 제기가 근본적으로는 문체부의 불통 정책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해석이다. 현 사태를 권력 관계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어떠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해결책이나 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문체부는 인사추천시스템을 재점검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연극계의 어느 한 세력의 목소리에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세력의 목소리를 듣고 적합한 후보를 추천하는 인사추천시스템, 개방하여 투명성과 공공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셋째, 평론가는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맡을 자격이 있다.
평론가가 예술감독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예술감독 임명 철회를 요구하던 초기에 철회의 논거로서 제시한 주장이 바로 ‘평론가 부당론’이다. 평론가는 현장 경험이 없으며,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은 지금껏 현장 연극인이 맡았기에 평론가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연극계에서 연극평론가의 존재와 역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연극계에서 평론가는 현장과 비현장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작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제작의 매커니즘을 잘 알고 있고, 나아가 극단들의 성향과 역사, 극단 배우와 스탭 등 현장 연극인들에 대해서도 폭넓게 알고 있어야 올바른 비평이 가능하다. 그만큼 현장과 관계 맺으며 오랜 공력이 필요한 전문가다. 어디 이뿐이랴. 평론가는 현장 바깥의 상황, 즉 이론 학문으로서의 연극학과 인문학을 연마하고, 국내외 연극계의 동향과 흐름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며, 나아가 동시대 연극계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지평과 비전을 제시하는 존재다. 대한민국에서 평론가가 예술감독을 맡을 수 없다면, 연출가나 배우도 예술감독을 맡을 수 없다. 연출이나 연기와 같은 현장 경험만 있다고 해서 국립극단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행정과 기획과 경영의 능력도 요구된다. 평론가가 현장 경험이 없다고 예술감독을 맡지 못한다? 궤변이다. 부족한 면은 보완하면 된다. 현장 경험을 지적한다면, 평론가는 상임연출을 두면 되고, 행정과 경영 경험이 없는 연출가나 배우는 예술 행정가나 뛰어난 기획자를 두면 된다.
기존의 관행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연극계 내의 전문 분야가 중요한 게 아니고, 업무 수행 능력 여부와 수월성이 중요하다. 외국의 사례도 있거니와, 평론가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수행한다면, 새로운 발상이고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 궤변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그거야말로 맹목이고, 정당한 다른 주장들마저 의심 받게 된다.
넷째, 대안을 마련하되, 쟁점들을 새롭게 예각화해야 한다.
상대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비판에 대한 대안이나 정책 마련은 쉽지 않다. 대안도 없이 비난이나 비판만 하는 태도는 건설적이고 발전지향적인 태도가 아니다. 지금의 상황이 대립 상황이라면, 누가 이기고 지고가 아니고 모두 이겨야 한다. 문체부와 연극계는 적대자가 아니라, 국민을 문화와 예술의 관객이자 향유자로 놓고 국민이 연극과 예술을 재미있고 가치있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자 단체이기 때문이다.
문체부는 권한 남용과 기존 인사추천 시스템의 문제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연극계의 여러 협회는 솔직한 사과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문체부는 문체부대로, 협회들은 협회대로 대안을 찾아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갈등 상황이 적당히 봉합되어 서로가 얻을 것은 대충 얻었다고 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설픈 타협은 안 하느니만 못 하다. 이 대립과정에서 쟁점들이 이미 부각되었고 새롭게 파생될 수 있지 않은가? 국립극단의 존재와 재단법인으로서의 역할, 재단법인 설립 이전과 이후의 국립극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존재와 위상과 자격, 인사추천시스템의 객관화 및 개방화 방안, 문체부와 현장 예술의 소통 방식, 정부 산하 기관의 통폐합 문제 등 연극계의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거나 당면한 문제들과 쟁점들을 논의하고 합리적으로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문체부, 연극계, 국립극단이 주관하든, 아니면 합동으로 주관하든, 공청회가 됐든 세미나가 됐든지 간에 연극계의 다양한 세력이 모여 활발한 논쟁이 본격화되어야 한다. 이 지점까지 나아가야 문체부나, 국립극단을 포함한 연극계는 건강하고 발전적인 담론과 정책의 협력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2014년 3월 26일
(사) 한국희곡작가협회
오랜만에 들어보는 귀한 의견입니다. 이런 사태가 장기화하는데도 대안과 해법이 없이 시위로 지새는 연극계는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쉬쉬하면서 끼리끼리 모임을 갖는 옹색한 태도도 볼쌍사납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대안과 해법’을 모읍시다. 연극이 살아있는 한 국립의 예술감독은 존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대갈등, 소외자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루머도 횡행합니다. 누구를 위한 싸움이라는 둥, 따라서 갈등에 놓여있는 당사자인 연극인들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느려터진 문화부와 양대협회를 기대하지 맙시다. 차라리 희곡작가협회가 앞장서 나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