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바후차라마타/ 김향

편견의 벽을 넘기 위한 성찰  – <바후차라 마타:Beyond Binary>

 

                                                           김 향 (연극평론가)

 

1. 극단 뛰다의 질문

 

극단 뛰다가 인도 극단과의 레지던시 작업의 결과물로 <바후차라 마타:Beyond Binary>(2014.4.5.~4.20. 남산예술센터)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작품을 올렸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배우의 몸을 중심으로 인형, 가면 등 다채로운 연극적 장치들을 통해 권력의 문제를 다루었던 ‘뛰다’는 화천에서 공동체를 이룬 후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몸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듯하다. <바후차라 마타>는 특히 ‘뛰다’가 인도 연극과의 교류 속에서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성적 편견’에 대해 돌아보게 하고 있다. 지구상에는 남자와 여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수히 다른 형태의 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들이 편견의 벽에 갇혀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연출자나 배우들은 관객들이 ‘성적 소수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소 명백한 목적과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오랜 시간 이 작품을 준비해 온 자신들 역시 이 문제가 그리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솔직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마음 상태에서 연극을 시작하고 연극이 끝난 뒤 얼마나 자신들의 마음 상태가 변화했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질문하기’. 그렇다. 이 작품의 주된 연극적 장치는 연출가 배요섭이 이전 작품들에서와 달리 무대에 직접 등장해 관객들과 배우들을 향해 성적 소수자를 이해하는지 질문하는 것이었다. 근래 들어 유행처럼 극단들이 활용하고 있는 ‘디바이징(devising) 연극’, 다시 말해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는 연극’ 방식을 극단 뛰다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는 연극’은 동시대에 맞는 특정한 방식, 양식을 탐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주제에 대해 배우들이 생각하는 바를 끌어내고 이를 연극화하여 관객과의 공감과 소통을 높이는 ‘과정’이 중시되는 연극 형태로 이 작품에서처럼 레지던시로 진행되는 작품에서 그 진가가 십분 발휘될 수 있는 창작 메소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제작 과정도 배우 및 스텝들이 인도와 한국에서 성적 소수자들을 찾아 질문 즉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삶을 채록한 뒤 배우들 스스로 특정 인물을 선택하고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등장인물들은 트렌스젠더(남성에서 여성화), 게이, 트렌스젠더(남성에서 여성화) 매춘부, 트렌스젠더(여성에서 남성화) 안무가, 트렌스젠더(여성에서 남성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간성 매춘부, 남성호르몬과다분비 여성, IT회사 게이 직원 등 실제 인터뷰에서 채록한 인물들이었다. 이 인물들은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다채로운 ‘경계의 성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인물들을 인도와 한국의 다국적 배우들이 맡아 연기한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인식의 경계는 더욱 허물어지고 공연을 보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극단 뛰다의 질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나눔에 속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성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전까지의 이분법적인 구분과 나눔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것이며 이 과정에 관객의 참여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겠다.

 

2. 그들은 누구인가 – 연출가와 배우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성찰

 

일반적인 성적 구분에서 타자화되어 있던 ‘그들은 누구인가?’

<바후차라 마타>는 단일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라기보다는 여러 명의 성적 소수자들의 사연이 에피소드적으로 전개되는 구조를 보인다. 연출가와 배우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장면이 있으며, 극 진행은 제작진이 관객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바를 연기로 보여주는 극중극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바후차라 마타>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경험한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공간’이라 할 수 있고 크게 1)성적 소수자들의 독백 장면, 2)성적 구분에 대한 물리학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전문가들 장면, 3)성적 소수자들의 내면이 에피소드적으로 소개되는 장면, 4)관객들이 무대에 앉아 객석을 바라보는 체험 속에서 실제 트렌스젠더 배우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출자는 여성과 남성 이외의 다채로운 성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존재함을 밝히고 관객들에게 ‘당신의 주변인이 커밍아웃을 한다거나 트렌스젠더라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며 극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무대에 놓여 있는 의자들에 배우들이 한명씩 나와 앉고 연출가는 이 배우들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했으며 배우들은 자신의 실명과 나이 등을 한국어, 영어, 타밀, 힌디로 이야기한다. 이 첫 장면은 관객들에게 ‘당신은 성적 소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습니까, 성이 이 두 가지로만 구분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확신합니까, 다시 말해 당신은 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함께 생각해 봅시다’라는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국적 배우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자신들을 소개하고 무대 위 의자들을 치운 뒤 무대 벽 쪽 자신들의 옷가지와 거울경대가 놓인 공간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거울은 단순히 배우들이 단장을 하는 소품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그 거울은 배우에서 경계인이 되기 위한, 즉 막이 전환되면 연기해야 할 ‘중간적인 성’을 지닌 인물이 되기 위한 전이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거울 공간에서 무대로 나온 배우들은 관객과 연출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극중극처럼 연기를 하게 된다.

관객들은 다채로운 성을 지닌 다수의 성적 소수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만나는 이는 남성에서 여성화된 앤디(조아라 분)라는 다소 터프한 트렌스젠더였다. 그녀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여성의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아버지가 고통스러워 했던 상황 그리고 트렌스젠더로 군대에 갔던 이야기, 적출 수술 준비과정 등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한다. 앤디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여성 트렌스젠더는 예쁜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지 않다는,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각종 과장된 편견이다.

그 다음에 관객이 만나는 인물은 분홍색 상의를 입은 루미(Palani Murugan 분)로, 그는 아들에서 딸이 되었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개인사는 대부분의 성적 소수자들이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소외되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특히 루미는 자신의 엄마에게 이해를 갈구하며 앞 뒤로 쓰러지는 몸동작을 보이는데, 이는 트렌스젠더로서 겪게 되는 극단적인 절망감을 ‘쓰러지는 몸’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민(최재영 분)과 최이동주(이지연 분) 이야기는 무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로버트 민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여성에서 남성이 된 인물이다. 그는 여성의 몸이지만 남성으로서 한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였으며 아내 대신 자신이 정자 기증을 받아 아기를 낳기도 했다. 최이동주는 남성화된 인물로 여성 희정이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로버트 민과 최이동주는 공통적으로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가 함께 살고 있는 이야기로, 남성 또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기에 사랑을 하고 사랑의 결실을 얻게 된,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 자궁이 있지만 남성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가족을 이룬 모습은 인간애의 완성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만나는 또다른 인물인 살리마(Pooja Balu 분)는 아름다운 인도인으로, 태생부터 여성도 남성도 아닌 간성으로 태어나 사회에서 내쫓김을 당함과 동시에 축복 받은 몸으로 인식되는, 聖과 俗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다. 살리마는 히즈라 집단에서는 성스러운 몸이었지만,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구걸을 하며 삶을 연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살리마의 특징은 이 모든 것이 ‘알라의 뜻’, 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체념적인 사유를 보이는 것이었다. 간성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와 더불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대한 사회적 편견을 타개할 수도 없는 미약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체념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겼고 또 그루의 남편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공동체에서 쫓겨나 몸 파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상황을 ‘알라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살리마에게서는 삶의 무기력함이 경험되었다. 트렌스젠더 또는 간성인들은 자신들의 성이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분류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여성 또는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일상에서부터 사회제도적으로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성적 소수자들 중에는 자신의 성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우(공병준 분)는 동성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수현이를 생각하고 있고 김영미(최수진 분)는 남성호르몬 과다로 자신의 몸이 남성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하고 여성이었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남성이 되어가는 것을 ‘고치고 싶지만’ 결코 다시 여성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출가는 이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의 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을 갖고 다수의 의학 전문서들을 읽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 과정을 A, B, C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해 과학지식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는 다소 희화화된 장면으로 형상화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이들의 대화는 결코 트렌스젠더와 간성인들의 정체성을 규명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잠정으로 추측한 것은 성적 소수자들의 정체성이 성적 지식으로 규명되지 않으며 몸의 느낌과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로 자신을 드러내던 성적 소수자들이 이번에는 역동적인 몸과 정서로 관객들에게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이러한 움직임은 천장에서 떨러진 다수의 쿠션을 도구 삼아 다채로운 몸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이 쿠션은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객석에 있던 관객들이 무대에 나와 앉아 객석을 바라보며 앉기 위한 방석으로 활용된다. 연출가와 배우들은 관객들을 무대 위로 끌어내어 그들이 좀 더 가까이 배우들을 만나고 또 관객으로 앉아 있던 객석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 구도 속에서 관객들은 인도인 엔젤 글레디의 공식적인 커밍아웃과 그녀가 여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과거의 시간들이 이미지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흰 가루로 그녀가 그리는 그림과 움직임과 외침 그리고 결국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배우를 끌어안는 글레디의 모습은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치유하는 성스러우면서도 해방되는 이미지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3. 나는 누구인가 – 경계인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기

 

성정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은 순간적이지만 관객들에게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후차라 마타>는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관객에게 결론을 내라고 유도한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결론은 관객 자신이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에서 얻어질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여성이라 생각하면서도 내 안에서 불쑥불쑥 드러나는 현상학적인 남성적 면모, 나는 남성이라 생각하는데도 불현 듯 드러나는 여성적인 행동들을 무심히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인적인 면모를 지니지 않았을까 살피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온전한 여성 또는 남성’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여성에서 남성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점을, 그래서 인류는 어쩌면 ‘온전한 여성 또는 남성’이 드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간성적 정체성을 지녔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별은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드러나고 때론 변할 수도 있다는 열린 사고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고정된 사고 방식과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이 작품의 결론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다.

<바후차라 마타>는 이미 해답이 결정되어 있는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관객의 사유체계가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는 연극’ 방식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선동적인 이야기보다는 진정성 어린 사연으로, 확고한 마음보다는 갈등하고 유보적인 마음으로, 편견에 대한 반항보다는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방법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추구했다고 여겨진다. 반짝이는 결론은 없지만 ‘낮고 겸손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관객의 마음에 스며드는 연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재인식은 물론 여기서 더 나아가 ‘내 안의 또 다른 성’에 대해 성찰하고 그 모습을 끌어안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고 보인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이분법적 성의 존재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폭력적 행위를 자제하기 위해서라도 ‘온전한 성’에 대한 허상을 깨고 ‘경계의 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요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재수록 출처: 『공연과 이론』 2014·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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